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당한 날,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Chapter 51 - Chapter 60

69 Chapters

51화 — 세림의 다온

한지훈의 전화는 아홉 시에 왔다.“봤지.”“봤어.”“네 회사, 이제 내 거야.”“다온은 원래 내 회사가 아니었어. 할머니 회사였지.”“그래서 더 좋지. 할머니 회사를 내가 산 거니까.”서하는 창밖을 봤다. 도윤은 출근했다. 이민영은 아직 한소이 집에 있었다.“지훈아.”“응.”“너는 내 회사를 산 게 아니라 내 할머니 이름을 산 거야. 이름은 못 사.”“무슨 뜻이야.”“다음 달에 알게 될 거야.”“돌아올 마지막 기회야, 서하야. 연구소장. 지분. 그리고…….”“지훈아. 채린이는 어떻게 할 건데.”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네가 다온을 샀으면 채린이도 네 회사 직원이야. 걔 이름으로 특허 냈잖아. 그 특허, 이의 신청 들어간 거 알지? 발명자 정정. 원본 노트가 다온 금고에 있었다는 확인서까지 들어갔어.”“……누가 확인서를.”“가져간 사람이.”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축하해. 회사 샀네. 그 회사에서 제일 잘 팔리는 세 개가 곧 내 이름으로 바뀔 거야. 발명자 윤서하. 라벨 뒤에 작게. 근데 소비자는 뒤를 봐.”전화를 끊었다.손은 떨리지 않았다.세라온의 첫 사무실은 모이스트랩 옆 칸이었다.공유오피스 여섯 평. 책상 세 개. 한소이가 보증금 절반을 냈다. 공동 개발 파트너로. 서하의 첫 제품은 모이스트랩 세 번째 시제품에서 갈라져 나올 예정이었다. 한소이의 것이 아니라 서하의 처방으로.박민지가 첫 출근했다. 다온에 사직서를 낸 지 사흘째였다.“선배, 월급 진짜 적네요.”“적다고 했잖아.”“그래도 여기가 좋아요. 이름이 있어서.”이민영은 라벨을 붙였다. 이제 그 일이 빨라졌다.유라가 오후에 왔다. 커피 네 잔을 들고.“앰배서더 계약서 갖고 왔어요. 돈은 나중에 주세요. 대신 첫 제품 제 계정에서 먼저 열어요.”“유라 씨.”“채린이 미워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이번엔.”서하가 웃었다.저녁에 도윤이 사무실에 왔다. 여섯 평을 둘러봤다.“열여덟 평보다 좁군요.”“월세는 반이에요.”“누구랑 반입니까.”“한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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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 회사는 지키고, 사람은 선택한다

“이혼해라.”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강일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노인의 목소리는 병실 벽에 부딪혀 낮게 울렸다.“네가 이사회에 낸 글은 잘 썼다. 그런데 그 글이 증명한 건 하나다. 네 약점이 어디 있는지, 이제 그룹 전체가 안다는 것.”“약점이 아닙니다.”“그럼 뭐냐.”“이유입니다.”“이유라.”노인이 웃었다. 마른 웃음이었다.“신탁 조건은 채웠다. 혼인. 일 년만 버티면 의결권은 네 것이다. 그러니 일 년 뒤에 정리해라. 명진이 기다려 준다고 했다. 서연희는 이유가 아니라 계산이 되는 아이다. 네 옆에는 계산이 되는 사람이 있어야 해.”“할아버지.”“말해라.”“그 사람이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제 거짓말이 들켰으니 자기가 원하는 조건으로 이혼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조건은 이혼 안 하는 거라고.”강일호의 손가락이 팔걸이 위에서 멈췄다.“일 년을 채워 준다고 했습니다. 제 신탁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그리고 일 년 뒤에 다시 물으라고 했습니다. 구청에서 물었던 것처럼.”“……그래서.”“그래서 저는 둘 다 가질 겁니다. 할아버지가 만든 신탁 조건대로 일 년을 채우고, 그 뒤에도 그 사람이 제 아내입니다. 명진은 거절합니다. 세 번째로.”“회사보다 그 아이냐.”도윤은 처음으로 앉았다. 노인과 눈높이가 맞았다.“회사는 제가 지킵니다. 그건 제 일입니다. 그 사람은 제가 선택합니다. 그건 제 삶입니다. 두 개를 바꾸라고 하시면, 저는 둘 다 안 내놓습니다.”병실이 조용했다.한참 뒤 강일호가 웃었다. 이번에는 마른 웃음이 아니었다. 오래 이어졌고, 끝에 기침이 붙었다.“네 아비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아버지가요.”“그 애도 그랬다. 회사는 지키고 사람은 고른다고. 그래서 내가 그 애한테 후계를 줬다.”노인이 창밖을 봤다.“그리고 그 애는 죽었다.”도윤의 턱이 굳었다.“그러니 잘 들어라. 이유는 지켜야 하는 거다. 약점은 숨기면 되지만 이유는 숨길 수가 없어. 그럼 지켜야지. 지킬 수 있겠느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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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 성북동

