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잔고가 사백십이만 원이었다.서하는 숫자를 세 번 확인했다. 결혼식 준비에 모은 돈을 다 썼고, 회사는 급여를 끊었고, 고은재 변호사의 착수금이 이번 주에 나갔다.“싸게 해 드리는 거예요. 원래 이 금액에 세 건은 안 해요.”고은재는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서른셋. 대형 로펌을 나와 혼자 사무실을 차린 지 일 년. 말이 빠르고 계산이 더 빨랐다.“알아요. 그래서 갚을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남편분이 도와주신다면서요.”“방해만 치워 주기로 했어요. 돈은 안 받아요.”“왜요?”“그 사람 돈으로 되찾은 건 제 게 아니니까요.”고은재가 서하를 잠깐 보더니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모이스트랩. 인디 브랜드예요. 대표가 처방 자문할 연구원을 찾고 있어요. 소송 중이라 다온 처방은 못 쓰지만, 서하 씨 머릿속에 있는 건 서하 씨 거잖아요.”모이스트랩의 대표 한소이는 서른둘이었다. 사무실은 성수동 공유오피스 한 칸이었고, 제품은 두 개, 직원은 셋이었다.“솔직히 말할게요. 저희 보습 라인 두 번째 제품이 안정성 테스트에서 계속 떨어져요. 세 달째예요.”서하는 샘플을 손등에 발랐다. 냄새를 맡고, 손가락으로 문질렀다.“유화제 비율 문제가 아니에요. 원료 투입 순서예요.”“네?”“지금 순서면 온도 올라갈 때 분리돼요. 바꿔 볼게요. 한 주만 주세요.”한소이가 서하를 바라봤다.“자문료가 많지 않아요.”“얼마인데요?”소이가 숫자를 말했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달부터는 올려 주세요. 제품이 나오면요.”집에 돌아오자 도윤이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편의점 도시락 두 개였다. 그는 요리를 못 했고, 못 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서하는 식탁 위에 봉투를 놓았다.“이번 달 월세 반, 관리비 반, 생활비 반.”도윤이 봉투를 봤다.“이번 달은 내가 내겠습니다.”“왜요?”“당신 통장이 얼마인지 압니다.”“제 통장을 어떻게 알아요?”“고은재 변호사 착수금이 나갔으니까.”“계산이 빠르네요. 그래도 반이에요.”“서하 씨.”
Last Updated : 2026-09-23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