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당한 날,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Chapter 41 - Chapter 50

69 Chapters

41화 — 다온이 아니어도 좋다

“뭘 알아요.”이민영이 모이스트랩에 간 뒤, 서하가 물었다.도윤은 바닥에 앉은 채였다. 일어나지 않았다.“당신 아버지 이름을 압니다. 김재현 연구소장.”“어떻게요.”“이십 년 전 해원이 다온 인수를 시도했을 때 협상 자료에 이름이 있었습니다. 연구소장 면담 기록. 핵심 인력 명단.”“그 자료를 당신이 왜 봐요.”“아르덴이 해원 재단의 옛 투자 기록을 관리합니다.”반쯤 진실이었다. 서하는 세지 않았다. 지금은 셀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구청 앞에서 제 이름을 알았어요?”“윤서하라는 이름은 몰랐습니다. 다온뷰티 김재현의 딸이 윤씨가 됐다는 건 알았습니다.”“화재는요.”“화재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 뒤 인수가 무산됐다는 기록만.”“기록이 없는 게 아니라 지워진 거겠죠.”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서하는 식탁에 앉았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당신이 아는 게 더 있죠.”“의심하는 게 있습니다. 아는 건 아닙니다.”“의심만 말해요.”“말하면 당신은 다온을 되찾으려고 할 겁니다. 아버지 때문에.”“그게 왜 안 돼요.”“당신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서하는 그 말에 멈췄다.다온이 아니어도 좋다.유언장 두 번째 장. 그녀는 그 문장을 도윤에게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결혼식 날 뒷방에서 건넨 것이었다.“어떻게 알아요.”“어머님이 어젯밤에 말씀하셨습니다.”“엄마가 당신한테 뭘 그렇게 많이 말해요.”“바닥에 누워 있으면 사람들이 말을 겁니다.”서하는 웃을 뻔했다. 웃지 못했다.그날 오후, 서하는 특허청 사이트에 접속했다.상표 출원. 세라온. 지정상품 화장품. 출원인 윤서하.수수료는 모이스트랩 두 번째 자문료에서 나갔다. 결제 버튼을 누를 때 손이 떨렸다. 삼십억 앞에서는 떨리지 않던 손이었다.접수 완료 화면을 캡처해 두 사람에게 보냈다. 고은재와 한소이. 답이 먼저 온 것은 한소이였다.[드디어. 세 번째 시제품, 세라온 이름으로 갈라요. 우리는 모이스트랩 라인으로.]저녁에 이민영이 라벨 붙이는 일을 마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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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 세 권의 노트

연구소 현관에서 오정민 소장이 막았다.“퇴사한 사람이 밤에 여긴 왜 옵니까.”“퇴사 아니에요. 해고무효 소송 중이에요.”“그래도 출입 권한은 없어요.”“저는 없죠.”서하가 옆으로 비켜섰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서동혁. 다온뷰티 감사. 오십 대, 회색 머리, 회계사 출신. 주총에서 소액주주가 뽑은 사람.“감사는 있습니다. 상법상 회사 재산 보전을 위해 언제든 실지조사 할 수 있고요. 금고 열어 주시죠.”오 소장의 얼굴이 굳었다.“지금은…….”“지금이 아니면 언제요. 상자를 들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들어서 왔는데.”고은재가 뒤에서 덧붙였다.“그리고 증거인멸이면 형사입니다. 감사 앞에서요.”오 소장은 십 초쯤 버텼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연구소 삼 층. 서하가 육 년 동안 일한 곳. 복도의 냄새가 그대로였다. 에탄올과 글리세린과 오래된 커피.금고는 열려 있었다. 상자 하나가 그 앞에 놓여 있었다.서하가 상자를 열었다.노트 두 권.검은 표지의 실험노트. 첫 장에 그녀의 글씨. 두 번째 권 모서리에 커피 얼룩. 삼 년 전 밤샘 실험 때 흘린 것이었다.세 번째 권은 없었다.“세 번째는요.”오 소장이 시선을 피했다.“한 시간 전에 가져갔습니다.”“누가.”“부회장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대표님 지시로.”“어느 부회장실이요.”오 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서동혁 감사가 반출 대장을 요구했다. 오 소장이 서랍에서 종이를 꺼냈다. 반출 물품: 실험노트 1권. 수령인 서명: 알아볼 수 없는 글씨. 반출 사유: 대표이사 지시.“복사하겠습니다.”감사가 말했다.서하는 두 권을 가슴에 안았다. 육 년의 절반이 돌아왔다. 나머지 절반은 광화문 어딘가에 있었다.박민지가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울고 있었다.“선배, 미안해요. 더 빨리 전화했어야 했는데.”“민지야.”“네.”“세라온에 연구원 자리 하나 있어. 월급은 지금보다 적어.”민지가 눈물을 닦았다.“언제부터요.”“내일부터.”건물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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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 값을 치르는 남자

