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Chapter 61 - Chapter 70

140 Chapters

제61화. 없던 일로 하지 않기

지하철 문이 닫힌 뒤에도 서연은 손잡이를 잡지 못했다. 입술에 남은 감각보다 마지막에 부른 호칭이 더 아팠다.형부.태주 씨라고 불러 놓고 다시 형부라 했다. 어느 쪽도 거짓말이 아니어서 피할 곳이 없었다.원룸에 도착한 서연은 눈이 녹아 어깨가 축축해진 코트를 벗어 걸고 세면대 앞에 섰다. 화장을 지운 뒤에도 입술만 오래 문질렀다. 피부가 붉어질 때까지 닦아도 오늘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휴대전화에는 태주의 메시지가 없었다. 약속한 시간에 봄이를 데리러 갔을 것이다. 서연은 먼저 묻지 않았다.***태주와 함께 804호 현관에 들어선 봄이는 연보라색 가방을 멘 채 아빠를 올려다봤다.“아빠, 오늘 돌봄에서 종이 눈 만들었어.”“신발부터 벗고 보여 줘.”태주가 봄이의 외투에 붙은 눈을 털어 주었다. 봄이는 외투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태주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을 주워 식탁 위에 펴 주고, 아이 손을 씻겼다. 저녁은 아침에 끓여 둔 된장국과 계란말이였다.평소보다 말이 적은 아빠를 봄이가 한 번 쳐다봤다.“회사에서 혼났어?”“아니.”“그럼 배 아파?”“그것도 아니야. 아빠가 생각할 게 좀 있어.”“내가 조용히 먹어?”“그럴 필요 없어. 오늘 뭐 했는지 말해 줘.”태주는 아이가 종이 눈을 접은 이야기와 친구가 풀을 쏟은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목욕물을 받고 머리를 말리고, 새 책가방 이름표를 다시 꿰었다. 해야 할 일은 차 안에서 다시 선을 넘기 전과 같았다.봄이가 잠든 뒤에야 태주는 차로 내려가 빈 종이컵 두 개를 치웠다. 서연이 마신 컵도 함께 버렸다. 그러다 조수석에 떨어진 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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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말하지 않는 일주일

수요일 아침, 서연은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태주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당연한 일이었다. 필요한 일 외에는 연락하지 않기로 한 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서연은 시간을 확인한 척 화면을 끄고 출근 준비를 했다.소담살림에는 신년 주문이 몰렸다. 서연은 반품된 이불의 박음질을 확인하고, 오전 내내 촬영 목록을 다시 짰다. 점심에는 미경과 거래처 단가를 맞췄다. 손을 멈출 틈이 없으면 생각도 줄어들 줄 알았다.오후 3시, 가족 대화방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연보라색 책가방을 멘 봄이가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가슴에는 태주가 인쇄해 준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학교 연습 중. 이름이랑 집 주소는 정확히 말함.’태주가 쓴 문장은 아이의 생활만 전했다. 서연은 한참 뒤 엄지손가락 그림 하나를 눌렀다.‘이모, 나 전화번호도 외웠어.’봄이가 직접 녹음한 음성이 이어졌다. 서연은 이어폰으로 두 번 듣고 답했다.‘모르는 사람한테는 말하면 안 되는 것도 기억하기.’‘알아. 선생님이나 경찰한테만.’그 뒤로 대화는 끝났다. 태주와 서연은 서로의 답을 읽었지만 개인 대화창을 열지 않았다.열지 않은 창이 말하지 않는 일주일의 규칙이었다. 규칙 위에서 엄지손가락만 눌렸다.태주는 그날 저녁 봄이와 응급 연락카드를 만들었다. 첫 줄에는 자기 번호, 두 번째에는 명자, 세 번째에는 서연의 번호를 적었다. 봄이는 서연 이름 옆에 빨간 별을 그리려 했다.“별은 빼자. 선생님이 보기 편해야 해.”“이모만 없으면 섭섭하잖아.”“이름이 있으면 안 섭섭해.”태주는 카드 뒷면을 가리켰다. 봄이가 그곳에 별을 옮겨 그리는 동안 앞면의 전화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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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도망도 내 선택이라면

