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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철향: Chapter 81 - Chapter 90

122 Chapters

철향鐵響 八十一

그날도 이렇게 비가 오는 봄날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이후로도 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면 그가 머무는 공간을 지나게 되었다. 이에 황제는 무심히 지나가라 일렀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아프지 말라고. 황제는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하백 황을 뵙고, 강물을 타게 되었을 때도 그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의 누이이자 하백 황의 신부이신 아일린雅佚潾님 마저 그의 소식은 알려주지 않으셨다. 그것이 본인의 뜻이 아님을 피력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이연아, 네 생부가 자신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아이를 품에 안고 끝내 내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가 인정한 그의 아들이었지.”이연은 고민했다. 그가 인정한 그의 아들이 있다. 부러운 걸까? 난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걸까? 아니다. 난 아바마마의 인정만 받으면 된다. 난 그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버석버석해진다. ”그는 어째선지 관혼상제를 굉장히 중히 여기더구나. 그 아이는 혼인한 처의 아이였지만, 너는 혼인이라는 제도에서 벗어나 태어났지. 그는 책임지지 못할 일엔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네게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을 도닥이는 것일 뿐 네가 잘못된 존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지금은 이연의 혼인을 앞두고 있다. 이연과 혼인할 여인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연은 그녀를 인정하고 품어 자손을 낳아 퍼뜨릴 것이다. 그의 두 아비와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의 아비들이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얘기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 얘기부터 해야 했구나. 사비나는 너를 갖고서 그를 거부했다. 오로지 너와 네 아우들만을 원했어. 그렇게 그는 이용만 당하고 너를 책임지고자 한 마음은 거절당했지. 그의 말에 따르면 사비나는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너에 대한 권리는 나에게 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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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八十二

이연은 황제와의 독대가 끝나고 망설임 없이 작약궁에 있는 은령의 방을 찾았다. 여백을 어둠으로 채운 공간에 은령의 체향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들켜서는 안 되지만 창문을 조금 열고 창가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이 년 전 은령을 현덕궁으로 보낸 것은 멀어지기 위함이었다. 언제부턴가 은령의 향이 몸에 옳지 않은 궤적을 그렸다. 내가 은령에게 위험해지려 하여 멀어졌다. 버릇이 들기 전에 곁에서 떨어뜨렸다. 그런 은령이 낯선 사내의 품에 안겨 돌아왔다. 비스듬히 들어오는 여린 빛이 축 늘어진 은령의 몸을 그려나갔다. 달려가 대신 안아 들어야 했는데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뭐가 이리 분한지 모르겠다. 그가 방 안으로 온전히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넌 누구지?”그는 먼저 묵례를 한 후 은령을 침상에 눕혔다. 정중한 행동에 찌꺼기 같은 감정은 없었다. 눕힌 그녀를 쓰다듬거나 지켜보지도 않았다. 그것마저 내 눈에는 아니꼬웠다. 깔끔하게 돌아선 그가 내 앞으로 와 창을 내려두고 무릎을 굽혔다. ”이연 마마님을 뵙습니다. 홍무도에서 온 제인이라고 합니다.” “아, 네가 민하의 호위무사군.”의자에서 내려와 머리를 맞댈 정도로 몸을 숙여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어두운 곳에서도 타는듯한 붉은 머리카락은 시야를 빨갛게 물들였다. 청아한 청록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담는다.문득 아래에서 비릿한 피 내음이 확 끼쳤다. 이연은 손을 내려 강한 체취의 근원지를 찾았다. 가슴팍에 난 기다란 상처가 만져졌다. 아직 벌어져 있는 틈을 손가락으로 후볐다. 뜨거운 피가 울컥 배어 나온다. 그럼에도 사내는 신음조차 내지 않는다. 훈련이 아니다. 이연은 마기에게서도 그리고 생부에게서도 홍루족 남자의 끈덕진 고집을 보았다. 이 사내 역시 그 지긋지긋한 고집으로 참아내고 버텨낸다. ”형편없군. 막지 못하다니.” “소……송구합니다.”제인의 목소리가 떨리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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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八十三

