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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꿈결처럼
여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길을 천천히 걸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여울은 우산도 없이 그대로 비를 맞았다.

마치 아무도 챙겨 주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쓸쓸해 보였다.

얼마나 걸었는지 발바닥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여울은 하이힐을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빗속에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여울은 팔로 몸을 감싸안은 채 길가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팔 사이에 묻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머리 위로 우산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다.

울음이 조금 잦아든 뒤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낯설지만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괜찮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는 낯선 사람의 다정한 한마디에도 마음의 경계가 쉽게 풀리곤 한다.

여울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본 남자에게 단팥죽을 사 주겠다고 말해 버렸다.

주도운은 담요를 두른 여울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집이 어디예요? 일단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요. 데려다드릴게요.”

“루미엘 레지던스요.”

여울은 도운의 우산을 빌려 집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도운은 차 안에서 기다렸다.

잔잔한 벨 소리가 울리자 도운이 전화를 받았다.

[도운아, 오늘 돌아왔다며. 저녁에 한잔할래?]

도운은 루미엘 레지던스 정문을 바라보며 짧게 답했다.

“오늘은 안 돼.”

[왜, 길에서 예쁜 여자애라도 만났어?]

도운이 시선을 들었을 때 마침 캐주얼한 롱원피스와 플랫슈즈로 갈아입은 여울이 우산을 쓰고 걸어오고 있었다.

“끊는다.”

도운은 그대로 전화를 종료했다.

여울은 집에서 간단히 샤워한 뒤 머리를 하나로 묶고 옷만 갈아입어 서둘러 나왔다.

화장기 없는 피부는 맑고 희었고 눈화장까지 지우자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여대생처럼 어려 보였다.

앞좌석에 앉아야 할지 뒷좌석에 앉아야 할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 도운이 먼저 내려서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여울은 우산을 접고 차에 올라 목적지를 말했다.

도운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 뒤 천천히 큰길로 합류했다.

비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길가에는 꽃과 작은 선물을 파는 가게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여울은 창밖을 보고 있다가 차가 멈춘 것도 늦게 알아챘다.

“마음에 들면 꽃 한 다발 사 드릴까요?”

여울이 돌아보며 웃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두 사람이 들어간 가게는 크지 않았지만 깔끔했다.

타지역에서 온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여울이 가끔 들르던 단팥죽 전문점이었다.

중년의 사장이 여울이 오늘은 남자와 함께 온 걸 보고 웃으며 물었다.

“남자친구 생겼어요?”

여울은 도운을 한 번 보고는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냥 아는 분이에요.”

“미안해요. 늘 혼자 오던 분에게 동행이 있길래 남자친구인 줄 알았네요.”

따뜻한 단팥죽이 나오고 나서야 여울은 단 걸 좋아하지 않는 남자도 많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해준도 그랬다.

“미안해요. 단 거 괜찮은지 먼저 물어봐야 했는데. 여기 팥죽이 조금 달아요.”

도운이 웃었다.

“단 걸 잘 먹는 편은 아니지만 싫어하진 않아요.”

알게 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여울은 도운과 함께 있으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했다.

“오늘 같은 날은 다들 연인과 함께 보내잖아요. 그런데 괜히 가족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갑자기 이런 게 먹고 싶었어요.”

여울은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던 기억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저도 단팥죽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먹을게요.”

식사를 마친 뒤 도운은 여울을 아파트 단지 정문까지 데려다주고 떠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울의 이름을 묻지도 않았고, 왜 비를 맞으며 길가에서 울고 있었는지도 캐묻지 않았다.

여울 역시 도운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우연히 스친 인연이라면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문을 연 여울은 현관에 놓인 남자 구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소규리랑 데이트하러 간 거 아니었어?’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여울은 가방을 현관에 내려놓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밥 먹고 왔어요. 대표님은 무슨 일이세요?”

말투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담담했다.

상사 입장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직원을 기특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여울의 남자라는 입장에서는 집에서까지 꼬박꼬박 선을 긋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해준이 다가와 큰 체격으로 현관 앞을 막아섰다.

“나한테 물어볼 거 없어?”

여울은 해준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대표님 사생활을 제가 물을 이유는 없죠.”

여울의 냉랭한 태도에 화가 난 해준은 여울을 신발장 쪽으로 밀어붙이고 입술을 덮쳤다.

이런 일에서만큼은 늘 여울을 배려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최근 두 번은 달랐다. 화가 난 짐승처럼 입맞춤이 거칠었고, 입술과 피부를 깨물 듯 집요했다.

목에 따끔한 통증이 번졌다.

여울은 해준을 힘껏 밀어냈다.

“뭐 하는 거예요? 저 내일 출근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울은 목을 손으로 감싸며 해준을 노려봤다.

동그랗게 치켜뜬 눈을 본 해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조금 풀렸다.

“미안. 살살할게.”

그 뒤로 이어진 입맞춤은 실제로 훨씬 부드러워졌다.

창밖에는 다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방 안은 따뜻했고 두 사람이 남긴 열기가 방 안 가득 번져 있었다.

