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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꿈결처럼
상호가 여울을 바라보며 웃었다.

“설마 모르고 있었어? 우리 회사 미혼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너 인기 엄청 많아.”

여울은 조금 놀랐다.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전에는 다들 대표님이 너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감히 들이대질 못했지. 오늘 지나면 꽃이며 선물이 쏟아질걸?”

여울은 손에 든 가방끈을 살짝 쥐며 웃었다.

“말도 안 돼요. 저랑 대표님은 애초에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인데.”

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지. 저런 집안 결혼은 결국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 처음엔 다른 사람을 좋아했어도 마지막에 배우자로 고르는 건 집안이 맞는 사람일 테고.”

누구나 아는 뻔한 이치를 여울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괜한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집에 돌아온 여울은 커피를 한 잔 내려놓고 노트북을 켜 사직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사직서를 다 쓴 뒤 개인 메일함에 저장해 두고 침실로 들어가 그 시계를 찾았다.

옷장 맨 안쪽에는 주얼리 상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전부 해준에게 받은 것들이었고, 여울은 거의 착용하지 않았다.

그중에서 시계가 든 상자를 꺼낸 뒤 오늘 해준에게 받은 상자도 함께 안쪽에 넣었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열어보지도 않았다.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윤명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에 엄씨 본가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여울은 아림에게 시계를 건네고 오후 업무를 정리해 둔 뒤 택시를 타고 엄씨 집안 본가로 향했다.

엄씨 집안 본가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오래된 저택이지만 내부는 낡은 느낌이 전혀 없었다.

절제된 고급스러움 곳곳에 오랜 집안의 세월이 배어 있었다.

“앉으렴. 차는 우릴 줄 아니?”

윤명희는 눈도 제대로 들지 않은 채 물었다.

여울은 솔직하게 답했다.

“잘 모릅니다.”

윤명희는 찻잎과 다구를 집어 들고 차를 우리는 과정을 처음부터 천천히 보여 주었다.

손놀림은 매끄럽고 단정했다. 웬만한 다도 전문가 못지않았다.

“나이를 먹으니 예전만큼 손이 곱게 움직이진 않는구나. 젊었을 땐 상류층 사모님들 사이에서도 차를 잘 우리기로 이름이 좀 났었지.”

윤명희가 말하며 찻잔 하나를 여울 앞에 놓았다.

“지난번에 구 실장에게 했던 말이 조금 심했을 수도 있겠구나.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면 한다.”

여울이 옅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오늘 부른 이유가 꾸짖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차를 내주는 데다 사과까지 하니 오히려 더 의아했다.

여울은 의문이 들었지만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윤명희는 그런 기색을 알아챈 듯 미소 짓고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해준이 곁을 지킨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일이 많은 남자에게는 마음을 풀 곳도 필요한 법이고.”

여울은 아무 말 없이 윤명희를 바라봤다. 찻잔을 쥔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오늘 자신을 부른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먼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차 예절을 보여 주며, 자신과 이런 집안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했다.

그다음에는 여울을 해준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곁에 두는 여자로 낮춰 버렸다.

“지난번처럼 돈 몇 푼 쥐여 주고 억지로 떼어 놓으면 네 마음에도 앙금이 남고, 해준이도 바로 적응하기 어렵겠지.”

“그래서 이제 너희 관계에 굳이 끼어들 생각은 없다. 해준이 결혼한 뒤에도 너를 따로 만난다면 모르는 척해 줄 수도 있어.”

여울은 입가에 반듯한 미소를 걸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표님과는 이미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업무 인수인계 때문에 당분간은 회사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여울이 퇴사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들은 윤명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택이니 존중하마. 퇴사하는 날 내가 따로 보상금도 챙겨 주겠다.”

여울은 윤명희가 따라 준 차에는 끝내 입도 대지 않고 본가에서 나왔다.

여울이 떠난 뒤, 오랫동안 윤명희를 돌봐 온 정길자가 다기를 정리하러 들어왔다.

정길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그렇게 말씀하셨다가 정말 구 실장님이 도련님 곁에서 안 떨어지면 어떡하시려고요?”