아침 식탁에 커피 두 잔이 놓였다.“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지, 어제 다음에 말한다고 했죠.”서하가 먼저 꺼냈다. 도윤은 잔을 들지 않았다.“이혼하라고 하셨습니다. 명진과 혼담을 다시 잡겠다고.”“당신 대답은요.”“회사는 제가 지키고, 사람은 제가 선택한다고 했습니다. 둘 다 안 내놓는다고.”서하는 그 문장을 한 번 더 들었다. 머릿속에서.“그게 다예요?”“……그게 전부는 아닙니다.”“나머지는요.”“할아버지가 화를 내셨습니다. 화를 내시는 방식이 있고요. 그건 제가 처리합니다.”반만 말하는 버릇. 서하는 파란 노트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 번 두드렸다. 노트의 빈 줄이 몇 개 남았는지 그도 알고 있었다.“이번 주말에 할아버지 댁에 가요. 회사 이름 가져오라고 하셨으니까.”“같이 갑니다.”“당연하죠. 손자잖아요.”일요일 오후, 성북동.대문은 집보다 먼저 사람을 압도했다. 돌담이 끝나지 않았고, 문이 열리자 자갈길이 다시 시작됐다. 서하는 차창 밖을 보며 말했다.“재단 이사장 집이 이 정도예요?”“……좀 큽니다.”“좀이 아닌데요.”본채는 한옥과 양옥이 붙어 있었다. 현관에서 나이 든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도윤을 보는 눈과 서하를 보는 눈이 달랐다. 전자는 익숙했고 후자는 조심스러웠다.강일호는 서재에 있었다. 병원에서 본 것보다 살이 붙어 있었다. 휠체어 대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도윤이는 나가 있어.”지난번과 같은 말이었다. 도윤이 서하를 봤다.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혔다.노인은 서랍을 열었다. 누렇게 바랜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네 할머니가 이십 년 전에 돌려보낸 거다.”인수계약서였다. 마지막 장이 반으로 찢겨 있었다. 찢긴 자리에 정세라의 글씨가 한 줄 남아 있었다.사람은 팔지 않습니다.서하는 그 글씨를 오래 봤다. 열 살 때 비커 옆에서 배합표를 적어 주던 손이었다.“회사 이름은 가져왔느냐.”“세라온. 등록결정 나왔어요.”“정세라의 온도.”“네.”노인이 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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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 두 여자의 거래

