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Chapter 131 - Chapter 140

150 Chapters

제131화. 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아이들이 처음 함께 엄마와 아빠를 부르던 아침 뒤로도 가족의 생활은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을 따라 이어졌다. 도윤은 손이 닿는 물건마다 이름을 묻기 시작했고, 서아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른의 손가락을 잡아 그 앞으로 데려갔다.은서의 달력에는 해외 일정과 함께 아이들의 작은 약속이 적혔다. 정원에 가기, 공을 가지고 놀기, 같은 책 다시 읽기. 시후는 회의 시간이 겹치면 비서에게 약속의 상대를 묻지 말고 시간을 옮겨달라고 했다.그날 피크닉도 그러다 남겨둔 오후였다. 은서는 커다란 바구니를 보고 사람이 몇 명 더 오느냐고 물었다. 시후가 바구니 안을 내려다봤다.“부족할까 봐.”“점심 먹고 간식만 먹을 건데요.”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사과와 물만 작은 가방에 옮겼다. 큰 바구니에 남은 것을 한 번 더 보던 그가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은서는 그 작은 가방을 받아들고 먼저 차에 올랐다.***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2시, 서울 성북동 故 서혜진 박물관 후원 프라이빗 정원. 초록빛 잔디밭 위에 체크무늬 돗자리가 펼쳐져 있고, 은서와 시후는 화이트 린넨 셔츠에 편안한 슬랙스를 맞춰 입고 앉아 있었다. 첫돌을 넘기고 “엄마, 아빠!”를 또렷하게 부르기 시작한 쌍둥이 도윤과 서아가 잔디밭 위를 아장아장 뛰놀고 있었다.“아빠! 아빠, 사과!”통통한 볼살을 흔들며 달려온 첫째 아들 도윤이, 제 작은 손에 쥐고 있던 사과 조각을 시후의 입가로 불쑥 내밀었다. 순간, 세상 그 어떤 거물들 앞에서도 서늘하던 강시후의 눈매가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풀려났다.“그래, 우리 도윤이가 아빠 주는 건가.”도윤은 사과를 다시 제 입으로 가져갔다가 아버지를 보았다. 어느 쪽이 먼저 먹을지 잠깐 고민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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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패밀리 브로치

밤 8시, 서울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 마스터 아틀리에.낮 동안의 피크닉으로 피곤했던 도윤과 서아가 일찍 잠든 후, 45층 아틀리에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창 너머 한강에는 불빛이 길게 번졌고, 은서의 작업등이 켜진 자리만 밝았다. 은서는 원목 세공 테이블 앞에 앉아, 가족의 평화와 사랑을 상징하는 ‘에메랄드-핑크 다이아몬드 패밀리 브로치’의 정밀 스케치를 다듬고 있었다.돌 네 개를 똑같은 크기로 그렸다가 지웠다. 가족이라고 모두 같은 모양으로 나란히 서 있을 필요는 없었다. 낮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은서는 두 개의 작은 돌을 조금 떨어뜨려 놓고, 그 바깥에 큰 돌 둘을 배치했다. 동그랗게 닫힌 선을 그었다가 한쪽을 끊었다. 세공하는 동안 한 조각이 걸리면 분리해서 손볼 수 있게 하려는 설계였다.보석함에서 작은 색석 견본을 꺼내 종이 위에 올렸다. 청혼반지의 중심석이나 어머니의 유품을 다시 해체할 작품은 아니었다. 가족 모두가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따로 골라둔 작은 돌들이었다.서아가 낮에 안고 있던 토끼 인형을 그 옆에 놓자 화면보다 색이 잘 맞아 보였다. 은서는 피식 웃으며 연필을 움직였다. 아이들이 작품을 이해할 때쯤에는 이 그림을 보며 엄마가 왜 토끼를 세공대에 앉혔는지 물을지도 몰랐다.사각, 사각.제도용 연필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 사이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샤워를 마치고 네이비 실크 가운만을 걸친 시후였다. 서늘한 시더우드 향과 남자의 불덩이 같은 체향이 은서의 숨결을 단숨에 집어삼켰다.파앗.은서가 마지막 선을 긋고 연필을 놓자, 시후가 굴러가는 연필을 받아 테이블 구석에 가지런히 놓았다.“앗…… 시후 씨?”은서가 놀라 고개를 들자, 시후의 짙은 눈동자가 맹렬한 갈증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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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기증

