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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사랑이었다
Author: 꿈결처럼

제1화

Author: 꿈결처럼
캐릭터가 그려진 잠옷 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온 구여울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엄해준을 발견했다.

해준은 깃이 느슨하게 벌어진 검은색 실크 로브를 입고 있었다.

여울이 토하는 바람에 엉망이 된 값비싼 정장은 아직 세탁 바구니 안에 그대로 있었다.

여울은 늘 해준이 갈아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 두곤 했다.

해준이 이 집에서 밤을 보내는 일은 드물었지만, 가끔 둘이 격하게 얽힌 날이면 입고 온 옷을 다시 입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울이 나오는 걸 본 해준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담배의 끝이 마지막으로 붉게 타오른 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베란다 유리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해준의 표정에는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기색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결혼하고 싶어? 남자면 아무나 상관없을 정도로?”

여울이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제가 자란 동네에선 25살쯤 되면 슬슬 결혼 얘기가 나오거든요. 26살을 넘기면 늦는다고 주변에서 성화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여울의 태도에 해준의 화는 더 치밀었다.

눈을 가늘게 뜬 해준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 손으로 허리를 감아쥐고, 다른 손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지금 나한테 뭐라도 암시하는 거야?”

여울의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선이 또렷한 해준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자, 잠시 외면했던 기대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엄해준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뜻?”

그 말에 여울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흐려졌던 정신도 금세 또렷해졌다.

윤명희 회장도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말끝에 묻어 있던 가벼운 비웃음까지 해준과 닮았다.

어쩌면 이렇게 묻는 편이 맞을지도 몰랐다.

호우시에서 해준의 아내 자리를 마다할 여자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여울은 그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태어난 환경부터 달랐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거리였다.

애초에 두 사람 사이에는 조건이 있었다.

그 선을 넘어서 더 많은 걸 원한 건 여울이었다.

다행이라면, 얼마 전 들은 해준의 소식이 여울의 욕심을 단번에 깨뜨려 놓았다는 것뿐이었다.

여울이 옅게 웃었다.

“대표님이 너무 깊게 생각하신 거예요. 전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대표님의 아내 자리에도 별로 관심 없고요.”

“그래?”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고개를 숙여 여울의 입술을 거칠게 삼켰다.

허리를 쥔 손에도 평소보다 힘이 들어갔다. 마치 벌을 주려는 듯했다.

“넌 아직 25살 생일도 안 지났어. 네가 말한 26살까지도 1년 넘게 남았고. 애초에 남들 시선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잖아.”

“그런 핑계로 넘어갈 생각 하지 마. 난 우리 관계 끝낼 생각 없어. 결혼 얘기는... 내 생각 알잖아.”

말을 마친 해준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입술을 덮쳤다. 입술에서 목으로, 입맞춤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해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울은 잘 알고 있었다.

결혼이 싫은 게 아니라, 결혼할 상대가 여울일 수 없는 것이겠지.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됐다.

해준은 여울이 어려울 때 도왔고, 여울은 그 대가로 해준에게 자신의 곁을 내주었다.

해준은 여울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 주었고,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도 알려 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밖으로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평소 해준은 다정한 편이었다.

오늘은 여울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지, 입맞춤은 어느 때보다 거칠고 집요했다.

다만 다치지 않을 만큼 힘을 조절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래서 여운이 더 선명하게 남았다.

여울은 눈을 감고 뜨거운 입맞춤을 받아 주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삼켰다.

‘이번 한 번만 더 빠져들자.’

“앞으로 술 마시고 싶으면 나랑 가. 다른 남자랑은 가지 말고, 알겠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강압적이지만, 동시에 여울을 달래는 듯한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

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준은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다.

회사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내릴 때와 다를 게 없었다.

해준은 생활이나 일 모두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사람이었다. 침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울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피기는 했지만, 늘 일정한 선을 지켰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방금 한 말에 대한 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다시 여울에게 몸을 기울였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씻고 침대로 돌아와 각자 이불을 들췄다.

여울이 눕자마자 해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해준은 다시 일어나 핸드폰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1분쯤 뒤 돌아온 해준은 옷장 앞에 서서 옷을 찾았다.

“먼저 자. 나 잠깐 나갔다가 올게.”

여울은 눈을 감은 채 짧게 대답했다.

몸이 지친 것도 사실이었지만, 마음이 아픈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해준은 옷장에서 옷을 꺼내 빠르게 갈아입었다.

나가기 전 침대를 돌아봤을 때 여울은 이미 잠든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해준은 수십 초 가까이 여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해준이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녹턴’이라는 라운지 바였다.

룸에 들어서자 매캐한 담배 연기가 먼저 목을 찔렀다.

해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해준도 담배를 피웠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만 손을 댔고, 한 번에 두 개비를 넘기는 일도 거의 없었다.

“담배 가게라도 털었냐?”

뿌연 연기 사이로 말끔한 인상의 남자가 화려한 셔츠 차림으로 일어났다.

옆에서 몸을 기대 오던 여자를 밀어내고 해준 쪽으로 걸어왔다.

해준의 굳은 표정을 본 지민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표정이 왜 그래? 설마 구 실장이 문전박대라도 했냐? 말도 안 되지. 구 실장이 얼마나 똑똑한데 사람 보는 눈이 없겠어?”

“아까 같이 온 놈은 비실비실한 게 딱 봐도 술에 절어 사는 타입이더라. 너랑 비교가 되겠냐?”

민재는 해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짓궂게 웃었다.

“옷도 금방 갈아입었네. 침대에서 바로 온 거냐?”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여울이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바가 하필 민재가 운영하는 ‘녹턴’이었다.

여울이 들어오자마자 민재가 알아봤고, 해준에게 소식을 전한 뒤 여울과 함께 온 남자를 떠보라고 사람까지 붙였다.