다감한 밤이 올 때면 지율은 거문고 줄을 닦았다. 그러나 현덕이 오지 않은지 나흘째 되는 밤이 되었는데도 거문고줄을 정성스레 닦았다. 경장(현 당기기)을 하여 음을 맞춰보고도 싶었지만, 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괜한 고집이다. 이런 기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나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데, 그분이 뭘 알아주실 수 있단 말인가.그러나 그분이 오시지 않는 이유는 알고 있다. 말이 너무 심했다. 그러나 다시 그 상황이 온다고 해도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루하루가 너무 길어서 살아내는 일에 질식당한다. 이게 보고 싶다는 걸까. 보지 못하는 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그분은 나를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분은 이미 식당에서, 욕실에서, 의약방에서 걸어 다니는 나를 보셨을 수 있다.듣고 싶다. 나는 그분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분이 내 주변을 정리해 주실 때 내는 작게 달각이는 소리와 바르작거리며 옷감이 스치는 소리와 사륵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소리가 듣고 싶다. 웃으실 때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는 듯 올라오는 떨리는 소리와 코로만 들이쉬고 내쉬는 나른한 한숨 소리마저 그립다.그립다라니. 그릴 줄도 모르는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우습다. 그래. 우스운 나는 고집스럽게도 나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내게로 와 들려주지 않겠다면 나도 들려주지 않는다.나도 몰랐는데, 내 속이 이렇게나 좁다. 그분의 향이 맡고 싶다. 여기 오실 때면 불을 켜고 만들어 온 향을 피우셨다. 나는 불이 필요하지 않기에 그분이 올 때만 맡게 되는 심지 타는 냄새를 그분의 향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의약방에서 만들어오시는 향은 그때그때 달라졌으므로 그분이 나에게 입히고자 하는 향은 아닐 터였다. 갑자기 분한 기분이 든다. 내가 가면 된다. 그런데 뭔가 지는 느낌이 들어 망설이게 된다.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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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八十四

술이 잘못했을까. 향이 잘못했을까. 그깟 술이 무어라고, 어설프게 만든 향이 뭘 어쩌겠냐며. 결국 내가 잘못한 것이지. 기탁의 수행에 방해될 수 없다며 만든 향을 모조리 들고 지율의 거처에서 피워댔다. 은연중에 잘 만들지 않았느냐고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하필 말리화가 들어간 향이었다. 하필 독한 술로 혀를 적신 참이었다.사실 핑계다.원래 궁에서는 제례가 있는 날이 아니고서야 술을 마시지 않았다. 저주로 곪아가는 몸에 술을 허락해 줄 리 없었다. 궁을 나와서야 마음껏 들이킬 수 있게 되었고, 화산에 이르러서야 술맛을 조금 알게 되었다. 정결한 산문 안에서 무슨 짓인가 싶지만, 객인 현덕과 기탁에게까지 술을 금하지는 않았고, 화산에서도 제례를 위한 화산만의 주조법이 있었다. 의약방에는 술이 항상 있었고, 현덕은 지율을 찾을 때면 괜스레 긴장이 되어 속에 한두 잔 들이붓고 오곤 했다. 그러면 말도 매끄럽게 나오고 좋았다. 등신같이 말하지 않았다.지율은 거문고의 현을 누르지 않은 채 술대로 퉁퉁 튕기며 공간에 진동만 더해주고 있었다. 둥둥거리는 떨림이 심장 박동 같아 현덕은 입술을 축였다. “태리님의 향이 납니다.”그간 딱히 어머니를 대화의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화산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그리고 지율에 관한 질문만으로도 봄밤은 잘만 익어갔다. ”말리화라고 장강 이남에서 피는 꽃이지. 어머니는 그쪽 출신도 아니신데, 꼭 이 향을 찾으셨어.” “스승님께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서늘하고 단단한 향이 어울리지 않으실까 하고요.” ”이를테면 백합같은?” “꽃향기보다는 초본의 향이랄까. 겨잣잎이나 곽향 같은 향이요.” ”기겁하셨겠군. 누구보다 권력욕이 강한 분이신데, 그런 잡초가 어울린다 하면.” “그래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잘했네.“어마마마께서는 무엇보다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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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八十五

