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Chapter 31 - Chapter 40

150 Chapters

제31화. 지분

다음 날 새벽 1시, 한남동 펜트하우스 45층 ‘창문 없는 방’.빗소리도 들리지 않는 밀실에서 듀얼 모니터만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태강그룹 강현석이 기습 소집한 임시주총의 지분 현황과 붉은 경고 표시가 함께 떠 있었다.[서경그룹 적대적 M&A 지분율: 태강 및 우호 사모펀드 42% vs 강시후 부사장 38%. 격차 4%p.]시후는 지분표를 내려다봤다. 격차는 4%p. 오늘 오전 9시까지 이 차이를 뒤집지 못하면 강현석에게 그룹 경영권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은서는 표의 숫자보다 그 밑의 이름들을 먼저 읽었다. 성북동 식탁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사람도 있었다. 그날의 지지와 오늘의 표는 다르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 났다.“가압류한 15%로는 안 돼요?”“그건 서경물산 지분이다. 지금 표를 세는 회사와 달라.”시후가 표를 나눠 보여줬다. 은서는 종이 여백에 회사 이름을 각각 적었다. 같은 서경이라는 말이 붙었다고 한데 더할 수는 없었다.시후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그는 은서에게 화면을 맡기고 짧게 통화했다. 넘어오겠다는 사람과 아직 결정을 못 했다는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은서는 모르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표시를 했다.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어머니에게서 받은 자료를 다시 꺼낸 것은 그때였다. 유작의 각인 사진 중 거래 번호와 맞지 않던 부분이 있었다. 은서는 사진 옆에 실제 에메랄드를 놓았다. 번호가 틀린 게 아니라,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루페를 들자 시후가 말을 멈췄다. 은서는 조명을 반대편으로 옮겼다. 아래쪽 프레임에 가려졌던 선이 한 칸 더 드러났다. 수첩에 옮겨 적던 연필이 종이 끝에서 멎었다.“오빠, 여기 좀 보세요.&rdquo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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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주총장

오전 8시 30분, 광화문 사거리 대로변.주총장인 서경그룹 본사를 불과 500m 앞둔 교차로에서, 25톤 덤프트럭 한 대가 신호를 무시하고 시후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향해 돌진해 왔다.끼이이익-!시후는 은서 쪽으로 팔을 뻗으며 핸들을 꺾었다. 차체가 옆으로 미끄러져 충돌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쿵!그 순간, 골목 어귀에서 검은 승합차 두 대가 차선을 막으며 멈춰 섰다. 태강 측 하청업체 직원과 사설 경호원들이 내려와 차량 주변을 둘러쌌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로 촬영했고, 다른 사람은 ‘채권 회수’라고 적힌 서류를 흔들며 문을 열라고 요구했다.강현석이 노린 것은 주총장 입장을 늦추고, 은서가 가진 의결권 서류를 빼앗거나 무효 논란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놓고 살인을 지시할 이유는 없었다. 10분만 지연시켜도 표결은 시작될 수 있었다.은서의 어깨가 안전벨트에 걸렸다. 눈앞이 흔들리는 동안에도 서류 가방은 무릎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앞 유리 너머로 회사 건물이 보였다. 밤새 준비한 곳이 저기인데, 길 한복판에서 멈춰 있었다.“다쳤나.”“아니요. 가방도 있어요.”대답하고 나서 은서는 안전벨트를 내려다봤다. 쇄골을 누르는 띠가 아직 팽팽했다. 저걸 풀면 좀 편해질 것 같았지만 손대지 않았다. 차가 다시 움직일 수도 있었다. 손은 가방 위에 그대로 얹었다.시후가 창밖을 한 번 보고 휴대폰을 건넸다. 은서는 받자마자 윤 실장에게 위치를 알렸다. 통화 중이라고 표시된 화면이 오래 가기를 바랐다. 바깥에서 문을 잡아당기는 소리가 났다.“서류 내놔!”은서는 가방을 발밑 안쪽으로 밀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이 자기 목숨뿐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가방을 주면 놓아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운전석까지 둘러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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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의사봉

