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당한 날,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Chapter 11 - Chapter 20

69 Chapters

11화 — 회장님이 누구예요

휴대전화 화면의 문장을 읽는 동안, 서하의 등 뒤로 뜨거운 체온이 붙었다.도윤이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몇 시입니까?”그의 팔이 맨허리를 감았다. 이불 아래에서 단단한 가슴이 등에 닿고, 밤새 몇 번이나 자신을 안았던 남자의 몸이 엉덩이 뒤에 선명하게 느껴졌다.서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도윤의 입술이 어깨에 닿았다.“아직 아파요?”“조금요.”“그럼 안 합니다.”그는 말과 동시에 허리를 뒤로 물렸다. 욕망이 분명한데도 손은 배 위에서 멈췄다.서하는 그 절제가 이상하게 더 야하게 느껴졌다.“안 한다고 하니까 아쉬워하는 얼굴인데.”“착각이에요.”“확인해 볼까요?”도윤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맨가슴을 감싼 손바닥이 유두를 스치자 서하의 숨이 흔들렸다. 그가 손가락 사이로 단단해진 끝을 가볍게 비틀었다.“도윤 씨.”“싫으면 손 뗍니다.”서하는 그의 손등을 눌렀다.“그대로 있어요.”도윤이 목덜미를 물듯 입을 맞췄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고, 이불 속에서 그의 허벅지가 서하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젖어 가는 감각을 알아챈 순간 서하는 얼굴을 붉혔다.그러나 침대 아래에 떨어진 휴대전화 화면이 다시 켜졌다.[강도윤 대표님. 회장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해원그룹 긴급 이사회가 한 시간 뒤 시작됩니다.]서하가 화면을 들어 보였다.“회장님이 누구예요?”도윤의 손이 멈췄다.조금 전까지 뜨겁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맨몸에 셔츠를 걸치며 화면을 확인했다.“아르덴 최대 출자자인 재단 어른입니다.”“재단 어른이 쓰러졌는데 해원그룹 이사회가 왜 당신한테 보고돼요?”“재단이 해원 지분을 갖고 있으니까요.”“그래서 계약직 심사역한테 대표님이라고 하고?”단추를 채우던 손이 잠깐 멈췄다.“설명은 돌아와서 하겠습니다.”“어젯밤에도 나중에 말한다고 했어요.”도윤이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으로 서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오늘은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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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 긴급 이사회

해원그룹 본사 삼십 층.엘리베이터 안에서 정우석이 태블릿을 넘겼다.“회장님은 뇌경색입니다. 새벽 네 시 사십 분. 의식은 없고, 중환자실입니다. 부회장님은 이미 이사회장에 계십니다. 비상 경영 위임안을 돌리셨습니다.”“내용은.”“회장 유고 시 대표권 일체를 부회장에게 위임. 사외이사 세 분은 서명하셨고, 두 분은 대기 중입니다.”“배진호는.”“혼인관계증명서 발급받아서 대기 중입니다. 오늘 아침 아홉 시에 수리 완료됐습니다.”도윤은 넥타이를 한 번 고쳤다.“들어가자.”이사회장 문이 열리자 열두 명의 시선이 한꺼번에 돌아왔다.십오 년 동안 이 방에 들어온 횟수는 손에 꼽았다. 등기에는 이름이 있었다. 해원홀딩스 기타비상무이사 강도윤. 그러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이 방 안에만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강태성이 상석 옆에 앉아 있었다. 쉰일곱. 은발. 웃는 얼굴.“도윤아. 오랜만이다. 앉아라.”“서서 하겠습니다.”도윤은 탁자 끝에 섰다.“정관 사십이 조. 회장 유고 시 임시 의장은 창업주 신탁의 의결권자가 맡습니다. 위임안은 임시 의장이 소집한 이사회에서만 다룰 수 있습니다.”“맞다. 그런데 신탁 의결권자는 조건이 있지.”강태성이 서류를 들었다.“수익자의 혼인. 네 서른네 번째 생일까지. 그게 사흘 전이었다.”“네.”“그리고 너는 미혼이다.”배진호 변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류 한 장을 도윤에게 건넸다. 도윤은 그것을 탁자 위에 놓고 강태성 쪽으로 밀었다.“혼인관계증명서. 사흘 전 오후 네 시 오십일 분 접수. 오늘 오전 아홉 시 수리.”방 안이 조용해졌다.강태성이 서류를 봤다. 웃음은 그대로였다. 눈만 달라졌다.“윤서하.”“제 아내입니다.”“생일날 결혼했다고?”“네.”“누구냐.”“제 아내입니다. 그 이상 알아보실 필요 없습니다.”“다온뷰티.”강태성이 서류의 본적란을 손가락으로 짚었다.“재미있는 이름이구나.”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럼 임시 의장은 네가 맡겠다는 거냐.”“네. 그리고 위임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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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 가처분

