All Chapters of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Chapter 11 - Chapter 20

140 Chapters

제011화. 비워 둔 화요일

월요일 오후 3시 52분, 고객문의 창에 빨간 표시가 떴다.선물로 보낸 반찬통 세트에 작은 뚜껑이 하나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안에 다시 보내야 내일 출고가 가능했다.서연은 창고 재고를 확인하고 송장을 만들었다. 시계가 3시 57분을 가리켰다. 미경이 외투를 입는 서연 옆으로 왔다.“답변은 내가 보낼게. 파일만 열어 둬.”“송장까지 만들었어요. 주소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알았어. 뛰지 말고 가.”서연은 컴퓨터를 끄지 못한 채 가방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주에게 버스가 늦으면 5분쯤 늦을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선생님께 연락하겠다고 했다.문자를 넣고 화면을 내리는데, 지난주 작은방의 요 주름이 손가락에 남는 것 같았다. 뛰지 말라는 말은 아이 앞에서 나온 잔소리였는데, 지금은 자기 심장에도 해당됐다.버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왔다. 유치원 문 앞에 도착하니 4시 56분이었다. 겨우 4분 남았는데 심장은 늦은 사람처럼 뛰었다.봄이는 외투 지퍼를 올리지 않은 채 나왔다. 선생님은 아침에 태주가 산책 동의서를 잘 전달했다고 말했다. 서연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이모 뛰었어?”봄이가 서연의 붉어진 얼굴을 봤다.“조금 빨리 걸었어.”“아빠가 뛰지 말라고 했는데.”“그러게. 이모도 혼나야겠네.”봄이는 지퍼를 올려 달라며 턱을 들었다. 서연은 숨을 고르면서 끝까지 채웠다. 아이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다른 숨과 겹치지 않게, 그녀는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집에 돌아온 뒤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출고는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3시 30분에 새 문의를 넘기라고 했다. 대신 사진이 필요한 오전 업무는 서연이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죄송해요.”“미안해할 거면 인수인계 꼼꼼히 해. 둘 다 뛰다 쓰러지면 그땐 진짜 곤란하니까.”서연은 메모장에 3시 30분을 크게 적었다.봄이는 거실 바닥에 산책 준비물을 펼쳤다. 노란 물병, 작은 손수건, 운동화. 수요일에 가져갈 것인데 이틀 전부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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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2화. 언니 없는 집에서

화요일 4시, 서연은 유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습관처럼 정류장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방향을 바꿨다. 명자가 5시에 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는 3분 전에 왔다. 서연은 그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서연은 문자에 짧게 답했다.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녁 드시고 천천히 계세요.명자는 밥은 해 놓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자신이 없어도 저 집의 저녁이 굴러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뒤따라와서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서운함의 밑바닥이 무엇인지, 정류장을 지나며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원룸까지는 회사에서 버스로 18분이었다. 며칠 비운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티가 났다. 현관에 신문 두 장이 끼어 있었고, 싱크대 배수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우편물을 날짜순으로 나눴다. 관리비 고지서, 카드 명세서, 광고 전단. 언니가 준 반찬통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토요일에 가져간 작은 통만큼 빈 네모가 생겨 있었다.냉장고에는 달걀 두 개와 물, 오래된 고추장뿐이었다. 배달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동네 분식집으로 걸어갔다. 원룸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대학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조민아에게 전화가 왔다.“너 오늘 어디야?”“내 집.”“내 집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요즘은 형부네 있는다며.”“화요일은 여기 오기로 했어.”서연은 떡볶이 봉투를 한 손으로 바꿔 들었다. 민아는 지금 근처라며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방 안의 빨래 더미를 떠올렸지만 오라고 했다.20분 뒤 민아는 편의점 캔맥주 대신 탄산수 두 병을 들고 왔다. 서연이 술을 마시고 다시 아이 있는 집에 갈까 봐 골랐다는 말에, 서연은 괜히 웃었다.두 사람은 낮은 상 앞에 앉아 떡볶이와 김밥을 나눠 먹었다. 5시가 지나자 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사진이 왔다. 민아는 장례식장에서 서연의 부모 곁을 지키다 먼저 돌아갔다. 그 뒤로는 길게 통화하지 못했다.“한 달만 있는 거 맞아?”“4월 14일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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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3화. 돌아온 물건들

