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축하해, 여보. 그런데 그 아이 당신 아이 아니잖아: Chapter 81 - Chapter 90

90 Chapters

81화 — 이름 삼백열두 개

“부인하세요, 서 대표. 기자들이 기다리잖아요.”세라가 마이크를 살짝 내리고 웃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단상 앞 첫 줄까지는 충분히 닿았다.플래시가 다시 터졌다. 기자들이 원하는 그림은 둘 중 하나였다. 위조라고 소리치는 전 재벌가 며느리, 아니면 울면서 퇴장하는 몰락한 디자이너.세라가 준비한 답도 그 두 갈래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이경은 화면 속 동의서 목록을 올려다봤다. 최종 승인자 서이경. 인증서 일련번호. 승인 시각 14시 00분 12초.그녀는 그 숫자를 그대로 읽었다.“오늘 오후 두 시 00분 12초. 이 승인에 쓰인 인증서는 제 것이 맞습니다.”행사장이 한순간 조용해졌다.“어디서, 누구 손으로,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되기 전까지 그 책임은 제가 집니다. 동의서에 이름이 오른 삼백열두 분께는 칠십이 시간 안에 월백이 직접 알리겠습니다. 기사보다 먼저요.”객석이 술렁였다. 기자들의 펜 끝이 한꺼번에 움직였다.세라의 미소가 멈췄다.0.5초.이경은 그 짧은 정지를 놓치지 않았다. 부인할 줄 알았던 상대가 먼저 인정해 버리면, 반박용으로 준비한 자료는 갈 곳을 잃는다.“덧붙이면, 두 시 정각에 저는 이 건물 대기실에서 고객 드레스 치맛단을 뜯고 있었습니다. 실밥이 아직 제 소매에 붙어 있네요.”이경이 소매를 들어 보였다. 흰 실 한 가닥이 조명 아래서 반짝였다. 객석 어딘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세라는 곧 웃음을 되찾았다. 회복이 빠른 사람이었다.“책임지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누구를 상대하는지도 정확히 아셔야죠.”리모컨이 눌렸다. 초승달 문장 아래 새 로고가 떠올랐다.‘WOLBAEK GLOBAL by VELOCE.’“오늘 오전 열 시, 밀라노의 벨로체 럭셔리가 애스터 헤리티지 인수를 마쳤습니다. 문화이트 글로벌은 오늘부로 이 이름을 씁니다.”세라는 가슴의 금빛 문장을 손끝으로 쓸었다.“저는 벨로체 그룹 WOLBAEK GLOBAL 브랜드 책임자 백세라입니다. 이제 서 대표가 싸울 상대는 한국 재벌가의 이혼 소송이 아니에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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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 길 건너편의 월백

“줄이 지하철역까지 꺾였대요.”직원 하나가 유리창에 이마를 붙인 채 말했다.일주일 뒤 아침 열 시. WOLBAEK GLOBAL 성수 플래그십이 문을 열었다.한주호텔 제복을 입은 발렛 직원들이 검은 차 문을 열었다. 한주물류 로고를 단 탑차가 뒷골목으로 세 대째 들어갔다. 개장 기념품을 받으려는 줄은 길을 건너 월백 매장 앞 보도까지 밀려왔다.월백 문 앞 화분이 누군가의 쇼핑백에 걸려 넘어졌다.정 실장이 흙을 쓸어 담으며 이를 갈았다.“남의 집 문 앞에서 저쪽 줄을 서네.”이경은 고개를 들었다. 플래그십 2층 통유리 너머에서 세라가 샴페인 잔을 들었다. 정확히 월백 쪽을 향해서.이경은 잔 대신 목에 건 줄자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문 앞에 손글씨 종이 한 장을 붙였다.‘이 가게는 줄 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느질은 안에서 합니다.’기다리던 사람 몇이 종이를 읽고 웃음을 터뜨렸다. 휴대전화로 찍어 가는 사람도 있었다. 2층의 잔이 조금 내려갔다.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열한 시, 등기 우편이 도착했다. 발신은 벨로체 럭셔리 법무팀. 영문 사십 쪽, 한국어 번역본 사십이 쪽.‘23개국 내 WOLBAEK 로마자 표기 및 초승달 문장 사용 즉시 중단. 수출용 포장, 택, 상자, 운송장 표기를 포함함.’정 실장이 국가 목록을 넘겼다.“싱가포르, 일본, 대만, 프랑스, 이탈리아……. 우리 옷이 한 벌도 안 나간 나라도 있어요.”“먼저 등록해 두면 가 보지도 않은 나라에서 우리를 막을 수 있어요. 저쪽은 그걸 아는 거예요.”인쇄소에 맡겨 둔 영문 택 삼천 장이 그날 오후 그대로 폐기 상자로 들어갔다.삼백열두 명에게 보낸 통지는 사흘 전에 끝나 있었다.칠십이 시간 동안 직원 넷이 교대로 전화를 돌렸다. 받지 않는 번호에는 문자와 등기를 함께 보냈다. 어떤 정보가 나갔는지, 월백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를 수 있는 대응이 무엇인지. 마지막 줄에는 월백에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안내를 넣었다.자문 변호사가 그 줄만은 빼자고 했지만 이경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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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 먼저 등록한 사람