윤명희가 담담하게 웃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면 안 돼. 해준이가 이미 구여울한테 마음을 꽤 줬어. 단 걸 그렇게 싫어하던 애가 여울 때문에 입맛까지 바뀔 정도이니.”

“해준이더러 먼저 놓으라고 하면 쉽지 않겠지. 하지만 구 실장은 야망도 있고 자존심도 센 아이야. 해준이 결혼한 뒤에 몰래 만나 주는 내연녀 처지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거다.”

“결국 제 발로 떠날 수밖에 없어. 해준이 살면서 누구에게 버림받아 본 적이 있니? 구 실장이 먼저 떠나면, 미워하지는 않더라도 예전처럼 좋아하긴 힘들겠지.”

정길자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회장님께서 멀리 보셨네요.”

엄씨 본가에서 나온 여울은 한참 동안 택시를 잡지 못했다.

결국 큰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손에 쥔 핸드폰이 몇 번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니 집에서 걸려 온 전화라 받지 않았다.

통화가 끊긴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왔다.

여울은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뭐 하길래 전화를 이렇게 안 받아?]

여울은 길가에 멈춰 서서 고개를 숙였다.

“일하고 있었어요. 무슨 일인지 빨리 말씀하세요.”

[일, 일, 맨날 그놈의 일 타령이지. 그렇게 바쁘게 일해서 돈을 얼마나 번다고 그래?]

진미숙이 툴툴거렸다.

여울은 눈을 감고 피로를 눌러 삼켰다.

“별일 없으면 끊을게요.”

[잠깐만.]

진미숙이 서둘러 붙잡더니 못마땅한 기색을 누르고 말했다.

[네 외삼촌이 몸이 안 좋대. 호우시에 있는 큰 병원에서 제대로 검사 한번 받아 보라고 했어. 네가 좋은 대학병원 교수님 좀 알아봐 줘. 외숙모랑 모레 호우시에 도착한다니까 그때 해원역에 마중도 나가고.]

“요즘은 핸드폰으로 진료 예약도 할 수 있잖아요. 예약은 두 분이 직접 하시라고 하세요, 역에는 제가 시간 내서 나갈게요.”

그 말을 듣자 진미숙의 목소리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둘이 그런 걸 잘하면 너한테 부탁하겠니? 내가 네 외삼촌이랑 외숙모한테 벌써 걱정 말라고 큰소리쳤어. 네가 다 해 줄 거라고 했으니까 엄마 체면 좀 세워줘.]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여울에게 묻지도 않고 먼저 남의 부탁을 받아 놓았다.

동네 지인의 아들이 취업이 안 된다며 여울에게 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했고, 아는 집 딸이 호우시에 놀러 온다며 며칠 데리고 다녀 달라는 부탁도 떠맡겼다.

진미숙은 다른 사람 사정은 누구보다 잘 헤아리면서 딸의 사정에는 무심했다.

친엄마라는 사람은 늘 남의 일을 들고 와 딸의 죄책감을 건드렸다.

정작 여울이 호우시에서 어떻게 사는지, 힘들지는 않은지를 묻는 일은 드물었다.

여울은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내려 눈 위를 덮었다.

“역에는 갈 수 있고 병원에도 같이 가 드릴게요. 하지만 교수님을 따로 잡아 드릴 인맥까지는 없어요.”

[인맥이 없는 거야, 도와주기 싫은 거야? 우리가 널 어떻게 키우고 공부시켰는데 이런 작은 부탁 하나도 못 들어줘?]

[됐다. 앞으로 나랑 네 아빠한테 무슨 일 생겨도 너한텐 연락 안 할게. 너는 돈 많은 사람 만나 잘 먹고 잘살아. 우리도 딸 하나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지.]

여울이 멈칫했다.

“돈 많은 사람 만나 잘산다니요? 엄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해준과의 관계는 같은 비서실 사람들도 몰랐다. 부모님이 알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어? 네가 돈 많은 남자 만나는 거 진작 알았어. 그것도 나이 많은 부자라며.]

보통 부모라면 딸이 그런 소문에 휩싸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거나 화부터 내지 않을까?

하지만 진미숙의 목소리에는 비웃음과 묘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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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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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제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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