유럽에 기증할 작품을 고르는 데는 수상 통보를 받았을 때보다 더 오래 걸렸다. 은서는 금고 안의 보석함을 꺼내놓고 어머니의 작품 목록을 하나씩 대조했다.어머니가 남긴 카멜리아 네크리스와 로열 헤리티지 브로치는 이번에 보내기로 했다. 카멜리아는 동백을 뜻하는 작품명이었다. 결혼식 때 썼던 200캐럿 에메랄드 세트나 퀸즈 헤리티지 프레임과는 별개의 유작이었다.목록을 확인하던 직원이 영구 기증 칸을 짚었다.“이제 대표님 개인 금고로 돌아오지 않습니다.”은서는 빈칸 아래에 놓인 펜을 바로 들지 못했다. 빌려주는 것이었다면 반환 날짜를 적으면 됐을 것이다. 오늘은 그 칸을 비워두어야 했다.그녀는 마지막으로 장식의 뒷면을 돌려봤다. 어머니 이름이 새겨진 작은 글씨를 읽고 나서야 천 위에 다시 놓았다. 어디에 가든 저 이름은 함께 남을 것이었다.은서는 알고 있다고 대답하고도 한동안 상자를 닫지 못했다. 더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 보내겠다고 마음먹는 것과, 자기 손으로 떠나보내는 일은 달랐다.시후가 빈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다시 생각해도 돼.”그녀는 목걸이의 이음새를 마지막으로 살핀 뒤 뚜껑을 닫았다.“가둬두는 것보다 거기서 어머니 이름으로 남는 게 좋겠어요.”작품 사진과 소장 이력을 한 부씩 박물관에 남겼다. 은서는 인계 장부에 서명한 뒤 파리로 향하는 상자의 봉인을 직접 확인했다.***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 유서 깊은 리츠 파리(Ritz Paris) 호텔 그랜드 살롱. 유럽 하이주얼리 협회와 주요 컬렉터가 후원하는 ‘유럽 황실 공식 주얼리 헌정 및 서경-EUN 글로벌 10대 지주사 도약 기념 만찬’이 해외 명품업계의 시선 속에 성대하게 열렸다. 유럽 하이주얼리 협회 관계자와 주요 컬렉터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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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요트

다음 날 밤 11시, 모나코 몬테카를로 앞바다.잔잔한 지중해의 검푸른 파도 위에 유유히 떠 있는 350피트 초대형 슈퍼요트 ‘에밀리아 Ⅱ호’. 사방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밤바람과 은빛 달빛 아래, 은서는 등이 깊게 파인 순백의 실크 백리스 홀터넥 드레스를 입고 최상층 선데크 난간에 서 있었다.파리 만찬을 마치고 모나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출항 여부를 함께 확인했다. 이번에 준비한 에밀리아 Ⅱ호는 이전 요트와 다른 배였다. 시후가 더 넓은 가족 공간을 보여주자 은서는 침실보다 아이들이 머물 좌석부터 살폈다.아이들은 이번 저녁에는 육지의 숙소에서 유모와 쉬고 있었다. 부부도 멀리 항해하지 않고 정박지 주변에 머물기로 했다. 은서는 선장에게 돌아가고 싶을 때 바로 말해도 되느냐고 물었다.“물론입니다.”그 대답을 들은 뒤에야 편하게 난간으로 갔다. 물결이 가까운 곳에서는 아직 몸이 먼저 긴장하는 순간이 있었다. 시후는 그럴 때마다 괜찮냐고 다그치지 않았다. 그녀가 육지의 불빛을 찾으면 같은 방향으로 돌아봤다.“저기 길이 보여요.”은서가 손가락으로 해안선을 짚었다.“오늘 걸어온 길이군.”육지 쪽 불빛이 잠깐 물결에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은서는 그 길 끝에 아이들이 자는 숙소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돌아가면 낮에 무엇을 했는지 물을 수 있고, 아침에는 함께 걸을 수 있었다. 배에 있다는 이유로 생활까지 끊기는 것은 아니었다.“내일도 걸어봐요. 사람들 일어나기 전에.”남자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음 아침을 상상할 수 있으니 바다가 조금 덜 막막했다.스륵.묵직한 카펫을 밟고 다가온 시후가 뒤에서 은서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남자의 단단한 맨가슴이 은서의 헐벗은 등골에 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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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100인