“지우지 마세요. 지우는 순간 증거도 같이 지워져요.”오세진이 장갑 낀 손으로 태블릿을 받쳐 들었다.세진포렌식 대표. 사십 대 중반, 짧은 단발, 말끝마다 시각을 적는 사람이었다.“열 시 사십이 분, 전원 켜진 상태로 인수. 화면 촬영 시작.”그녀는 태블릿을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 화면을 한 장씩 찍고, 설치 목록을 영상으로 남기고, 통신 기록을 떠 냈다. 어떤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반드시 소리 내어 말했다.사십 분 뒤 그녀가 화면 하나를 가리켰다.“원격관리 프로그램이에요. 압수 조서에 적힌, 공용 PC에서 실행 중이던 프로그램과 이름이 같네요.”이경은 태블릿 화면 구석의 작은 아이콘을 봤다. 매일 아침 이 기계로 상담을 기록했다. 다온이 ‘젖은 비단’이라는 이름을 처음 소리 내 말하던 순간에도 이 화면은 켜져 있었다.“지금 바로 끊을 수 있어요?”“끊을 수는 있죠. 대신 누가 언제 들어왔는지도 같이 끊겨요.”“언제부터 깔려 있었어요?”세진이 설치 기록을 넘겼다.“설치 일자는 개장 전날이에요. 새벽 시간대. 누가 설치를 요청했는지는 업체 쪽 서류를 봐야 알아요. 추측으로 이름 붙이지 않을게요.”개장 전날. 이경은 그 날짜를 머릿속 어딘가에 접어 두었다.세진은 태블릿을 차단 봉투에 넣고 봉인 스티커를 붙였다.“저는 해커가 아니에요. 문 따는 사람이 아니라, 문 앞 발자국을 안 지우는 사람이에요. 이건 그대로 수사기관에 넘기겠습니다.”상담 기록 일주일 치가 태블릿과 함께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오후에는 민해수 변호사가 왔다.월백이 직접 위임한 상표·국제분쟁 변호사였다. 사십 대, 회색 정장, 서류를 펼치기 전에 계산기부터 꺼내는 사람.“나쁜 소식부터 할게요. 좋은 소식은 아직 없어서요.”그녀가 첫 장을 넘겼다.“문화이트는 여섯 해 전에 WOLBAEK을 3류까지 등록해 뒀어요. 향수, 화장품. 웨딩드레스 회사가 왜 향수까지 잡았는지 그땐 아무도 안 물었겠죠.”두 번째 장.“벨로체는 ‘젖은 비단’을 일본, 대만, 싱가포르에 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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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 녹아내린 향

