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축하해, 여보. 그런데 그 아이 당신 아이 아니잖아: Chapter 31 - Chapter 40

90 Chapters

31화 — 엄마가 아빠를 버리는 거야?

“엄마가 결혼하면 아빠 사진도 치울 거잖아.”채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미라가 아니라고 손을 뻗자 아이는 낡은 드레스 뒤로 물러났다.“정호 아저씨가 오면 아빠 제삿날도 없어지고, 나도 아저씨 성으로 바꿔야 하잖아.”“누가 그런 말을 했어?”“할머니가. 새 가족이 되려면 그래야 한대.”미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정호가 문밖에서 들어오려다 멈췄다.이경은 드레스부터 치우려 했다. 산화된 천이 아이의 손에서 더 상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채은아, 일단 옷을 대표님한테—”“이것부터 뺏으려고요?”아이의 눈에 공포가 번졌다.이경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천의 안전을 먼저 본 순간, 채은에게는 자기 기억을 빼앗는 어른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었다.“미안해.”이경은 한 걸음 물러났다.“옷이 상할까 봐 네가 왜 붙잡았는지보다 천을 먼저 봤어. 지금은 손대지 않을게.”채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더 물러서지는 않았다.미라가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나는 그냥 다시 웃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 그런데 그걸 네 아빠 옷으로 증명하려고 했나 봐.”“아빠 잊은 거 아니야?”“안 잊었어. 정호 씨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아빠랑 살았던 시간이 없어지지도 않아.”“그럼 왜 결혼해?”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미라는 슬픔을 견디는 것과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가능한지 중학생에게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이경도 같은 질문을 자기 안에서 들었다. 지안이 죽고 난 뒤 웃었던 날마다 죄책감이 따라왔다. 태준과 결혼식 날짜를 잡았을 때도, 봄이 첫돌 케이크 앞에서 웃었을 때도 언니 몫의 삶을 훔친 것 같았다.그래서 더 열심히 과거를 보존하려 했다. 사람 대신 물건을 붙들면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저도 틀렸어요.”이경이 말했다.세 사람이 그녀를 보았다.“처음에는 옛 드레스 천을 새 옷에 꼭 넣어야 기억이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라 씨가 원하는 답을 빨리 만들어 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기억을 증명하려고 유품을 위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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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 추억을 자르지 않는 법

“이건 우리 엄마 옷이 아니에요.”채은이 합성사진을 확대했다. 잘린 치맛단에는 푸른 실도, 목 뒤 얼룩도 없었다.그러나 기사는 이미 십만 번 넘게 공유됐다. 제목만 읽은 사람들은 월백을 ‘추억을 돈으로 자르는 가게’라 불렀다.미라의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시댁 식구와 식당 단골, 죽은 남편의 형제들이 왜 유품을 넘겼느냐고 몰아세웠다.이경이 물었다.“사진을 바로 반박해도 될까요? 실제 드레스 상태를 보여 주지 않고 합성 흔적만 공개할 수 있습니다.”미라는 낡은 드레스 상자를 품에 안았다.“내 옷인데 또 남들한테 검사받는 기분이에요.”“그럼 공개하지 않겠습니다.”“그러면 대표님이 욕먹잖아요.”“그걸 막으려고 고객의 유품을 꺼내면 제가 기사와 같은 일을 하게 됩니다.”이경은 반박문에서 미라와 채은의 이름을 뺐다. 월백 작업대의 시간 기록, 합성사진에 존재하지 않는 재단 장비, 촬영 원본을 요구하는 문장만 올렸다.디지털 감정인은 잘린 천의 그림자가 가위 방향과 맞지 않고, 배경에 쓰인 작업대가 한주 홍보실 소품이라는 예비 의견을 냈다. 이경은 확정 전이라는 표시를 지우지 않았다. 빨리 이기려고 추정을 사실처럼 쓰면 세라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객 동의 없이 실제 의상과 가족 정보는 공개하지 않겠습니다.’댓글은 답답하다며 증거를 내놓으라고 재촉했다. 예약 두 건이 취소됐다.취소한 고객 중 한 명은 “사실이 아니어도 시끄러운 업체는 싫다”고 말했다. 이경은 붙잡지 않고 기작업 비용까지 면제했다. 잘못이 없어도 평판 공격의 비용은 실제 장부에서 빠져나갔다.정 실장은 손실표를 보여 주면서도 드레스 상자에는 손대지 않았다.“이번에도 버틸 수는 있어요. 대신 주말 예약을 더 받으면 안 됩니다.”“안 받아요. 직원 일정은 그대로 갑니다.”이경은 손실을 숨기지 않고 미라에게 알렸다. 죄책감 때문에 공개를 허락하게 만들지 않으려, 먼저 덧붙였다.“비용은 월백이 감수합니다. 선택은 바꾸지 않으셔도 돼요.”채은이 기사 사진을 다시 보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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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 고인의 이름으로 낸 가짜 기사