수요일 아침, 봄이는 운동화를 신고도 현관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손수건 없어.”태주가 가방 앞주머니를 다시 열었다. 봄이가 미리 접어 넣은 손수건이 보이지 않았다. 서연은 식탁 아래와 소파 틈을 찾았다.“분명 여기 넣었는데.”“아빠가 가방 정리하면서 뺐나 봐.”태주가 신발장 위 바구니를 뒤졌다. 없었다. 시계는 7시 18분을 가리켰다. 서연은 자기 가방에서 새 손수건을 꺼냈다. 빈소에서 건네고, 세탁되어 돌아오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던 그 크기와 비슷한 연한 파란색이었다.“이거 가져가. 안 쓴 거야.”봄이는 연한 파란색 천을 펴 봤다.“이모 냄새 나.”“세제 냄새겠지. 다녀와서 돌려줘.”태주는 노란 물병이 새지 않는지 확인해 가방에 넣었다. 봄이의 모자 안쪽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준비를 마친 아이가 일어나자 현관 수납장 옆 상자가 다시 보였다. 해외에서 온 반환 상자였다. 며칠째 그 자리에 있었다.“오늘 열어?”“산책 잘 다녀오고 저녁에 생각해 보자.”태주가 상자와 아이 사이에 서서 말했다. 봄이는 더 묻지 않고 아빠 손을 잡았다.서연은 두 사람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봄이에게 나뭇잎 하나만 주워 오라고 했다. 아이는 두 개를 가져오겠다고 손가락을 폈다.오전 내내 서연은 유치원 연락이 오는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비상 연락 2순위가 된 뒤 처음 있는 바깥 활동이었다. 점심 무렵 태주가 유치원에서 받은 사진을 보내왔다. 봄이가 노란 모자를 쓰고 친구들과 통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잘 다녀왔대.짧은 문자 아래에 선생님이 보낸 안내가 붙어 있었다. 서연은 화면을 한 번 더 보고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퇴근 뒤 유치원에 가자 봄이는 신발에 흙을 묻힌 채 나왔다. 주머니 속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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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4화. 주인을 잃은 컵

목요일 오후, 서연이 유치원으로 출발하려던 때 태주에게서 전화가 왔다.“서희 회사 분이 집에 잠깐 오신대.”“오늘요?”“책상 정리하다 나온 물건이 있나 봐. 내가 일찍 들어갈게.”태주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마지막 말 뒤에 짧은 숨이 붙었다. 서연은 몇 시쯤 오느냐고 물었다. 6시 30분. 봄이와 집에 도착해 손을 씻기고 밥을 안치면 금방이었다.“제가 받을까요?”“아니. 내가 받을 거야.”대답은 단호했다. 서연은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끊은 뒤에도 수화기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받을 거라는 말은 손님을 피하라는 뜻에 가까웠다. 서연은 그걸 거절할 자리가 아니었다. 유치원 가방 끈을 고쳐 메며, 저녁에 그의 집 현관에 서는 일이 이제는 습관이 됐다는 사실을 미뤄 두었다.봄이는 유치원에서 종이 화분을 만들어 왔다. 우유갑에 색종이를 붙이고 강낭콩을 심은 것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는 햇빛이 드는 곳을 찾아 거실 창가에 올려놓았다.“엄마한테도 보여 주고 싶었는데.”“싹 나면 사진 찍어 두자.”“엄마가 사진 볼 수 있어?”서연은 수도꼭지를 틀던 손을 멈췄다. 대답을 고르는 사이 봄이가 먼저 비누 거품을 냈다.“내가 나중에 보여 줄 거야.”서연은 비누칠한 아이 손을 받아 손등까지 문질러 주었다. 방금 한 말을 어떻게 받아 줘야 할지, 물을 잠글 때까지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따뜻한 물이 손목까지 올라왔다. 아이 손등에는 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서연은 그 손을 오래 씻기지 않았다. 오래 씻기면 엄마의 손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수도를 잠그고 수건으로 손가락 사이만 닦아 주었다.태주는 6시가 조금 넘어 돌아왔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려는 서연을 막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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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5화. 한 달이라는 약속