연희는 성북동 골목 끝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삼십 분 뒤였다. 도윤은 차에 남았다.“어른이 저한테는 이렇게 말했어요. 일 년만 기다리면 명진에 해원리테일 유통권을 준다. 그동안 혼담은 살려 두고.”“기다릴 거예요?”“아버지는 기다리라고 하죠. 저는 바둑돌이 되기 싫고요.”연희가 커피를 내려놓았다.“당신한테는 뭐라고 했는데요.”“이혼하면 다온 지분 십 퍼센트.”“거절했군요.”“네.”“그럼 그다음 제안이 있었겠네요. 그 어른은 거절한 사람한테 진짜 제안을 하니까.”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희는 더 묻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두는 법을 아는 여자였다.“동맹 할래요?”“무슨 동맹이요.”“저는 강태성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려 드릴게요. 명진은 리테일이랑 거래하니까 그쪽 숨소리가 들려요. 당신은…….”“저는요.”“이 결혼이 서류가 아니라는 걸 계속 보여 주세요. 집안 어른들 앞에서, 기자들 앞에서, 이사회 앞에서. 그러면 명진은 혼담을 접어요. 아버지도 안 되는 일에 돈을 안 쓰는 사람이니까.”“그게 당신한테 좋은 거예요?”“네. 저는 명진을 물려받고 싶어요. 결혼으로 말고 일로.”서하는 처음으로 서연희를 이해했다.“좋아요.”“적이 아니라 아군이 되는 거예요. 지난번에 정했다고 했죠.”“네. 그런데 하나만.”“말해요.”“도윤 씨한테 감정 없다는 말, 거짓말이에요?”연희가 웃었다. 지친 웃음이 아니라 가벼운 웃음이었다.“없어요. 그 사람은 서류로 나를 봤고 나도 서류로 그 사람을 봤어요. 당신은 그 사람이 서류를 찢는 걸 봤죠. 그건 다른 거예요.”집에 돌아오자 이민영은 한소이의 집에 가 있었다. 요즘 어머니는 주말마다 거기서 잤다.도윤이 현관에서 물었다.“할아버지가 뭘 제안했는지, 안 물어도 됩니까.”“물어도 돼요.”“……뭘 제안하셨습니까.”“세림이 가진 다온 지분 십 퍼센트. 오십억. 당신이랑 이혼하면요.”도윤의 턱이 굳었다.“그래서요.”“할머니도 안 팔았다고 했어요.”“그게 답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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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 집 구하기

“한강이 보이는 데로 합시다.”도윤이 태블릿을 돌렸다. 화면에 유리로 된 건물이 떠 있었다. 서하는 가격을 보고 화면을 도로 돌렸다.“반반 못 내요.”“제가 냅니다.”“그럼 당신 집이죠. 제 집이 아니라.”“……”“월급 얼마예요?”도윤이 잠깐 멈췄다.“심사역 월급이요. 아르덴투자.”그가 숫자를 말했다. 서하는 그 숫자를 두 번 들었다.“그 월급으로 어떻게 그 시계를 사요.”“시계는 할아버지 선물입니다.”“차는요.”“회사 차입니다.”“정장은요.”“……오래 입은 겁니다.”서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월급과 그의 삶 사이에 빈자리가 너무 컸다. 그 빈자리를 그녀는 일 년 동안 묻지 않기로 했다.“그 월급 반이랑 제 자문료 반으로 낼 수 있는 집이요. 세라온 사무실에서 걸어갈 수 있는 데.”부동산은 성수동에 세 군데였다.첫 번째 집은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도윤이 좋다고 했다. 서하는 열여덟 평에서 스물두 평이 되는 것은 이사가 아니라고 했다.두 번째 집은 빌라 꼭대기였다. 서하가 좋다고 했다. 도윤은 계단이 다섯 층이라고 했다. 서하는 운동이라고 했다. 도윤은 어머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냐고 했다.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세 번째 집은 아파트였다. 구십 년대에 지은 서른 평. 복도가 넓고 창이 컸다. 부엌에 사람 둘이 서도 부딪히지 않았다.“여기요.”서하가 말했다.집주인은 칠십 대 할머니였다. 전세금을 말했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잠깐만요.”그녀는 할머니 앞에 앉았다.“보일러 몇 년 됐어요?”“……십이 년.”“창틀 실리콘 갈아야 하고요. 화장실 환풍기 소리 들으셨죠. 오백 내려 주시면 저희가 다 고쳐서 살게요. 이 년 뒤에 집이 더 좋아져요.”할머니가 서하를 보고, 도윤을 봤다. 도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흥정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사는 쪽이었지 깎는 쪽이었던 적이 없었다.“……삼백.”“사백.”“사백 오십.”“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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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 두 아버지