“냉장비는 월백이 내겠습니다. 오늘 안에 다시 옮겨 주세요.”“고객님, 규정상 이미 이동이 완료됐습니다.”한주물류 고객센터 직원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단단했다.“언제 옮겼죠?”“알림 발송 시각 기준 삼십 분 전입니다.”알림보다 이동이 먼저였다. 이경은 수화기를 쥔 손을 바꿨다.“그 규정은 언제 생겼어요?”잠시 키보드 소리가 났다.“분쟁 화물 보관 지침은…… 지난주 화요일 개정됐습니다.”“우리 화물이 들어온 다음 날이네요. 그 지침, 개정 문서 그대로 메일로 보내 주세요. 승인란까지요.”직원이 머뭇거렸다. 이경은 녹음 중이라고 알렸다. 이십 분 뒤 PDF 한 장이 도착했다.‘한주그룹 비상경영위원회 물류 리스크 지침 제3호. 위원장 승인.’승인자 서명란에 강태준이 있었다.이경은 파일을 민해수에게 바로 보냈다. 화물 하나 묶는 데도 그는 직접 서명했다. 기록은 남았다.그러나 기록은 향을 식혀 주지 않았다.회수 승인은 이틀 뒤에야 났다. 분쟁 보류 해제 절차, 화주 확인서, 보관료 정산. 서류 한 장마다 반나절씩 걸렸다.이경은 다온과 함께 인천으로 갔다. 일반 구역 창고는 철판 지붕 아래 있었다. 문이 열리자 더운 공기가 얼굴을 덮었다.창고 직원이 온도 기록지를 내밀었다. 이틀 동안 최고 31도.다온은 상자를 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테이프를 뜯는 손이 느렸다. 병 하나를 꺼내 불빛에 비췄다. 맑던 연둣빛이 흐린 호박색으로 변해 있었다.뚜껑을 열자마자 다온이 고개를 돌렸다.“끝났어요.”이경은 냄새를 맡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온의 얼굴이 먼저 말했다.“초록이 다 죽었어요. 쇠 냄새만 남았어요. 산화된 거예요.”다온은 이백 병을 하나씩 다 열어 봤다. 이경은 말리지 않았다. 마지막 병까지 확인해야 끝낼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온은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코에 남은 쇠 냄새를 바람으로 씻어 내려는 것 같았다.같은 날 도쿄 세관에서 통지가 왔다. 수입정지된 샘플 병은 상표권 침해 의심 물품으로 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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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 다시 만들 수 없는 향

“계약서 돌려드리러 왔어요.”다온은 봉투를 라운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세라가 펜 뚜껑을 열던 손을 멈췄다.월백 직원들은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본 건 십오 분 뒤 다온이 빈손으로 길을 건너오는 모습뿐이었다.다온은 월백 문을 열자마자 보리차부터 달라고 했다.“거기 물에서 소독약 냄새 나요.”남도은이 컵을 건네자 다온은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안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옮겼다.“합성으로 복원해 주겠다길래 물었어요. 그 향 왜 만들었는지 아냐고.”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했다.‘알 필요 없어요. 팔리는 건 냄새지 사연이 아니니까.’“그래서 말했어요. 그러니까 못 팔아요, 내 건.”정 실장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박수를 치려던 손이었다.다온은 웃지 않았다.“통쾌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사람 말이 반은 맞아서 그래요. 팔리는 건 냄새 맞아요. 근데 나는 팔려고만 만든 게 아니라서.”그녀가 이경을 봤다.“그리고 대표님한테도 할 말 있어요.”“네.”“수출 안 해요. 일본도 대만도. 국내에서, 제 이름으로만 내요. ‘DAON’ 하나만요.”다온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덧붙였다.“공동 라벨도 빼 주세요. 월백 이름이 붙은 순간부터 제 향이 남의 싸움 한복판에 들어갔어요. 미안해요.”미안할 사람은 다온이 아니었다.이경은 아팠다. 월백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줄 첫 협업이었다. 그 이름을 스스로 지워 달라는 말을 듣는 건 생각보다 아팠다.“빼겠습니다. 오늘 안에 라벨 파일 넘겨 드릴게요.”“드레스는요?”“드레스는 끝까지 만듭니다. 그건 다온 씨 옷이니까요.”결혼식은 원래 날짜 그대로 연남동 조향공방에서 열렸다. 로안의 연회장 대신 다온이 고른 장소였다.하객은 마흔 명. 증류기와 유리병이 늘어선 선반 사이에 접이식 의자가 놓였다. 신랑 남한결은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었다.“여러분, 지금 이 공기 중 에탄올 농도가요, 아마 결혼식장 역사상 최고일 겁니다. 불은 피우지 마세요.”하객들이 웃었다.서약 순서에서 한결은 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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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 새벽 네 시의 신부

