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 ‘빛의 아틀리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통유리창 너머 한강에는 불빛이 길게 번졌고, 천장 채광 돔에는 서울의 밤하늘이 보였다. 아이들은 베이비룸에서 축제의 피로를 잊은 채 잠들어 있었다.은서는 얇은 순백 실크 슬립만을 걸친 채, 45층 빛의 아틀리에 한가운데 서 있었다. 테이블 위 투명 방탄 아크릴 큐브 안에는 한때 족쇄였던 ‘백금 앵클릿’이 영구히 잠들어 있었고, 은서의 발목에는 영원한 사랑과 헌신의 증표인 ‘핑크 다이아몬드 발찌’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축제에서 받은 작은 꽃이 가방 안에 남아 있었다. 은서는 물컵에 줄기를 담가 선반에 놓았다. 스위스에서 가져온 자갈 두 개 옆이었다. 둘 다 값비싼 보석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자기 손으로 찾아 건넨 것들이었다.창가에 서니 성수동에서 비를 맞던 밤이 떠올랐다. 그때 은서는 잃어버린 돈을 되찾으면 자신의 삶도 되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돈을 갚고, 가문을 벗어나고, 새로운 이름으로 일을 하게 된 뒤에도 해야 할 말은 남아 있었다.싫다는 말. 아프다는 말. 혼자 있고 싶다는 말.사랑한다는 말도 그 말들을 할 수 있게 된 뒤에야 제 모양을 찾았다. 은서는 열린 문을 바라봤다. 남자가 들어오면 오늘 그림 하나를 더 그려도 되겠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먼저 원하는 것을 말하고, 함께 보낼 시간을 고를 것이다.큐브 안의 앵클릿을 잠깐 보고 시선을 거뒀다. 매일 들여다볼 필요는 없었다. 지금 발목에 있는 장신구는 자기 손으로 채웠고, 원하면 오늘 밤에도 벗어둘 수 있었다.벅, 벅.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셔츠 단추를 세 개 푼 시후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남자의 긴 두 팔이 은서의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며, 제 뜨거운 맨가슴 위로 밀착
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