“작은아버지.”도윤은 앉지 않았다.강태성은 노트를 덮었다. 검은 표지.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글씨가 좋더구나. 네 아내. 처방도 좋고. 이걸 다온이 다음 달에 낸다지? 채린이라는 애 이름으로.”“노트를 돌려주십시오.”“노트는 다온 거다. 윤성호가 넘겼어. 나는 채권자로서 담보를 받았을 뿐이고.”“개인 실험노트는 회사 재산이 아닙니다.”“그건 법원이 정하겠지. 몇 년 걸릴까.”강태성이 일어났다. 창가로 갔다. 이십팔 층 아래로 광화문이 펼쳐져 있었다.“네 아버지도 그랬다. 원칙, 원칙. 그러다가 갔지.”도윤의 턱이 굳었다.“아버지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그래. 오늘은 네 아내 얘기니까.”강태성이 돌아섰다.“리테일 대표 자리. 준혁이 앉히려고 한다. 다음 주 이사회. 네 표가 필요해.”“준혁이는 준비가 안 됐습니다.”“준비는 앉으면 되는 거다. 네 표 하나. 그리고 이 노트.”도윤은 노트를 봤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그리고 강태성을 봤다.“복사본은요.”“이미 여러 곳에 있지. 그건 네가 어쩔 수 없어.”“원본만 있으면 됩니다.”“그래. 원본이 있어야 네 아내가 법원에서 자기 글씨라고 할 수 있으니까.”강태성이 노트를 책상 위로 밀었다.“찬성표. 다음 주 이사회.”도윤은 노트를 집었다.“하나 더 있습니다.”“말해 봐라.”“제 아내에게 두 번 다시 봉투를 보내지 마십시오. 사진도, 축의금도, 공문도.”강태성이 웃었다.“그 애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다. 삼십억을 거절하는 여자는 요즘 드물어.”“마음에 드시면 더 멀리 계십시오.”도윤이 돌아섰다.문 앞에서 강태성의 목소리가 따라왔다.“도윤아. 너는 이 자리에 앉으려고 십오 년을 숨어 살았다. 그런데 노트 한 권에 표를 내줘. 그 애가 네 약점이라는 건 이제 이사회도 알 거다.”“약점이 아닙니다.”“그럼 뭐냐.”도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이유입니다.”새벽 두 시, 오피스텔.서하는 자지 않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두 권의 노트를 무릎에 얹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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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 노트 한 권의 값

