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당한 날,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Chapter 31 - Chapter 40

69 Chapters

31화 — 결혼식을 한 번 더

“호텔은 안 돼요.”서하가 잘라 말했다.“왜요.”“당신이 고를 호텔은 다 해원 거잖아요.”도윤이 잠깐 말이 없었다.“……전부는 아닙니다.”“구청에서 시작했으니까 구청 근처에서 해요. 작은 데서. 사람 스무 명.”“스무 명.”“당신 쪽에서 몇 명 올 수 있어요?”도윤은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그 계산이 인원이 아니라 위험이라는 것을 서하는 알았다. 그의 가족이 오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드러난다.“세 명.”“누구요?”“정우석, 배진호 변호사, 아르덴 임재현 대표.”“가족은요?”“할아버지는 병원에 계시고,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서하는 그 말의 무게를 뒤늦게 알았다. 안 계십니다. 돌아가셨다는 뜻이었다. 그는 한 번도 부모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미안해요.”“물은 게 아니니까 사과할 일도 아닙니다.”“그래도요.”도윤은 대답 대신 상자를 열었다.반지는 화려하지 않았다. 얇은 백금 링 두 개. 안쪽에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왜 비어 있어요?”“새길 말을 못 정했습니다.”“언제 샀는데요?”“구청 다음 날.”서하는 반지를 오래 봤다.“그때 왜 안 줬어요?”“서류 결혼에 반지를 주면 당신이 도망칠 것 같아서.”“지금은요?”“지금은 당신이 도망칠 것 같으면 따라갈 겁니다.”주말은 빨리 왔다.장소는 구청에서 두 블록 떨어진 오래된 양식당이었다. 고은재가 아는 집이었다. 흰 식탁보와 낡은 샹들리에. 하객은 열아홉 명.서하 쪽에는 고은재, 박민지, 한소이와 모이스트랩 직원들, 그리고 유라가 왔다. 유라는 서하를 보자마자 말했다.“영상 보낸 사람이 저예요. 이제야 인사하네요.”“알고 있었어요. 고마워요.”“고마워하지 마세요. 저는 채린이 미워서 보낸 거예요.”“그래도요.”도윤 쪽에는 정우석과 배진호, 임재현이 왔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사람 하나.이민영이었다.혼자였다. 검은 원피스에 화장기 없는 얼굴. 문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들어왔다.“성호 씨는 몰라.”“엄마.”“유언장 사진 보낸 거, 후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32화 — 어머니가 아는 이름

깨진 잔은 고은재가 치웠다.이민영은 자리에 앉지 못했다. 서하가 어머니를 식당 뒤편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도윤은 따라오지 않았다. 따라오지 않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엄마. 왜 그래요.”“그 이름. 강태성.”“해원 부회장이에요. 사업 제안하러 왔던 사람이고요. 제가 거절했어요.”“네가 거절했다고?”“네.”민영이 서하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서하야. 그 사람이 네 남편 결혼식에 왜 돈을 보내니.”“그건……”“네 남편이 그 집 사람이니?”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민영은 그 침묵을 읽었다. 여섯 달 전 결혼식 대기실에서 서하가 어머니의 침묵을 읽었던 것처럼.“엄마가 왜 이렇게 놀라는지 모르겠어요.”“해원은…… 네 할머니 회사를 처음 사려고 했던 데야.”“다온을요?”“이십 년 전에. 그때 나는 몰랐어. 나중에 성호 씨가 말해 줬어. 해원이 다온을 인수하려다 실패했고, 그 뒤로 할머니가 해원 사람은 회사에 들이지 말라고 했다고.”서하의 머릿속에서 병실의 노인이 떠올랐다.정세라의 손녀가 이 집에 들어왔구나.그녀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강일호가 자신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무엇을 봤는지는 이제 알 것 같았다.“엄마, 그건 이십 년 전 일이에요.”“이십 년이 아니라 이백 년이 지나도 그 사람들은 안 변해. 서하야, 그 남자가 누구든, 그 집안이 너한테 원하는 게 있어.”“저도 그 사람한테 원하는 게 있어요.”민영이 서하를 봤다.“그래서 결혼한 거야. 지훈이 때문이 아니라.”“지훈이 때문이기도 했어요.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민영은 오래 딸을 바라봤다. 그러다 가방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이거. 유언장 나머지 장이야. 사진으로는 안 보내려고 했어. 성호 씨 휴대전화가 내 걸 다 보니까.”두 번째 장이었다.[본인의 연구 기록과 다온뷰티 초기 처방 원본은 서하에게 남긴다. 서하가 원하면 그 처방으로 자기 이름의 회사를 만들어도 좋다. 다온이 아니어도 좋다.]서하는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다온이 아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33화 — 두 번째 첫날밤