금요일 아침, 봄이는 노란 머리끈 하나로 머리를 묶고 유치원에 갔다.서연이 빗으로 가르마를 타 주는 동안 아이는 거울에서 머리끈만 바라봤다. 두 갈래로 묶자고 했지만 하나는 서랍에 둘 거라고 했다.“이거 잃어버리면 하나 남아야 하니까.”태주는 현관에서 아이의 모자를 씌워 주다가 고무줄을 한 번 만졌다. 잘 어울린다는 말은 했지만 누가 산 것인지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서연은 그 손끝을 봤다. 노란 고무줄을 만지는 손가락이 어제 카디건 단추를 잠그던 손과 겹쳤다. 겹친 손을 그녀는 현관 거울에 비추지 않았다.***토요일 오전에는 명자가 반찬통 세 개와 종이봉투 두 개를 들고 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봄이가 달려가 노란 머리끈부터 보여 줬다.“엄마가 사 준 거래.”명자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가 금세 작아졌다.“그래. 네 엄마가 노란색 좋아했지.”명자는 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큰 통에는 새로 담근 열무김치, 작은 통에는 멸치볶음과 봄이가 먹을 장조림이 들어 있었다.“이렇게 많이 안 주셔도 돼요.”서연이 냉장고 자리를 만들며 말하자 명자가 반찬통을 받아 직접 넣었다.“너 먹으라고 가져온 건 아니야. 태주랑 봄이 주려고 가져왔지.”말끝이 차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았다. 서연은 네, 하고 물러섰다.종이봉투에는 봄이의 얇은 점퍼와 작아진 옷을 바꿔 입힐 새 내복이 있었다. 명자는 거실에 앉아 소매 길이를 대 봤다. 봄이는 할머니 무릎에 기대 어린이 프로그램을 틀어 달라고 했다.태주는 베란다 창틀을 닦고 있었다. 서연은 빨래를 개어 작은방과 봄이의 방으로 나눴다. 서로 맡은 일이 있어 집 안이 조용히 움직였다.명자는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봤다.“살림을 아주 나눠서 하나 보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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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6화. 사진 속 네 사람

월요일 하원길, 봄이는 가정통신문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가방에 넣어야 안 잃어버리지.”서연이 손을 내밀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내가 아빠한테 줄 거야.”아빠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서연은 억지로 받지 않았다. 봄이는 아파트까지 오는 동안 주머니 위를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눌렀다.태주가 돌아오자 아이는 현관까지 뛰어가 종이를 꺼냈다. 구겨진 통신문에는 ‘우리 가족을 소개해요’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금요일까지 가족사진 한 장과 가족을 그린 그림을 보내 달라는 안내였다.“사진 있어?”봄이가 묻자 태주는 구두를 벗다 말고 종이를 읽었다.“찾아보면 있지.”“이모도 있는 거?”태주의 시선이 서연에게 갔다. 서연은 냄비 뚜껑을 열며 못 들은 척했다.뚜껑에서 김이 올랐다. 오른 김 뒤로 그의 시선이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시선을 냄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족사진에 들어갈 얼굴이 아니라는 말을, 국이 끓기 전에 스스로 해 두었다.저녁을 먹고 태주는 컴퓨터에 옮겨 둔 사진 폴더를 열었다. 봄이는 아빠 의자에 반쯤 걸터앉았고, 서연은 거리를 두고 침대 끝에 앉았다. 가족 태블릿의 영상과 사진을 복사해 둔 뒤 처음 여는 폴더였다.첫 화면에는 작년 봄 벚꽃 아래의 세 사람이 있었다. 서희가 봄이의 모자를 바로잡고, 태주는 접은 유모차를 들고 있었다. 셋 다 카메라를 보지 않는 사진이었다.“이건 엄마 얼굴이 잘 안 보여.”봄이가 말했다.다음 사진에서는 서희가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태주의 눈은 촛불을 보고 있었고, 어린 봄이는 입가에 크림을 묻혔다. 아이는 사진마다 언제였는지 물었다. 태주는 기억나는 것만 대답했다.“이건 네 네 번째 생일.”“엄마가 케이크 만들었어?”“아니. 만들다 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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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7화. 돌아가지 않는 저녁

