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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꿈결처럼
해준은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여울과 사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전날 밤 서로 뜨겁게 얽혔든 냉랭하게 등을 돌렸든, 다음 날 회사에서는 언제나 손발이 잘 맞는 엄 대표와 구 실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여울이 출근하자 아림이 커피 한 잔과 간단한 아침 식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제 시계를 빌려준 데 대한 감사 표시라고 했다.

“실장님, 그 시계 엄청 비싼 거죠?”

여울은 김밥 한 조각을 먹으며 말했다.

“레플리카예요.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에요.”

해준이 준 선물이 가짜일 리 없었다. 한정판이 아니더라도 상당한 가격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남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아 가볍게 거짓말했다.

아림은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레플리카였어요? 전 진짜인 줄 알았어요.”

조금 뒤 아림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시계 며칠만 더 빌려도 돼요? 콘텐츠 몇 개 더 찍고 싶어서요.”

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실장님, 대표님이 찾으세요.”

여울은 문 쪽을 바라봤다.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대답한 뒤 아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먼저 갈 테니까 천천히 먹어요.”

“실장님...”

아림의 표정이 조금 묘했다.

여울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그래요?”

아림은 여울의 목을 바라보다가 망설이며 말했다.

“목에 자국이 있어요.”

차마 키스마크라고 직접 말하진 못했다.

여울은 어젯밤 해준에게 깨물렸던 곳을 떠올렸다. 목을 손으로 만지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 여기요? 어제 모기 물린 데를 좀 긁었더니 이렇게 됐네요.”

아림도 굳이 들춰내지 않았다. 책상 위 아침 식사 용기를 치운 뒤 밖으로 나갔다.

여울은 가방에서 예전에 아림이 돌려준 스카프를 꺼냈다. 이것 역시 해준이 선물한 것이었다.

스카프를 목에 간단히 리본처럼 묶고 립스틱을 덧바른 뒤 해준의 사무실로 향했다.

“대표님, 부르셨어요?”

해준이 서류에서 눈을 들어 조금 떨어져 서 있는 여울을 바라봤다.

시선에 알 수 없는 기색이 스쳤다.

목걸이, 스카프, 팔찌, 시계 등 여러 가지를 선물했지만 여울은 회사에 하고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목에는 액세서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이 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짙은 남색이 여울의 하얀 쿨톤 피부에 잘 어울렸다. 단정한 분위기에 은근한 매력까지 더해졌다.

“르베르그룹 임원진 자료야. 미리 읽어 둬. 다음 주에 그쪽에서 사람들이 오니까 그때 너도 나랑 같이 움직여.”

여울은 책상 앞으로 다가가 자료를 집어 든 뒤 다시 몇 걸음 물러났다.

“네. 최대한 빨리 숙지하겠습니다.”

해준이 말을 이었다.

“점심때 기다려.”

“점심 약속 있으세요?”

해준은 여울의 차분하고 선명한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아니. 나랑 밥 먹자.”

여울은 잠깐 놀랐다.

해준과 단둘이 점심을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해준이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이면 저녁이나 야식을 함께 먹기는 했다.

대부분 늦은 밤까지 체력을 쓰고 난 뒤 허기가 져서 먹는 야식이었다.

“왜? 선약 있어?”

여울이 웃었다.

“업무의 연장이면 시간 있습니다. 사적인 약속이라면...”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고 한진이 들어왔다.

“대표님, 주도운 선생님 오셨습니다. 옆 소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진은 오랫동안 해준을 보좌해 온 수석비서였다.

여울이 직접 처리하기 곤란한 일은 한진이 맡는 경우도 있었다.

한진이 여울에게 고개를 숙였다.

“구 실장님.”

여울도 옅게 웃으며 인사한 뒤 자료를 들고 대표실을 나왔다.

해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문 쪽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 곁에서 일한 한진은 해준이 화가 났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누구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자신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신 때문이었다면 벌써 차가운 표정으로 나가라고 했을 테니까.

사무실로 돌아온 여울은 스카프가 예쁘고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여러 번 들었다.

여울은 조용히 웃어넘겼다. 꼭 가릴 게 아니었다면 굳이 이 스카프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비싸고 눈에 띄는 제품이었다.

여울은 해준에게 받은 자료를 펼쳐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앉아서 읽다 보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정오였다.

해준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역시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한 말이었다고 생각했다.

여울은 핸드폰을 챙겨 사내 식당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때 상호에게 전화가 왔다.

[여울아, 점심 같이 먹자. 부탁이 하나 있어.]

엘리베이터 안에는 이미 사람이 많았다.

여울은 문 가까운 구석으로 들어가 목소리를 낮췄다.

“부탁할 거 있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밥은 괜찮아요. 저 점심시간에 밖에 나갔다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알지. 밖에 안 나가. 구내식당에서 먹자.]

“네.”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췄다. 여울이 전화를 끊고 내리자 안에 남은 사람들이 다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표님 약혼하신다는데 구 실장님도 나중에 그만두려나? 남편 옆에 저렇게 예쁜 비서실장이 붙어 있으면 어느 아내가 신경 쓰이지 않겠어?”

“구 실장님이랑 대표님은 그냥 상사와 부하 직원이잖아. 이상한 관계도 아닌데 왜 그만둬? 대표님이 예쁜 여자한테 휘둘릴 사람처럼 보여?”

옆 사람이 혀를 살짝 내밀었다.

“전혀.”

엘리베이터 맨 안쪽에 서 있던 도운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앞사람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었다.

‘그 사람이 구여울이었구나.’

...

상호와 사내 식당에서 만나기로 한 여울이 배식대 앞에 막 섰을 때 상호가 도착했다.

상호는 여울 앞을 막아 계산하지 못하게 한 뒤 자기 핸드폰으로 함께 결제했다.

“이 정도도 내가 못 사면 부탁하기가 민망하잖아.”

상호는 자기 식사를 받고 나서 여울에게 딸기 요거트 한 잔도 사 왔다.

“여자 직원들이 이거 많이 먹길래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여울이 웃으며 받았다.

“고마워요. 이제 무슨 부탁인지 말씀해 보세요.”

평소 사내 식당에 거의 오지 않던 해준이 처음으로 점심을 먹으러 왔다.

입구에 도착한 해준은 상호 맞은편에서 딸기 요거트를 들고 있는 여울을 보자 표정이 굳었다.

곧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한진은 여울 쪽을 한 번 바라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해준을 따라갔다.

회사에서 해준과 여울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한진뿐이었다.

‘쓸데없이 많은 걸 알면 피곤하다더니. 내가 왜 두 사람 눈치까지 봐야 하지.’

“해안시에 새로 들어간 프로젝트 있지? 조상호 보내서 맡겨.”

한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 팀장님은 법무팀 총괄입니다. 르베르그룹 건도 계속 직접 맡아 왔고요.”

“법무팀에 조상호 말고는 일할 사람이 없어?”

한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조금 있다 전달하겠습니다.”

“지금 전달해.”

상호는 여울의 집안 사정을 조금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여울에게 과외 자리를 소개해 준 적도 있었다.

지금은 예전만큼 과외비가 절실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여울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절반쯤 꺼냈을 때 상호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를 마친 상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이 얼마 전에 계약한 해안시 프로젝트를 내가 가서 맡으래.”

여울은 자신 때문에 상호가 갑자기 지방 프로젝트로 보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회사 일에서 해준이 내린 결정을 되돌릴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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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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