서울 성북동 故 서혜진 박물관 대강당. 유럽 황실 공식 헌정을 성대하게 마치고 금의환향한 은서와 시후를 환영하는 가운데, ‘차세대 K-주얼리 청년 디자이너 100인 유럽 진출 공식 출범식’이 거행되었다. 성북동 박물관과 한남동 ‘EUN’ 글로벌 공익재단이 전액 지원하는 프로젝트였다.은서는 출범식 전날까지 참가자들의 포트폴리오를 읽었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 옆에 아직 손자국이 남은 시제품들이 있었다. 선발 기준을 함께 정할 때 재단 담당자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을 포함하면 홍보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은서는 오래 고민한 뒤 작품과 과정으로 보자고 답했다. 기회가 없어서 한 번도 이름을 내보지 못한 사람이 빠진다면 이 사업을 만드는 이유가 약해졌다.오늘 대기실에서 한 청년이 작은 상자를 꼭 쥐고 있었다. 은서가 인사하자 그가 뚜껑을 열었다. 낡은 금속 조각을 이어 만든 브로치였다.“어머니가 쓰던 장식인데 깨져서요. 새 돌 살 돈이 없어서 계속 이걸 고쳤어요.”은서는 손을 내밀기 전에 만져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장식을 들여다보니 서툰 부분과 집요하게 고친 부분이 함께 보였다.“고친 자리를 전부 숨길 필요는 없겠어요. 이 선은 살려도 좋을 것 같고요.”청년은 자신이 잇댄 부분을 다시 들여다봤다. 은서는 대신 고쳐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느 선을 남길지 결정하는 것까지 그의 작업이었다. 질문이 끝난 뒤 상자를 돌려주자 그는 아까보다 덜 세게 뚜껑을 쥐었다.청년이 다시 물었다. 은서는 다른 방향의 빛을 받아보게 상자를 돌려주었다. 잠시 뒤 그가 설명을 받아 적는 손에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한때, 10억 사기 덫에 걸려 세상 끝으로 내몰렸던 천재 보석 감정사 한은서. 이제 그녀는 단상 위에 서서,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100명의 청년 예술가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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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시총

밤 10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EUN’ 글로벌 타워 30층 펜트하우스 ‘유리궁전’.행사의 피로로 곤히 잠든 쌍둥이를 베이비룸에 뉘어두고, 은서는 얇은 실크 슬립 가운만을 걸친 채 와인 잔을 들고 통유리창가에 서 있었다.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한강의 은빛 물결과 남산타워의 찬란한 조명이 침실 바닥 위로 쏟아져 내렸다.은서는 잔을 들었지만 오래 마시지 못했다. 낮에 받았던 질문 하나가 자꾸 떠올랐다. 연수 뒤 다른 회사로 가도 되느냐는 말. 대답은 어렵지 않았는데, 자신이 같은 질문을 누구에게 했을 때 어떤 말을 들었을지 생각하면 목이 메었다.휴대폰에는 참가자들의 감사 메시지가 계속 도착했다. 은서는 모두 길게 답하려다 잠시 화면을 껐다. 잘해보겠다는 말에 일일이 성공하라고 답할 필요는 없었다. 내일이라도 도움을 청하면 제대로 연결해 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완성된 패밀리 브로치의 견본이 화장대 위에 놓여 있었다. 네 돌 사이에 작은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은서는 손가락으로 그 틈을 만졌다. 손을 옮기면 돌들 사이로 천의 색이 보였다. 은서는 견본을 옆으로 돌려 보고, 그 작은 틈에 빛이 드는 모양을 살폈다.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손을 거두지 않고 시후에게 견본을 보여주었다. 남자가 반짝이는 표면보다 뒷면의 구조를 먼저 살폈다.시후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견본의 한쪽을 받쳐 들었다. 잠금쇠와 보석을 연결한 자리를 들여다보느라 고개가 조금 숙여졌다.“그렇게 뒤를 보는 건 처음이네요.”은서의 말에 시후가 눈을 들었다.“눈에 안 보이는 이음새를 오래 고친다더군.”“제가 한 말을 기억했어요?”시후는 브로치를 손바닥 위에서 돌렸다. 빛이 닿지 않는 뒷면에도 그녀가 손본 자리가 있었다. 은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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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통합