“나한테요.”그 말이 떨어진 뒤 도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서하는 그가 무엇을 참고 있는지 알았다. 첫날 밤의 거침, 식탁 위의 조급함. 그것들과 다른 것이었다.“오늘은 천천히 하고 싶습니다.”“왜요?”“결혼식 날이니까.”그가 그녀의 손을 들어 반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하나에.서하는 웃으려다 웃지 못했다. 목이 막혔다.도윤이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녀가 입은 그의 셔츠였다. 단추 하나에 키스 하나. 쇄골, 가슴 사이, 명치, 배꼽 옆. 셔츠가 어깨에서 미끄러져 침대 위에 떨어졌을 때 서하는 이미 숨이 고르지 않았다.“누워요.”그녀는 누웠다.그는 옷을 벗고 그녀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옆에 누워 그녀를 바라봤다. 손바닥이 얼굴에서 목으로, 가슴으로, 허리로 천천히 내려갔다. 만지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손이었다.“뭐 해요?”“외우는 중입니다.”“뭘요?”“당신을.”서하는 그의 손을 잡아 자기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외우는 건 나중에요.”도윤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곧 숨으로 바뀌었다.손가락이 들어왔다. 느리게, 그러나 정확하게. 서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그는 그녀의 몸이 어디에서 반응하는지 알았다. 안다는 것이 이렇게 위험한 일인 줄 몰랐다.“도윤 씨.”“여기 있습니다.”“지금요.”그가 그녀 위로 올라왔다. 콘돔을 씌우는 손이 침착했다. 눈은 침착하지 않았다.들어올 때 그는 그녀의 눈을 봤다. 첫날처럼. 그러나 첫날과 달리 서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느렸다. 한 번 깊이 들어와 멈추고, 그녀의 숨이 돌아오면 다시 움직였다. 서하는 그의 등을 끌어안고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급하지 않은 것이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줄 몰랐다.“더요.”“아직.”“도윤 씨.”“오늘은 내가 정합니다.”그의 손이 두 사람 사이로 내려가 그녀를 건드렸다. 서하의 허리가 들렸다. 그제야 도윤이 속도를 올렸다.침대 머리가 벽에 닿았다. 두 사람의 숨이 겹쳤다. 서하는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대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34화 — 사촌