“예식까지 열여덟 시간 남았는데 보험을 취소한다고요?”이경의 질문에 담당자는 같은 문장만 반복했다.“위험 심사 결과가 바뀌었습니다.”“어떤 위험이요?”“내부 기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통화가 끊기자 대관 계약 해지서가 도착했다. 사유는 ‘고객 가족 간 분쟁으로 인한 안전 우려’였다. 세라가 만든 합성기사가 근거 자료로 첨부돼 있었다.미라가 화면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내 남편 이름으로 거짓말을 만들더니, 그 거짓말로 내 결혼식도 막네요.”이경은 장소부터 찾겠다고 말하려다 멈췄다. 고객에게 묻기 전에 또 정답을 내놓을 뻔했다.“미라 씨가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날짜를 미룰 수도 있고, 규모를 줄일 수도 있고, 지금 계약을 끝낼 수도 있어요. 어떤 선택도 비용을 고객에게 떠넘기지 않겠습니다.”미라는 옆에 앉은 채은을 보았다.“나는 내일 하고 싶어. 더 미루면 남들이 허락해 줄 때까지 기다리게 될 것 같아.”채은이 입술을 깨물었다.“나는 호텔 싫어. 카메라 올 것 같아.”“그럼 카메라가 못 들어오는 곳이어야겠네.”정호가 휴대전화 지도를 열었다. 교회, 주민센터, 소형 공연장에 차례로 전화했지만 토요일 자리는 없었다. 가능하다는 곳도 보험 없이 행사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선우는 로안의 다른 연회장을 확인했다. 모두 한주와 공동으로 든 행사 보험에 묶여 있었다.“제가 개인 명의로 보증하면—”“안 됩니다.”이경이 잘랐다.“개인 보증으로 절차를 건너뛰면 다음 고객도 대표 한 사람에게 매달리게 돼요. 허가와 보험이 가능한 공간을 찾아야 합니다.”그때 한주 법무팀 내부 메일이 제보로 들어왔다.‘오미라 예식은 사망 배우자 유품 분쟁 중. 취소 시 부당 개입 논란 가능.’그 아래 태준의 답장이 달려 있었다.‘알고 있다. 장소와 보험 모두 중단. 책임은 월백에 귀속.’법무팀은 합성 가능성과 고객 손해까지 적어 경고했다. 태준은 두 줄 아래 전자승인 버튼을 눌렀다.이경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몰랐다는 변명조차 막아 둔 기록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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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 두 번째 사랑의 자리