서울 광화문 서경그룹 본사 40층 그랜드 프레스 센터. 해외 200여 개 글로벌 경제지와 방송사 특파원 수백 명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찬 가운데, ‘서경-EUN 통합 지주사 공식 출범 기자회견’이 거행되었다. 메인 전광판에 최종 집계된 통합 시가총액 숫자가 떠오르는 순간, 장내에 숨 막히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서경-EUN 글로벌 통합 시가총액: 221조 8,000억 원 돌파! 대한민국 1위, 글로벌 상위권 기업군 공식 진입!]은서는 무대 뒤에서 지분 변동표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표의 위쪽에는 이번 통합 지주사의 총발행주식이 기준이라고 굵게 적혀 있었다. 예전 서경 지주사의 비율을 그대로 더하는 표가 아니었다.통합 과정에서 기존 주식을 새 지주사 주식으로 바꾸는 절차와 이번에 시후가 가족에게 추가 이전하는 절차가 따로 표시돼 있었다. 은서와 아이들이 이미 가진 몫은 별도 칸에 남았다. 오늘 공표할 25%와 각 7.5%는 시후의 새 지주사 보유분 40%를 나누는 수치였다. 은서는 이전 대상별 수량을 다시 읽어 달라고 했다. 세 사람에게 나눌 주식의 합계가 시후의 보유분과 일치하는지 표시하며 들었다.“이전분만 보여주면 제 최종 지분이 25%로 보이겠어요.”담당자는 앞서 만든 표를 옆에 놓고 화면을 다시 띄웠다. 은서는 두 제목이 분명히 구별되는 것을 확인했다. 발표 뒤에 설명을 덧붙이는 것보다 지금 고쳐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수정된 화면에는 ‘이번 추가 이전 내역’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최종 주주명부도 바로 넘겨 볼 수 있도록 준비돼 있었다. 그녀는 숫자가 크다는 이유로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시후는 그녀가 검토를 끝내고 서류를 덮은 뒤에야 무대 쪽으로 돌아섰다. 그가 준비한 선물이라도 그녀의 확인 없이 확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스리피스 블랙 수트를 입은 강시후 회장이 단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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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서명

집에 돌아오자 은서는 무대에서 신었던 구두부터 벗었다. 시후가 신발을 정리하는 동안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메이크업을 지웠다. 거울 속 평범한 피로가 오늘 처음 본 얼굴처럼 반가웠다.법무팀에서 최종 확인 문서가 도착했다. 낮의 기자회견 전에 합의한 내용을 정식 원본으로 묶은 서류였다. 은서는 회사별로 쓰던 이름이 통합 이후에도 정확히 이어지는지 확인했다. 준비 문서의 서명과 마지막 원본의 서명이 각각 어느 단계인지 담당자에게 되물었다.“이것까지 끝나면 오늘은 그만해요.”시후가 말했다.“네. 그리고 내일부터는 시후 씨가 하던 걸 전부 저한테 보내지 말아요.”“그럴 생각은 없어.”“말해두는 거예요. 회사도 재단도 제가 직접 할 일과 맡길 일이 있으니까.”그는 동의했다. 은서는 그 대답을 듣고도 업무를 나누는 표를 다시 펼쳤다. 내일부터 맡을 일이 어느 쪽인지 직접 짚고 싶었다. 은서는 주주로서의 결정과 개인 업무 일정을 나누어 적은 메모를 옆에 두었다.***밤 11시, 서울 한남동 펜트하우스 45층 마스터 침실.은서가 법무팀이 이전 절차를 확인한 ‘통합 지주사 지분 양도 증서’ 마지막 장에 제 친필 서명을 마쳤다. 서명한 뒤 은서는 펜을 내려놓고 남자를 돌아봤다.“아무것도 안 남기면 불안하지 않아요?”“네게 받은 것이 남아 있지.”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회사 이야기하고 있는데요.”은서는 문서의 첫 장을 다시 봤다. 자기 이름 옆에 남자의 서명이 있었다. 은서는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을 남자가 기억했으면 했다. 서명은 끝났어도 내일부터 어떤 일을 맡을지는 계속 상의해야 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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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브로치