화요일 오후 4시, 서연은 노트북 전원을 끄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지난주처럼 원룸에 들렀다가 저녁만 먹고 804호로 돌아가면 됐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개인시간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것 같았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들어 태주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은 원룸에서 잘게요. 내일 회사로 바로 갈게요.답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왔다.알았어. 봄이한테 내가 말할게.붙잡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는 답이었다. 서연은 안도하면서도 화면을 오래 봤다.원룸 문을 열자 일주일 동안 닫혀 있던 공기가 밀려 나왔다. 환기하려고 창문을 여니 찬 바람이 들어왔다. 냉장고에는 달걀과 생수, 지난주에 사 둔 우유밖에 없었다. 서연은 관리비 고지서를 우편함에서 가져와 식탁에 올렸다.보일러를 켜고 검은 장례 원피스가 걸린 옷장을 열었다. 출근할 옷은 충분했지만 양말이 없었다. 대부분 804호 작은방 서랍에 옮겨 둔 탓이었다.“잠깐 산다면서.”혼잣말이 빈 방에서 크게 들렸다.서연은 편의점에서 양말과 컵밥을 사 왔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동안 휴대전화가 울렸다. 봄이가 건 전화였다. 정확히는 태주의 휴대전화로 걸려 왔다.“이모, 왜 안 와?”“오늘은 이모 집에서 잘 거야.”“내일도?”“내일 퇴근하고 갈게.”“이모 집이 어디야?”지난번에도 들은 설명인데 아이는 다시 물었다. 서연은 유치원에서 버스로 멀지 않은 곳이라고 말했다.“할머니랑 저녁 먹었어?”“응. 장조림이랑 계란.”“아빠 왔어?”“지금 옆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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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8화. 첫 번째 보호자

금요일 아침, 봄이는 가족사진과 그림이 든 파일을 선생님에게 직접 건넸다.태주는 유치원 현관에서 투명 파일이 구겨지지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봄이는 노란 머리끈을 한 채 교실로 들어갔고, 출근길의 서연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이모, 사진 안 잃어버렸어.”서연은 사무실에 도착한 뒤에야 메시지를 들었다. 잘했다는 답을 녹음하려다가 글자로 짧게 보냈다. 미경이 오전 주문 목록을 내밀며 오늘은 4시 전에 꼭 발주를 끝내야 한다고 했다.점심을 조금 넘긴 시각, 책상 위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태주의 이름이 떴다.“형부?”“유치원에서 연락 왔어. 봄이가 열이 난대.”서연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많이요?”“내가 지금 데리러 가는 중이야. 병원 들렀다가 다시 연락할게.”“제가 갈까요?”“넌 일해. 내가 데리러 가고 있잖아. 병원에서 뭐라는지 바로 알려 줄게.”그 말에 서연은 다시 앉았다. 비상 연락 카드를 쓰던 날, 태주는 자기 번호부터 적었다. 오늘 선생님도 그 번호로 먼저 전화한 모양이었다.손가락이 발주서 숫자 위에서 미끄러졌다. 미끄러진 손가락이 가방 끈을 찾았다가 놓았다. 놓는 일이 2순위의 자리였다. 그 자리가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었다.“병원 다녀오시면 알려 주세요.”“그래.”전화는 짧게 끝났다. 서연은 화면을 뒤집어 놓고 발주서를 다시 열었다. 숫자를 두 번씩 확인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방을 들고 나갈 수는 없었다. 봄이에게는 이미 가는 아빠가 있었고, 서연에게는 끝내야 하는 일이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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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9화. 아픈 다음 날