“서연희 씨를 만날 거예요. 내일 두 시.”서하가 전화를 끊고 말했다.“알겠습니다.”“먼저 말했어요. 반씩.”“알겠습니다.”“안 말려요?”“말려도 갈 거잖습니까.”“네.”“그럼 가세요. 대신 돌아와서 나한테 물으세요. 그 사람 말이 맞는지.”같은 티룸이었다.서연희는 지난번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지난번과 달리 먼저 사과했다.“새벽에 전화한 건 미안해요. 이사회 자료가 새벽에 돌았어요.”“무슨 이사회요.”“해원리테일 대표이사 선임. 다음 주예요. 강준혁이 앉아요.”“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강도윤 씨가 찬성했어요. 어젯밤에 서면으로.”“그 사람이 이사회 표가 있어요?”연희가 서하를 봤다. 이번에는 안쓰러움이 아니라 놀라움이었다.“……정말 모르시는군요.”“월급쟁이라고 했어요.”“월급쟁이도 표가 있을 수 있죠. 아르덴이 해원 지분을 갖고 있으니까.”“얼마나요.”“그건 제가 말할 게 아니에요.”“그럼 뭘 말하러 오셨어요.”연희가 커피를 내려놓았다.“그 사람은 지금까지 강태성한테 한 번도 표를 준 적이 없어요. 십오 년 동안. 그런데 어젯밤에 줬어요. 당신 노트 한 권 때문에.”서하의 손이 잔 위에서 멈췄다.“강준혁이 리테일을 맡으면 해원은 강태성 쪽으로 기울어요. 명진도 손해예요. 우리는 리테일이랑 거래하니까.”“그래서 저한테 화내러 오신 거예요?”“아뇨.”연희가 처음으로 웃었다. 지친 웃음이었다.“지난번에 적인지 아군인지 안 정했다고 했죠. 정했어요. 아군이에요.”“왜요.”“당신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때문에요. 십오 년 동안 안 흔들리던 사람이 흔들렸어요. 그런 사람은 처음 봐요. 그게 약점인지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유 쪽에 걸었어요.”서하는 집으로 돌아왔다.도윤은 있었다. 이민영은 없었다. 어머니는 요즘 저녁마다 모이스트랩에서 늦었다.“물어요.”도윤이 먼저 말했다.“강준혁 리테일 대표. 찬성했어요?”“네.”“십오 년 동안 한 번도 안 준 표를요.”“네.”“나 때문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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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 해원의 월급쟁이

“해원 직원이에요?”아침이었다. 이민영은 일찍 나갔다. 요즘 어머니는 서하보다 먼저 일어났다.도윤은 커피잔을 든 채 멈췄다.“출입증 봤어요. 어젯밤에. 재킷 주우다가.”“……그렇군요.”“전략기획실.”“오래된 겁니다.”“얼마나요.”“해원 계열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르덴입니다.”“계열 어디요.”“말 못 합니다.”서하는 파란 노트를 꺼냈다. 펜을 들었다. 한 줄 적었다.“다섯 개 반.”“오늘 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말 안 한 겁니다.”“말 안 한 것도 한 줄이에요. 그건 처음부터 그랬어요.”도윤이 잔을 내려놓았다.“노트, 몇 줄이면 찹니까.”“몰라요. 근데 오늘은 거래하려고요.”“거래.”“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해원 직원이든, 해원 재단 사람이든, 해원 지분을 가진 월급쟁이든.”“……”“대신 하나만. 내 회사에 해원 돈이 들어오는 순간, 계약 끝이에요. 세라온에 해원이 한 푼이라도 닿으면 그날로 이혼이에요. 조건은 내가 정하고요.”도윤은 오래 그녀를 바라봤다.“아르덴 돈도 해원 돈입니까.”“당신 말로는 해원 재단이 출자했다면서요. 그럼 해원 돈이죠.”“그럼 나는 당신 회사에 아무것도 못 넣는군요.”“남편은 넣을 수 있어요. 정규직 전환 심사는 통과했으니까.”그가 웃었다. 짧게.“알겠습니다. 해원 돈은 세라온에 안 들어갑니다. 한 푼도.”“약속이에요.”“약속입니다.”서하는 노트를 닫았다. 그리고 덧붙였다.“당신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다만 지금은 물어도 대답 안 할 거니까 안 묻는 거예요.”“언젠가 물으면.”“언젠가 대답해요. 그때 노트를 버릴게요.”오전 열한 시, 고은재의 전화가 왔다.“서하 씨, 특허청이요.”“상표 나왔어요?”“상표가 아니라 특허요. 다온뷰티가 어제 특허 출원했어요. 세 번째 처방. 발명자 윤채린.”서하는 세 번째 노트를 봤다. 식탁 위에 있었다. 커피 얼룩, 초록 형광펜, 원료 견적서.“제 노트가 여기 있는데요.”“그러니까 다온은 서하 씨 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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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 발명자의 이름