서연은 출장 신청서를 가방에 넣어 퇴근했다. 회사에서 바로 표시하지 않은 것은 태주의 허락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한 달을 떠나는 이유를 자기한테 먼저 설명하고 싶었다.원룸 식탁에 종이를 펴 놓고 빈 메모장을 반으로 나눴다.왼쪽에는 일의 이유를 적었다. 팝업 총괄 경험, 현지 직원 교육, 재고 운영, 출장비, 다음 연봉 협상. 오른쪽에는 불편한 점을 적었다. 한 달 외지 생활, 부모와 친구를 못 보는 주말, 익숙하지 않은 숙소.태주 이름은 어느 쪽에도 쓰지 못했다.한참 뒤 메모장 맨 아래에 따로 적었다.‘멀어지고 싶다.’그 문장을 보고서야 서연은 민아에게 전화했다.“지금 말해도 돼?”민아는 서연 목소리를 듣고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응. 해.”“나, 그 사람이랑 입 맞췄어.”“누군데.”서연은 눈을 감았다.“형부.”전화기 너머가 오래 조용했다. 민아는 쉽게 위로나 욕부터 하지 않았다. 형부라는 두 글자가 먼저 무거웠다.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물었다.“네가 말하는 형부, 서희 언니 남편?”“응.”“둘 다 원했고?”“응.”“언제부터야.”“그 집에 있을 때 이미 선을 넘었어. 좋아한 건…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야, 한서연.”민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내가 네 편인 거랑 이게 괜찮은 일인 건 다른 거야.”“알아.”“봄이는 몰라야 하고. 그 집에서 언니 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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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붙잡지 않는 말

출장 사실은 이틀 뒤 가족 대화방에 올렸다.서연은 여러 번 썼다 지운 끝에 날짜부터 적었다.‘회사에서 2월 한 달 대전 팝업을 맡게 됐어요. 1월 28일 저녁에 내려가고 3월 1일에 돌아옵니다. 그동안 방학 돌봄 비상 연락은 형부, 사돈어머니, 엄마 순서로 부탁드릴게요. 학교 응급 카드는 입학 전에 돌아오니 그대로 두겠습니다.’일 때문이라는 말도, 자기가 선택했다는 말도 더 붙이지 않았다. 이미 사실 안에 들어 있었다.명자가 먼저 엄지손가락 그림을 보냈다.‘일 맡았으면 잘하고 와. 화요일은 그대로 내가 본다.’정숙은 숙소 주소를 보내 달라고 했고, 동식은 추운 날 객지에서 감기 조심하라고 썼다. 태주의 답은 한참 뒤에 왔다.‘확인했습니다. 2월 비상 연락은 제가 다시 정리할게요.’꼭 필요한 말뿐이었다. 서연은 그 문장을 읽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바라던 반응인데도 속이 빈 것처럼 서늘했다.점심 무렵 태주는 방학 돌봄 담당자에게 보낼 수정표 사진을 가족 방에 올렸다. 1번째 칸에는 자기 번호, 2번째에는 명자, 3번째에는 정숙이 적혀 있었다. 서연의 이름에는 줄을 긋지 않고 ‘2월 외지 근무’라고 작은 글씨를 붙였다. 학교가 시작되는 3월 카드에는 바꿀 것이 없다는 메모도 있었다.정숙이 갑자기 연락이 오면 자기가 바로 갈 수 있겠느냐고 묻자 태주는 먼저 자기 회사와 명자에게 연락한 뒤 부탁드리겠다고 답했다. 딸의 일을 서연의 부모에게 밀어 놓지 않겠다는 순서였다. 한 달 동안 서연이 빠져도 봄이의 생활은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사실은 안심이었고, 동시에 서연이 떠날 수 있게 만드는 단단한 바닥이었다.저녁에는 봄이에게 영상 전화를 걸었다. 태주가 거실 탁자에 휴대전화를 세워 주고 화면 밖으로 물러났다.“이모가 한 달 동안 대전에서 일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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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떠나는 가방