다온뷰티의 반격은 다음 날 오전 도착했다.[영업비밀 침해금지 및 업무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서]서하는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도윤은 문서를 끝까지 읽고 휴대전화를 들었다.“법무팀 보내겠습니다.”“아니요.”“상대는 회사입니다.”“그래서 내 변호사를 선임할 거예요.”“내 법무팀이 더 빠릅니다.”“당신 돈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내 승리도 당신 것이 돼요.”도윤의 턱이 굳었다.“부부 사이에도 계산이 필요합니까?”“우리 결혼은 계산으로 시작했잖아요.”그 말이 날카롭게 박혔다.서하는 고은재 변호사를 만났다. 특허와 직무발명 분쟁을 전문으로 하는 여자였다.고은재는 계약금을 말했고, 서하는 자신의 적금 통장을 내밀었다.“남편분이 꽤 능력 있는 사람이라던데 도움을 안 받으시네요.”“제 이름을 되찾는 일은 제 돈으로 시작하고 싶어요.”“좋아요. 그 고집은 법정에서 쓸모가 있습니다.”USB 안에는 초기 처방 파일, 실험일지 일부, 서하 개인 이메일로 보낸 날짜 기록이 남아 있었다.부족하지만 시작은 가능했다.오후 늦게 도윤에게 전화가 왔다.“서버 보존명령이 인용됐습니다.”“벌써요?”“운이 좋았습니다.”“도윤 씨한테 운이란 말은 안 어울리네요.”잠시 침묵이 흘렀다.“삭제 로그가 확보됐습니다. 윤성호 대표 계정으로 새벽 두 시 십칠 분에 접속했습니다.”서하는 눈을 감았다.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지우려 했다.집에 돌아왔을 때 도윤은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화났어요?”“당신이 내 도움을 거절해서가 아닙니다.”“그럼?”“혼자 다칠 준비부터 하는 얼굴이라서.”서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도윤이 손을 내밀었다.그녀가 가까이 가자 그는 허리를 끌어안아 무릎 위에 앉혔다. 치마가 허벅지 위로 밀려 올라갔다.“도윤 씨.”“안 하겠습니다. 오늘은.”“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요.”“그러니까 안 한다고요.”그의 입술은 목에 닿았지만 손은 허리에만 머물렀다.서하는 오히려 그 손을 잡아 가슴 위에 올렸다.“위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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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 반반