“여기는 취재 장소가 아닙니다.”채은이 기자들 앞에 종이를 붙였다. 삐뚤한 글씨로 ‘가족 허락 없는 촬영 금지’라고 적혀 있었다.한 기자가 식당 안을 기웃거렸다.“오미라 씨가 공개적인 피해를 주장했으니 반론도 공개해야죠.”“피해를 주장한 건 기사였어요. 우리 엄마 아니고.”채은은 떨면서도 문에서 비키지 않았다. 이경이 아이를 뒤로 보내고 촬영 금지 통지서를 내밀었다.“고객이 인터뷰를 거절했습니다. 고인 이름과 미성년자 얼굴을 촬영하면 바로 신고하겠습니다.”기자들은 길 건너로 물러났지만 렌즈는 내리지 않았다.미라가 주방 앞에서 앞치마 끈을 묶고 있었다. 결혼식 두 시간 전인데 직접 국을 끓였다.“신부가 이래도 되나?”정호가 웃으며 국자를 빼앗았다.“오늘은 손님이니까 앉아 있어요.”“내 식당에서 누가 나를 손님 취급해.”미라의 웃음이 처음으로 자연스러웠다.작업실 직원들은 드레스 옆선을 마무리했다. 이경은 안감의 채은 그림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바늘을 내려놓았다. 약속한 최종 피팅 시간까지 십 분이 남아 있었다.“완성입니다.”미라는 드레스를 입고 식당 홀을 한 바퀴 걸었다. 겉은 새 천이었고, 허리 안쪽에만 푸른 실 그림이 숨어 있었다. 오래된 드레스는 창고가 아니라 미라의 집 보존 상자에 그대로 있었다.“엄마.”채은이 입구에서 불렀다.미라는 대답을 기다렸다. 같이 걸어 달라고 먼저 말하지 않았다.“나 중간까지만 갈래. 끝까지는 정호 아저씨가 와.”“그래.”“아빠 사진도 들고 갈 건데 괜찮아?”미라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들고 싶으면.”식은 계획보다 마흔 분 늦게 시작됐다. 백 명 중 예순세 명만 왔고, 절반은 마당 밖 골목에 서 있었다. 꽃장식 대신 식당의 들깻잎 화분이 통로를 만들었다.오지 않은 하객의 빈 의자는 치우지 않았다. 미라는 취소 문자를 보낸 사람에게 서운함을 돌려주지 않았고, 온 사람에게 한주와 싸운 용기를 칭찬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채은은 아버지의 작은 사진을 품에 안고 어머니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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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 늦은 고맙다는 말

태준은 밤새 서이경의 글씨를 지우지 못했다.자기 이름으로 발표된 드레스 서른여덟 벌. 구조를 바꾼 붉은 선, 신부의 통증을 적은 메모, 납기를 맞추려고 새벽 세 시에 저장한 기록마다 작성자는 이경이었다.그가 한 일은 마지막 발표 자료에서 익명 표시를 확인한 것뿐이었다.‘허리 절개 2센티미터 아래. 고객이 앉을 때 갈비뼈 압박.’‘장식 삭제. 신부가 어머니 취향을 거절함.’태준은 두 번째 메모 앞에서 손을 멈췄다. 이경은 모르는 신부의 거절은 지켜 주면서, 자기 이름이 지워지는 일에는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그 침묵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정확히는 자신을 위한 사랑이 계속 공짜일 거라고 믿었다.휴대전화를 들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두 글자를 썼다.‘고맙다.’답은 점심이 지나 도착했다. 문장이 아니라 파일이었다.‘조정 별첨 누락분: 한주웨딩 미지급 보수 명세.’합의서에 오른 열 명의 수당은 기한에 맞춰 지급됐지만, 증거가 없어 빠졌던 퇴직자와 외주 인력이 남아 있었다. 재단사, 피팅 직원, 야간 계약직의 이름과 시간이 한 줄씩 적혔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지연 이자 계산이 붙었다.태준이 전화를 걸었다.“문자는 봤어?”“봤어요.”“그게 답이야?”“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먼저 갚으세요. 내게 보낼 말로 직원들 시간을 대신하지 말고.”“네 몫은?”“이혼 조정에서 정리했습니다.”“칠 년을 숫자 몇 줄로 끝낼 수 있어?”이경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끝낸 건 숫자가 아니라 당신 선택이에요.”통화는 끊겼다.태준은 재무팀을 불렀다. 명세를 지급하라고 지시하자 담당 임원이 난색을 보였다.“법적으로 시효가 지난 항목도 있고, 회사가 인정하면 유사 청구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확인되는 시간은 지급해.”그 말은 처음으로 옳았지만 늦었다. 지급 승인란 아래에는 과거 미지급을 묵인한 대표의 전자서명도 함께 남았다.명세 속 사람들의 계좌에 돈이 들어오자 누구도 태준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정 실장은 입금 여부를 확인한 뒤 원본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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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 친부라는 남자

