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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꿈결처럼
“해안시에 가서 프로젝트 하나 맡는 것도 선배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잖아요. 잘하고 돌아오면 승진할 수도 있고요.”

“아까 말씀하신 부탁은 저도 지금 확답은 못 드려요. 이번 주말에 한 번 만나 보고 말씀드릴게요.”

여울은 다시 과외를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상호가 갑자기 해안시로 가게 된 게 마음에 걸렸다.

이번 부탁을 들어주는 걸 작은 보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잠시 어두워졌던 상호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네 말이 맞아. 새로운 분야를 맡는 것도 경험이지. 법무팀에만 너무 오래 있었더니 나도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았어. 한 번쯤 밖에 나가 부딪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점심을 마친 여울이 사무실로 돌아와 잠깐 쉬려던 때 해준이 들어왔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여울은 의자에서 일어나 해준을 공손하게 바라봤다.

조금 전 상호와 식당에서 있을 때는 환하게 웃더니 자신 앞에서는 표정부터 사무적으로 바뀌었다.

해준은 여울에게 자신이 그렇게 보기 싫은 사람인가 싶었다.

속에 쌓인 화를 누르지 못한 해준은 사무실 문을 닫고 여울 쪽으로 걸어왔다.

여울은 그 행동을 보며 조용히 경고했다.

“중요한 업무를 말씀하실 거면 저를 대표실로 부르시면 됩니다. 대표실 쪽이 여기보다 방음도 잘되고요.”

해준은 그 말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여기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방음도 좋지 않고 언제 누가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해준이 여울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점심시간에 비서실이 비는 건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뭐가 그렇게 겁나? 아니면 누가 들어오는 게 싫은 건가?”

두 사람 사이에는 두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거리만 남았다.

여울은 해준의 눈을 보며 화를 꾹 참고 있음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보통은 비어 있죠. 그런데 요즘은 일이 많아서 다른 직원들에게도 점심 당직을 부탁했어요.”

여울은 물러서지 않았다. 말하는 속도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래?”

해준이 갑자기 다가와 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여울의 몸이 그대로 품 안으로 쏠렸다.

“한 비서한테 비서실 직원들 오후 출근을 한 시간 늦추라고 했어.”

‘처음부터 작정하고 온 거야?’

해준이 화가 난 상태라는 건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사무실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여울은 해준의 숨겨진 연인이었지만, 그렇다고 상사와의 관계를 이용해 승진한 여자라는 말은 듣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정도 자존심은 있었다.

그래서 사무실만큼은 여울이 반드시 지키고 싶은 마지막 선이었다.

여울은 두 팔을 해준의 목에 감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

“오늘 저녁에 일정 없으면 제가 만두 빚어 드릴까요? 우리 같이 저녁 먹은 지도 꽤 됐잖아요.”

예상대로 해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자신을 달래서 이 상황을 넘기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부드러워진 목소리와 옅은 미소를 보고 있자 여울을 몰아붙이려던 마음이 한풀 꺾였다.

애초에 두 사람은 공과 사를 나누고 회사에서는 사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해준도 여울의 뜻을 존중했고, 회사에서 불필요한 소문이 생기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품 안에 여울을 안고 아무렇지 않을 만큼 해준이 초연한 사람은 아니었다.

해준은 한 손으로 여울의 뒷머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끌어안은 채 붉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나 아직 밥 못 먹었어. 같이 가.”

낮고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해준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5분만 기다려 주세요.”

해준은 여울을 놓아주고 작은 파우치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여울은 정말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는 화장 하나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 집에만 가면 힘 빠진 고양이처럼 늘어졌다.

밖에 나갈 일이 없으면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서 세수하는 것도 귀찮아할 때도 있었다.

사적으로 보면 꽤 재미있는 여자였다.

한진은 굳은 표정으로 들어갔던 해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나오는 걸 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여울은 그래도 상황 파악이 빨랐다. 저 까다로운 남자의 기분을 풀어주는 법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한진도 불똥을 피할 수 있었다.

“대표님, ‘소담재’에 룸 예약해 뒀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어. 내가 운전할게. 넌 쉬어.”

기분이 좋은 날의 해준은 부하 직원에게 제법 너그러웠다.

한진이 차 키를 건네자 여울이 먼저 손을 내밀어 받았다.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대표님은 가는 동안이라도 좀 쉬세요. 오후에도 회의가 몇 개 더 있으시잖아요.”

회사에서 소담재까지 차로 적어도 30분은 걸렸다. 식사하고 돌아오면 따로 쉴 시간이 없으니 이동하는 동안이라도 눈을 붙이는 편이 나았다.

해준은 거절하지 않았다.

업무든 생활이든 여울은 언제나 빈틈없이 해준을 챙겼다.

때로는 해준 자신보다도 자신을 더 잘 알았다.

여울이 소담재에 온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해준과 단둘이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해준이 말하기도 전에 여울은 직원에게 해준이 좋아하는 메뉴 몇 가지를 주문하고 따뜻한 차도 부탁했다.

“술 조금 마실래?”

해준은 정장 재킷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커프링크스를 풀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안 마시는 걸로 하시죠. 대표님은 오후에 회의 있으시고 저도 볼일이 있습니다. 술 마시면 운전할 사람도 없고요.”

여울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린 해준의 재킷을 보고 일어나 뒤쪽 옷걸이에 걸었다.

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오후에 무슨 일 있는데?”

해준이 알기로 오후 회의에는 여울이 참석하지 않아도 됐다.

여울은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

“외삼촌이랑 외숙모가 오늘 오세요. 역에 마중 나가려고요.”

해준은 여울의 집안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울이 과거 수천만 원 때문에 자신과 비밀스러운 관계를 건 조건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여울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라서 해준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은 금세 차려졌다.

여울은 이미 점심을 충분히 먹었지만 해준과 함께 오기로 한 이상 몇 입이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그때 해준이 물었다.

“인터넷 기사 봤어?”

호우시 사람들 사이에 이미 널리 퍼진 기사였다.

여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태도만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해준은 한참 고민하다 결국 직접 물었다.

여울은 당근 한 조각을 집어 천천히 씹은 뒤 담담하게 답했다.

“네. 봤어요.”

비서실장으로서만 말한다면 축하한다고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말만큼은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였다.

해준은 흐트러짐 없는 여울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유 모를 화가 다시 치밀었다.

다른 여자가 자기 남자가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렇게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태연하진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어쩌면 진짜 관심이 없는지도 몰랐다. 계속 이 관계를 끝내자고 했으니까.

해준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닦았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여울이 눈을 들어 해준을 바라봤다.

“비서실장으로 말씀드리면 축하드린다고 해야겠죠. 하지만 다른 관계로 말씀드리자면... 좋은 일 앞두셨으니 이제 저를 좀 놓아주세요.”

“좋은 일?”

해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구여울, 넌 진짜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 재주가 있어.”

여울은 시선을 내리고 접시에 놓인 새우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습관은 무서웠다. 해준은 새우를 좋아했지만 직접 껍질 벗기는 걸 귀찮아했다.

그래서 같이 먹을 때마다 여울이 대신 손질해 줬다.

이제는 생각하지 않고도 손이 먼저 움직일 정도로 익숙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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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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