해준이 여울을 욕실에서 안아 나왔을 때 여울은 이미 졸음에 겨워 있었다.

침대에 닿자마자 이불을 끌어안고 한쪽 끝으로 몸을 말았다.

등 뒤에서 이불이 들리는 느낌이 들더니 곧 단단한 가슴이 등에 닿았다.

여울의 잠이 확 달아났다.

“피곤해요. 오늘은 그만해요.”

해준은 여울을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무것도 안 해. 그냥 자.”

여울은 몇 초 동안 말없이 굳어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같은 이불을 덮고 잠든 적도 거의 없었고, 서로를 안은 채 잠든 적은 더더욱 없었다.

여울의 몸이 딱딱하게 굳은 걸 느낀 해준이 물었다.

“잠 다 깼어?”

“대표님...”

“오늘은 그냥 널 안고 자고 싶어.”

점심 무렵 회사 앞에서 해준이 규리의 허리를 받쳐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후에는 영화관 앞에서 팝콘을 든 채 규리와 웃으며 들어가는 모습까지 봤다.

생각만 해도 가슴 안쪽이 시리고 쓰렸다.

헤어지기 전 베푸는 마지막 다정함이라면 차라리 받지 않는 편이 나았다.

“대표님, 이렇게 있으면 잠이 안 와요. 그냥 제가 옆방에서 잘게요.”

‘대표님’이라는 호칭 하나가 둘 사이에 다시 선명한 거리를 만들었다.

해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켜 여울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끝내자는 생각이야?”

끝낸다는 말조차 두 사람 사이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정식으로 사귀어 본 사람끼리나 ‘헤어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여울은 옆으로 조금 물러나며 차분하게 말했다.

“대표님은 저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잠깐이라도 곁에 있을 수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사람 욕심이 끝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해준이 비웃듯 말했다.

“네가 평범해? 회사 남자들이 다 너 좋아한다던데.”

여울은 점심때 상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구여울, 내가 말했지. 난 너랑 끝낼 생각 없어. 나한테서 벗어나서 다른 남자 만날 생각도 하지 마.”

“저 결혼하고 싶어요.”

결혼이라는 말에 해준의 등이 굳었다. 여울 옆을 짚은 팔에 선명한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한참 뒤 해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갔다.

밖에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여울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은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어 베개를 적셨다.

가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먼저 손을 놓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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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30화

    르베르그룹의 방문 일정은 원래 목요일이었는데 내부 사정이 생겼다며 갑자기 다음 날로 일정을 앞당겼다.여울과 아림은 갑작스러운 준비 때문에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일을 마쳤다.사무실을 나선 여울은 무심코 맞은편 대표실 쪽을 바라봤다.아림이 바로 말했다. “대표님은 오후에 먼저 나가셨어요. 가실 때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해준이 비서실 문제를 강하게 정리한 뒤 아림도 두 사람 사이가 단순한 상사와 부하직원보다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래서 평소보다 해준의 움직임을 조금 더 눈여겨봤다.물론 아림 나름대로는 여울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 주려는 마음이었다.아림은 여울과 해준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둘이 정말 사귀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여울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가요. 오늘은 일찍 자야 해요. 내일 오전에 공항 픽업도 가야 하니까.”“실장님, 저는 대표님이 꽤 괜찮은 사람 같아요.”여울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아림은 옆에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실 저 YL그룹 지원한 것도 처음엔 대표님 때문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 대표님이 학교에 특강하러 오신 적이 있거든요.”“그날 학생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졸업하고 첫 지원서를 여기 냈는데 이렇게 진짜 붙을 줄은 몰랐죠.”여울은 그 이야기에 작게 웃었다. 아마 대부분의 대학생은 저런 기억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반면 여울의 대학 시절은 수업과 공부, 아르바이트 공고를 확인하는 일로만 채워져 있었다. 누가 잘생겼는지 관심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여울이 웃자 아림은 혹시 말을 잘못했나 싶어 급히 덧붙였다. “제가 하려던 말은요, 대표님이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만약 대표님이 실장님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여울은 아림을 돌아봤다. 목소리는 동생에게 말하듯 부드러웠다.“어떤 부분에서 대표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어요?”아림은 비서실을 강하게 정리한 일과 오세화를 두고 화냈던 일을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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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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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7화