“봄아, 엄마 뒤로.”이경이 아이 앞을 막자 박도윤은 카메라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보셨죠? 친아빠를 또 못 만나게 합니다.”봄은 이경의 코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손가락 힘이 세졌다.“촬영 끄세요. 미성년자 동의가 없습니다.”이경이 말했지만 한 기자는 렌즈를 내리지 않았다.“박도윤 씨는 아이를 빼앗겼다고 주장합니다. 입양 당시 강압이 있었습니까?”도윤이 낡은 사진을 치켜들었다.“지안이가 죽고 정신도 없는데 재벌가에서 변호사를 보냈어요. 서이경이 애를 가져가야 자기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거짓말이 너무 매끄러웠다. 일곱 해 전 도윤은 병원에 세 번밖에 오지 않았다. 한 번은 지안의 휴대전화를 가져가려고, 한 번은 보험금을 묻기 위해, 마지막은 서류에 서명하고 돈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친권과 입양에 관한 답은 기록으로 하겠습니다.”이경은 도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학교에서 물러나세요.”“피가 섞인 아빠가 딸 보겠다는데 네가 뭔데 막아?”봄의 몸이 움찔했다. 이경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법적 보호자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싫다고 합니다.”“애가 뭘 알아. 네가 시켰겠지.”도윤이 한 걸음 다가오자 학교 보안요원이 사이를 막았다. 이경은 신고 전화를 걸고, 기자들에게도 아동 얼굴이 담긴 원본을 보존하되 송출하지 말라고 통지했다.도윤은 경찰이 도착하기 직전 카메라를 보며 울었다.“돈 많은 사람들이 내 딸을 훔쳐 갔습니다.”그날 저녁 인터뷰가 첫 화면을 차지했다. 봄의 얼굴은 모자이크됐지만 교문과 교복 색이 그대로 나왔다. 학교 이름을 알아낸 사람들이 댓글에 주소를 적었다.교장은 전화를 걸어 당분간 등교를 쉬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피해 아이를 집에 두라는 말입니까?”“다른 학생들 안전도 있어서요. 취재진이 계속 오면—”“전학 절차와 보호 대책을 문서로 보내세요. 봄이 잘못 때문에 떠나는 것처럼 기록하지 마시고요.”같은 반 학부모들은 단체방에서 취재진 때문에 아이들이 위험하다고 항의했다. 봄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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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 엄마가 된 건 법원 때문이 아니다

“법원에서 엄마 하라고 해서 한 거야?”봄이 신생아 팔찌를 손가락에 걸었다. 너무 작아 이제는 손목에 들어가지도 않았다.이경은 친권상실 결정문을 옆으로 밀었다.“아니. 법원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내 결정을 확인해 준 곳이야.”“그럼 이모라서?”“그것도 전부는 아니야.”이경은 일곱 해 전 신생아집중치료실을 떠올렸다. 투명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봄의 가슴은 종잇장처럼 작게 오르내렸다. 봄이 태어난 지 열이틀째, 산후심근병증으로 지안이 숨진 날에도 아이는 기계 소리 속에서 혼자 숨을 쉬었다.박도윤은 치료비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살아날지 모르는 아이에게 돈을 쓰기 싫다고 했다. 사회복지사는 장기 위탁도 선택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이경은 처음부터 용감하지 않았다. 스물여섯에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결혼과 일을 모두 잃을지 무서워 병원 화장실에서 여러 번 토했다.그래도 매일 같은 시간 봄의 등에 손을 올렸다. 팔십구 일째, 인큐베이터 밖으로 나온 아이가 이경의 검지를 놓지 않았다.“언니한테 빚을 갚으려고 너를 데려온 게 아니야.”봄의 눈이 이경에게 머물렀다.“너를 남의 아이로 두고 살 수 없는 사람이 엄마였어. 네가 뭘 갚아야 해서도 아니고, 착하게 살아야 해서도 아니야. 엄마가 너를 원해서 서명했어.”“내가 많이 아팠는데도?”“아파서가 아니라 봄이라서.”이경은 지안이 마지막에 남긴 말을 예쁜 유언처럼 꾸미지 않았다. 언니는 숨이 차 제대로 긴 문장을 말하지 못했고,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보다 무섭다는 말을 더 많이 했다.“이모도 용감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어. 살고 싶어 했고, 너를 안아 보고 싶어 했어. 엄마는 그 마음까지 기억해.”봄은 팔찌 옆에 노란 리본을 놓았다. 지안이 신생아실 유리창에 묶어 둔 표식이었다.“그럼 이건 엄마랑 이모랑 나 셋 거야?”“네가 가지고 싶으면 네가 보관해. 보여 주고 싶은 사람도 네가 정하고.”봄은 한참 팔찌만 만졌다.“친아빠는 나 안 원했어?”이경은 거짓 위로를 고르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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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 오십다섯의 첫 피팅