첫 정산은 일요일 아침이었다.서하는 노트북에 표를 만들었다. 월세, 관리비, 전기, 수도, 식비. 도윤은 그 표를 진지하게 읽었다. 투자 보고서를 읽는 얼굴이었다.“식비가 편의점 영수증 열한 장입니까.”“당신이 요리를 못 하니까요.”“당신도 못 하잖습니까.”“저는 실험실에서 십 년을 살았어요. 비커에 밥은 안 해요.”“그럼 이건 뭡니까.”그가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콘돔이요. 반씩.”도윤이 웃었다. 소리를 내서. 서하는 그 웃음을 처음 들었다. 낮고 짧았고, 끝이 조금 갈라졌다.“그건 제가 사겠습니다.”“왜요.”“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있던 거니까.”“사용한 적은 없다면서요.”“그러니까 제 몫입니다.”서하는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옆에 적었다. 강도윤 부담.오후에 서하는 민지의 USB를 열었다. 두 번째 처방의 배합 기록. 세 번째 처방의 안정성 데이터. 육 년의 절반이 거기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회사 서버에서 지워졌고, 채린의 계정에 있었다.도윤이 옆에 앉았다.“무슨 처방입니까.”“관심 있어요?”“내 아내가 뭘 만드는지는 알아야죠.”서하는 화면을 돌렸다.“첫 번째는 보습. 피부 장벽을 만드는 거예요. 두 번째는 진정. 예민한 피부를 가라앉히는 거. 세 번째는 재생. 상처 난 피부를 회복시키는 거예요. 세 개가 한 세트예요. 막고, 가라앉히고, 고치고.”“순서가 있군요.”“네. 할머니가 정한 순서예요. 좋은 화장품은 따뜻해야 한다고. 피부는 온도를 기억하니까.”“회사 이름은 정했습니까.”서하가 잠깐 망설였다.“세라온.”“무슨 뜻입니까.”“할머니 이름이에요. 정세라. 거기에 따뜻할 온.”도윤은 그 이름을 한 번 입 안에서 굴렸다.“언제 만듭니까.”“소송 세 개 끝나면요. 아직 하나지만 곧 세 개가 될 거예요.”“그럼 그 전에 이름부터 지키세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당신한테 말했는데요.”“저는 아무나가 아닙니다.”밤이 되자 둘은 같은 침대에 누웠다.서하는 노트북을 펼쳤고 도윤은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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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 런칭쇼

“가지 마세요.”도윤이 말했다.“가요.”서하가 말했다.“그럼 같이 가겠습니다.”“아뇨. 당신이 오면 사람들은 당신을 봐요. 저는 제가 보이고 싶어요.”도윤은 오래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재 변호사는 데려가세요.”“그건 그럴 거예요.”세림호텔 그랜드볼룸.결혼식이 열릴 뻔했던 곳에서 두 층 위였다. 서하는 그 사실을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생각하고, 내려놓았다.입구에서 한지훈이 서 있었다. 그가 서하를 봤다.“왜 왔어.”“초대받았어.”“채린이가 보낸 거? 걔가 그럴 리…….”“카드에 손 글씨로 썼던데. 걔 글씨 알잖아.”지훈의 얼굴이 굳었다. 서하는 그를 지나쳤다. 고은재가 뒤를 따랐다.볼룸 안에는 이백 명이 있었다. 뷰티 기자, 인플루언서, 유통 바이어. 무대 위 스크린에 '채린 글로우'가 떠 있었다. 유리병 안에 연한 분홍색 세럼.서하는 뒷줄에 앉았다.윤채린이 무대에 올랐다. 흰 원피스. 완벽한 화장. 마이크를 잡은 손이 떨리지 않았다.“육 개월 동안 제가 직접 개발한 첫 번째 제품이에요. 예민한 피부를 위한 진정 세럼. 성분 하나하나 제가 골랐어요.”박수가 나왔다.서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옆자리의 고은재에게 말했다.“육 개월이면 저는 배합비를 못 잡았을 거예요. 이 처방은 이 년 걸렸어요.”“기록에 있어요?”“민지가 준 USB에요. 날짜까지.”질의응답 시간이 왔다.기자들의 질문은 부드러웠다. 향은요. 가격은요. 다음 제품은요. 채린은 웃으며 대답했다.서하가 손을 들었다.진행자가 그녀를 가리켰다. 마이크가 건네졌다. 서하는 일어섰다.“전 다온뷰티 연구원 윤서하입니다.”볼룸이 조용해졌다. 앞줄에서 윤성호가 돌아봤다.“세럼의 안정화제로 무엇을 쓰셨나요. pH 오 점 이에서 활성 성분이 분리되는 문제를 어떻게 잡으셨어요?”채린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그건…… 연구소에서…….”지훈이 무대 옆에서 마이크를 잡았다.“기술적인 질문은 연구소를 통해 서면으로.”“연구소 답을 제가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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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 접근