현덕은 기탁이 턱을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떴다. 손에 거슬리는 것이 없다면 다 된 것이다.도구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사이에 지율이 내던 둥둥거리는 거문고 소리가 섞인다. 심장 박동 같은 소리는 그 어떤 소리와도 어우러지는구나. “아무래도 가봐야겠다.” “그러십시오. 향과 초를 챙겨드릴까요?” “그래.”선반 앞에 선 현덕은 새 도복과 도포를 꺼내 갈아입었다. 도포 앞섶을 탁탁 당겨 펼치고 뒤도니 기탁이 작은 꾸러미를 내민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항상 뭘 챙기는지 지켜봐 온 솜씨다. “이런, 내가 폐하께 큰 빚을 졌네. 이렇게 기민한 금군을 독차지하다니.” “잘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으십쇼.”짓궂기는. 현덕은 꾸러미를 넘겨받았다. “깔끔하게 쓰려고 애쓰는 거 안 보여?”웃으며 어깨를 한 번 짚어주고 집을 나섰다. “유능하니까 돌아가는 건 알아서 잘하겠지.”뒤돌아보지 않아도 기탁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있을 것임을 안다. 문 옆에 달린 등롱을 꺼내 들고 길을 나섰다.바람이 아리다. 여름을 앞에 두고도 험준한 화산은 칼바람이 몰아친다. 입을 벌리면 소리 없이 들어온 바람이 숨구멍을 막는다. 바람에 맞서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마지막 오르막을 오르는데 창백한 달빛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사람의 형상이 보인다. 현덕의 심장이 멎고 눈은 요동쳤으며 발은 미친 듯이 내달렸다. 등롱이 바닥에 떨어져 빛을 흩뿌리다 순식간에 타들어 가더니 까맣게 사라져 버렸다. 그 사이 현덕은 절벽 앞에 서 있는 지율을 당겨 끌어안았다. “여서 뭐 하는 거야!”사람이 품에 안겨있기에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들릴 터인데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멈췄던 심장이 온몸을 때려댄다. 이 격한 고동을 지율이도 알게 될 터인데 팔에 실린 힘을 풀 수가 없다. “신발이……. 잘 맞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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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八十六

불을 켜고 지율의 발부터 살폈다. 신발이 벗겨진 발이 시커멓게 때가 타 있다. 현덕은 대야에 물을 받아와 지율의 얼굴부터 손과 발까지 씻겼다. 지율은 그저 내맡길 수밖에 없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나뭇가지에 긁힌 듯한 생채기가 뺨에 하나 나 있고, 하얀 발에 찔리고 긁힌 상처가 자잘하게 나 있다. 무엇을 붙잡으려 했는지 손바닥에도 붉게 쓸린 자국이 있다. “도포는 입지 않았느냐.” “급히 나가느라 어깨에 걸치기만 했더니 바람에 날려가 버렸습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이 사달이 나.”지율은 답할 수 없었다. 급한 건 마음이었고, 마음이 왜 급해졌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현덕은 초를 들고 일어나 선반을 살폈다. 분명 의약방에서 본 것과 같은 약통을 본 적이 있다.지율은 멀어진 온기에 안심하면서도 허전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게도 이렇게 가까이 닿아보고서야 알았다. “잔인하신 분.”선반을 훑던 굵고 긴 손가락이 잠시 멈칫거렸지만 금세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고 떠나실 거라면 애초에 이리 찾아오지도 마셨어야죠.”지금이라도 두고 떠나십시오. 여기서 멈추십시오. “너무 비겁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험담하면 제가 당신을 싫어하고 멀어질 거라 여기셨습니까?”그게 오히려 자신을 내보여서 걱정시키고 생각나게 했다는 거 모르셨습니까? “남겨질 자의 심정은 왜 모른 체하십니까.”그럴거면 떠나갈 자의 입장 따위 운운하지 마셨어야 합니다.옹졸해지는 마음이 몸도 움츠리게 만들었다. 지율이 다리를 침상 위로 끌어 올리려는데 현덕의 손이 발목을 붙잡았다. “보고 싶었다. 그래서 왔을 뿐이야.”더 해줄 말이 없어서, 묵묵히 붙잡은 발에 연고를 펴 발라주었다. 지율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 마음만 생각했지, 지율의 마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 따위가 누구의 마음에 들어갈 리 없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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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八十七