서울 용산구 한남동 ‘EUN’ 글로벌 하이 주얼리 본사 타워 30층 최상층, ‘유리궁전’ 아틀리에. 오늘 밤, 해외 여러 나라 주요 방송사와 인터넷망을 통해 15억 명에게 실시간 동시 생중계될 ‘서경-EUN 통합 220조 사업 출범 감사 갈라 리셉션’. 은서는 세공 테이블 앞에 앉아, 저녁 행사의 최종 마스터피스인 ‘영원한 서약(The Eternal Vow) 브로치’의 마지막 결합 나사를 조이고 있었다.은서는 200캐럿 마터호른 에메랄드와 500억 블러디 핑크 다이아몬드가 이루는 원형을 조명 아래로 옮겼다. 두 돌 사이로 빛이 번져 손등에 작은 색이 맺혔다.영원한 서약은 브로치로도, 그랜드 티아라의 중앙 장식으로도 쓸 수 있게 만든 분리형 작품이었다. 저녁 행사에서는 티아라의 프레임에 장착할 예정이었다. 웨딩 네크리스에서 잠시 옮긴 에메랄드와 앞선 갈라에 사용한 핑크 다이아몬드가 여기에 놓였다. 각각의 빈 프레임에는 이동 날짜와 보관 위치를 적은 표찰을 달아두었다.은서는 결합부를 한 번 풀었다가 다시 잠갔다. 옮겨 쓰기 위해 만든 장치가 실제로도 편해야 했다. 화려한 앞면보다 나사를 조이는 작은 저항에 더 신경이 쓰였다.“이번에는 제가 뒤에서 채워도 되겠습니까?”담당 세공사가 물었다. 은서는 시험용 받침을 넘겼다. 자기 손에만 익은 작품이면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할 날에 곤란해진다. 세공사가 잠금 위치를 확인하고 손을 뗐다. 두 사람이 같은 부분을 보고 웃었다.완성에 가까워진 작품을 앞에 두고 은서는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이 작품이 앞으로도 여러 형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벅, 벅.묵직한 구두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블랙 실크 셔츠 차림의 시후가 다가왔다. 남자의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은서의 등 뒤를 감싸 안으며,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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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출범

저녁 8시, 한남동 ‘EUN’ 글로벌 타워 그랜드 볼룸.해외 여러 나라 15억 시청자에게 실시간 동시 생중계되는 통합 지주사 출범 감사 리셉션. 각국 국가수반과 왕실 대표, 글로벌 100대 기업 총수 수백 명이 운집한 가운데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졌다. 메인 레드카펫의 문이 열리고, 샴페인 골드 실크 드레스 위에 ‘에메랄드-핑크 다이아몬드 그랜드 티아라’를 쓴 한은서와, 흐트러짐 없는 블랙 턱시도의 강시후가 쌍둥이 도윤과 서아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카메라 플래시가 잇따라 터졌다. 단상으로 가는 통로 양쪽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시후는 마이크 앞에 선 뒤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은서의 티아라 중앙에는 낮에 완성한 영원한 서약이 장착돼 있었다. 브로치로 사용할 때의 핀은 분리해 보관했다. 시후는 입장 전에 결합부를 살펴주었고, 그녀는 고개를 움직여 무게가 쏠리지 않는지 확인했다.두 아이는 단상 가까이에서 유모에게 갔다. 도윤이 손을 놓기 싫어하자 시후는 무릎을 굽혀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서아는 은서의 드레스를 한 번 만지고 유모 쪽으로 돌아섰다. 부부는 아이들이 편히 앉은 것을 확인한 뒤 마이크 앞으로 갔다.이번 행사는 앞선 도약 갈라와 달리 통합 법인이 출범한 뒤 감사와 운영 방향을 알리는 자리였다. 은서는 연설 순서 뒤에 실제 제작자와 재단 관계자들의 소개가 이어지는지 확인했다.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 회사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한때, 내 세계는 어둠 속에 갇힌 ‘창문 없는 방’이었습니다. 오만과 집착으로 가득 찼던 나를 구원하고, 내 심장에 사방으로 열린 투명한 창문을 선물해 준 사람은 오직 한은서 회장이었습니다.”순간, 시후가 해외 카메라 앞에서 은서를 향해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오늘 해외 앞에 선언합니다. 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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