도윤에게는 말했다.“강태성을 만나요. 내일 오전.”“안 됩니다.”“먼저 말했어요. 반씩.”“먼저 말하면 다 되는 게 아닙니다.”“당신이 노트 한 권 값으로 십오 년짜리 표를 줬어요. 저는 그 값을 갚으러 가는 거예요.”“그건 내가 정한 값입니다.”“그럼 이번엔 제가 정할게요.”도윤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세게는 아니었다. 그러나 놓지도 않았다.“그 사람이 뭘 원할지 압니까.”“알아요. 당신이요.”“……”“노트도, 처방도, 세라온도 아니에요. 그 사람이 원하는 건 당신 약점이에요. 그 약점이 저라고 이사회가 다 안다면서요.”“그러니까 가면 안 되는 겁니다.”“그러니까 가야 해요. 약점이 되러 가는 게 아니라, 약점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한테 직접 보여 주러요.”도윤의 손이 풀렸다.“당신 방식입니까.”“제 방식이에요.”“……돌아와서 말하세요. 전부.”“전부요.”서하는 그 말이 거짓말이 될지 그때는 몰랐다.해원그룹 본사 이십팔 층.서하는 처음으로 그 건물 안에 들어갔다. 로비의 천장이 높았고, 엘리베이터에는 층수가 있었다. 정우석이 아니라 강태성의 비서가 안내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서하는 재킷 안주머니의 출입증을 떠올렸다. 회색 바탕, 파란 로고. 이 건물 로비에 걸린 것과 같은 로고였다. 도윤은 이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나 탔을까. 층수 표시가 이십팔에서 멈췄다.집무실 창밖으로 광화문이 보였다. 도윤이 며칠 전 밤에 섰던 자리라는 것을 서하는 몰랐다.책상 위에 검은 표지의 복사본이 놓여 있었다. 서하의 글씨가 흑백으로 찍혀 있었다. 강태성은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 일부러 두었다는 것을 서하는 알았다.“윤서하 대표님. 오실 줄 알았습니다.”“대표 아니에요. 상표 심사 중이에요.”“그래도 곧이죠.”강태성은 앉으라고 했다. 서하는 앉았다.“반출 대장 수령인 서명. 누구 건지 확인서를 주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다온 금고에서 가져간 게 제 세 번째 노트라는 것도요.”“왜 제가 그걸 드려야 하죠.”“다온이 채린 이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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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 위험한 거래

강태성을 만나러 가는 날 아침, 서하는 거울 앞에서 셔츠 단추를 잠갔다. 도윤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녀를 보고 있었다.“가지 말라고 하면요?”“갈 거예요.”“압니다.”그가 일어나 뒤에서 마지막 단추를 대신 잠가 줬다. 손끝이 목덜미를 스치자 서하의 피부가 먼저 반응했다.“그런데 왜 물어요.”“당신이 돌아올 곳을 잊지 않게 하려고.”도윤의 입술이 목 뒤에 닿았다. 서하는 거울 속 그의 눈을 보며 단추를 다시 하나 풀었다.“몸으로 말리려는 거면 싫어요.”“말리지 않습니다.”“그럼요?”“원하면 안고, 싫으면 보내 줍니다.”서하는 몸을 돌려 그의 넥타이를 풀었다.“원해요. 그리고 그 뒤에 갈 거예요.”그 순간 도윤의 인내가 끊겼다. 키스가 깊게 파고들었고, 셔츠 단추가 다시 풀렸다. 그는 그녀를 화장대 위에 앉히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속옷을 옆으로 밀자 젖은 살이 드러났다.“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원합니까.”“네. 빨리.”손가락 두 개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서하는 거울을 짚고 허리를 들었다. 도윤은 안쪽을 깊이 눌러 가며 엄지로 앞을 문질렀다. 그녀의 숨이 흔들릴 때마다 속도를 바꿨다.“도윤 씨, 입으로도.”그는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혀가 젖은 틈을 벌리고 손가락이 안에서 굽혀졌다. 서하는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봤다. 강태성을 만나러 갈 여자도, 남편의 입술 아래에서 몸을 떠는 여자도 모두 자신이었다.첫 절정이 지나가기도 전에 도윤이 일어섰다. 서하가 서랍에서 콘돔을 꺼내 그의 손에 건넸다. 준비된 위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당신이 위험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한 어젯밤부터.”그가 씌우는 동안 서하는 다리를 더 벌렸다. 도윤은 그녀의 허벅지를 들어 올리고 한 번에 깊이 들어왔다. 화장대가 벽에 부딪히며 거울이 가볍게 떨렸다.“아프면 말해요.”“안 아파요. 더 깊게.”그 말 뒤로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서하는 목에 걸린 그의 넥타이를 당겨 입술을 맞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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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 부모의 사고