전화는 토요일 아침에 왔다.“윤서하 연구원님이시죠. 해원리테일 신사업팀 최민규 팀장입니다. 어제 영상 봤습니다.”서하는 커피를 내리다 멈췄다.“저희가 신진 뷰티 브랜드를 인큐베이팅합니다. 입점, 연구소, 법무 지원까지요. 부회장님께서 직접 관심을 보이셨습니다.”“부회장님이요.”“네. 한번 뵙고 싶습니다. 내일 오후 어떠십니까.”서하는 도윤을 봤다. 그는 식탁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듣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두 시요.”일요일 오후, 강남의 카페.최민규는 마흔 안팎이었다. 명함이 두껍고 말이 부드러웠다. 그는 한 시간 동안 해원리테일이 어떤 유통망을 가졌는지, 어떤 브랜드를 키웠는지 설명했다. 조건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영상 조회수가 지금 삼백만입니다. 이런 건 돈으로 못 삽니다.”“저는 산 게 아니라 질문한 건데요.”“그래서 더 값이 나가죠.”그가 잠깐 웃고 덧붙였다.“참고로 채린 씨 쪽에서도 저희랑 얘기 중입니다. 다온이 해원리테일 입점을 원하거든요. 두 분을 같이 모실 수는 없으니까, 먼저 정하시는 분이…….”“조건은요.”서하가 말을 잘랐다.“조건은 서로 알아 가면서요. 우선 초안만 두고 가겠습니다.”그가 서류봉투를 놓고 갔다. 서하는 열어 보지 않고 가방에 넣었다.집에 돌아오자 도윤이 먼저 말했다.“해원리테일 제안은 거절하세요.”서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어떻게 알았어요?”“업계에서 들었습니다.”“어느 업계가 비공개 미팅 내용을 실시간으로 알려 줘요?”“서하 씨.”“당신이 왜 결정해요?”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계약은 안전하지 않습니다.”“무엇이 위험한지 말해요.”“아직은 말할 수 없습니다.”서하는 웃었다.“또 그 말.”“당신을 보호하려는 겁니다.”“보호와 통제는 달라요.”그녀가 침실로 들어가려 하자 도윤이 손목을 잡았다.“놓아요.”그는 즉시 놓았다.그러나 문 앞을 막고 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해원 쪽 사람들은 당신을 이용할 겁니다.”“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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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 엄마

계약서 초안은 열두 장이었다.서하는 월요일 아침에 그것을 읽었다. 도윤은 소파에서 잤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열한 번째 장에 문장이 있었다.브랜드 및 처방 관련 지식재산권 일체에 대한 우선협상권 및 공동 출원권.서하는 그 줄을 세 번 읽고 노트북을 열었다. 최민규 팀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세 줄이었다. 검토했습니다.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도윤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커피를 두 잔 내려 놓고 있었다.“거절했어요.”“……”“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계약서 때문에. 열한 번째 장이요.”도윤이 서류를 봤다. 그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고맙습니다.”“고마워할 일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은 아직 이유를 말 안 했어요.”“압니다.”“그럼 오늘 밤도 소파예요.”“……압니다.”오후 세 시,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자 이민영이 서 있었다. 베이지색 코트. 손에 든 종이에 이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가처분 송달지였다.“엄마.”민영은 서하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열여덟 평을 둘러봤다. 침실 문, 소파, 편의점 영수증이 붙은 냉장고.“이런 데서 살아?”“월세 반씩 내면서요.”“그 남자는.”“회사요.”민영이 소파에 앉았다. 앉자마자 무너졌다.“서하야, 그만해라.”“뭘요.”“성호 씨가 형사 고소한대. 채린이는 런칭 망쳤다고 사흘째 방에서 안 나와. 광고 두 개가 취소됐어. 성호 씨가 집에서……”민영이 말을 멈췄다.서하는 어머니의 손목을 봤다. 코트 소매 아래, 손목 안쪽. 노랗게 바랜 멍이 있었다.“엄마.”“아무것도 아니야.”“엄마.”“네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성호 씨는 회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고 지훈이네가 있어. 너는…….”“저는 제 이름이 있어요.”민영이 딸을 봤다.“이기려는 게 아니에요. 돌려받으려는 거예요. 제 처방, 제 기록, 제 이름. 그것만요.”“그게 그렇게 중요하니.”“할머니가 그러셨어요. 네 거는 네 이름으로 남겨 두라고. 스물세 살 때 공증받으러 갔을 때요.”민영의 눈이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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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 두 번째 거짓말

