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당한 날,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Chapter 21 - Chapter 30

69 Chapters

21화 — 약혼녀였던 여자

[강도윤 씨의 아내 되시죠? 서연희라고 합니다. 남편분과 혼담이 있던 사람입니다. 한 번 뵙고 싶습니다.]서하는 메시지를 세 번 읽었다.혼담. 약혼이 아니라 혼담이라는 단어를 고른 사람이었다. 단어를 고를 줄 아는 여자는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답장을 보냈다.[내일 두 시. 장소는 그쪽이 정하세요.]도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지는 알고 있었다.청담동의 조용한 티룸이었다.서연희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회색 정장, 낮은 구두, 화장기 없는 얼굴. 인터넷에서 찾아본 명진물산 상무의 사진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훨씬 피곤해 보였다.“앉으세요. 커피는 시켜 뒀어요. 싫으면 바꾸시고요.”“괜찮아요.”서하는 앉았다. 연희가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 적의는 없었다. 대신 값을 매기는 눈이었다. 다온뷰티 회의실에서 수없이 봐 온 눈.“먼저 말씀드릴게요. 저는 강도윤 씨한테 감정 없어요.”“그럼 왜 저를 보자고 하셨어요?”“궁금해서요. 그 사람이 집안이 정한 자리를 걷어차고 고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구청 앞에서 만난 여자예요.”“들었어요. 웨딩드레스 차림이었다는 것도.”연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혼담은 두 집안 어른들이 정했어요. 다음 달 어른 생신에 약혼을 발표하기로 돼 있었고요. 강도윤 씨는 세 번 거절했어요. 그래서 어른이 조건을 걸었죠. 그날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지켜야 할 걸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고.”서하의 손끝이 잔에서 멈췄다.오늘 다섯 시 전까지 결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그날 구청 앞에서 도윤이 한 말이 전혀 다른 무게로 돌아왔다. 그는 서연희와 결혼하라는 압박을 피하려고 낯선 여자를 골랐다. 서하가 한지훈을 피하려고 낯선 남자를 고른 것처럼.“그러니까 저는 차인 게 아니에요.”연희가 말했다.“이용당할 뻔한 거죠. 당신처럼.”“저는 이용당한 게 아니에요.”“그래요?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아세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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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 과거는 묻지 않는다

“계약서 조항, 기억해요?”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서로의 과거를 억지로 묻지 않는다.”“기억합니다.”“그러니까 혼담은 안 물을게요. 과거니까.”도윤의 눈이 가늘어졌다.“단서가 붙을 것 같군요.”“현재 진행형이면 거짓말이에요. 그 사람이 지금도 당신 집안 계획에 들어 있다면요.”“들어 있지 않습니다.”“확실해요?”“내가 거절한 순간부터 계획이 아니라 어른의 미련입니다. 미련은 내 것이 아닙니다.”서하는 그 말을 오래 들여다봤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윤의 말은 늘 이랬다. 틀린 데가 없는데 빈자리가 있었다.“오늘은 소파에서 잘게요.”“내가 나가겠습니다.”“아뇨. 이 집 월세 절반은 제 거예요. 소파도 절반은 제 거고요.”도윤은 더 말하지 않았다. 침실 문이 닫혔다.서하는 소파에 누웠다. 그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첫날 밤 그가 여기서 잤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 났다.잠은 오지 않았다.새벽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침실 문이 열렸다.서하는 눈을 감았다.발소리가 다가왔다. 얇은 담요가 어깨까지 덮였다. 그의 손이 담요 끝을 정리하다가 멈췄다.“깨어 있죠.”“……네.”“숨소리가 다릅니다.”“관찰력 좋네요.”도윤이 소파 앞 바닥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옆얼굴만 희미하게 보였다.“혼담을 거절한 이유를 말하죠. 과거를 묻지 말라고 했으니, 묻지 않은 걸 대답하는 겁니다.”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나를 서류로 보는 사람과 사는 게 싫었습니다. 내 이름, 내 지분, 내가 물려받을 것. 그 사람 잘못은 아닙니다. 그 집안에서 자란 사람은 다 그렇게 봅니다. 나도 그렇게 보고 자랐으니까.”“나도 당신을 서류로 봤는데요.”“당신은 서류를 찢고 왔잖습니까.”서하의 목이 조금 막혔다.“그날 구청 앞에서, 당신이 찢어진 혼인신고서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서류 때문에 결혼했다가 서류 때문에 떠나진 않겠구나.”“그래서 골랐어요?”“그래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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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 VIP 병동