도윤은 밤 열 시에 들어왔다.서하는 확인서 두 장을 식탁에 펼쳐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민영은 침실에 있었다. 문이 닫혀 있었다.“확인서 받았어요. 두 장. 반출 수령인, 그리고 노트가 금고에 있었다는 것.”도윤은 서류를 보지 않았다.“자문계약은요.”서하의 손이 멈췄다.“……정우석 씨요?”“리테일 법무팀 등록 시스템입니다. 아르덴이 접근 권한이 있습니다.”“그것도 해원 거네요.”“지금 그 얘기가 아닙니다.”도윤이 앉았다. 앉는 동작이 무거웠다.“전부 말하겠다고 했습니다.”“말하려고 했어요.”“언제.”“……통하지 않을 때요.”“무슨 뜻입니까.”서하는 가방 안쪽에서 자문계약서 사본을 꺼내 확인서 옆에 놓았다.“일 원짜리예요. 강태성이 이걸 이사회에 뿌리겠죠. 당신 아내가 자기 쪽에 붙었다고. 그런데 안 통할 거예요.”“왜 안 통합니까.”“당신이 안 흔들릴 거니까요.”도윤이 계약서를 봤다. 그리고 서하를 봤다.“당신은 강태성을 모릅니다.”“알아요. 삼십억 들고 온 사람이고, 사진 보낸 사람이고, 축의금 보낸 사람이고, 당신 작은아버지고.”도윤의 눈이 굳었다.“누가 말했습니까.”“아무도요. 제가 맞췄어요.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이 부정 안 했어요.”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렇습니다. 작은아버지입니다.”“그 말이 여섯 번째예요? 아니면 노트에서 하나 지워요?”“지우세요. 대답했으니까.”서하는 노트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왜 그렇게 그 사람을 무서워해요. 당신은 아무것도 안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구는데.”도윤이 오래 식탁을 봤다. 확인서 위의 한 문장을. 김재현 연구소장 서가.“십오 년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서하의 숨이 멈췄다.“교통사고였습니다. 아버지가 운전했고, 어머니가 옆에 있었고, 저는 뒷자리에 있었습니다. 옆구리 흉터는 그때 겁니다.”“……”“아버지는 그때 해원의 후계자였습니다. 사고 뒤에 후계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작은아버지가 부회장이 됐고, 저는 열아홉이었고, 할아버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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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 파란 파일