“의사봉 내려놓으세요. 아직 제 의결권은 확인하지도 않으셨잖아요.”강현석은 의사봉을 쥔 손을 내리지 못했다. 문 쪽으로 돌아앉은 주주들과 기자들 뒤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은서는 그쪽에 답하는 대신 현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피 묻은 수트 차림으로 압도적인 살기를 뿜어내며 서 있는 강시후, 그리고 그의 곁에서 순백의 수트를 차려입고 결연한 눈빛으로 선 한은서.“너, 너희들이 어떻게……! 아스팔트에서 분명……!”강현석이 사색이 되어 말을 잇지 못하자, 은서가 성큼성큼 단상을 향해 걸어 올라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랙스 밑단 사이로 백금 앵클릿이 찰랑이며 차가운 빛을 발했다. 은서는 가슴팍에서 꺼낸 황금빛 서류철을 강현석의 가슴팍에 툭 던졌다.서류철이 펼쳐지고, 전면 스크린에는 스위스 연방은행 신탁 담당자와의 실시간 보안 영상이 연결되었다.— [스위스 연방은행 취리히 본점 공증: 故 서혜진의 적통 상속인 한은서의 10% 우선주 실물 의결권 확인. 본 의결권은 강시후 총괄 부사장에게 전량 위임되었음을 확인합니다.]강현석이 연결을 끊으라고 외쳤다. 은서는 화면을 내려다보던 진행 직원에게 말했다.“확인 절차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저분의 직함과 제출한 서류 번호도 기록하시고요.”“갑자기 나타난 서류를 어떻게 믿나!”강현석이 소리쳤다. 은서는 가방에서 접수 확인 자료를 꺼냈다.“갑자기 낸 게 아니에요. 사본은 미리 보냈어요. 확인을 안 하신 건지, 못 하게 하신 건지 저도 알고 싶네요.”진행 직원이 자신이 받은 서류 묶음을 꺼냈다. 은서는 담당자를 몰아붙이지 않고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중간에 끼어 있던 접수증이 펼쳐지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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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공표

주총이 끝난 뒤에도 은서는 한동안 회의장을 떠나지 못했다. 확인 서류에 서명하고 같은 질문에 몇 번씩 대답했다. 서류 가방에서 종이를 꺼낼 때마다 도로에서 붙잡고 있던 감각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디자인 전략실로 돌아오자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서는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그러다 제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을 봤다. 누군가 따뜻한 물을 받아 놓았다.“커피 드시면 손이 더 떨릴 것 같아서요.”직원의 말에 은서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이 떨리는 걸 들킨 것이 부끄럽다가, 알아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고마워요. 조금만 쉬었다 할게요.”앉아 물을 마시자 갑자기 배가 고팠다. 밤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직원이 간단한 음식을 가져다주겠다고 하자 은서는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았다.화면 속 뉴스에는 주총 결과가 반복해서 나왔다. 은서는 소리를 끄고 오늘 밀린 도면을 열었다. 같은 선을 두 번 긋고서야 일을 계속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일을 저장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해가 진 뒤 부사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은서는 빈 컵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남은 일이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먼저 복도로 나섰다. 퇴근하는 직원들의 인사에 한 사람씩 답하며 걸었다.***밤 10시, 광화문 서경그룹 본사 32층 부사장실.지이잉-전자동 암막 블라인드가 통유리창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화려했던 서울의 밤 풍경이 한순간에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철컥.이중 방음 도어의 잠금장치가 차갑게 맞물리며, 낮의 치열했던 전쟁터는 순식간에 둘만의 서늘하고 농밀한 밀실로 변했다.“오빠…… 드디어 끝났어요.”은서가 긴장이 풀린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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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껍데기