강준혁은 다음 날 오후 모이스트랩 사무실에 나타났다.약속은 없었다. 서른 살, 큰 키, 손목에 시계 두 개를 찬 남자. 한소이가 당황해서 자리를 내주려는 것을 서하가 막았다.“여기는 회의실이 없어요. 용건은 여기서요.”“화끈하시네. 강준혁입니다. 인플루언서 브랜드에 투자해요. 채린 씨 브랜드도 저희가 봤고요.”“그래서요?”“그래서 윤서하 씨 브랜드도 보려고요. 세라온.”또 그 이름이었다.“등록도 안 한 이름을 어떻게 다들 아시죠?”“아버지한테 들었어요.”준혁이 태연하게 말했다.“삼십억 거절하셨다면서요. 멋있던데.”“용건이 그거면 끝났어요.”“아니, 용건은 따로 있어요.”준혁이 소파에 앉았다. 앉으라고 한 적 없었다.“어제 영상, 제가 찍었어요. 지웠는데 벌써 퍼졌더라고요. 사과하러 왔어요. 그쪽 가족 일이니까.”“가족 아니에요.”“의붓동생이면 가족이죠. 그리고 한지훈 씨는 곧 제부가 될 뻔했고.”서하는 그를 바라봤다. 이 남자는 강태성과 달랐다. 강태성은 온도를 조절했다. 준혁은 온도를 갖고 놀았다.“그래서 사과가 끝이에요?”“하나 더. 도윤이 형이 요즘 이사회에서……”준혁이 말을 끊었다. 서하의 얼굴을 봤다.“아, 모르셨구나.”“뭘요?”“아니, 우리 형이 아르덴 이사회에서 잘나간다고요. 아르덴이 우리 쪽 돈 받잖아요. 형이라고 부르는 건 그냥 업계 습관이에요.”거짓말이었다. 서하는 알았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거짓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도윤 씨를 아세요?”“오래 알았죠. 형이 미국에 있을 때부터.”“미국이요?”“어? 그것도 모르세요?”준혁이 웃었다. 그 웃음이 서하를 화나게 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즐기는 웃음이었다.“강준혁 씨.”“네.”“나가세요.”준혁은 일어났다. 문 앞에서 돌아섰다.“형이 여자 때문에 회의 접고 집에 간 거, 처음이래요. 아버지가 그러더라고요. 그게 약점이라고.”문이 닫혔다.한소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아요?”“네. 배합표 봐요. 세 번째 시제품 온도 다시 잡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35화 — 약점

“다온뷰티 회사채, 만기 두 달 남았습니다. 삼백억. 인수한 곳이 해원리테일 자회사입니다.”정우석이 태블릿을 건넸다. 도윤은 화면을 넘겼다.“윤성호가 팔았나.”“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림 인수금융이 막혔고, 은행 연장도 안 됐습니다. 부회장님이 시장가보다 이십 퍼센트 높게 사셨습니다.”“조건은.”“공식 조건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윤성호 대표가 부회장실에 다녀갔습니다. 하드디스크 두 개를 들고.”도윤은 화면을 껐다.삭제된 자료였다. 서버에서 지운 서하의 실험 결과와 결재 문서. 윤성호는 그것을 복구해 뒀다가 강태성에게 넘겼다.“사모님께 말씀하시겠습니까.”“일부만.”같은 날 오후, 모이스트랩.한소이가 서하를 회의실 대신 복도로 불러냈다.“해원리테일에서 연락 왔어요. 입점 제안이요. 조건이 좋아요. 너무 좋아요.”“어떤 조건인데요.”“입점 수수료 면제. 마케팅 지원. 대신 세 번째 시제품 처방을 공동 명의로.”서하는 복도 벽에 기댔다.“소이 씨 브랜드예요. 결정은 소이 씨가 해요.”“서하 씨 처방이잖아요.”“계약서에는 모이스트랩 거예요. 저는 자문이고요.”“그래서 묻는 거예요. 서하 씨가 싫으면 안 해요.”서하는 한소이를 봤다. 직원 셋, 제품 둘, 공유오피스 한 칸. 이 사람에게 해원의 조건은 회사의 삼 년이었다.“하지 마세요.”“……이유는요.”“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소이 씨 브랜드가 아니라 제 처방이에요. 그리고 제 처방을 통해서 저예요. 소이 씨가 중간에 끼면 소이 씨가 먼저 다쳐요.”한소이는 오래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안 해요. 대신 세 번째 시제품, 빨리 내요. 우리끼리.”“다음 주에 안정성 데이터 나와요.”집에 돌아오자 서하는 식탁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모이스트랩 세 번째 시제품 안정성 데이터였다. 그녀는 요즘 밤마다 그것을 봤다.“얘기 좀 합시다.”서하가 노트북을 닫았다. 도윤이 앉았다.“당신 자료를 원하는 사람이 윤성호 말고 또 있습니다.”“누구요?”도윤은 대답하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36화 — 말실수