    여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준을 가볍게 밀어내며 일부러 사무적으로 말했다. “대표님, 회사입니다. 체면 좀 지키세요.”해준은 붉어진 귀를 보자 최근 여울이 제 품에서 그만하라고 매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생각이 떠오르자 재빠르게 행동했다.해준은 여울의 귀에 짧게 입을 맞췄다.여울은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바로 두 걸음 물러났다. 놀란 눈으로 천장 쪽을 올려다봤다.“걱정 마. 전용 엘리베이터 카메라는 평소엔 꺼져 있어. 켜져 있어도 밖에 말할 사람 없어.”마침 관제실에서 장비 점검을 하던 보안 직원은 화면을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마시던 차를 삼키는 것도 잊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영상은 상시 모니터링하지 않았지만 장비 이상 여부를 확인하려고 정해진 시간마다 점검 화면을 띄웠다.하필 그날 화면을 켜자마자 방금 장면이 잡힌 것이다.‘설마 대표님이 구 실장님을 좋아하는데 구 실장님이 선을 긋는 건가?’같은 시각, 옆 직원용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조금 전 로비에서 해준과 현수가 나눈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해준과 여울 두 사람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여울이 당한 일 때문에 비서실 전체를 문책하고, 약혼 상대의 어머니를 두고 난동을 부린 외부인이라고까지 했다.규리가 정말 해준의 아내가 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여울이 해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비서실에는 전에는 없던 정적이 흘렀다.모두 제자리에서 조용히 일했고 물을 마실 때조차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유일하게 아림만 평소와 같은 자세로 여울을 대했다.여울이 들어오자 아림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장님,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이에요.”여울은 다른 직원들을 한 번 둘러본 뒤 아림에게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아림은 곧장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비서실 일 들으셨죠? 대표님 진짜 멋있었어요. 저 오늘부터 대표님 팬 할래요.”여울은 웃으며 자기 사무실로 걸었다. “내가 준 자료는 다 봤어요?”“일부만 봤어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고요.”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6화

    안내데스크 직원 둘은 방금 대화를 들킨 줄 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두 사람이 어쩔 줄 모르며 변명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왼쪽 앞에서 다급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앞으로는 정말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같은 실수 절대 안 하겠습니다.”막 로비로 들어오던 직원들도 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상황을 지켜봤다.YL그룹에서 대표이사 비서실 직원들은 경영진 바로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회사에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비서실에 들어가기가 본사 입사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해준과 함께 일하는 자리인 만큼 채용 기준도 까다롭고 처우도 일반 직원보다 좋았다.해준 앞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는 현수였다. 여울과 비슷한 시기에 비서실에 들어온 직원이었다.해준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정 비서가 왜 잘렸는지는 알아?”현수는 해준 눈치를 보며 더듬거렸다. “업무 시간에 딴짓한 거랑... 여자친구를 사무실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한진은 해고 통보를 하면서 진짜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그 정도면 승진에 불이익 주는 선에서 끝낼 수도 있었어. 정 비서가 잘린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어.”현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구여울은 비서실장이고 정 비서의 직속 상사야. 지난주 금요일 외부인이 비서실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는데, 정 비서는 옆에서 한 마디도 안 했지.”“상사가 모욕당하는 걸 보고도 말리지 않고 구경만 했어. 책임감도 없고 비겁한 데다 남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더군. 그런 사람을 내가 왜 내 비서실에 둬야 하지?”현수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가 붉어졌다. 하지만 반박할 말은 나오지 않았다.해준은 현수를 지나쳐 다시 걸었다.“대표님, 그래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현수가 뒤를 돌아 소리쳤다. “그날 말 안 한 사람이 저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왜 저만 해고입니까?”해준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눈에는 싸늘한 비웃음이 담겼다. “정말 여기서 정 비서가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5화

    여울이 뭘 묻고 싶은지 이미 안다는 듯 해준이 먼저 말했다. “오늘은 너랑 같이 출근할 거야.”여울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얼마 전 비서실 사람들 앞에서 해준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선을 그어 놓고, 오늘 같은 차에서 내려 회사에 들어가면 스스로 했던 말을 뒤집는 꼴이었다.“그럼 제 차 타고 가세요. 저는 지하철로 갈게요.”해준이 여울을 돌아보며 손에 든 넥타이를 흔들었다. “그 전에 이것부터 매 줘.”예전에도 몇 번 해 준 일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사적인 행동처럼 느껴졌다.여울은 고개를 숙인 채 익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정리했다.“우리가 몇 년 동안 같이 드나들었는데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자꾸 피하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여. 어차피 우리 둘 실제로 만나는 사이잖아. 굳이 숨길 이유 없어.”여울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이게 무슨 뜻이지?’‘우리 관계를 공개하겠다는 건가?’해준이 낮게 말했다. “네가 공개하고 싶다면 나도 반대 안 해. 다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막 떠오르던 기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해준의 말이 맞았다.규리와 약혼한다는 기사가 이미 퍼진 상황에서 두 사람 관계가 알려지면 결국 욕을 먹는 쪽은 여울이 될 것이다.‘설마 규리와 약혼한 뒤에도 나랑 지금 같은 관계를 계속 이어가려는 건 아니겠지.’가슴이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무겁고 답답해졌다.윤명희와 해준이 같은 생각이라면, 자신은 지난 몇 년 동안 사람을 완전히 잘못 본 셈이었다.“여울아.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다 정리할게. 너한테 손해 가는 일 없게 할 거야.”“그럼 지금 인터넷에 난 약혼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힐 수 있어요?”말이 나가자마자 여울은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할 수 있었다면 이미 진작 해명했을 것이다.여울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해준의 셔츠 깃까지 정리해 주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가요. 늦겠어요.”해준은 여울의 눈을 오래 바라봤다. 기대가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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