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Chapter 11 - Chapter 20

150 Chapters

제11화. 창문 없는 방의 전쟁

콰앙-! 콰앙-!펜트하우스 45층 깊숙한 ‘창문 없는 방’의 육중한 방음 도어가 유압 절단기의 굉음과 함께 요동쳤다. 철판이 비틀리는 섬뜩한 파열음 너머로, 조수현의 표독스러운 고함이 복도를 찢었다.“당장 문 부숴! 서경그룹 후계자가 집무실에 의붓여동생을 감금하고 추잡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 기자들에게 라이브 스트리밍 당장 연결해!”은서는 소파에서 문을 바라봤다. 조수현은 가문의 이름이 망가지는 것까지 감수할 작정이었다. 문만 열리면 자신과 시후의 모습이 그대로 기자들에게 넘어갈 터였다.“오, 오빠…… 어떡해요…… 문이 뚫리면……!”은서가 떨리는 손으로 시후의 셔츠 자락을 붙잡으려던 찰나였다. 시후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셔츠 소매의 커프스링크를 풀고 있었다. 남자의 깊고 어두운 흑요석 눈동자 안에서, 인간의 이성이 증발한 맹수의 살기가 번뜩였다.“떨지 마라.”시후가 몸을 숙여 은서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은서의 새하얀 이마에 뜨거운 입술을 깊게 묻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문 안쪽 잠금장치를 걸고 절대 나오지 마.”“오빠, 혼자 나가면 위험해요! 밖에 30명이 넘게……!”“은서야.”시후의 낮고 서늘한 음성이 은서의 말을 가로막았다.“감히 내 새장에 발을 들인 버러지들이 어떻게 찢겨 나가는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기다려라.”은서는 책상 위 인터폰으로 손을 뻗었다. 시후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봤다.“열지 말라고 했다.”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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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내일은

철컥.피비린내 나는 복도의 소음이 차단되고, 시후가 다시 ‘창문 없는 방’으로 들어섰다. 소파 구석에서 숨을 죽인 채 떨고 있던 은서가, 문이 열리자마자 튕겨 나가듯 달려왔다.“오빠……!”은서의 시선이 시후의 찢겨진 블랙 셔츠와 소매에 묻은 붉은 피에 닿는 순간,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경악과 눈물이 차올랐다.“피…… 피가 나잖아요! 다친 거예요? 어서 구급상자……!”은서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시후의 상체를 더듬으려 하자, 시후의 커다란 손이 은서의 떨리는 두 손을 허공에서 단단히 낚아챘다. 남자의 거칠고 뜨거운 손바닥이 은서의 손등을 으스러져라 감싸 쥐었다.“내 피가 아니다.”시후의 낮고 긁히는 중저음이 은서의 귓전을 때렸다.“버러지들의 더러운 피가 튄 것뿐이야.”격투의 여열과 맹렬한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시후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은서의 가녀린 어깨와 쇄골 위를 위험하게 훑어내렸다. 시후는 거칠게 셔츠 단추를 뜯어내듯 벗어던졌다. 조각 같은 활배근과 복근 위로 흉터와 땀방울이 뒤엉켜 성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따라와.”시후는 은서의 손목을 쥔 채 마스터 베드룸 안쪽의 프라이빗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촤아아아-!천장 매립형 레인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앗……!”시후의 힘에 이끌려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선 은서의 머리칼과 옷 위로 차가운 물벼락이 쏟아졌다. 순백의 팬츠 수트와 실크 블라우스가 물에 흠뻑 젖어 들며, 은서의 가녀린 허리선과 뽀얀 살결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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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내 여자

오전 11시, 서울 성북동 서경그룹 본가 그랜드 볼룸.은서는 대기실 문틈으로 연회장을 봤다. 전날 밤 조사받던 사람들이 하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변호인들과 함께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는 보고를 듣고도 믿기지 않았는데, 조수현은 이미 샴페인 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불편하시면 입장 순서를 바꾸겠습니다.”윤 실장이 물었다. 은서는 가방 속 태블릿을 확인했다. 밤새 받은 자료와 자신이 준비한 화면이 차례대로 열렸다.“그대로 할게요. 저 사람들은 제가 못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잖아요.”윤 실장이 연결 장치의 표시등을 확인해 줬다. 은서는 화면을 잠갔다가 제 손으로 다시 열었다. 어머니 이름이 가장 먼저 보였다. 잠깐 그 글자에 손끝을 댔다가, 밖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태블릿을 가방으로 돌려놓았다.거울 속 은서는 잔뜩 차려입고 있었다. 드레스는 약혼식에 어울렸지만 그 안에 넣어 온 서류는 아니었다. 은서는 귀걸이 잠금쇠를 다시 눌렀다. 사소한 것부터 확인해야 손이 덜 떨렸다.문 너머에서 음악이 시작됐다. 윤 실장이 입장할 때가 됐다는 듯 한 발 물러났다.크리스탈 샹들리에의 눈부신 조명 아래, 정재계 거물들과 30여 개 언론사 취재진이 연회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상석에는 굳은 표정의 강문혁 명예회장, 그리고 어젯밤 펜트하우스 습격의 상흔을 감추기 위해 짙은 화장을 떡칠한 조수현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깁스를 한 채 살기 어린 눈빛으로 입술을 씹고 있는 태강그룹 강현석 상무가 자리했다.“시간이 되었습니다. 서경그룹과 태강그룹의 백년대계를 약속하는 정략 약혼 서약식을 거행하겠습니다.”사회자의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그랜드 볼룸의 흑단나무 양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순식간에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며 장내가 숨죽였다.버진로드 위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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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내가 선택한 출국