“이 시간에 문 연 웨딩숍 처음 봐요. 사기 아니죠?”새벽 네 시. 월백 유리문 앞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회색 근무 조끼에 운동화, 어깨에는 커다란 천 가방. 목에 건 끈에는 휴대전화가 두 대 매달려 있었다.이경은 재단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설치 요청서를 본 뒤로 잠이 오지 않았다.요청서는 그날 오후 진술서와 함께 수사기관에 냈다. 서명은 내 손이 했지만 무엇이 깔리는지는 몰랐다고, 그리고 몰랐다는 것도 책임이라고 적었다. 그 뒤로 사흘째, 그녀는 새벽마다 작업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집에서는 눈을 감으면 새벽 2시 7분이 떠올랐다.“사기면 이 시간에 불 켜고 있겠어요? 전기세 아깝게.”여자가 피식 웃었다.“그 말이 더 사기꾼 같은데요.”이경미. 서른여덟. 한주케어 소속 방문요양보호사. 방금 야간 근무를 마치고 첫차를 기다리다 불 켜진 간판을 봤다고 했다.“제가요, 말이 빨라요. 시간이 없어서요. 육 주 뒤에 결혼해요. 신랑은 택배기사고요. 그 사람도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둘 다 말이 빨라요.”“드레스는 어떤 걸 원하세요?”“숨 쉬어지는 거요.”경미가 조끼 단추를 풀었다.“한복 대여점 갔더니 허리를 졸라매요. 제가 하루에 어르신 몸을 몇 번 일으키는지 알아요? 허리 졸리면 저 식장에서 쓰러져요. 그리고 주머니. 두 개요.”그녀가 목에 건 휴대전화 두 대를 들어 보였다.“하나는 회사 폰, 하나는 내 폰. 결혼식 날도 둘 다 울릴 거예요.”경미의 눈이 벽에 붙은 가격표로 갔다. 원단비, 부자재비, 재단 시간, 봉제 시간, 인건비. 줄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와. 인건비를 이렇게 써 붙인 데 처음 봐요.”“숨기면 누군가 그만큼 공짜로 일하게 되니까요.”“우리 회사는 제 시급을 저한테도 잘 안 알려 줘요. 월급날 맞혀 보는 재미가 있죠.”건조한 말투였다. 농담인지 아닌지 한 박자 늦게 알 수 있는 종류의.“예산은 얼마예요?”“준석 씨랑 둘이 모은 게 있어요. 드레스는 이백 넘으면 안 돼요. 넘으면 신혼여행이 제주도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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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 바뀌는 근무표

“또 바뀌었어요. 이번 주만 세 번째.”경미가 업무폰을 흔들며 들어왔다. 화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월요일엔 화목 새벽이라더니, 수요일엔 수금 새벽이래요. 오늘 아침엔 또 화목이래요. 제가 무슨 택배 상자예요?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게.”“그럼 저도 옮기면 되죠.”이경은 바로 달력을 열었다. 근무표가 바뀔 때마다 피팅 시간을 옮겼다. 새벽 다섯 시에서 여섯 시로, 다시 새벽 한 시로.경미가 화면을 들여다봤다.“대표님, 새벽 한 시에 피팅하고 다섯 시에 또 피팅하면 언제 주무세요?”“세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 하는 사람치고 충분한 사람 못 봤어요. 제가 그런 분들 기저귀도 갈아 드려요, 나중에.”농담이었지만 경미는 웃지 않았다.새벽 다섯 시 반, 문밖에서 트럭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택배 조끼를 입은 남자가 캔커피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오준석이었다. 첫 배송 터미널이 근처라 했다.“신부님 피팅 구경은 반칙이라길래, 커피만 놓고 갑니다.”그는 커피를 재단대 끝에 내려놓고 정말로 돌아섰다. 문 앞에서 한 번 뒤돌아봤다.“대표님. 이 사람 숨 쉬는 옷, 꼭 부탁드려요. 이 사람 숨 참는 거 선수예요.”경미가 커튼 너머에서 소리쳤다.“빨리 가! 늦으면 또 별점 테러 당해!”그 주 이경은 매일 세 시간씩 잤다. 봄의 밤은 등록해 둔 야간 돌봄 선생님이 지켰다. 봄이 잠든 뒤 나왔다가 봄이 깨기 전에 돌아가는 날들이었다.봄은 아침마다 엄마 눈이 왜 토끼 같냐고 물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묻지 않고, 자기 눈을 손가락으로 당겨 빨간 척을 했다. 같이 토끼가 되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이경은 웃었지만, 그 웃음 끝이 조금 아팠다.목요일 오전, 가봉 치수표가 도은에게 넘어갔다. 월백의 이중 치수 확인 절차였다. 대표가 잰 치수도 예외는 없었다.도은이 표를 들고 재단실로 왔다.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대표님, 이 숫자 두 번 다르게 적으셨어요.”진동 둘레. 앞장에는 38, 뒷장에는 83.숫자를 뒤집어 적은 것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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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 문자 한 통의 값