출발을 닷새 앞둔 토요일, 서연은 24인치 여행 가방을 원룸 한가운데 펼쳤다.출장 물품표에 적은 순서대로 물건을 놓았다. 검은 바지 세 벌, 셔츠 다섯 장, 매장에서 신을 낮은 운동화, 휴대용 다리미, 노트북 충전기와 여분 멀티탭. 한 달치 옷을 다 넣을 수는 없어 숙소 근처 세탁방 주소도 저장했다.전날 회사에서는 샘플 18세트에 번호표를 붙였다. 큰 상자는 회사 화물차가 설치일 아침 행사장으로 가져가고, 서연은 숙소 열쇠와 매장 출입증만 들고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미경은 같은 날 아침 기차로 와서 설치가 끝난 뒤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서연은 운송 기사와 행사장 담당자의 번호를 종이 수첩에도 옮겨 적었다. 휴대전화 하나가 꺼졌다고 일이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짐을 꾸리는 동안만큼은 마음보다 확인할 항목이 많았다. 숫자가 맞고 운송 시간이 맞으면 다음 칸에 표시했다. 그런 구체적인 일이 있어서 서연은 떠나는 선택을 후회만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옷장 아래에서 검은 원피스 자락이 잠깐 보였다. 언니 장례식에 입었던 옷이었다. 서연은 손을 멈췄다가 그 위로 겨울 니트를 다시 덮었다. 가져갈 이유가 없었다.정숙은 점심부터 전화를 세 번 했다. 숙소 냉장고가 작다는 말을 듣고도 멸치볶음과 장조림, 김치를 각각 작은 통에 나눠 놓았다고 했다.“엄마, 한 달 굶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객지에서 퇴근하면 밥 차리기 싫어져. 조금만 가져가.”“조금만요. 김치는 제일 작은 통.”“알았어. 네가 와서 골라.”서연은 일요일 부모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태주와 봄이도 정숙이 먼저 불렀다. 출장 전 얼굴을 보자는 말이었고, 서연은 거절할 핑계를 만들지 않았다. 둘만 있지 않기로 한 약속과 가족으로서 인사하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일요일 오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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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멀리 와도 그대로

1월 28일 오후, 서연은 원룸 문을 두 번 확인하고 여행 가방을 끌었다.회사에서 보내는 샘플은 다음 날 도착할 예정이라 손에는 가방 하나와 노트북 가방만 있었다. 역까지는 택시를 탔다. 태주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고, 승강장 어디에도 그가 없었다.서연은 안도하면서 빈자리를 찾았다. 오지 말라고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오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이 정한 거리였다.기차가 출발하자 가방 옆주머니에서 봄이의 그림을 꺼냈다. 접힌 종이 안에는 네모난 가게와 줄지어 놓인 베개가 있었다. 한쪽에 머리가 유난히 큰 사람 하나가 서 있었고 가슴에는 ‘이모’라고 쓰여 있었다. 위쪽에는 노란 별 네 개와 삐뚤한 글씨가 붙어 있었다.‘일 잘하고 와. 일요일에 보자.’그림 속에는 봄이 자신도, 태주도 없었다. 아이는 이모가 일하는 곳을 그렸고 자기와의 다음 약속만 남겼다. 서연은 사진을 찍어 봄이에게 개인 메시지로 보냈다.‘하나도 안 웃었어. 이모 닮았어. 고마워.’곧 봄이가 웃는 얼굴 그림을 답으로 보냈다. 태주 이름은 대화창에 나타나지 않았다.대전역에서 숙소까지는 택시로 15분쯤 걸렸다. 회사가 구한 원룸은 작은 주방과 침대, 접이식 식탁이 전부였지만 깨끗했다. 서연은 도착 사진과 주소를 가족 대화방에 올렸다.명자와 정숙이 거의 동시에 답했고, 태주는 잠시 뒤 ‘확인했어. 문단속 잘해’라고 썼다. 서연은 ‘네’ 하나만 남겼다.냉장고에는 정숙이 준 작은 김치 통과 멸치볶음을 넣었다. 멀티탭은 침대 옆에 놓고, 셔츠는 휴대용 다리미로 한 장만 펴서 걸었다. 낯선 방에 자기 물건이 자리를 잡자 출장이라는 말이 조금 실감 났다.***다음 날 아침 미경과 행사장에서 만났다. 회사 화물차는 약속한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했다. 서연은 샘플 번호를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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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전화로도 선은 넘는다