병원은 강남 한복판에 있었다. 정문 위의 간판은 작았다. 해원의료재단.서하는 그 이름을 눈에 담았다.지하 주차장에서 전용 엘리베이터로 곧장 올라갔다. 버튼이 없는 엘리베이터였다. 정우석이 카드를 대자 층수 표시 없이 올라갔다.복도에는 검은 정장의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경호원이었다. 도윤을 보자 고개를 숙였다.“재단 이사장이라고 했죠.”서하가 낮게 물었다.“네.”“이사장한테 경호원이 붙어요?”“나이가 많으시니까.”반만 대답하는 버릇. 서하는 세는 것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지금은 문 안쪽이 더 중요했다.병실은 병실 같지 않았다. 거실과 서재가 있었고,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침대 옆 안락의자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강일호.여든이 넘었다고 했다. 마른 몸에 링거를 꽂은 채였지만 눈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서하는 그 눈이 자신의 구두부터 머리까지 한 번에 훑는 것을 느꼈다.“앉아라.”반말이었다. 서하는 앉았다.“도윤이는 나가 있어.”“할아버지.”“나가 있으라고 했다.”도윤이 서하를 봤다.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혔다.노인은 한참 말이 없었다. 서하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어른을 다온뷰티에서 충분히 겪었다.“내 손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나.”“월급쟁이요.”“월급쟁이.”“네. 그런데 월급쟁이치고 비서가 있더군요. 운전기사도요. 손목시계는 아파트 한 채 값이고요.”강일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런데도 월급쟁이라고 하나.”“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아직은 그 말을 믿어 주기로 했어요.”“믿어 준다?”“거짓말인 걸 알면서 믿어 주는 것도 결혼이라고 들었어요. 저는 결혼이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요.”노인이 이번에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마른 웃음이었지만 오래 이어졌다. 문밖에서 경호원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이 결혼, 서류 때문인가.”“처음엔요.”“지금은.”“지금은 확인 중이에요.”“확인?”“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확인 과정이라고.”강일호가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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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 반반

통장 잔고가 사백십이만 원이었다.서하는 숫자를 세 번 확인했다. 결혼식 준비에 모은 돈을 다 썼고, 회사는 급여를 끊었고, 고은재 변호사의 착수금이 이번 주에 나갔다.“싸게 해 드리는 거예요. 원래 이 금액에 세 건은 안 해요.”고은재는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서른셋. 대형 로펌을 나와 혼자 사무실을 차린 지 일 년. 말이 빠르고 계산이 더 빨랐다.“알아요. 그래서 갚을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남편분이 도와주신다면서요.”“방해만 치워 주기로 했어요. 돈은 안 받아요.”“왜요?”“그 사람 돈으로 되찾은 건 제 게 아니니까요.”고은재가 서하를 잠깐 보더니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모이스트랩. 인디 브랜드예요. 대표가 처방 자문할 연구원을 찾고 있어요. 소송 중이라 다온 처방은 못 쓰지만, 서하 씨 머릿속에 있는 건 서하 씨 거잖아요.”모이스트랩의 대표 한소이는 서른둘이었다. 사무실은 성수동 공유오피스 한 칸이었고, 제품은 두 개, 직원은 셋이었다.“솔직히 말할게요. 저희 보습 라인 두 번째 제품이 안정성 테스트에서 계속 떨어져요. 세 달째예요.”서하는 샘플을 손등에 발랐다. 냄새를 맡고, 손가락으로 문질렀다.“유화제 비율 문제가 아니에요. 원료 투입 순서예요.”“네?”“지금 순서면 온도 올라갈 때 분리돼요. 바꿔 볼게요. 한 주만 주세요.”한소이가 서하를 바라봤다.“자문료가 많지 않아요.”“얼마인데요?”소이가 숫자를 말했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달부터는 올려 주세요. 제품이 나오면요.”집에 돌아오자 도윤이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편의점 도시락 두 개였다. 그는 요리를 못 했고, 못 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서하는 식탁 위에 봉투를 놓았다.“이번 달 월세 반, 관리비 반, 생활비 반.”도윤이 봉투를 봤다.“이번 달은 내가 내겠습니다.”“왜요?”“당신 통장이 얼마인지 압니다.”“제 통장을 어떻게 알아요?”“고은재 변호사 착수금이 나갔으니까.”“계산이 빠르네요. 그래도 반이에요.”“서하 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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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 실명 기사