“업무폰으로 문자 보낸 건 제 잘못입니다.”이경은 경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처음 적어 주신 번호를 그대로 썼어요. 어느 번호인지, 누가 그 폰을 관리하는지 묻지 않았어요. 그 문자 한 통 한 통이 회사에 일정표를 넘겨준 거예요.”경미가 손을 저었다.“제가 그 번호를 적었잖아요.”“고객이 번호를 적는 건 실수가 아니에요. 그 번호로 뭘 보낼지 정하는 건 우리 일이었어요.”사과 뒤 이경은 곧바로 움직였다. 한주케어 운영본부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찾았고, 근무표 변경 사유를 서면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오후에는 직접 본부에 찾아갈 생각이었다.경미가 그 사실을 안 건 저녁이었다.“대표님, 본부에 전화하셨어요?”“사유를 요구했어요. 문서로 받아야 나중에…….”“하지 마세요.”경미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빠르던 말이 처음으로 끊겨 나왔다.“대표님이 나서면 저 진짜 잘려요. 대표님은 사장님이잖아요. 저는 근무표 한 장에 목숨 거는 사람이고요. 대표님이 본부에 전화한 거, 벌써 팀장이 알아요. 오늘 저한테 ‘월백이랑 무슨 사이냐’고 물었어요.”이경은 휴대전화를 쥔 채 굳었다.구하려던 손이 또 한 번 경미의 목줄을 당긴 셈이었다. 경미의 직장은 이경이 들어가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문을 두드린 대가는 경미가 다음 날 아침 근무표로 받았다.“……찾아가지 않을게요.”그날 밤 열한 시. 이경은 재단대에 엎드려 있었다. 새벽 한 시 피팅 전에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그대로 잠들었다.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대표님. 대표님, 여기서 주무시면 목 돌아가요.”도은이었다. 퇴근했어야 할 시간이었다.“도은 씨가 왜 여기…….”“정 실장님이 불렀어요. 저희 다 있어요.”재단실 문가에 직원 넷이 서 있었다. 맨 앞에 정 실장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대표님, 하나만 물을게요.”“……네.”“혼자 밤새우는 게 원칙 지키는 거예요?”이경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정 실장이 말을 이었다.“직원 야근 금지라면서요. 그러니까 대표님이 혼자 야근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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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 대신 싸우지 않는 법