“지금 끊을까요?”서연이 물었지만 손가락은 통화 종료 버튼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네가 피곤하면.”“그런 뜻 아니에요.”태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조금 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도 둘은 다음 문장을 고르지 못했다. 사귀자는 말도, 잊자는 말도 어느 쪽도 지금의 관계에는 너무 가벼웠다.“발은 괜찮아?”뜬금없는 물음에 서연은 내려다봤다. 새 운동화에 쓸린 뒤꿈치가 따끔거렸다.“어떻게 알았어요?”“저녁 통화할 때 절뚝였잖아.”봄이에게 진열대를 보여 주려고 매장 안을 걸었던 몇 초였다. 태주는 화면을 들고 있었으면서 그걸 봤다.“밴드 붙였어요. 별것도 아닌데.”“내일은 다른 신발 신고 가.”“형부는 봄이 가방 끈 손봤어요? 화면에서 한쪽이 자꾸 내려가던데.”“방금 줄여 놨어. 애가 또 멋대로 늘이면 소용없지만.”서연은 웃었다. 태주도 아주 낮게 웃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늘 저녁 반찬과 내일 아침 알람, 봄이가 잃어버린 지우개 이야기가 이어졌다. 특별한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위험한 일상이 키스를 한 번만 한 사이보다 먼저 선 안으로 들어왔다.한집에 살 때 부엌 식탁에서 나누던 말들이 전화선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형부.”“응.”“우리 지금 뭐 하는 거예요?”태주의 대답은 늦었다.“나도 생각하는 중이야.”“끊어야 하는데 자꾸 묻게 돼요. 봄이가 밥은 먹었는지, 형부는 늦게 들어갔는지.”“나도 네 퇴근 시간을 보고 있었어.”“그런 게 더 무서워요.”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키스는 한 번뿐이었다. 손도 잡지 않았고, 서로를 만나러 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루 끝에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태주가 먼저 말했다.“잘 자.”“형부도요.”통화 시간은 37분이었다. 서연은 숫자를 한동안 보고 있다가 휴대전화를 엎었다.***다음 날 매장 문을 열기 전, 민아가 사진을 보내 왔다. 사무실 탕비실에 쌓인 종이컵 옆에 ‘출장자는 살아 있는지 보고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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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기다리는 사람의 몫

태주는 서연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고 대화창을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은 더 있었다. 오늘 밤에도 뒤꿈치에 밴드를 붙였는지, 혼자 있는 방은 춥지 않은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알겠어’라고 답한 사람이 먼저 약속을 흐릴 수는 없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거실 탁자에 놓고 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새 책가방 옆에 색연필을 늘어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낮에 줄여 둔 어깨끈 한쪽이 다시 길어져 있었다. “역시 네 맘대로 했구나.” 태주는 끈을 맞추고 색연필 뚜껑을 닫았다. 책상 위 안내문에는 유치원 졸업식 날짜와 초등학교 예비소집 뒤 제출할 서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이름표, 실내화, 돌봄교실 준비물. 그는 사진을 찍는 대신 종이에 하나씩 옮겨 적었다. 서연에게 보내면 빨리 정리해 줄 거라는 생각부터 든 자신이 싫었다. 봄이의 아버지는 자신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봄이는 식탁에 앉자마자 가방을 뒤로 숨겼다. “아빠, 끈 또 줄였어?” “어깨에서 빠지니까.” “길게 해야 언니 같단 말이야.” “언니처럼 보이다가 가방 잃어버린다.” 태주는 달걀말이를 잘라 밥 옆에 놓았다. 봄이는 한참 입을 삐죽이다가 한 조각을 먹었다. “이모한테 물어볼 거야.” “가방 끈은 아빠랑 정하면 돼.” “이모는 긴 게 예쁘다고 할 수도 있잖아.” “그래도 메는 사람 어깨에 맞춰야지.” 태주의 말에 봄이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서연을 찾았지만 떼를 써서 불러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일요일에 통화한다는 약속을 알고 있었다. 출근길에 명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토요일 점심 비워라.” “왜요?” “전에 말한 병원 원장 딸 있잖아. 그쪽도 부담 없이 밥이나 먹자더라.” 태주는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안 만납니다.” “한 번 앉아 보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 봄이도 이제 학교 들어가. 계속 혼자 살 거야?” “만날 마음도 없는데 그분 시간만 뺏잖아요. 괜히 나갔다가 또 미안해지고요.” “무슨 시간을 뺏어? 만나 봐야 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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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연락하지 않는 밤