“등이 안 잠기네요.”최영숙은 거울 앞에서 웃었지만, 직원의 손에 들린 지퍼는 손바닥만큼 벌어져 있었다.월백이 가진 가장 큰 샘플이었다. 이경은 임시 천을 덧대려다 영숙에게 먼저 물었다.“지금 모습을 그대로 보고 싶으세요, 아니면 등을 가린 뒤 상담할까요?”“그대로 봅시다. 내 등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아닌데.”영숙은 어깨를 펴고 거울을 보았다. 배와 팔뚝, 굽은 손가락까지 국밥집에서 삼십 년을 버틴 몸이었다.성인 아들 동민이 한숨을 쉬었다.“엄마, 맞는 옷도 없는데 꼭 드레스를 입어야 해?”딸 수진도 낮게 거들었다.“동네 사람들이 웃어. 아빠 돌아가신 지 십오 년이나 됐는데 갑자기 결혼이라니.”“십오 년이나 혼자 살았으니 이제 하는 거지.”영숙은 웃으며 답했지만 지퍼를 잡은 손끝은 떨렸다.영숙은 샘플을 벗기 전에 한 번 앉아 보겠다고 했다. 지퍼가 열린 등보다 허벅지에서 치마가 말려 올라가는 것이 더 불편했다.“서 있을 때만 맞는 옷은 사진 옷이지 사람 옷이 아니잖아요.”이경은 직원에게 큰 천으로 등을 가리라고 하면서도 영숙이 원하는 높이를 먼저 확인했다. 피팅 기록에는 숫자보다 ‘앉아서 밥 먹기’가 첫 요구로 적혔다.예비 신랑 배기철은 식당에서 함께 일한 지 스무 해 된 사람이었다. 아픈 남편을 간병할 때부터 주방을 지켰고, 사별 뒤에도 청혼 한마디 없이 곁에 남았다. 두 사람은 지난해에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기철 씨는 뭐라고 합니까?”이경이 묻자 영숙이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앞치마만 입고 와도 예쁘대요. 그 양반 말은 도움이 안 돼.”작업실에 웃음이 번졌다. 동민만 웃지 않았다.“재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라고 어떻게 알아요?”영숙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그건 내가 확인할 일이다.”“엄마가 들떠 있으니까 우리가—”“들뜬 사람은 계약서도 못 읽니?”영숙은 가방에서 혼전 재산 약정서와 식당 지분 계약을 꺼냈다. 자녀 몫과 자신의 생활비, 기철의 급여와 거주권까지 법률 상담을 받아 정리한 서류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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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 사이즈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