저녁 7시, 서울 성북동 서경그룹 본가 그랜드 볼룸.국내외 100여 개 주요 방송사와 언론사 취재진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회의장 안에는 수백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강문혁 명예회장이 파들거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오늘 이 자리를 통해 발표할 가문의 결단이 있습니다. 서경그룹 디자인 전략실 한은서 팀장을 이 시각부로 가문 호적에서 영구 제적하고, 해외 지사로 강제 영구 추방을……”명예회장의 선언이 끝나기도 전이었다.쿵-!그랜드 볼룸의 흑단나무 양문이 거칠게 열렸다. 순식간에 카메라 셔터 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어버렸다. 버진로드 같은 레드카펫 위로, 스리피스 블랙 턱시도를 입은 강시후가 짙은 에메랄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한은서의 손을 깍지 낀 채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은서의 드레스 트임 사이로, 조명 아래 백금 앵클릿이 서늘하고도 찬란하게 번뜩였다.“누, 누가 저 불효막심한 놈들을 들여보냈어!”강 명예회장이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노성을 터뜨렸지만, 시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 시후의 큰 손이 명예회장의 손에 쥐여 있던 제적 성명서를 가차 없이 낚아챘다.찌이익-!수백 대의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성명서가 두 동강으로 찢겨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시후가 마이크를 잡고, 은서의 가녀린 어깨를 제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남자의 단단한 손바닥이 은서의 허리를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은서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봤다. 자신의 이름 아래로 희망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읽어본 적도 없는 문서에서 자신은 해외 근무를 원하고 있었다.“저는 신청한 적 없어요.”은서가 먼저 말했다. 앞줄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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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홍콩

새벽 1시, 한남동 펜트하우스 45층 마스터 스튜디오.바깥에서는 강시후의 발언을 놓고 기사가 쏟아졌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45층 스튜디오에서는, 은서가 종이에 연필을 긋는 소리만 났다. 이 시간만큼은 아무 질문도 받고 싶지 않았다. 은서는 순백의 실크 로브를 걸친 채, 대형 제도판 앞에 앉아 새로운 독자 브랜드 ‘EUN’의 론칭 주얼리 컬렉션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첫 장에는 이름만 적혀 있었다. EUN. 세 글자를 쓰고 나니 그 아래 어떤 선을 그어야 할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누군가의 유작을 되찾고 감정하는 일과 자신의 작품을 내놓는 일은 달랐다. 은서는 어머니의 도면을 참고하려다 덮었다. 이음새를 마무리하는 법은 배울 수 있어도 같은 꽃을 다시 그릴 필요는 없었다.처음 그린 장식은 너무 무거워 보였다. 두 번째는 어디선가 본 모양이었다. 은서는 종이를 찢지 않고 옆으로 밀었다. 틀린 것을 남겨두면 무엇을 바꾸려 했는지 잊지 않을 수 있었다.손가락 끝의 검은 연필 자국을 문지르며 세공 도구를 정리했다. 내일은 직원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부사장의 지시로 진행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으로 시작하는 일이라고 말하려면, 왜 이 선을 골랐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전화 화면이 켜졌다. 기자의 메시지였다. 은서는 답하지 않고 화면을 뒤집었다. 지금은 어떤 관계냐는 질문보다 이 프레임이 견딜 수 있느냐는 질문이 더 절실했다.두 선을 연결하자 조금 마음에 드는 형태가 나왔다. 은서는 고개를 숙여 가까이 봤다. 오랜만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잊고 있었다.종이를 돌려 반대쪽에서도 봤다. 한쪽이 무거워 보여 선을 조금 덜어냈다. 누군가 예쁘다고 해주기 전에도 바꿔야 할 곳을 알 수 있었다. 은서는 그 감각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다.스케치북 위로 연필을 놀리던 은서의 귓가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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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핑크 다이아몬드