서재는 없었다. 열여덟 평에 서재가 있을 리 없었다.그러나 서하는 강태성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옷장 맨 위 칸. 검은 서류가방. 도윤이 구청 날부터 갖고 있던 가방. 그녀는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었다.이민영은 오늘 한소이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세 번째 시제품 안정성 테스트를 밤새 지켜본다고 했다. 어머니가 밤을 새우겠다고 한 것은 서하가 기억하는 한 처음이었다.집은 조용했다.서하는 의자를 가져와 옷장 앞에 놓았다. 올라섰다. 가방은 잠겨 있지 않았다.파란 파일이 있었다.그녀는 파일을 들고 한참 서 있었다.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강태성에게 거래 끝이라고 말하고 파일을 도로 넣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도윤이 자신에게 해 온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열었다.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서하는 알고 있었다.의결권 신탁계약서.위탁자 강일호. 수탁자 아르덴캐피털. 수익자 강도윤.서하는 첫 장을 읽었다. 조항이 이어졌다.수익자가 만 삼십사 세 생일까지 혼인하지 않을 경우, 신탁 의결권은 강태성에게 이전한다.혼인 후 일 년 이내에 혼인이 해소될 경우, 전항과 같다.일 년.그녀는 그 두 글자를 오래 봤다.구청 앞에서 도윤이 말했다. 일 년. 그 전에 한쪽이 원하면 합의해서 끝낼 수 있습니다. 그는 끝낼 수 있다고 했지만, 끝나면 그가 무엇을 잃는지는 말하지 않았다.계약 기간 일 년은 서하의 편의가 아니었다. 그의 조건이었다.구청 앞에서 그는 작은 지분이라고 했다. 회사원한테 의결권이 있냐고 물었을 때. 작은 지분. 서하는 그 말을 이제 다른 무게로 들었다. 작은 지분에 신탁계약서가 붙지는 않는다.그 아래에 신탁 재산이 적혀 있었다. 해원홀딩스 보통주. 그리고 숫자.서하는 숫자를 읽지 않았다.손으로 그 줄을 가렸다. 그리고 파일을 덮었다.그가 무엇을 가졌는지 아는 것과, 그가 왜 일 년이라고 했는지 아는 것은 달랐다. 그녀는 두 번째만 알기로 했다. 첫 번째는 그가 말할 때까지.파일을 가방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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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 열어 본 대가

“일 년까지.”도윤이 그 말을 되풀이했다.“네. 숫자는 안 읽었어요. 손으로 가렸어요.”“왜.”“그건 당신이 말해야 하는 거니까요.”그가 재킷을 벗었다. 소파에 던지지 않고 의자에 걸었다. 손이 느렸다.“그래서 뭘 봤습니까.”“일 년이요. 당신이 왜 일 년이라고 했는지.”“……”“구청 앞에서 저는 당신이 저한테 시간을 준 줄 알았어요. 일 년 살아 보고 싫으면 끝내라고. 그런데 그건 저를 위한 게 아니었어요. 당신이 일 년 안에 저를 잃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둘 다입니다.”“둘 다는 없어요.”“있습니다.”도윤이 그녀 앞에 섰다.“일 년은 신탁 조건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일 년이라고 말한 건 당신이 도망칠 문을 남겨 두려고 한 겁니다. 문이 없으면 당신은 그날 서명 안 했을 겁니다.”“그럼 저를 잃으면 어떻게 되는데요.”“작은아버지가 이깁니다.”“그게 다예요?”“그게 십오 년입니다.”서하는 그 말의 무게를 받았다. 열아홉 살에 미국으로 보내진 남자. 부모의 사고. 흉터. 십오 년.“그러면 당신은 저를 일 년 동안 붙잡아 둬야 하는 거네요.”“……”“그래서 반씩 내자고 한 것도, 동전 돌려준 것도, 결혼식 한 것도.”“아닙니다.”“뭐가 아닌데요.”“계산이었으면 동전은 안 돌려줬습니다. 계산이었으면 당신이 세림 채권 연장하라고 했을 때 안 했습니다. 계산이었으면 노트 한 권에 표를 안 줬습니다.”그가 숨을 골랐다.“계산이 안 되니까 문제라고 했잖습니까.”서하는 그를 올려다봤다.“그래서 떠날 겁니까.”도윤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처음 듣는 종류의 낮음이었다.“계약대로면요.”서하가 말했다.“당신 거짓말이 들켰으니까, 제가 원하는 조건으로 이혼할 수 있죠.”“……그렇습니다.”“제 조건은요.”그녀가 한 걸음 다가섰다.“이혼 안 하는 거예요.”도윤이 굳었다.“일 년 채워 줄게요. 당신 신탁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요. 대신 일 년 뒤에 다시 물어봐요. 나와 결혼하겠냐고. 구청에서 물었던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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