“사이즈 추가금을 없애면 이번 분기 이익이 칠 퍼센트 줄어요.”정 실장이 계산표를 돌렸다. 이경은 숫자를 감추지 않고 직원들과 마주 앉았다.“없애자는 말부터 하기 전에 구조를 봅시다. 원단 손실이 정말 체형 때문인지, 우리가 한 사이즈씩 따로 재단해서인지.”재단대 위에 지난 석 달의 배치도가 펼쳐졌다. 작은 드레스 옆에 버려진 긴 조각, 큰 드레스 곡선 사이에 남은 삼각형 천이 표시됐다.막내 재단사가 두 주문을 맞붙였다.“사이즈가 다른 세 벌을 한 번에 배치하면 손실이 줄어요. 지금은 대표님이 한 고객씩 직접 자르니까 다음 주문을 같이 못 봐요.”이경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고객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정성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모든 판단을 자기 손에 쥐고 직원의 눈을 쓰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한번 짜 보세요.”세 사람이 종이 패턴을 옮겼다. 영숙의 넓은 치맛단 옆에 다른 고객의 탈착 소매용 조각과 베일이 들어갔다. 버리는 천이 절반으로 줄었다.“제가 이 배치를 승인하는 게 아니라, 재단팀이 기준을 만들어요. 원단 결 방향과 고객별 비공개 표시는 반드시 두 사람이 확인하고요.”정 실장이 물었다.“가격은요?”“기본 디자인은 사이즈와 상관없이 같은 가격. 특수 장식과 실제 추가 작업만 항목별로 받겠습니다. 작은 사이즈에서 남는 천을 재사용했으면 그 이익도 전체 원가에 반영하고요.”이경은 자신이 받던 디자인 수수료를 줄여 손실을 덮으려다 그 문장을 지웠다. 대표 개인 희생으로 유지되는 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대신 샘플 수를 줄이고, 주문마다 새로 만들던 기본 몸판을 네 가지 움직임 유형으로 표준화했다. 앉는 시간이 긴 고객, 팔을 많이 드는 고객, 보조기와 함께 입는 고객, 허리 압박을 피하는 고객이었다.다음 날 영숙이 다시 왔다.이경은 수정 견적과 원가표를 함께 내밀었다.“추가금은 없습니다. 선의로 한 번 빼 드리는 게 아니라 모든 고객에게 적용합니다.”“회사가 망하면 나만 좋은 사람이 되잖아요.”“그래서 유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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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 날씬해진 가짜 사진

최영숙의 맨발 피팅 사진이 새벽 여섯 시에 퍼졌다.등이 열린 임시 몸판, 접힌 배, 자수 위치를 확인하려 들어 올린 팔까지 그대로였다. 촬영에 동의한 적 없는 모습이었다.세라의 팬 계정은 사진 옆에 웃는 표시를 붙였다.‘오십대의 무리한 공주놀이.’댓글은 영숙의 몸을 음식과 가축에 빗댔다. 누군가는 사진 배경으로 월백 주소를 알아냈다.이경이 영숙에게 전화했을 때, 영숙은 이미 식당 문을 닫고 있었다.“손님 두 명이 와서 사진처럼 정말 크냐고 묻더라고요.”평소 같으면 욕부터 했을 사람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침착함이 더 아팠다.식당 예약 취소 문자에는 ‘사진을 보고 입맛이 떨어졌다’는 문장까지 있었다. 영숙은 주방 직원에게 화면을 보여 주지 않고 그날치 식재료부터 계산했다. 이미 끓인 육수와 손질한 고기는 사진이 내려가도 돌아오지 않았다.“사진 삭제 절차를 시작했습니다. 경찰 신고와 플랫폼 요청, 어떤 것도 영숙 씨 동의 없이 진행하지 않겠습니다.”“내가 숨어야 해요?”“아닙니다. 숨을지 공개할지도 고객님이 정합니다. 다만 지금 보셔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한주 계정에 새 다이어트 광고가 올라왔다. 같은 피팅 사진 속 영숙의 허리는 절반으로 줄고 턱선은 매끈해져 있었다.‘사랑 앞에 나이는 숫자, 사이즈도 선택입니다.’모델 이름은 없었지만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광고 끝에는 백세라가 디자인한 슬림 웨딩 컬렉션이 등장했다.영숙이 낮게 욕했다.“내 몸으로 자기 옷을 파네.”한주 내부 결재 문서도 곧 제보됐다. 법무팀은 초상권 동의가 없고 원본 취득 경로가 불법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세라는 ‘공익적 체중 관리 캠페인’이라고 수정 의견을 냈다. 최종 집행란에는 강태준의 서명이 있었다.‘논란성은 있으나 타깃 반응 예상. 진행.’이경은 문서를 읽고도 놀라지 않았다. 태준은 위험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경의 고객을 숫자로 봤기 때문에 승인했다.광고 중단 통지를 보내자 한주 홍보팀은 모델 특정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이경은 영숙에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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