성북동 저택의 파혼 선언 직후, 서울 도심은 발칵 뒤집혔다. 정재계의 판도를 뒤흔든 대형 스캔들에 수백 명의 기자들과 파파라치가 서경그룹 본사와 펜트하우스를 에워쌌다. 하지만 시후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은서를 김포공항 비즈니스 전용 터미널로 직행시켰다.출국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은서는 비엔날레 사무국에 회신을 보냈다. 감정 절차와 작품 이력 자료를 요청하는 짧은 메일이었다. 전송 표시가 뜨는 것을 보고 나서 가방을 무릎에서 내려놓았다.시후가 옆에서 물었다.“그렇게 급한가.”은서는 메일에 첨부된 보석 사진을 내려다봤다. 어머니 작품을 알아보는 딸이 아니라, 훼손이나 바꿔치기를 가려낼 감정사로 서야 했다. 그 생각을 하자 밤새 자신을 따라다니던 기사 제목이 잠시 잊혔다.“가서는 감정해야 하니까요. 그냥 어머니 물건 보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쉬면서 봐도 된다.”“다들 오빠 때문에 초청받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해요.”시후가 말을 멈췄다. 은서는 대답을 들으려 그의 얼굴을 살피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작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잘못된 판정을 내려도 곤란했다. 그들이 딸에게 바라는 것은 추억이 아니라, 다른 감정사도 납득할 근거여야 했다.공항에서 윤 실장이 여권과 일정을 돌려줬다. 은서는 자기 여권부터 직접 챙겼다. 시후가 한 번 내려다봤으나 빼앗지는 않았다.전용기에 오르기 전 은서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서울 뉴스에는 아직 자신의 얼굴이 떠 있었다. 화면을 끄고 사무국에서 보낸 파일을 열었다. 지금은 그쪽을 읽고 싶었다.활주로 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서 있던 서경그룹의 최고급 전용기 걸프스트림 G650ER의 트랩이 육중하게 닫혔다.쿠우우웅-!제트 엔진의 묵직한 굉음과 함께 기체가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라 3만 피트 상공의 밤하늘로 솟구쳤다. 기내 안쪽, 외부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마스터 베드룸. 은서는 샴페인 골드빛 실크 슬립을 입은 채, 침대 헤드보드에 기댄 채 창밖의 짙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때, 침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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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황실의 에메랄드

파리 중심부 방돔 광장, 오랜 전통의 리츠 파리 호텔 프라이빗 펜트하우스. 스위트룸에 들어서자마자 시후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방돔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통유리창의 두터운 벨벳 암막 커튼을 전부 쳐버리는 것이었다.촤아악-!파리의 화려한 햇살과 낭만이 일순간 차단되고, 서울의 ‘창문 없는 방’과 완벽히 똑같은 칠흑 같은 암흑과 정적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오빠…… 파리까지 와서 커튼을 왜 다 닫아요?”은서가 놀란 눈으로 묻자, 시후는 천천히 다가와 은서의 턱을 단단하게 쥐어 올렸다. 남자의 깊은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푸른 불꽃처럼 타올랐다.“파리에 왔다고 해서 내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라.”시후의 서늘한 숨결이 은서의 입술을 스쳤다.“이곳에서도 넌 내 숨결 아래에서만 숨 쉬는 거다, 은서야.”시후는 은서의 백금 앵클릿을 손끝으로 가볍게 튕기며 차가운 소유욕을 각인시켰다.은서가 한 발 물러서려 하자 시후의 손이 허리를 잡아챘다.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은서의 목선을 비췄다. 시후는 그 빛을 싫어하는 듯 몸을 더 밀착시켰다.“공항에서 그 남자가 널 봤어.”“인사한 것뿐이에요.”“그 눈은 인사가 아니었다.”시후의 입술이 은서의 입술을 삼켰다. 비행기에서 이미 한 번 비운 몸인데도, 남자의 키스는 더 거칠었다. 혀가 깊게 들어와 은서의 숨과 침을 한꺼번에 가져갔다. 손이 치마 밑으로 들어가 팬티를 옆으로 밀어젖히고, 아직 미처 가라앉지 않은 틈새를 두 손가락으로 벌렸다.“하아…… 오빠, 지금은…… 일정 확인해야…….”“확인은 내가 한다. 넌 여기 서서 받아.”시후는 은서를 커튼 쪽으로 돌렸다. 손은 벽이 아니라 두꺼운 벨벳을 짚게 했다. 뒤에서 바지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은서의 엉덩이 틈에 닿았다가, 이미 젖어 있는 입구를 찾아 단숨에 밀어 넣었다.“읏——!”은서가 커튼을 움켜쥐었다. 시후는 허리를 깊게 붙여 전부 넣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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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추격전