기사는 정오가 되기 전에 포털 메인에 올라갔다.다온뷰티 전 연구원 윤 모 씨. 기사 본문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지만 제목에는 실명이 그대로 실렸다. 댓글은 오백 개를 넘어 있었다.[결혼식 날 도망간 신부가 회사 자료도 훔쳤네][동생 남자 뺏긴 게 아니라 뺏으려다 실패한 듯]서하는 댓글을 끝까지 읽었다. 읽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도윤은 그녀 맞은편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기사 내린 언론사 세 곳 확인했습니다. 나머지는 오늘 안에…….”“끊어요.”도윤이 서하를 봤다.“끊으라고요.”그가 전화를 내렸다.“당신 방식으로 지우면, 제 방식이 사라져요.”“당신 방식이 뭡니까.”“기사를 내리는 게 아니라 틀렸다는 걸 보여 주는 거요. 기사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누가 지웠는지만 궁금해해요. 그 답이 당신이면 저는 영영 당신 아내로만 남아요.”도윤은 한참 말이 없었다.“알겠습니다. 대신 하나만.”“뭐요?”“기사 쓴 기자가 윤성호와 같은 골프 모임입니다. 그 정보는 드리죠.”“그건 받을게요.”서하는 노트북을 열었다. 고은재와 통화하며 자료를 정리했다. 입사 전 연구노트의 전자기록 타임스탬프. 공증사무소 접수증. 세 개 처방의 최초 실험 날짜와 다온뷰티 입사일.오후 네 시, 서하는 자기 계정에 글을 올렸다.[저는 자료를 훔치지 않았습니다. 제 이름이 적힌 것을 돌려받는 중입니다.]아래에는 날짜만 나열했다. 감정은 한 줄도 넣지 않았다. 다온뷰티 입사일보다 여덟 달 앞선 공증 날짜가 가장 위에 있었다.한 시간 동안 조회수는 이천이었다.다섯 시 십 분, 유라가 그 글을 공유했다.유라. 팔로워 백이십만. 윤채린에게 광고를 빼앗긴 뒤 반년 동안 조용했던 사람. 결혼식 날 열두 초짜리 영상을 보낸 사람.[날짜는 거짓말을 못 하죠. 8시 라이브 기대할게요, 채린 씨.]조회수가 뛰기 시작했다.저녁 여덟 시, 윤채린의 라이브가 시작됐다.채린은 울었다. 언니가 어릴 때부터 자기를 미워했다고 말했다. 회사 자료를 몰래 빼돌렸다고, 가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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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 전남친의 조건

“한지훈을 만납니다.”서하가 아침에 먼저 말했다.“내일 두 시. 성수동 카페. 사람 많은 곳이에요.”도윤은 커피를 내려놓았다.“말해 줘서 고맙습니다.”“반씩이니까요.”“내가 따라가면 안 되겠죠.”“안 돼요.”“근처에 있는 건.”“……그건 당신 자유예요.”카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한지훈은 창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정장을 입었지만 넥타이가 없었다. 결혼식 날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살이 빠져 있었다.“앉아.”서하는 앉았다. 주문하지 않았다.“기사는 내렸어. 봤지?”“봤어. 정정보도 청구는 그대로 갈 거야.”“서하야.”지훈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내가 잘못했어. 채린이랑은 정리할게. 이미 얘기했어.”“약혼반지 끼고 있던데.”“그건 어른들이…….”“어른들이 시켜서 내 결혼식 날 걔랑 잤어?”지훈의 얼굴이 굳었다.“말을 그렇게…….”“사실을 말한 건데.”“서하야, 나 없이 네가 뭘 할 수 있어. 다온에서 나온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통장 바닥났잖아. 그 남자?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 네가 그 사람한테 뭔지 알아? 서류야. 그 사람 집안 서류.”서하는 지훈을 바라봤다.똑같은 말이었다. 서연희가 한 말과 똑같았다. 그런데 연희의 말은 경고였고 지훈의 말은 모욕이었다. 같은 문장이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돌아와. 다온으로. 연구소장 자리 만들게. 지분도 줄게. 그리고 우리도…….”“지훈아.”서하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너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 내 일을 사랑했어. 내 처방, 내 인맥, 내가 살린 회사. 그게 네 거가 될 줄 알았는데 안 되니까 지금 이러는 거야.”“아니야.”“그럼 내가 아무것도 없이 너한테 갔을 때, 너는 나를 만났을까.”지훈이 대답하지 못했다.서하는 일어났다.“소송은 소송대로 해. 만나자는 전화는 이제 안 받아.”지훈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앉아.”낮고 다급한 목소리였다.카페 안의 몇몇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서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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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 그보다 나쁜 것