토요일 새벽 5시, 서연은 물 흐르는 소리에 잠을 깼다.부엌으로 나가 보니 태주가 물컵을 씻고 있었다. 셔츠 대신 어제 입었던 면 티 차림이었다. 눈 밑이 어둡고 머리는 한쪽으로 눌려 있었다.“한숨도 못 주무셨어요?”“중간에 좀 잤어.”태주는 컵에 물을 다시 받아 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은 밤새 열어 둔 만큼만 벌어져 있었다. 서연은 뒤따르지 않고 주방에 남았다.남은 주방에 그의 면 티 냄새가 잠깐 머물렀다. 머문 냄새를 따라가면 아이 방 바닥에 앉은 그의 어깨가 있었다. 서연은 수도를 틀어 그 냄새를 씻었다. 씻은 물이 새벽 부엌을 차갑게 했다.냉장고에는 진료 뒤 받은 안내문과 시간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서연은 내용에 손대지 않았다. 대신 전날 끓인 죽을 작은 냄비에 덜고, 배를 갈아 밀폐용기에 담았다.7시가 넘어서야 봄이가 방에서 나왔다. 아이는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태주의 품에 기대 있었다. 얼굴은 아직 붉었지만 어젯밤처럼 축 처져 있지는 않았다.“이모.”“잘 잤어?”“아빠 코 골았어.”태주가 아이를 식탁 의자에 앉히며 헛기침했다.“아빠 안 골았어.”“골았어. 으르렁.”봄이가 소리를 흉내 내자 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태주도 입가를 잠깐 풀었다. 아픈 아이가 평소처럼 장난하는 것만으로 주방 공기가 가벼워졌다.봄이는 죽을 다섯 숟갈 먹고 그만두었다. 서연이 갈아 둔 배는 두 입 먹었다. 태주는 아이 상태를 살핀 뒤 병원에서 들은 대로 오늘은 집에서 쉬게 하겠다고 했다.“제가 볼 테니까 좀 주무세요.”“괜찮아.”“얼굴이 안 괜찮은데요.”“서연아.”태주가 낮게 부르자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거절하려는 목소리였지만, 봄이가 아빠 손등을 두드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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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0화. 다시 정한 날짜

봄이는 월요일에 유치원으로 돌아갔다.금요일에는 가족사진과 그림도 돌려받았다. 노란 원피스의 엄마 옆에 선생님이 작은 꽃 도장을 찍어 줬고, 종이 맨 끝의 서연 옆에는 ‘이모’라고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봄이는 약속대로 그림을 보여 준 뒤 거실 서랍에 넣었다. 그다음 주가 되자 아팠던 날은 죽이 싫었다는 기억으로만 남았다.***4월 15일 수요일.서연은 퇴근 뒤 봄이를 데리고 집에 와서 식탁 달력부터 보았다. 한 달 전 태주가 그어 둔 동그라미가 오늘 날짜를 감싸고 있었다.저녁에는 카레를 만들었다. 태주는 7시 전에 돌아와 봄이를 씻겼고, 서연은 8시부터 1시간 동안 일을 했다. 처음 정한 생활표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봄이가 잠든 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아이 방문이 손바닥 너비로 열려 있었다. 열린 문 앞에서 오늘 이야기는 짐을 싸는 이야기에 가까웠다. 가까워진 이야기가 몸을 먼저 허락하지는 않았다.서연은 원룸에서 가져온 관리비 고지서와 한 달 동안 모은 영수증 봉투를 꺼냈다. 태주는 회사 수첩을 펼쳤다. 어느 쪽도 오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봄이는 이제 유치원 잘 가요.”서연이 먼저 말했다.“밤에도 전처럼 자주 깨지 않고요.”“지난주에는 두 번 깼어.”“형부가 계셨잖아요.”태주는 펜을 내려놓았다.“그래서 이제 가겠다는 거야?”“오늘 다시 얘기하기로 했으니까요.”서연은 영수증 봉투를 식탁 가운데 놓았다. 당장 여행가방을 싸 두지는 않았다. 남겠다고 마음먹고 앉은 것도 아니었다.태주는 5월 일정이 적힌 수첩을 돌려 보여 줬다. 다음 주부터 현장 세 곳의 마감 일정이 겹쳐 있었다.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평소보다 일찍 나가야 하고, 늦어질 가능성도 컸다.“등원은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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