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지 마세요. 지우는 순간 증거도 같이 지워져요.”오세진이 장갑 낀 손으로 태블릿을 받쳐 들었다.세진포렌식 대표. 사십 대 중반, 짧은 단발, 말끝마다 시각을 적는 사람이었다.“열 시 사십이 분, 전원 켜진 상태로 인수. 화면 촬영 시작.”그녀는 태블릿을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 화면을 한 장씩 찍고, 설치 목록을 영상으로 남기고, 통신 기록을 떠 냈다. 어떤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반드시 소리 내어 말했다.사십 분 뒤 그녀가 화면 하나를 가리켰다.“원격관리 프로그램이에요. 압수 조서에 적힌, 공용 PC에서 실행 중이던 프로그램과 이름이 같네요.”이경은 태블릿 화면 구석의 작은 아이콘을 봤다. 매일 아침 이 기계로 상담을 기록했다. 다온이 ‘젖은 비단’이라는 이름을 처음 소리 내 말하던 순간에도 이 화면은 켜져 있었다.“지금 바로 끊을 수 있어요?”“끊을 수는 있죠. 대신 누가 언제 들어왔는지도 같이 끊겨요.”“언제부터 깔려 있었어요?”세진이 설치 기록을 넘겼다.“설치 일자는 개장 전날이에요. 새벽 시간대. 누가 설치를 요청했는지는 업체 쪽 서류를 봐야 알아요. 추측으로 이름 붙이지 않을게요.”개장 전날. 이경은 그 날짜를 머릿속 어딘가에 접어 두었다.세진은 태블릿을 차단 봉투에 넣고 봉인 스티커를 붙였다.“저는 해커가 아니에요. 문 따는 사람이 아니라, 문 앞 발자국을 안 지우는 사람이에요. 이건 그대로 수사기관에 넘기겠습니다.”상담 기록 일주일 치가 태블릿과 함께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오후에는 민해수 변호사가 왔다.월백이 직접 위임한 상표·국제분쟁 변호사였다. 사십 대, 회색 정장, 서류를 펼치기 전에 계산기부터 꺼내는 사람.“나쁜 소식부터 할게요. 좋은 소식은 아직 없어서요.”그녀가 첫 장을 넘겼다.“문화이트는 여섯 해 전에 WOLBAEK을 3류까지 등록해 뒀어요. 향수, 화장품. 웨딩드레스 회사가 왜 향수까지 잡았는지 그땐 아무도 안 물었겠죠.”두 번째 장.“벨로체는 ‘젖은 비단’을 일본, 대만, 싱가포르에 출
Last Updated : 2026-10-07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