서하는 도윤에게 말하지 않았다.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지는 알았다. 그래도 갔다.세림호텔 바. 지훈은 창가에 있었다. 위스키가 반쯤 비어 있었다.“앉아.”“용건만.”“네 남편. 해원 본사에서 봤어. 지난주 목요일.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더라.”서하는 앉지 않았다.“경호원들이 허리를 숙였어. 월급쟁이한테 그러진 않아.”“그래서?”“해원이 이십 년 전에 다온을 먹으려고 했어. 아버지한테 들었어. 그때 못 먹은 걸 지금 먹으려는 거야. 그 사람, 해원 사람이야. 너는 열쇠고.”“네가 다온을 먹으려던 건 뭐였는데.”“나는 너랑 결혼하려고 했어.”“결혼식 날 걔랑 자면서?”지훈이 잔을 내려놓았다.“서하야. 나 후회해.”처음 듣는 말이었다. 서하는 그 말이 어디에 닿는지 기다렸다. 아무 데도 닿지 않았다.“늦었어.”그녀는 돌아섰다.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파란 표지의 작은 노트를 샀다. 손바닥만 한 크기. 천이백 원.도윤은 집에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그녀를 봤다.“어디 다녀왔습니까.”서하는 코트를 벗지 않고 물었다.“해원 본사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 경호원.”도윤의 표정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아르덴의 최대 출자자가 해원 계열 재단입니다. 업무상 출입한 겁니다.”“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요?”“보안 때문에 동선이 분리돼 있습니다.”“그게 전부예요?”“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전부입니다.”서하는 서랍에서 파란 노트를 꺼냈다.첫 장에 적었다. 작은 투자회사 계약직 심사역.그 아래에 두 번째 줄을 썼다. 해원 재단과는 업무상 관계뿐.도윤의 표정이 굳었다.“뭡니까?”“당신 거짓말 세는 노트.”“거짓말이라고 확정했습니까?”“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반쯤은 거짓말이죠.”“반 개씩 셀 겁니까?”“필요하면요.”도윤이 노트를 덮었다.서하는 다시 열었다.그가 손목을 잡았다.“놓아요.”손은 즉시 풀렸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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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 해고