옷감이 사르륵 쓸리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가느다란 손끝이 정수리에 닿았다.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는 지율의 온도가 내 피를 들끓게 했다. 가만히 있으려 노력하는데도 조금씩 팔과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사람의 손길은 익숙하다. 방금도 기탁이 해주는 면도를 받고 오지 않았는가. 궁녀와 환관들의 치장을 받으며 자란 나다.그러나 지율의 손길이 닿자, 혼이 녹아내린다. 몸은 반대로 굳어져 동상처럼 뻣뻣해졌다.엄지로 불퉁하게 튀어나온 눈썹뼈를 훑고 검지로 콧대를 쓸어내린다. 손가락 관절로 속눈썹을 슬쩍 건드리더니 두 손가락을 펼쳐 광대뼈를 꾹 눌렀다. 그렇게 차츰 손을 펼쳐 손바닥 전체로 한쪽 뺨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을 뻗어 입매를 따라 그렸다. 입술을 쓸던 엄지가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하루 종일……. 만지고 싶을 정도입니다.”손가락이 좀 더 입안으로 파고든다 싶었을 때, 지율이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더니 입술을 맞대었다. 말랑한 혀가 내 이를 툭툭 건들더니 결국 숨을 멈춘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벌받는 걸까. 내가 그간 엄한 상상을 해서 지율이 내 생각을 읽고 벌을 주는 걸까. 그렇다면 이건 너무 황홀한 벌이다.지율의 다디단 침이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넘어가고 지율이 나의 지저분한 타액을 계속 훔친다. 더이상 숨을 참기 어려워 지율을 밀어내고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내 손바닥에 기댄 지율의 가슴팍도 계속 오르내린다. “하아하아. 떠날 거라면 확실하게 심어주고 가십시오. 후우, 지난 나흘간 얼마나 아쉬워하고 후회했는지 짐작이라도 하시겠습니까?”고개를 들어 지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모습이 아파 보였다. 아, 이건 우는 모습이구나. “당신은 제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떠올리시겠죠. 그러나 제가 떠올릴 수 있는 건 고작 목소리와 발소리와 초의 심지가 타는 냄새밖에 없어서! 당신을 떠올릴 건덕지가 고작 그것뿐이라 얼마나 서럽고 억울했는지!”지율이 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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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八十八

지율이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흘러내리고 지율의 긴 손가락이 뻗어와 내 얼굴을 쓸었다. “죄인이 되고자 하실 정도로 원하시는 것입니까.”현덕은 지율이 짚고자 하는 것이 뭔지 모를 수 없었다. “그래. 친족을 죽이는 죄를 저지르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명징하게 내뱉고 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뭔지 언어로 명확해졌다. 그러나 나는 죄로 죄를 덮을 것이다. 나를 불사를 것이다. 나는 이토록 어머니를 닮았구나.지율이 입술을 덮었다. 지율이 나를 더 원할 리 없다고 여기던 현덕은 잔뜩 굳었다. “말린다고 말려지지 않으시겠죠.”지율의 도톰한 입술이 말소리를 따라 현덕의 입술을 문지른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요.”그리고 다시 제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지율은 현덕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박아 넣기 위해 제 몸에 현덕을 심었다. 현덕은 지율을 양껏 품고 나서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지질해 보인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율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어보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응하는 것이지?” “무슨 답이 듣고 싶으신 겁니까?”현덕은 웃으며 지율의 코를 꽉 꼬집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궁에서 실컷 했어. 제대로 답해야 할 거야.” “알면서 물어보는 것이 더 얄밉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지율은 코를 문지르며 입을 삐죽였다. “이렇게 누군가를 애타게 원한 적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가 어찌 움직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말하는 지율의 얼굴이 빨갛다. 이게 새로 켜둔 촛불 때문인지 아니면 듣는 내 얼굴에도 피가 쏠려서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딸꾹.”잘 익은 지율을 멍하니 보다 침을 꼴깍 삼켰더니 바보같이 딸꾹질이 나와버렸다. “이익! 도대체 제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길 원하시는 겁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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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八十九