바스락-시후가 홍콩발 초대장을 구겨 쥐었다. 종이 접히는 소리가 은서의 책상 너머까지 났다. 주소가 적힌 부분이 손가락에 가려져 있었다. 장신을 올려다보던 은서는 그의 손에 눌린 초청장으로 눈을 내렸다.“신라호텔 프라이빗 스위트룸에서 단둘이 독대?”시후의 짙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위험한 불꽃이 일렁였다. 남자의 단단한 손이 은서의 가녀린 턱끝을 단단히 쥐어 올렸다.“빅터 첸 그 늙은 여우 새끼가 감히 누구를 호텔 방으로 부르는 거지? 죽고 싶어 환장했군.”“오빠, 턱 놔주세요.”은서는 물러서지 않고 시후의 서늘한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빅터 첸이 가져온 건 500억 가치의 원석이에요. 무엇보다 어머니가 생전 홍콩에 남기셨다는 마지막 보석의 단서가 들어있어요.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해요.”은서의 결연한 눈빛에 시후의 턱관절이 굳어졌다. 남자는 이를 악물며 은서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낮게 으르렁거렸다.은서는 구겨진 초청장을 그의 손에서 가져왔다. 찢어지지 않게 천천히 당겼다.“제가 숨겼어요? 먼저 보여드렸잖아요.”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숨기지 않은 걸로 충분하다는 건가.”“함께 확인하자는 거예요. 싫으면 뭘 확인해야 안 위험한지부터 말해 주세요.”초청장 한쪽은 시후의 손에 구겨져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은서는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러 펴면서 기다렸다. 보석을 볼지 말지 자신이 정하기도 전에 종이부터 망가지는 일이 싫었다. 이번에는 필요한 답을 듣고 움직일 것이다.시후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은서는 접힌 부분을 폈다. 주소와 시간, 원석의 이름이 다시 보였다.“이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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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질투

쾅-!스위트룸의 이중 연결 도어가 시후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경첩째 뜯겨 나가며 날아갔다. 순식간에 거실 안의 공기가 찢겨 나갔다.파앗!시후는 빅터 첸과 은서 사이로 뛰어들었다. 빅터의 손이 그녀에게 닿기 전에 그 손목을 낚아챘다.우드득!뼈마디가 삐걱거리는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빅터 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크윽……!”빅터 첸의 사설 경호원들이 총기를 꺼내려던 순간, 시후의 등 뒤에서 들이닥친 윤태준 실장의 특수 경호팀이 흉기 끝을 겨눴다. 그들의 미간에 레이저 조준점이 일제히 떠올랐다. 시후는 빅터의 눈을 놓지 않았다. 경호원들이 총을 내밀어도 붙잡은 손목을 놓아줄 기색이 없었다.“내 허락 없이 한은서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첸 그룹 전체를 오늘 밤 홍콩 증시에서 지워버리겠다고 경고했을 텐데.”시후의 서늘한 목소리에 빅터 첸은 식은땀을 흘리며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역시 소문대로 지독한 폭군이시군, 시후 부사장. 시험해 본 것뿐이오.”은서는 보석 케이스를 먼저 닫았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통에 테이블이 밀렸기 때문이었다. 뚜껑을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이건 돌려드릴까요?”그녀가 묻자 빅터가 은서를 봤다. 시후가 여기서 끝내려는 듯했지만 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감정만 의뢰한 건지, 디자인까지 맡기는 건지 분명히 해주세요. 오늘 제가 확인한 내용도 문서로 남겨야 해요.”빅터는 아픈 손목을 감싸 쥐고 비서를 불렀다. 준비해 온 계약서가 있었다. 은서는 마지막 장부터 펼치지 않고 첫 장부터 읽었다.디자인 권한과 보관 책임, 경매를 진행할 경우의 조건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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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금고