“세림 채권 연장 거부. 당신이에요?”고은재의 전화를 끊자마자 서하가 물었다.도윤은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네.”“왜요?”“방해를 치운 겁니다.”“방해가 아니라 벌이잖아요. 손목 잡았다고 회사 자금줄을 끊어요?”“손목만이 아닙니다. 기사, 가처분, 당신 계정 삭제. 세림은 처음부터 다온 인수를 위해 움직였습니다.”“그건 소송으로 갚을 거예요. 제 이름으로.”서하는 그의 앞에 섰다.“당신이 지훈을 벌주면, 그건 제가 이긴 게 아니라 당신이 이긴 거예요. 저는 또 누군가의 뒤에 서 있는 여자가 되는 거고요. 그거 하려고 결혼식장에서 나온 거 아니에요.”도윤이 넥타이를 손에 쥔 채 그녀를 봤다.“그럼 어떻게 하길 바랍니까.”“연장 승인해요. 조건 없이.”“그 회사는 당신을 다치게 할 겁니다.”“그럼 제가 다치고, 제가 갚을게요.”“서하 씨.”“계약 조건 추가요. 제 싸움에 당신 돈이나 힘을 쓰려면 먼저 저한테 물어요. 제가 아니라고 하면 안 하는 거예요.”도윤은 오래 침묵했다. 그 침묵이 계산인지 감정인지 서하는 알 수 없었다.“알겠습니다.”그가 전화를 걸었다.“세림 채권. 연장 승인해. 조건 없이.”전화를 끊은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무방비했다.“화났어요?”“아닙니다.”“그럼 뭐예요?”“처음이라서.”“뭐가요?”“내 결정을 누가 돌려세운 게.”서하가 웃었다. 웃다가, 문득 그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물러난 사람의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더 깊어져 있었다.“질투했어요? 지훈이 손목 잡았을 때.”“그보다 나쁘다고 했잖습니까.”“그 기억까지 다 당신 걸로 바꾸고 싶다는 거요?”“네.”“그럼 바꿔요.”말이 떨어지기 전에 그의 손이 그녀의 뒷목을 감쌌다.키스는 거칠었다. 며칠 동안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터졌다. 서하는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고 단추가 하나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도윤이 그녀를 안아 올려 식탁 위에 앉혔다. 어제 동전을 세던 자리였다.“여기서요?”“침대까지 못 갑니다.”그의 입술이 목을 물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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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 부회장

강태성은 예약된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한식당이었다. 광화문이 내려다보이는 자리. 쉰일곱, 은발, 구김 없는 정장. 웃는 얼굴이 사진보다 부드러웠다.“윤서하 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 해원리테일 강태성입니다.”“대표가 아니에요. 아직.”“곧 되실 거라고 들었습니다.”누구에게 들었다는 말은 없었다.서하는 고은재와 상의한 끝에 혼자 왔다. 도윤에게는 어젯밤 공문을 보여 줬다. 그는 오래 화면을 보다가 딱 한마디만 했다. 가세요. 대신 아무것도 받지 마세요.음식이 나오고 강태성은 사업 이야기를 했다. 해원리테일이 신진 뷰티 브랜드를 인큐베이팅한다는 것. 유통망과 마케팅, 연구소까지 제공한다는 것.“다온뷰티 소송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 법무팀이 세림보다는 나을 겁니다.”“조건은요?”“세라온.”서하의 젓가락이 멈췄다.그 이름은 아직 어디에도 등록하지 않았다. 도윤과 고은재, 한소이. 세 사람만 알았다.“그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업계는 좁습니다.”“업계에 말한 적 없어요.”강태성은 대답 대신 서류를 꺼냈다.“해원리테일이 세라온에 삼십억을 투자합니다. 브랜드 지분 사십구, 처방 지식재산권 오십일.”“처방을 갖겠다는 거네요.”“공동 소유입니다.”“오십일이면 공동이 아니죠.”강태성이 웃었다.“정확하시군요. 그래서 남편분이 대표님을 고르셨나 봅니다.”“남편이 저를 고른 게 아니에요. 제가 골랐어요.”“그런가요.”서하는 서류를 덮어 그의 앞으로 밀었다.“제 처방은 오십일 퍼센트짜리가 아니에요. 그리고 아직 없는 회사에 삼십억을 주는 사람은 회사를 사려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사려는 거고요.”“다른 것?”“그건 부회장님이 더 잘 아시겠죠.”강태성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웃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온도가 내려갔다.“남편 잘 두셨더군요.”“무슨 뜻이죠?”“곧 알게 되실 겁니다.”그가 일어났다. 식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문 앞에서 그가 돌아섰다.“아, 하나 두고 가는 게 있습니다. 사업과는 상관없는 겁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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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 사진 한 장의 값