“엄마, 오늘은 눈이 안 빨개.”봄이 식탁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경의 얼굴을 들여다봤다.새벽 여섯 시 반. 이경은 집 부엌에서 달걀을 부치고 있었다.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뒤집는 데 세 번 실패했다.“엄마 계란 못 하네.”“엄마는 실은 계란보다 천을 잘 뒤집어.”“그럼 계란에 시접을 넣어.”봄이 진지하게 말했다. 작업실에서 주워들은 단어를 아무 데나 붙이는 게 요즘 봄의 놀이였다.어젯밤 월백에서는 남도은과 직원 둘이 처음으로 수당을 받는 야간 교대를 섰다. 경미의 새벽 피팅도 그 조가 맡았다. 이경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결과 보고 문자를 읽었다.‘피팅 완료. 주머니 각도 OK. 신부님이 대표님 안부 물음. 대표님 자고 있다고 함. 신부님이 박수 침.’봄은 터진 노른자를 밥에 비비며 말했다.“엄마, 오늘은 나 학교 갈 때까지 있어?”“응. 오늘은 교문까지 갈게.”“그럼 상담 선생님한테 자랑해야지. 엄마가 계란 했다고.”“터진 계란이라고는 말하지 마.”“말할 건데.”이경은 웃으며 봄의 머리를 묶었다. 고무줄이 한 번 튕겨 나갔다. 봄이 자기가 하겠다고 손을 뻗었다.그날 오전, 경미가 노조 조끼를 입은 여자 둘과 함께 왔다.“요양보호사 노조 분들이에요. 저 직접 노동청에 진정 넣을 거예요. 근무표 보복으로요.”경미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월백한테 부탁할 건 하나예요. 제가 동의할 테니까, 업무폰으로 문자 보낸 날짜랑 시각 기록만 주세요. 그 이상은 하지 마세요. 증언도, 기자회견도, 본부 전화도.”“알겠습니다.”이경은 3인 승인 절차를 거쳐 문자 발송 기록을 뽑았다. 경미의 서면 동의서를 첨부했고, 다른 고객 정보는 한 줄도 섞이지 않았는지 정 실장과 도은이 각각 확인했다.노조 측 활동가가 기록을 넘겨보며 말했다.“발송 다음 날마다 근무표가 바뀌었네요. 이 정도면 진정 요건은 충분합니다. 다만 결론까지는 몇 달 걸려요.”“몇 달이요.”경미가 따라 말했다. 결혼식은 삼 주 뒤였다.이경은 다른 서류를 하나 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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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 할머니의 하객석

“하객석 맨 앞줄, 바퀴 들어갈 자리 비워 주세요.”평일 아침 여섯 시 사십 분. 구민회관 이 층 강당.경미가 결혼식 시작 이십 분 전에 그 말부터 했다.강당 문이 열릴 때마다 근무복 차림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야간 근무를 막 끝낸 요양보호사들이었다. 회색 조끼, 남색 점퍼, 병원 이름이 박힌 셔츠. 그 위에 하나같이 하얀 코사지를 달고 있었다.“코사지는 신부가 돌렸어요. 근무복 벗고 올 시간이 없을 거라고.”정 실장이 이경 귀에 속삭였다.신랑 오준석은 여섯 시 오십오 분에 뛰어 들어왔다. 택배 조끼를 벗으며.“한 건만 하고 온다는 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요. 십오 층.”하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경미가 신랑을 위아래로 훑었다.“땀 냄새 나. 식 끝나고 혼날 줄 알아.”“알지.”경미의 드레스는 아이보리 면 혼방이었다. 허리를 조이는 대신 등판에 주름을 잡아 숨 쉴 때마다 천이 따라 늘었다. 치마 양옆으로 주머니 두 개. 입구는 십오 도 기울어 있었다.오른쪽 주머니는 열린 주머니였다. 개인폰이 들어갔다.왼쪽 주머니에는 지퍼가 달려 있었다. 안쪽에 작은 글씨로 수가 놓여 있었다.‘꺼 두는 주머니.’경미가 회색 업무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이 꺼졌다. 그녀는 그것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육 년 만에 처음 꺼 봐요.”그녀가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렸다.“근데 이거 지퍼 소리 좋네요. 찌익. 퇴근 소리 같아.”지퍼 손잡이는 이경이 일부러 무거운 놋쇠로 골랐다. 장갑 낀 손으로도, 피곤한 새벽 손으로도 한 번에 잡히게.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열리지 않게.일곱 시 정각, 강당 문이 다시 열렸다.휠체어 한 대가 들어왔다. 박 할머니였다. 딸이 휠체어를 밀었다. 할머니는 꽃무늬 블라우스에 브로치까지 달고 있었다.경미가 입을 막았다.할머니는 맨 앞줄 비워 둔 자리에 멈췄다. 경미를 올려다보더니 손을 흔들었다.“이쁘네.”그 한마디였다.할머니는 하객이었다. 담당 보호사를 되찾으러 온 보호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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