“아르덴이 해원 지분을 갖게 되더라도, 라는 뜻입니다.”도윤이 말했다. 목소리는 돌아와 있었다. 눈은 아직이었다.“아르덴이 해원 지분을 가져요?”“투자회사니까 어디든 삽니다.”“해원을요?”“일부를.”“작은 지분이겠네요.”“작습니다.”“당신 신탁 의결권처럼요.”도윤이 대답하지 않았다.서하는 일어나 서랍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파란 표지. 손바닥만 한 크기. 그 안에 사진 한 장이 접혀 들어 있었다.그녀는 펜을 들어 한 줄을 적었다. 도윤에게 보여 주지는 않았다.“네 개 반이에요.”“뭐가.”“거짓말. 오늘 건 반이 아니라 하나로 칠게요. 눈이 흔들렸으니까.”도윤이 노트를 봤다.“그 노트가 다 차면 어떻게 됩니까.”“몰라요. 아직 안 차 봐서.”“차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하면.”“그럼 노트를 버리죠.”그가 손을 뻗어 노트를 잡으려 했다. 서하가 등 뒤로 감췄다.“지금은 안 돼요.”“왜.”“지금 말하면 당신이 궁지에 몰려서 말하는 거니까. 그건 고백이 아니라 자백이에요.”도윤은 오래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지친 웃음이었다.“당신은 가끔 내 변호사보다 무섭습니다.”“고은재 변호사가 들으면 좋아하겠네요.”법원 심문기일은 목요일이었다.유언집행 청구 사건. 윤성호 측 변호사는 예상대로 혼인의 진의를 물고 늘어졌다. 서하는 증인석에서 삼십 분을 버텼다. 구청 앞에서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이 사실인지, 그날 결혼식장에서 도망친 것이 사실인지, 그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지.“압니다. 월급쟁이입니다.”방청석 뒤에서 누군가 웃었다.도윤이 증인석에 앉았을 때 윤성호 측 변호사는 자신 있는 얼굴이었다.“증인은 신청인과 혼인신고 당일 처음 만났습니까.”“네.”“만난 지 몇 분 만에 혼인신고를 했습니까.”“삼십칠 분.”“그 결혼에 진의가 있었습니까.”“있었습니다.”“무슨 진의입니까.”도윤은 서하를 봤다. 그리고 판사를 봤다.“결혼식장에서 신랑이 도망친 날, 신부가 혼인신고서를 찢고 걸어 나왔습니다. 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37화 — 한 표도 없는 주주

십이 퍼센트짜리 주주가 한 표도 없다는 사실은 서하를 이상하게 차분하게 만들었다.“그럼 계산을 다시 해요.”고은재의 사무실 화이트보드에 숫자가 다시 적혔다.윤성호 이십이. 윤채린 삼. 주주연합 십구. 이민영 십오. 나머지 사십일은 기관과 소액주주.“어머님 십오가 열쇠예요. 어머님이 해임에 찬성하면 삼십사. 반대하면 윤성호가 사십. 나머지는 반반으로 갈린다고 보고요.”“엄마한테 부탁하라는 거죠.”“부탁이 아니라 설명이에요.”“엄마는 설명을 들으면 무서워해요.”서하는 화이트보드의 십오라는 숫자를 봤다.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을 생각했다. 결혼식에 혼자 온 검은 원피스. 유언장 두 번째 장을 삼 년 동안 서랍에 넣어 둔 손.“부탁 안 할 거예요.”“서하 씨.”“엄마가 정해요. 저는 엄마 표 없이도 살아요. 그걸 엄마가 알아야 해요.”고은재는 한숨을 쉬었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그날 오후 세림홀딩스에서 공문이 왔다.윤서하 주주 보유 다온뷰티 주식 십이 퍼센트 매입 제안. 시장가의 세 배.서하는 공문을 한 번 읽고 파쇄기에 넣었다.저녁에 채린이 왔다.오피스텔 초인종이 울렸을 때 서하는 배합표를 보고 있었고 도윤은 아직 퇴근 전이었다. 문을 열자 채린이 서 있었다. 화장이 번져 있었다.“언니.”“무슨 일이야.”“들어가도 돼?”서하는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채린은 열여덟 평을 한 바퀴 둘러봤다. 비웃음이 얼굴에 떠올랐다가, 이상하게도 사라졌다.“여기서 살아?”“응.”“진짜?”“월세 반씩 내면서.”채린이 소파에 앉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언니가 다 뺏어 가려는 거지.”“내 거 돌려받는 거야.”“십이 퍼센트는 할머니 거였잖아. 언니 거 아니잖아.”“할머니가 나한테 주신 거야.”“나한테는?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주셨어. 나는 손녀도 아니니까.”서하는 채린을 봤다. 스물일곱. 서하가 만든 세럼을 자기 이름으로 팔고, 서하의 약혼자와 서하의 결혼식 날 침대에 있었던 사람. 그런데 지금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은 그 사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38화 — 위임장