탕-! 탕-!그랑 팔레 지하 비상 통로를 울리는 총성이 축축한 공기를 찢었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어둠 속에서, 시후는 은서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단 한 걸음의 흔들림도 없이 복도를 돌파하고 있었다. 은서의 손에는 혼란 속에서 쇼케이스 밖으로 꺼내 품에 안은 100캐럿 ‘황실의 에메랄드 티아라’가 묵직하게 들려 있었다.구두 뒤축이 벗겨질 듯 흔들렸다. 은서는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접어 티아라의 아래 프레임을 받쳤다. 달릴 때마다 장식이 가슴에 부딪혔다. 조금 전 감정대에서 들고 있던 그대로라 보관함도 없었다.“넘어져도 그걸 먼저 잡을 생각은 하지 마.”시후의 말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은서는 숨이 차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남긴 물건을 놓지 않는 것과 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계단이 먼저 나왔다.시후가 난간을 짚고 속도를 늦췄다. 은서는 발끝으로 다음 계단을 더듬었다. 문 안쪽에서 사람이 몰려 나오며 통로가 막혔다. 윤 실장이 앞에서 대피 방향을 가리켰고, 시후는 은서를 벽 쪽으로 붙였다.울고 있는 관람객이 옆을 스쳐 갔다. 은서는 그 사람에게 길을 내주며 티아라를 더 안쪽으로 당겼다. 화려했던 전시장 바닥이 미끄러운 비상계단으로 바뀌는 데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마지막 철문을 지나자 찬 공기가 들어왔다. 은서는 겨우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켰다. 시후가 그제야 귀에 손을 댔다.은서는 한 손을 잠깐 펴 보았다. 프레임을 받친 자리만 붉게 눌려 있었다. 놓쳤을까 봐 계속 조였던 손이었다. 시후가 보고 손가락에 힘을 빼라고 했다.“알아요. 부러뜨리려는 거 아니에요.”쏘아붙이고 나서야 자신도 놀랐다.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아니라 빠져나갈 길을 살피며, 뒤따르는 사람들이 나올 동안 몸으로 문을 받쳤다. 은서는 그 짧은 기다림을 틈타 보석을 다시 받쳐 들었다. 이번에는 숨을 멈추지 않았다.“윤 실장, 선착장 상황은.”시후가 귓가의 인이어를 누르며 차갑게 물었다.— 부사장님! 센강변 3번 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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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멈춰 선 엘리베이터

치지직-!스피커 너머로 경고음이 울리며 전파가 끊겼다. 층 사이에 멈춰 선 리츠 파리의 사각 철제 엘리베이터. 외부로 연락할 길마저 끊긴 승강기 안에서는 비상등만 켜져 있었다. 젖은 옷 위로 어두운 붉은빛이 번졌다.은서는 벽면 버튼 위의 불빛부터 살폈다. 층 표시가 멎어 있었다. 비상 통화 버튼을 누르자 잠깐 사람 목소리가 들리다가 잡음으로 끊겼다.“여기 두 명 있어요. 다친 사람은 없고…….”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은서는 버튼에서 손을 뗐다가 다시 눌렀다. 뒤에서 시후가 인이어로 윤 실장을 불렀다. 그쪽도 연결이 고르지 않았다.한 번쯤은 우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정전이 났고, 강에서는 추격을 당했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이렇게 멎어 버렸다. 은서는 바닥이 움직이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체중을 옮겼다. 난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문을 억지로 열면 안 돼요. 어디에 걸렸는지 모르잖아요.”층 표시 옆에 걸린 작은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은서는 알아볼 수 있는 단어를 읽다가 그만뒀다. 평소라면 별것 아닌 안내인데 지금은 글자가 자꾸 겹쳤다. 문을 두드리고 싶은 손을 난간 아래로 내렸다. 밖에서 응답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시후가 문 앞에서 멈췄다. 말없이 전화 화면을 확인하는 얼굴에 붉은 등이 번졌다.은서는 숨을 길게 뱉었다. 차라리 물속에서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숫자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자신의 숨과 시후가 움직일 때 나는 옷 소리가 유난히 가까웠다.“아까 자료는 윤 실장님이 갖고 있죠?”“보관함까지 넘겼어.”그 말을 듣자 어깨가 조금 내려왔다. 은서는 같은 확인을 한 번 더 하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었다. 자꾸 묻는다고 더 안전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말하지 않고 있으면 방금 겪은 일이 처음부터 다시 떠올랐다.시후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화가 났거나 명령하던 얼굴에, 아주 잠깐 판단을 기다리는 틈이 보였다. 은서는 그 틈에 기대고 싶었다가, 그 사람이 문을 잠그던 손을 떠올렸다. 고장 난 엘리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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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로스웰

