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시엘의 목소리가 떨어진 순간, 수천 개의 기억이 떠다니던 어둠이 기묘할 정도로 고요해졌다.엘로디아는 라시엘의 손을 잡은 채 붉은 기억 조각을 바라봤다. 조각 안에는 열네 살의 라시엘이 누워 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 식은땀에 젖은 검은 머리,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해 가늘게 오르내리는 가슴. 그리고 침대 곁에는 지금보다 훨씬 젊은 카시엘 황제가 서 있었다.틀릴 수 없었다.라시엘과 같은 검은 머리.황실 특유의 금빛 눈.세월이 흐르며 얼굴에 깊은 선이 생기기 전이었지만, 분명 현 황제 카시엘 폰 아르젠이었다.그리고 그의 손 아래.검은 잔이 있었다.엘로디아는 본능적으로 라시엘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전하.”대답이 없었다.“라시엘.”그제야.라시엘이 그녀를 봤다.조금 전 엘로디아가 기억을 잃었을 때처럼.이번에는 반대였다.엘로디아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끝까지 봐요.”라시엘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봐야 할까.”처음이었다.그가 진실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는 건.르메르 영지에서 자신의 황위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기록을 발견했을 때도.레오넬이 왕좌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라시엘은 진실을 피하지 않았다.그런데.이번에는 아버지였다.자신이 열네 살에 죽을 뻔했던 밤.그 곁에.황제가 있었다.엘로디아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저도 같이 볼게요.”쿵.라시엘의 심장이 뛰었다.“기억은.”엘로디아가 천천히 말했다.“혼자 볼 필요 없잖아요.”라시엘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두 사람은 다시 붉은 조각을 바라봤다.기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이번에도 살아남아라.”젊은 황제가 말했다.침대 위의 라시엘은 듣지 못했다.의식이 없었다.그의 입술은 푸르게 질려 있었고, 손끝에는 검은 반점이 번지고 있었다. 당시 기록으로 보았던 독의 증상과 같았다.황제가 천천히 검은 잔을 들었다.그런데.이상했다.잔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랐다.황제는 라시엘
Terakhir Diperbarui : 2026-09-16 Baca selengkapn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