“철회할 수 있어요.”고은재가 전화로 말했다.“포괄 위임이라도 본인이 철회하면 끝이에요. 주총 전에 철회서를 회사에 내고, 본인이 직접 주총장에 가서 표를 던지면 돼요.”“직접이요.”“네. 대리인 말고 본인이.”서하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결혼식 대기실 문 앞에서 서하의 팔을 잡던 손. 유언장 사진을 화장실에서 보내던 목소리.“가능할까요.”“그건 서하 씨가 저보다 잘 알죠.”토요일 오후, 서하는 집으로 갔다.여섯 달 만이었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가정부가 아니라 윤성호였다.“왔냐.”“엄마 보러 왔어요.”“네 엄마는 지금 몸이 안 좋다.”“그럼 더 봐야죠.”성호가 문을 막았다. 그러나 밀지는 않았다. 세림호텔 회의실에서 손목을 잡혔던 기억이 그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들어와.”이민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실제로 안색이 나빴다. 서하가 옆에 앉았다. 성호는 맞은편에 서 있었다.“엄마. 위임장 얘기 들었어요.”민영의 손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철회할 수 있어요. 철회하고 주총장에 직접 가면 엄마 표는 엄마 거예요.”“서하야.”성호가 끼어들었다.“네 엄마는 그런 거 몰라. 십 년 동안 내가 대신해 줬어. 회사 일이야.”“회사 일이면 주주가 하는 거죠. 주주는 엄마예요.”“이 집에서 나가서 반년 만에 돌아와 놓고 뭘 안다고.”서하는 성호를 보지 않았다. 어머니만 봤다.“엄마.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민영이 고개를 들었다.“엄마가 정해요. 철회하면 엄마가 정하는 거고, 안 하면 그것도 엄마가 정하는 거예요. 저는 엄마 표 없이도 살아요. 그동안 그렇게 살았으니까.”“서하야…….”“그런데 엄마가 한 번도 주총장에 안 가 봤다는 건, 엄마 회사에 엄마가 한 번도 없었다는 거예요. 할머니 회사에요.”민영의 눈이 흔들렸다.성호가 서하의 팔을 잡았다.“나가.”서하는 팔을 빼지 않았다. 대신 성호의 손을 내려다봤다.“이 손, 두 번째예요. 세림호텔에서 한 번. 오늘 한 번.”“그래서?”“세 번째는 없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39화 — 엄마의 표