"이런 무례한 불청객이 내 스위트룸을 점령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시후는 커튼이 닫힌 거실을 둘러봤다. 은서의 앞을 가로막은 장신에 루시앙의 시선이 걸렸다. 시후는 그와 은서 사이를 내주지 않았다.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루시앙 로스웰 후작이 샴페인 잔을 가볍게 흔들며 나직하게 웃었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의 숨은 아직 고르지 않았다. 은서의 젖은 드레스 자락이 허벅지에 달라붙어 있었고, 쇄골 위 키스마크는 붉은 비상등 아래보다 거실 조명에서 더 선명했다. 루시앙의 푸른 눈이 그 자국에 한 박자 머물렀다. 시후의 턱선이 돌처럼 굳었다."반응이 너무 날카롭군요, 시후 부사장. 난 그저 그랑 팔레에서 당신들의 화려한 탈출극을 축하하러 온 것뿐인데."루시앙의 서늘한 푸른 눈동자가 시후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은서의 청초한 얼굴에 노골적으로 닿았다."그리고…… 소문으로만 듣던 서경가의 아름다운 감정사 한은서 아가씨를 직접 뵙고 싶기도 했지요."루시앙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사설 무장 경호원 4명이 수트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은서는 그 손이 다시 나오는지 살폈다.“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 에메랄드 티아라 안쪽에 숨겨진 암호 각인을 내게 넘기시오. 조수현 쪽과 진행하던 비공개 자금 거래는 정리하고, 대신 서경그룹과 로스웰 측 투자회사가 공동 펀드를 만들지.”은서는 시후의 옆으로 반걸음 나왔다. 루시앙이 처음으로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제 어머니 물건에 왜 그쪽 거래가 적혀 있는지부터 설명해 주세요.”루시앙은 잔을 내려놓았다. 잔받침에 묻은 물기를 손끝으로 밀었다.“오래된 거래를 오늘의 기준으로 읽으면 오해가 생기지요.”“그럼 기록을 없앨 이유도 없겠네요.”은서는 루시앙의 입을 봤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발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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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파리

루시앙이 남긴 잔은 그대로였다. 은서는 그 잔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갔다. 윤 실장이 부하들에게 방문 기록과 객실 출입 내역을 확보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티아라는요?”“별도 보관 중입니다. 행사장 측에도 안전하게 회수했다고 통보했습니다.”은서는 작품의 인계 절차부터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허락 없이 가져간 것으로 보이면 안 됐다. 감정위원으로 온 사람이었고, 그 작품의 상속을 주장할 사람도 자신이었다. 실물이 어디에 있으며 누가 보관하는지 기록이 남아야 했다.“제 감정 자료도 같이 보내 주세요. 제 이름으로요.”윤 실장이 수신처를 읽어줬다. 은서는 마지막 주소까지 듣고 맞다고 했다. 사건을 맡긴다고 자기 이름까지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잘못된 자료가 나가면 자신이 설명해야 했다.윤 실장이 확인을 마치고 물러났다. 은서는 젖은 드레스를 갈아입으러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손끝에 물기가 남아 단추를 풀기가 어려웠다. 옷을 바꿔 입고 나서도 전시장의 매캐한 냄새가 머리칼에 밴 것 같았다.문밖에서 시후의 전화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객실을 열어줬는지, 호텔 경호선이 어디에서 끊겼는지 묻고 있었다. 은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수건을 접었다. 자신을 지키느라 화가 난 것과, 다른 남자가 자신을 봐서 화가 난 것을 그는 구분하고 있을까.시후가 안으로 들어왔다. 은서는 그가 내려놓은 휴대폰 옆에서 손을 봤다. 한 번 더 다쳤는지 묻고 싶었다. 그 뒤에는 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는지도 물을 생각이었다.철컥.이중 방음 도어의 전자 잠금장치가 차갑게 맞물렸다. 거실의 불빛마저 꺼진 펜트하우스 안쪽, 오직 침실 협탁의 낮은 스탠드 조명 하나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오빠…… 손은 괜찮아요? 다친 건 아니죠?"은서가 놀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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