“당신은 누구예요.”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고,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시간을 버는 사람의 동작이었다. 서하는 기다렸다.“사진부터 말하죠.”“그건 나중에요. 강태성부터.”“연결돼 있습니다.”그가 사진을 다시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이 년 전, 할아버지 생신입니다. 명진물산 회장이 딸을 데려왔고, 어른들이 그 자리에서 혼담을 꺼냈습니다. 케이크는 생신 케이크고, 박수는 할아버지 건배사에 친 겁니다. 나는 그날 저녁에 거절했습니다. 서연희 씨도 그 자리에서 처음 봤습니다.”“그걸 강태성이 갖고 있어요.”“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할아버지 생신에요?”“할아버지가 만든 재단의 이사입니다. 그날 이사들이 전부 왔습니다.”“재단 이사가 해원 부회장이에요?”“해원이 출연한 재단이니까 해원 임원이 이사를 맡습니다.”서하는 웃음이 나왔다. 화가 나서 나오는 웃음이었다.“그러니까 당신 할아버지는 해원이 돈을 댄 재단 이사장이고, 그 재단 이사가 해원 부회장이고, 할아버지는 해원이 만든 병원에 누워 있고, 아르덴은 그 재단이 출자한 회사고. 그런데 당신은 월급쟁이다.”“월급을 받으니까요.”“강도윤 씨.”“전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왜요?”“말하는 순간 당신이 그 싸움 안으로 들어오니까.”“이미 들어와 있잖아요. 강태성이 나한테 삼십억을 들고 왔어요.”도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받았습니까.”“내 처방이 오십일 퍼센트짜리가 아니라서 거절했어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감탄인지 알 수 없었다.“약속 하나만 하죠. 강태성이 주는 건, 돈이든 정보든 사진이든, 아무것도 받지 마세요. 그 사람이 주는 건 전부 값이 붙어 있습니다.”“당신이 주는 건요?”“그것도 값이 붙어 있습니다.”“얼마인데요?”“아직 계산 중입니다.”서하는 사진을 집어 반으로 접었다. 찢지는 않았다.“이건 제가 갖고 있을게요. 당신 거짓말 노트에 끼워 두려고요.”“노트가 있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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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 할머니의 조건

“유언 공증은 실제로 있어요. 공증사무소에 원본이 보관돼 있고요.”고은재는 사무실 화이트보드에 날짜를 적으며 말했다.“정세라 여사 사망 육 년 전. 유언집행자 윤성호. 서하 씨가 스물세 살 때예요.”“그때 저는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당연하죠. 집행자가 입 다물면 상속인은 유언장이 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십이 퍼센트면……”고은재가 숫자를 적었다.“다온뷰티 지분 구조상 세 번째 대주주예요. 윤성호 이십이, 어머님 십오, 서하 씨 십이.”“그런데 조건이 이상해요. 결혼이나 서른. 왜 할머니가 그런 조건을 걸었을까요.”“보통은 손녀가 어릴 때 재산이 남편감이나 새아버지한테 넘어가는 걸 막으려고 걸어요. 결혼했거나 서른이면 본인이 지킬 수 있다고 본 거죠.”서하는 화이트보드를 오래 바라봤다.열 살의 서하에게 정세라는 말했다. 좋은 화장품은 따뜻해야 한다고. 스물세 살의 서하에게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줄 알았다.아니었다. 할머니는 조건을 남겼다. 네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도 설 수 있을 때, 그때 받아라.그리고 서하는 홧김에 낯선 남자와 혼인신고를 한 날 그 조건을 채웠다.“웃기죠.”“뭐가요?”“결혼식장에서 도망친 날, 할머니 조건을 채웠어요. 지훈이랑 결혼했어도 채웠을 텐데.”“그랬으면 그 십이 퍼센트는 지금 세림 거였겠죠.”고은재의 말이 정확해서 서하는 대꾸하지 못했다.“유언집행 청구 넣어요. 오늘.”“윤성호가 가만있을까요.”“가만 안 있겠죠. 그런데 이건 소송이 아니라 집행이에요. 유언장이 있고 조건이 성취됐으면 집행자는 이전할 의무가 있어요. 안 하면 집행자 해임하고 법원이 새로 정해요.”“그럼 뭘 물고 늘어질까요.”고은재가 펜을 내려놓았다.“조건 성취 자체를요. 혼인이 무효라고.”서하는 그 말을 곱씹었다.“위장결혼.”“네. 진의 없는 혼인은 무효예요. 서하 씨 결혼이 지분 받으려고 한 위장이라고 주장하겠죠. 구청 앞에서 만난 남자랑 삼십 분 만에 혼인신고 했다는 건 그쪽한테 좋은 재료예요.”“지분 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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