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수도의 집무실과 나른한 정적]제국 서쪽 산맥을 거쳐 남부의 이볼론 자치구, 그리고 수도 본성에 이르기까지 전 제국을 아우르던 기나긴 순행이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본회의 잔재와 보수파 귀족들의 반란, 그리고 태초의 원혼마저 완벽히 정화된 밤의 제국에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평화로운 침묵이 찾아와 있었다. 황좌를 위협할 만한 거센 바람은 온 대륙을 통틀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수도 저택의 최상층, 높다란 아치형 창문 너머로 핏빛 달빛이 장엄하게 내리쬐는 가주의 대집무실.수개월간 비어 있던 집무실의 붉은목재 책상 위에는 전 제국 영지에서 올라온 상소문과 재정 보고서 대신, 두 사람의 여유로운 시간을 축하하는 온화한 조명이 은은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스스륵—.엘리자는 가주의 화려한 붉은 로브 대신, 편안한 실크 드레스 자락을 느슨하게 풀어 내린 채 거대한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순행 동안 제국 전역을 호령하던 황제로서의 서리 같은 긴장감이 비로소 풀어지며, 차가운 숨결이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나른하게 새어 나왔다.그리고 그녀의 바로 옆, 거대한 책상 위에는 검은 비단 셔츠의 깃을 넓게 풀어헤친 미소년 카엘이 나비처럼 걸터앉아 있었다.카엘은 가늘고 매끈하며 단단한 다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책상 위에서 엘리자를 내려다보며 풋풋하고 미더운 실소를 짓고 있었다.소년 특유의 앳된 얼굴선 뒤로, 과거 이성을 위협하던 늑대 왕가의 파괴적인 야성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제 곁의 여인을 온전히 눈에 담고 싶어 하는 다정한 열망과 깊은 안도감만이 소년의 핏빛 어린 동공 속에서 따스하게 번져가고 있었다."진짜로 서류를 다 치워버렸네, 엘리자."카엘의 나른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집무실의 정적을 은은하게 간지럽혔다.소년은 책상 위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엘리자가 앉아 있는 가죽 의자의 양 팔걸이를 두 손으로 살포시 짚고 허리를 숙였다.두 사람의 얼굴이 스칠 듯 가까워졌다. 카엘의 검은 머리칼이 내려
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