지율은 현덕이 자신을 그저 소리가 좋은 거문고 정도로 보고 있지 않을까 추측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제 몸을 욕정의 대상으로 봐주었다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다. 이렇게 크고 강인한 몸을 가진 이가 자신의 약하고 여린 몸을 좋아해 준다는 것이 신기하고 흡족했다. 현덕은 지율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버거운 행복이 밀려 들어온다. 본디 나는 여기를 떠나면 사라질 사람이다.이연의 주변을 배회할 수는 있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이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율을 두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지율의 세상에 존재하는 나를, 내가 감히 지워버려도 될까?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난 그러고 싶은가?울컥하고 눈물이 솟아올랐다. 현덕은 벌써 밀어닥치는 상실감에 몸을 떨며 울었다. 내가 나아가려는 길에 너를 담을 수 없다. 네가 머무는 곳에 내가 뿌리내릴 수 없다. 지율은 당황하여 가만히 있었다. 이분은 분명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을 텐데도, 조그마한 애정에도 크게 반응한다. 하룻밤 만에 지나치게 몰아붙였던 걸까.두꺼운 팔뚝이 바들바들 떨리며 계속해서 지율의 허리를 미끄러졌다가 올라와 조인다. 지율은 본인의 숨을 차분히 고르며 현덕에게 전해지길 기다렸다. 시간을 야금야금 잡아먹고 잦아든 울음 끝에 현덕이 말을 시작했다. “자호란에게는 해귀족海鬼族의 피가 흐른다. 해귀족은 바다에서 사는 종족이야.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으며, 바닷속에서 상대에 따라 다른 성별의 몸이 된다고 하지. 해귀족 혼혈인 자호란은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해귀족과 홍루족 혼혈인 지금의 국사는 여인도 사내도 아니야.”지율은 현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슴팍을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몇 해 전 성인이 된 자호란이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마도 궁에서 지내기 어려워져 바닷가에서 살고 있지 않을지 추측할 뿐이야. 해귀족은 바다속에서만 생식이 가능하다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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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九十

쥐어짜진 건 구름인데 잔뜩 움츠러든 달이 힘겹게 빛을 짜내고 있다. 조용하고 침잠한 하루였다. 밤새 쏟아져 내린 비는 수런거리던 궁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낮 동안 고요를 만끽한 설화궁은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씩 부산스러워졌다. 습기와 냉기를 몰아내려 화로에 불을 지피고 초를 잔뜩 켰다. 응접실 가득 계피와 귤피를 끓이는 향이 퍼진다. 눈 속에 파묻힌 건물을 본뜬 설화궁에 어울리는 따뜻한 겨울의 향이다. 매령은 주희를 따라 찻잔을 들었다. 문가에는 새로 온 금군들이 서 있다. 흑갈색 곱슬머리에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와 작지만 다부진 체구. 월국 출신 사람들이다. 고향 사람들을 만난 반가움에 절로 마음이 풀어졌다. “소우 장군께서 저를 많이 배려해 주신 모양입니다.”잔을 내려놓은 주희가 언제나처럼 같은 미소를 보여준다. “소우 장군은 반정 세력을 밀고하고 궁에 들어온 자 입니다. 그래서인지 궁 내에서 반역이 일어날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보면 금군을 뽑을 때 연줄이 많은 자를 오히려 배척합니다. 유력자 집안 출신이나 고위 관료의 자제는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제외하더군요. 오히려 이방인이나 도사들을 선호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강현에게는 전혀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운남을 지배했던 집안 출신이다. 강현을 구심점으로 반역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주 무리한 일은 아니다. 특히 본래 운남이 속했던 월국 출신 군인들이라면 동조할 수도 있다. 강현도 이걸 알고 있을까? 알게 되었기에 일찌감치 금군이 되는 길을 포기한 걸까. 그래서 민하와 친하게 지내는 걸까. 매령은 심장이 콕콕 찔리는 느낌에 찻물을 들이켰다. 주희가 소매를 정갈하게 붙잡으며 다관을 들어 찻잔을 채워준다. “설화궁의 금군들은 어마마마 때부터 지켜온 자들로 보시다시피 먼 서역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체구가 크고 모색과 홍채의 색이 옅지요. 흐음. 고집 센 소우 장군께서 제 청을 반만 들어주시는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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