주주총회장은 다온뷰티 본사 강당이었다.서하는 방청석에 앉았다. 주주가 아니라 방청인으로. 십이 퍼센트를 가진 방청인. 고은재가 옆에 있었고, 도윤은 오지 않았다. 아르덴 펀드의 대리인은 배진호 변호사였다.윤성호는 단상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채린은 오지 않았다. 세림홀딩스에서는 한지훈이 왔다. 그가 서하를 봤다. 서하는 보지 않았다.열 시 오 분.강당 뒷문이 열렸다.이민영이 들어왔다.검은 정장. 손에 서류봉투 하나. 걸음이 느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강당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윤성호가 일어섰다.“당신이 여기 왜…….”민영은 남편을 보지 않았다. 접수대로 갔다.“위임 철회서예요. 그리고 제 주주 확인서요.”접수 직원이 윤성호를 봤다. 윤성호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고은재가 일어났다.“주주 본인이 출석했습니다. 위임은 본인 출석으로 당연히 실효됩니다. 의장께서 확인해 주시죠.”의장은 사외이사였다. 그는 서류를 보고, 윤성호를 보고, 다시 서류를 봤다.“……확인합니다. 이민영 주주 본인 출석. 위임 실효.”윤성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민영은 서하 근처가 아니라 주주석 맨 앞에 앉았다. 혼자.첫 번째 안건. 대표이사 윤성호 해임의 건.표결이 시작됐다.찬성. 주주연합 십구. 이민영 십오. 소액주주 일부.반대. 윤성호 이십이. 윤채린 삼, 위임. 세림홀딩스 팔. 그리고 서하가 처음 듣는 이름의 투자조합 육.고은재가 서하의 귀에 속삭였다.“저 육 퍼센트, 해원리테일 쪽이에요. 지난주에 시장에서 긁어모았어요.”집계가 발표됐다.찬성 사십일. 반대 사십삼. 기권 십육.부결.강당에서 짧은 탄식이 났다. 윤성호가 숨을 내쉬었다. 한지훈이 서하를 돌아봤다. 승자의 얼굴이었다.서하는 어머니의 등을 봤다. 그 등은 움직이지 않았다.두 번째 안건. 감사 선임의 건. 주주연합 추천 후보.고은재가 서하를 툭 쳤다.“이제 봐요.”“뭘요?”“감사 선임은 대주주 의결권이 삼 퍼센트로 제한돼요. 상법이에요. 윤성호 이십이가 삼이 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40화 — 세 사람의 열여덟 평

열여덟 평에 세 사람이 살게 됐다.침실은 이민영이 썼다. 서하는 소파, 도윤은 바닥이었다. 첫날 밤 도윤이 바닥에 요를 깔 때 민영이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자네가 바닥에서 자나.”“네.”“내가 소파에서 잘게. 자네는 서하랑…….”“어머님. 소파는 월세 반을 낸 사람 겁니다. 저는 바닥 반을 냈습니다.”민영이 서하를 봤다. 서하는 어깨를 으쓱했다.“저 사람 원래 저래요.”민영은 처음으로 웃었다. 뺨의 붉은 자국 위에서.접근금지 가처분은 사흘 만에 나왔다. 고은재가 병원 진단서와 주차장 CCTV를 첨부했다. CCTV는 도윤이 구했다. 서하가 물었다.“그건 당신 돈 쓴 거예요?”“다온 본사 관리회사가 아르덴 고객입니다. 요청한 겁니다.”“그게 힘이지 돈이에요?”“……물어봤어야 했습니까.”“네.”“다음엔 묻겠습니다.”“다음엔 제가 직접 요청할게요.”민영은 낮에는 서하와 함께 모이스트랩에 갔다. 할 일이 없어서였다. 한소이가 어머니에게 원료 라벨 붙이는 일을 맡겼다. 민영은 그 일을 이상할 만큼 열심히 했다.“어머니 회사에서 나는 한 번도 일을 안 해 봤어.”라벨을 붙이며 민영이 말했다.“어머니는 나한테 회사를 안 물려주셨어. 너한테 주셨지. 그때는 서운했는데 지금은 알겠다. 나는 붙이는 것도 이렇게 느리니까.”“엄마.”“괜찮아. 서운한 게 아니라 아는 거야.”셋째 날 밤, 서하가 잠든 뒤 민영이 거실로 나왔다. 도윤은 바닥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자네.”“네, 어머님.”“해원 사람인가.”도윤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해원 돈을 받는 사람입니다.”“그게 그 말 아닌가.”“어머님 댁에서는 그 말이 그 말이겠죠.”“우리 어머니가, 서하 할머니가, 그 집 사람은 들이지 말라고 했네.”“저는 어머님 댁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따님 집에 들어왔습니다. 월세 반씩 내고요.”민영은 오래 그를 바라봤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는 얼굴이었다.“자네, 서하한테 원하는 게 뭔가.”“처음엔 서류였습니다.”“지금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Read more
PREV
1234567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