이사 첫날 밤, 상자는 풀지 않았다.두 사람은 빈 거실 바닥에 앉아 사진 한 장을 사이에 두었다. 창밖으로 성수동의 불빛이 들어왔다. 커튼은 아직 달지 않았다.“아버지 이름은 강민석입니다.”도윤이 말했다.“이십 년 전에 해원이 다온을 사려고 했을 때 협상을 맡았습니다. 작은아버지가 인수를 밀어붙였고, 아버지는 그 일을 맡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시킨 겁니다.”“그래서 제 아버지를 만났어요?”“연구소장이었으니까. 핵심 인력 면담. 그런데 면담이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 됐습니다.”“친해졌어요?”“아버지 수첩에 김재현이라는 이름이 열한 번 나옵니다. 마지막 두 번은 협상이 끝난 뒤입니다.”서하는 사진 속 두 남자를 봤다. 둘 다 웃고 있었다. 협상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었다.“당신 아버지는 다온을 사려던 게 아니었어요?”“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첩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회사는 사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게 맞다.”“누구한테서요.”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작은아버지.”“……네.”서하는 사진을 뒤집었다. 뒷면에 날짜가 있었다. 아버지가 죽기 석 달 전이었다.“그날 밤에 말했죠. 제 아버지 사고 자료에서 당신 부모님 사고와 같은 자문회사 이름을 봤다고.”“네.”“이름이 뭐예요.”“서진자문. 보험사고 자문회사입니다. 교통사고, 화재, 산재. 보험사 대신 원인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씁니다.”“해원이 쓰는 회사예요?”“해원 계열사 전부가 씁니다. 이십 년 전부터.”“그러니까 제 아버지 화재도, 당신 부모님 사고도, 같은 회사가 원인을 썼네요.”“네.”“그 보고서를 봤어요?”“부모님 것은 봤습니다. 졸음운전. 당신 아버지 것은 제목만 봤습니다. 전기 합선.”서하는 사진을 다시 뒤집어 두 남자의 얼굴을 봤다.“같이 확인하자고 했죠. 대가도 같이 치르고.”“했습니다.”“그럼 내일부터요.”“내일은 커튼을 달아야 합니다.”서하가 웃었다. 웃다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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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 최초 신고자

커튼은 회색이었다. 서하가 골랐고 도윤이 달았다. 그가 의자 위에서 커튼봉과 씨름하는 동안 서하는 식탁에 서진자문 보고서를 펼쳤다.이십 년 된 종이였다. 복사본의 복사본. 글씨가 번져 있었다.“윤성호 진술. 새벽 한 시경 김재현 소장의 전화를 받음. 연구소에 급히 와 달라는 내용. 한 시 사십 분경 도착. 삼 층에서 연기 확인. 즉시 신고.”서하가 읽었다. 도윤이 의자에서 내려왔다.“신고 시각은 한 시 이십 분입니다.”“네. 도착하기 이십 분 전에 신고했네요.”“진술이 틀렸거나 시계가 틀렸거나.”“시계는 소방서 거예요. 틀렸으면 진술이에요.”서하는 보고서를 넘겼다. 발화 원인 전기 합선. 삼 층 실험실 배전반. 노후. 그리고 서진자문의 의견란.사고사로 판단됨. 보험금 지급 권고.“보험금을 누가 받았어요.”“다온뷰티. 수령인 서명은 재무이사.”“윤성호.”도윤이 맞은편에 앉았다.“지금 치고 싶습니까.”“치고 싶어요.”“그런데요.”“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다 잃었어요. 회사도, 집도, 채린이도. 궁지에 몰린 사람은 거짓말을 더 잘해요. 지금 가면 또 다른 진술이 나올 거예요.”“그럼 어떻게 합니까.”“엄마 이혼 소송이요. 재산분할 때문에 이십 년 전 회사 재무 자료를 제출해야 해요. 보험금 수령 기록도 거기 들어가요. 법원이 내라고 하면 윤성호는 내야 해요. 제가 묻는 게 아니라.”도윤이 그녀를 오래 봤다.“당신은 가끔.”“네 번째예요.”“네 번째로 무섭습니다.”다음 날 오후, 세라온 사무실.박민지가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숫자가 줄지어 있었다. 사십 도, 사십오 도, 오십 도. 사 주, 팔 주, 십이 주. 분리 없음. 점도 유지. 피에이치 안정.“통과예요, 선배. 1호 장벽 크림. 전 조건 통과.”서하는 화면을 한참 봤다. 그리고 샘플 병을 들어 손등에 발랐다. 냄새를 맡고, 문지르고, 삼십 초를 기다렸다.“할머니 처방이랑 제 처방 사이에 있어요. 이거.”“그게 좋은 거예요?”“좋은 거야. 할머니가 막고,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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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 두 번째 가처분