그 남자는 예상대로 여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이었다.

몇 마디 유혹에 여울을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를 덥석 끌어안은 채 플로어로 나가 버렸다.

여울이 언제 자리를 떠났는지도 몰랐다.

해준이 질린 눈으로 민재를 노려봤다.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결론만 말해.”

민재가 소파 쪽 여자에게 손짓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 여울과 함께 온 남자를 유인했던 여자였다.

“녹음한 거 틀어 봐.”

여자가 핸드폰을 조작하자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그 여자? 나도 몰라. 돈 받고 남자친구인 척해 준 거야. 근데 진짜 예쁘긴 하더라. 몸매도 장난 아니고.]

[허리며 골반이 죽여주잖아... 기회만 되면 돈 안 받고도 같이 자고 싶을 정도라니까.]

룸 안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민재가 여자에게 눈짓하자 여자는 서둘러 재생을 껐다.

“이제 알았지? 구 실장이 너 열받게 하려고 데려온 사람이야. 구 실장은 어디 안 가. 누가 너한테서 뺏어 가겠냐.”

해준은 빈 잔에 술을 반쯤 따랐다. 바로 마시지 않고 붉은 술만 한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이번에 진짜 나한테서 떠나려는 것 같아.”

민재가 잠깐 굳었다. 여자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낸 뒤에야 해준 옆에 앉았다.

“직접 그렇게 말했어?”

해준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어젯밤에 저런 짓까지 한 게 답 아니야?”

“설마 그 일 알게 된 거 아니고?”

해준이 미간을 좁힌 채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직은 모를 거야.”

민재가 몸을 해준 쪽으로 기울였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진짜 못 놓겠으면 혼인신고라도 해서 확실히 잡아.”

“그냥 잠자리 상대였으면 이번 기회에 정리할 건 정리하고. 애매하게 끌면 나중에 더 복잡해져. 사람 욕심은 상대가 키워 주는 거야.”

해준은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비웠다.

대리석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자 부딪쳐서 맑은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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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베르그룹의 방문 일정은 원래 목요일이었는데 내부 사정이 생겼다며 갑자기 다음 날로 일정을 앞당겼다.여울과 아림은 갑작스러운 준비 때문에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일을 마쳤다.사무실을 나선 여울은 무심코 맞은편 대표실 쪽을 바라봤다.아림이 바로 말했다. “대표님은 오후에 먼저 나가셨어요. 가실 때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해준이 비서실 문제를 강하게 정리한 뒤 아림도 두 사람 사이가 단순한 상사와 부하직원보다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래서 평소보다 해준의 움직임을 조금 더 눈여겨봤다.물론 아림 나름대로는 여울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 주려는 마음이었다.아림은 여울과 해준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둘이 정말 사귀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여울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가요. 오늘은 일찍 자야 해요. 내일 오전에 공항 픽업도 가야 하니까.”“실장님, 저는 대표님이 꽤 괜찮은 사람 같아요.”여울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아림은 옆에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실 저 YL그룹 지원한 것도 처음엔 대표님 때문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 대표님이 학교에 특강하러 오신 적이 있거든요.”“그날 학생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졸업하고 첫 지원서를 여기 냈는데 이렇게 진짜 붙을 줄은 몰랐죠.”여울은 그 이야기에 작게 웃었다. 아마 대부분의 대학생은 저런 기억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반면 여울의 대학 시절은 수업과 공부, 아르바이트 공고를 확인하는 일로만 채워져 있었다. 누가 잘생겼는지 관심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여울이 웃자 아림은 혹시 말을 잘못했나 싶어 급히 덧붙였다. “제가 하려던 말은요, 대표님이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만약 대표님이 실장님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여울은 아림을 돌아봤다. 목소리는 동생에게 말하듯 부드러웠다.“어떤 부분에서 대표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어요?”아림은 비서실을 강하게 정리한 일과 오세화를 두고 화냈던 일을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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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6화

    안내데스크 직원 둘은 방금 대화를 들킨 줄 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두 사람이 어쩔 줄 모르며 변명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왼쪽 앞에서 다급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앞으로는 정말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같은 실수 절대 안 하겠습니다.”막 로비로 들어오던 직원들도 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상황을 지켜봤다.YL그룹에서 대표이사 비서실 직원들은 경영진 바로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회사에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비서실에 들어가기가 본사 입사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해준과 함께 일하는 자리인 만큼 채용 기준도 까다롭고 처우도 일반 직원보다 좋았다.해준 앞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는 현수였다. 여울과 비슷한 시기에 비서실에 들어온 직원이었다.해준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정 비서가 왜 잘렸는지는 알아?”현수는 해준 눈치를 보며 더듬거렸다. “업무 시간에 딴짓한 거랑... 여자친구를 사무실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한진은 해고 통보를 하면서 진짜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그 정도면 승진에 불이익 주는 선에서 끝낼 수도 있었어. 정 비서가 잘린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어.”현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구여울은 비서실장이고 정 비서의 직속 상사야. 지난주 금요일 외부인이 비서실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는데, 정 비서는 옆에서 한 마디도 안 했지.”“상사가 모욕당하는 걸 보고도 말리지 않고 구경만 했어. 책임감도 없고 비겁한 데다 남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더군. 그런 사람을 내가 왜 내 비서실에 둬야 하지?”현수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가 붉어졌다. 하지만 반박할 말은 나오지 않았다.해준은 현수를 지나쳐 다시 걸었다.“대표님, 그래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현수가 뒤를 돌아 소리쳤다. “그날 말 안 한 사람이 저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왜 저만 해고입니까?”해준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눈에는 싸늘한 비웃음이 담겼다. “정말 여기서 정 비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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