징계위원회 출석 통지서는 수요일에 왔다. 위원회는 금요일이었다.“가지 마세요.”고은재가 말했다.“서면으로 소명해요. 가면 걔네가 원하는 그림이 나와요.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안 울어요.”“그래도요.”서면 소명서는 다섯 장이었다. 공증 날짜. 입사일. 서버 삭제 로그. 채린 계정의 다운로드 기록. 런칭쇼에서 한 말은 사실이며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문장.금요일 오후 네 시, 해고 통지서가 메일로 왔다.징계해고. 사유 세 가지. 영업비밀 유출. 회사 명예훼손. 무단결근.“무단결근이요?”서하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출입증을 정지시켜 놓고요.”“그래서 넣은 거예요. 셋 중에 하나만 걸려도 되니까.”고은재는 화이트보드에 세 번째 사건을 적었다. 해고무효확인. 그 옆에 네 번째. 발명자 정정.“이제 세 개예요. 가처분, 해고무효, 발명자 정정. 발명자 정정은 돈이 아니라 이름이에요. 특허 서류에 발명자로 서하 씨 이름을 넣는 거. 그건 이길 수 있어요.”“착수금이…….”“다음 달에 줘요.”“왜 이렇게 해 주세요.”고은재가 펜을 돌렸다.“로펌에서 나온 이유가 있어요. 대기업 직무발명 사건에서 연구원 편에 서겠다고 했다가 잘렸어요. 서하 씨 사건은 그때 못 한 사건이에요.”같은 시각, 다온뷰티 보도자료가 나왔다.윤채린 브랜드총괄 임명. 채린 글로우 이 차 물량 확대.서하는 기사를 한 번 읽고 닫았다.육 년이었다. 제품 세 개, 밤샘 백열두 번, 실험노트 세 권. 그리고 해고 통지서 한 장. 통지서에는 그녀가 만든 것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는 것은 그녀가 하지 않은 일 세 가지였다.박민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선배, 기사 봤어요. 저도 사표 쓸까요.][아직은 있어. 거기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길 거야.][무슨 이유요?][나도 아직 몰라.]집에 도착하자 도윤이 식탁에 서류를 펼쳐 놓고 있었다.“주주연합입니다.”“뭐요?”“아르덴 펀드 칠 점 이. 운용사 두 곳 십일 점 팔. 합쳐서 십구.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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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 할아버지

VIP 병동은 새벽에도 조용했다.강일호는 침대를 세운 채 앉아 있었다. 얼굴은 반쪽이 됐지만 눈은 그대로였다. 도윤이 들어서자 그 눈이 손자를 위아래로 훑었다.“결혼했다고.”“네.”“누구냐.”“다온뷰티 김재현의 딸입니다.”노인의 눈이 멈췄다. 오래 멈췄다.“……정세라의 손녀.”“네.”“네가 골랐냐, 그 애가 골랐냐.”“그 사람이 골랐습니다. 저는 물었고요.”“왜 그 애냐.”“구청 앞에서 찢어진 혼인신고서를 버리는 걸 봤습니다.”“그게 다냐.”“……아닙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할아버지한테 말할 게 아닙니다.”강일호가 웃었다. 웃다가 기침했다. 간호사가 들어오려는 것을 손으로 막았다.“태성이가 위임안을 돌렸다더구나.”“막았습니다.”“혼인증명서로.”“네.”“서류로 막았으면 서류로 뚫릴 거다. 태성이는 그런 애다.”“압니다.”“알면 됐다.”노인이 숨을 골랐다. 반쪽이 된 얼굴에서 눈만 살아 있었다.“태성이가 그 애 뒷조사를 한다더구나.”“압니다.”“막지 마라. 뭘 찾는지 봐야지.”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정우석에게 한 말과 같았다.“데려와라. 보고 싶다.”“할아버지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그럼 나를 뭐라고 소개할 거냐.”“할아버지요.”노인이 다시 웃었다.“다음 주에 데려와.”집에 돌아온 것은 아침 일곱 시였다.서하는 깨어 있었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두 잔 놓고 있었다.“회장님이 깨어나셨대요?”“……일 얘기는 침대 밖에서라고 했죠. 여기는 식탁이니까 하겠습니다.”도윤이 앉았다.“다음 주에 병원에 같이 가 줄 사람이 있습니다. 제 할아버지.”서하의 손이 잔에서 멈췄다.“할아버지가 계셨어요?”“재단 이사장입니다. 쓰러지셨던 분.”“……그 회장님이요?”“재단 이사장입니다.”서하는 그를 봤다.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는 것으로 피하는 사람이었다.“저를 왜 보고 싶어 하세요.”“손자며느리니까.”“손자며느리를 손자가 월급쟁이라고 소개할 거예요?”“이미 그렇게 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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