“방식이 달라요.”고은재가 화이트보드에 두 줄을 그었다.“세 번째 처방은 온도를 내리고 투입 순서를 바꿔요. 세라온 1호는 유화제 자체를 바꿨어요. 온도는 안 건드리고요. 맞죠?”“네. 1호는 상온에서 가요. 그래서 공장 비용이 적게 들어요.”“그럼 침해가 아니에요. 다른 길로 같은 산을 오른 거니까. 그런데 서하 씨.”“또 그런데요.”“발명자 정정 심판이 아직 진행 중이에요. 법원 입장에서는 세 번째 처방이 누구 건지 결정 안 났는데, 그 사람이 만든 새 제품이 들어온 거예요. 보수적으로 보면 출시를 잠깐 막을 수도 있어요. 심판 끝날 때까지.”“얼마나요.”“두 달. 길면 네 달.”서하는 화이트보드를 봤다. 두 달이면 크라우드펀딩이 끝나고, 공장이 돌고, 첫 물량이 창고에 쌓인다. 네 달이면 창고비로 회사가 죽는다.“지훈이 그걸 노리는 거네요.”“네. 이기려는 게 아니라 늦추려는 거예요.”“그럼 늦출 수 없게 만들어야죠.”“어떻게요.”서하는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1호 처방의 전 실험 기록. 날짜별로. 세라온 사무실 생긴 날부터. 박민지가 매일 백업했어요. 서버 말고 세 군데에.”고은재가 서류를 받아 들고 처음으로 웃었다.“배웠네요.”“잘린 날 배웠어요.”지훈은 다온뷰티 본사 대표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서하는 육 년 동안 그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윤성호의 방이었다. 지금은 가구가 바뀌어 있었다. 유리와 검은 가죽.“앉아.”“서서 할게.”지훈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표의 자리에서 그녀를 올려다봤다.“내용증명 받았지.”“받았어. 변호사가 웃더라.”“웃을 일 아니야. 출시 못 하면 네 회사 죽어.”“그래서 보낸 거잖아. 죽이려고.”“아니.”지훈이 처음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살리려고. 세라온을 다온 자회사로 들여. 연구소장 자리. 지분 십오 퍼센트. 네 이름 그대로 두고. 그럼 가처분 철회해.”서하는 그를 봤다. 삼십삼 살. 그녀가 십 년을 알았던 남자. 회사를 샀고, 채린을 버렸고, 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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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 잘린 동생