서연은 태주와의 대화창을 알림 목록 아래로 밀어 두었다. 차단도, 삭제도 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는 데 그런 장치까지 필요하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손가락은 먼저 그 이름이 있는 자리로 갔다. 2월 5일, 행사장 담당자가 밸런타인데이 판촉안을 들고 왔다. “베개 두 개를 묶어서 커플 세트로 만들면 어떨까요? 리본만 둘러도 사진이 예쁘게 나와요.” 서연은 진열대 위 샘플을 나란히 놓았다. 같은 높이의 베개 두 개에 붉은 띠지를 두르자 눈에 잘 띄기는 했다. “커플만 쓰는 건 아니니까 문구는 ‘둘이 쓰는 세트’로 할게요. 부부든 자매든 선물할 수 있게요.” “밸런타인데이 분위기가 덜 나지 않을까요?” “대신 색 조합을 두 가지로 만들어요. 같은 색 두 개, 다른 색 두 개. 손님이 고를 수 있으면 묶음 판매도 쉬워요.” 현지 직원들이 띠지를 자르는 동안 서연은 본사에 할인율을 확인했다. 오후에는 세트 사진을 찍어 행사장 계정에 올리고, 반응이 좋은 색을 따로 앞줄에 뒀다. 연인 한 쌍이 베개를 번갈아 눌러 보며 높이를 골랐다. “자기는 낮은 게 좋다며.” “네가 자꾸 내 거 베니까 높은 것도 사야 돼.” 두 사람은 사소한 걸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다른 높이 하나씩을 샀다. 서연은 영수증과 세탁 안내서를 건네며 웃었다. 그들이 손을 잡고 멀어지고 나서야 진열대의 빈자리를 채웠다. 평범한 연애는 저런 것일지도 몰랐다. 남들 앞에서 베개를 고르고, 어느 쪽이 이불을 더 가져가는지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 서연과 태주에게는 그런 장면 하나에도 설명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저녁에는 파란색 퀸 사이즈가 재고표보다 4개 부족했다. 직원들은 전산 오류라고 했지만 서연은 오전 판매 내역과 창고 출고표를 다시 맞췄다. “2개는 세트로 묶으면서 낱개 재고에서 안 뺐고, 2개는 진열용 침대 밑에 있어요.” 1시간 만에 수량이 맞았다. 서연은 누구의 실수인지 이름부터 찾지 않았다. 세트 작업을 마치면 두 사람이 함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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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가까이 가도 만나지 않는

월요일 오후, 세종 현장 책임자에게서 회신이 왔다. 2월 11일 오전 11시. 변경된 배수 동선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오후 3시에는 대전 사무소에서 협력사와 최종 도면을 맞추는 일정이었다. 태주는 팀원 2명과 함께 갈 차량을 먼저 잡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는 대전역 저녁 8시 30분이었다. 업무가 길어져도 1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모든 예약을 끝낸 뒤에도 서연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봄이의 졸업식 가운을 다려 걸고, 다음 날 아침밥에 쓸 쌀을 씻어 놓았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식탁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었다. ‘11일에 세종 현장 때문에 내려가. 오후에는 대전 사무소에 있고 저녁 기차로 올라와.’ 문장을 적고 한 줄을 더 썼다. ‘약속을 바꾸자는 뜻은 아니야. 네가 괜찮으면 기차 타기 전에 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 태주는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시간을 확인했다. 늦은 밤이었다. 메시지를 지우고 다음 날 점심까지 기다렸다. 서연이 손님에게 이불솜 차이를 설명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태주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일주일 만에 온 개인 메시지였다. 서연은 설명을 끝내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서야 읽었다. ‘11일에 세종 현장과 대전 사무소 일정이 잡혔어. 저녁 8시 30분 기차로 올라가.’ 그 아래에는 더 짧은 문장이 있었다. ‘1시간이라도 볼래? 싫으면 안 갈게.’ 서연은 날짜부터 다시 봤다. 이틀 뒤였다. 마음만 먹으면 마감 교대를 당기고 대전역 근처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태주가 일부러 만든 일정도 아니었다. 그런데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3월 1일까지 남은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 같았다. 차 안에서 멈췄던 키스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떠오른 입이 창고의 먼지보다 먼저 가까웠다. 가까운 입을 그녀는 전송 버튼으로 밀었다. ‘안 보는 게 좋겠어요.’ 답을 쓰고도 보내지 못했다. 민아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뒀다. 만나든 만나지 않든 이번에는 자기 선택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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