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 스위스 몽트뢰 레만 호숫가 프라이빗 정원.만년설이 덮인 알프스 영봉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으며, 잔잔한 호수 수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은서는 정원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자신의 아랫배를 가만히 어루만졌다.정원에 나오기 전 시후는 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 묻지 않았다. 바람이 차가우니 겉옷을 챙기라는 말만 했다. 은서는 혼자 걸어 나와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꽃의 이름을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보석을 디자인할 때 참고했던 모양도 실제로 보니 달랐다. 잎이 완벽하게 대칭인 꽃은 드물었다. 은서는 구겨진 꽃잎 하나를 보며 어머니가 일부러 남긴 세공 자국을 떠올렸다.시후가 어제는 기다려 줬어도 오늘은 또 불안해할 수 있었다. 은서 자신도 열린 문 앞에서 자꾸 멈췄다. 꽃잎에서 눈을 뗀 뒤에도, 문손잡이를 잡고 망설였던 아침 일이 떠올랐다.그럴 때마다 어디가 불편한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서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숨을 쉬었다. 혼자 나와 앉아 있어도, 집으로 돌아오라는 소리가 뒤따라 들리지는 않았다.임신 6주 차.심했던 입덧이 가라앉고, 두 개의 작은 심장이 뛰고 있는 기적 같은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사각, 사각.잔디를 밟는 발소리와 함께, 시후가 따스한 캐시미어 숄을 들고 다가와 은서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검은색 벨벳 상자. 시후가 상자를 열자, 마터호른 백금으로 정교하게 깎아낸 한 송이 순백의 백합 브로치가 모습을 드러냈다.시후가 열린 상자를 은서의 앞으로 내밀었다.은서는 브로치를 손에 올려놓았다. 잠금 장치를 만지며 시후를 봤다.“이번에는 제가 달아 볼게요.”브로치 뒤의 핀이 손끝에 닿았다. 은서는 옷감을 접어 뒷면을 받쳤다. 시후의 손이 잠깐 움직였지만 그녀가 해낼 때까지
Last Updated : 2026-10-02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