채린은 모자를 쓰고 왔다.화장은 없었고 손톱은 길었다. 육 평 사무실 문 앞에서 한참 들어오지 못했다. 열두 살 때 현관에서 신발을 못 벗던 아이의 얼굴이었다.“들어와.”박민지가 노트북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바로 차가워졌다. 한소이가 건너편 칸에서 블라인드를 내렸다.채린은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매출이 반토막 났어. 발명자 얘기 나오고 나서. 지훈 오빠가 그랬어. 얼굴값을 못 하면 나갈 때라고.”“그래서.”채린이 가방에서 USB를 꺼내 책상에 놓았다.“삭제되기 전에 내려받은 거. 언니 자료 전부. 아빠가 지우라고 했을 때 내 계정으로 먼저 받아 뒀어.”“왜.”“……언젠가 쓸 데가 있을 것 같아서.”“나한테 팔려고?”“아니.”채린이 고개를 들었다.“나 좀 써 줘.”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박민지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지금 뭐라고 했어요?”“민지야.”“선배. 이 사람이 선배 처방으로 런칭쇼 하고, 선배 이름 지우고, 라이브에서 선배가 도둑이라고…….”“알아.”“그런데 써 달라고요?”박민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채린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숙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이상하게 안쓰러웠다.서하는 USB를 집었다.“채린아.”“응.”“자리는 없어.”채린의 입술이 떨렸다.“네가 만든 게 하나도 없으니까. 여기는 만드는 사람만 있어. 민지도, 소이 씨도, 유라 씨도. 네가 뭘 만들어 오면 그때 얘기해.”“언니.”“대신 이건 받을게. 그리고 하나 더 써 줘.”서하가 종이와 펜을 밀었다.“이 USB를 언제, 누구 지시로, 왜 받았는지. 그리고 그 뒤에 이 자료가 어디로 갔는지. 네가 본 대로.”“진술서?”“응. 네 이름으로.”채린은 한참 펜을 보다가 들었다. 글씨가 서하와 조금 닮아 있었다. 같은 집에서 같은 선생님에게 배운 글씨였다.쓰는 데 삼십 분이 걸렸다. 쓰다가 두 번 멈췄고, 한 번은 종이를 구겼다.서하는 다 쓴 진술서를 읽었다.아빠가 삭제를 지시했다. 지훈 오빠가 승인했다. 내 계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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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 사촌의 손

“심판 증거로 써요.”서하가 말했다.“다온이 세 번째 처방을 채린 이름으로 출원한 날짜랑, 윤성호가 자료를 해원리테일에 넘긴 날짜가 겹쳐요. 해원리테일 쪽 사람이 받았다는 진술이 있으면, 다온이 혼자 한 일이 아니라는 게 돼요. 심판원이 다르게 봐요.”“그러면 준혁이 이름이 공문서에 올라갑니다.”“올라가야죠. 받았으니까.”도윤은 식탁 위 진술서를 봤다. 새 집 식탁은 열여덟 평 것보다 두 배 컸다. 종이 한 장이 더 작아 보였다.“제 조건은 그 다음입니다. 준혁이는 심부름꾼입니다. 하드디스크를 받아서 누구한테 줬는지, 그 자료가 어디서 복구돼서 채권 담보 평가서에 들어갔는지. 거기까지 잡으면 작은아버지가 나옵니다.”“당신 작은아버지를 공문서에 올리고 싶어요?”“아니요.”“그런데요.”“당신 이름이 그 사람 금고에 있는 게 더 싫습니다.”서하는 그 대답을 받았다.“그럼 어떻게 잡아요. 리테일 안쪽 기록을.”“서연희 씨.”도윤이 그 이름을 말하는 데 반 박자가 걸렸다.“명진이 리테일이랑 거래합니다. 거래 상대방은 상대 회사의 결재 라인을 압니다. 신사업팀이 외부에서 자료를 받으면 수령 기록이 남습니다.”“연희 씨한테 부탁하라고요?”“당신이 동맹이라면서요.”“……그 얘기 했어요?”“안 했습니다. 그런데 성북동에서 그 사람이 당신한테 뭐라고 하는 걸 봤습니다.”서하는 웃을 뻔했다. 반만 보는 버릇도 옮는 것이었다.연희는 답이 빨랐다. 다음 날 오후, 메일 한 통.[해원리테일 신사업팀 외부자료 수령대장 사본. 수령 일자 두 건. 수령자 최민규 팀장. 전달자 강준혁 대표. 내부 결재 상신: 부회장실. 출처는 묻지 마세요. 명진도 리테일에 줄 게 있으니까.]서하는 메일을 고은재에게 보냈다. 고은재의 답은 더 빨랐다.[이거면 돼요. 심판원에 추가 증거로 냅니다. 이번 주 안에.]그날 밤, 새 집.커튼을 치지 않았다. 창밖으로 성수동의 불빛이 들어왔고, 서른 평 거실은 아직 가구가 적어서 바닥이 넓었다.서하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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