밤 11시, 광화문 서경그룹 본사 지하 5층 특수 방탄 금고실.두께 1m의 삼중 티타늄 방폭 도어로 차단된 금고실 한가운데, 은서는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낀 채 제도용 확대경 아래에서 500억 가치의 ‘블러디 핑크 다이아몬드’ 메인 프레임을 정밀 세공하고 있었다.오후에 도굴단 첩보를 전달받은 뒤 작업 장소가 이곳으로 바뀌었다. 다른 직원들은 외부에서 도면을 확인했고, 실물에 손대는 일만 은서가 맡았다. 보석을 맡아온 이상 작업을 완전히 중단할 수도 없었다.은서는 들어올 때 보관 기록에 직접 서명했다. 도구 수를 확인하고 인수 사진과 원석을 대조했다. 세공을 시작하기 전 오늘 어디까지 할지도 적어뒀다. 마음이 급하다고 중요한 부분을 한꺼번에 손보면 되돌릴 수 없었다.작업대 위에는 프레임 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중앙 보석을 떼어냈다가 다른 장신구에 옮길 수 있는 구조였다. 티아라 전체를 녹이지 않고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만들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이니셜과 각인이 있는 부분에는 손을 대지 않도록 선을 그어뒀다.“이쪽은 나중에 확인.”핀셋을 내려놓자 확대경 밖의 방이 어둡게 느껴졌다. 은서는 눈을 감았다 떴다. 같은 부분만 오래 보면 실수를 못 알아볼 때가 있었다. 작업대 옆의 인수 사진으로 시선을 옮겨 오늘 건드린 범위를 다시 짚었다.프레임의 한쪽에 표시한 선만큼 진행돼 있었다. 더 욕심내지 않고 여기서 멈춰도 되는 단계였다. 은서는 확인한 곳에 연필로 작은 점을 찍었다.은서는 적어 둔 메모 옆에 표식을 붙였다. 가격보다도 원석 안에 남은 흔적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는 그 흔적을 지우려고 돈을 쓰고 있었다.경호팀에서 상태를 확인하는 연락이 왔다. 은서는 예정한 부분까지만 작업하고 나가겠다고 답했다. 방 안에 혼자 있어도 문밖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시후가 자신을 믿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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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과거

“크아아악!”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나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후는 멈추지 않고 사내의 턱관절에 팔꿈치를 내리꽂았다.우두둑!턱뼈가 함몰되며 리더가 피를 뿜고 쓰러지자, 뒤편에서 흉기를 들려던 세 놈에게 시후가 차례로 발을 뻗었다. 구두 끝이 그들의 관절을 짓눌렀다. 비명과 유혈이 티타늄 바닥을 적셨다. 단 20초 만에 5명의 최정예 사설 경호원이 뼈마디가 부러진 채 나뒹굴며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쾅-!외부 셔터가 뜯겨 나가며 윤태준 실장과 경찰특공대가 들이닥쳐 괴한들을 질질 끌어냈다. 강제 배기 장치가 돌아가자 실내의 가스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테러 충격으로 인한 중앙 전산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금고실 3중 차단벽이 다시 쾅 닫히며 30분간의 자동 락다운이 발동되었다.치지직-은서는 멎은 표시등을 올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열려 있던 통로가 다시 벽이 돼 있었다.“밖에는 연락돼요?”시후가 인이어를 확인했다. 윤 실장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강제 배기는 작동하고 있으며 해제 절차를 밟고 있다는 보고였다.은서는 그 말을 직접 듣고 싶어 시후에게 가까이 갔다. 그가 스피커를 켜자 이번에는 그녀도 들을 수 있었다. 다친 직원이 있는지 묻고 나서야 작업대에 기대 앉았다.장갑 끝이 찢어져 있었다. 은서는 그것을 벗어 한쪽에 놓았다. 손바닥에 밴 땀이 공기를 만나 식었다. 테이블 아래에는 자신이 쓴 메모가 떨어져 있었다. 이쪽은 나중에 확인. 몇 분 전에 적은 글씨가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느껴졌다.“보관함은 건드리지 마. 사람들 들어오면 먼저 확인시켜.”은서는 손을 거뒀다. 흩어진 물건은 제자리에 넣지 않고 남겨뒀다. 들어올 사람들이 누가 무엇을 건드렸는지 확인해야 했다.그제야 시후의 옷에 묻은 피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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