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Chapter 11 - Chapter 20

55 Chapters

피의 제단

검은 손들이 카시안의 발목을 붙잡았다.뼈만 남은 손가락이 군화의 가죽을 파고들자, 그의 몸이 피의 제단을 향해 거칠게 끌려갔다. 카시안은 즉시 검을 바닥에 꽂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대리석을 긁으며 긴 자국을 남겼지만, 수십 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전하!”다미안이 달려들려는 순간, 대성전 바닥에서 검은 가시가 솟구쳤다. 그는 검을 휘둘러 가시를 베어 냈으나 잘려 나간 단면에서 또 다른 손들이 돋아났다.성전 밖에서는 비명이 이어졌다. 붉은 기도 끈을 찬 사람들의 피부 위로 검은 문양이 번지고 있었다.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이들은 제 손목을 쥔 채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렸다.라엘은 망설이지 않았다.“카시안!”그녀가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쾅!대성전 전체가 흔들렸다. 피의 제단 위에서 뛰는 심장이 라엘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크게 수축했다. 검은 손들이 카시안을 끌어당기는 힘이 더욱 거세졌다.라엘의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다. 손바닥이 찢어지며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다.“라엘, 놓아.”카시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누구 마음대로?”“이대로라면 너까지 끌려간다.”“그래서 놓으라고?”라엘이 이를 악물었다. 손끝에서 금빛이 번져 나와 카시안의 손목을 감쌌다.“당신은 내가 잡은 사람이야. 아스테리아에게 넘겨줄 생각 없어.”“그 말은 꽤 오해하기 좋군.”이런 상황에서도 카시안의 입가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라엘은 어이가 없어 그를 노려보다가 손에 힘을 더 주었다.“살아남으면 마음껏 오해해.”“명령대로 하지.”카시안이 바닥에 박았던 검을 비틀었다. 은빛 신력이 검신을 따라 폭발하듯 번졌다. 동시에 라엘의 금빛이 그의 팔을 타고 흘러 검에 뒤섞였다.금빛과 은빛이 하나로 엉켰다.콰아앙!바닥을 뚫고 나온 검은 손들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카시안의 몸을 끌어당기던 힘이 사라지자 라엘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차가운 바닥에 닿기 직전, 카시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두 사람의 숨이 가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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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황제

“황제 폐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전령의 보고가 대성전 안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카시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라엘은 그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는 것을 보았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남자였으나, 가슴에 남아 있는 은빛 연결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놀람과 분노, 제때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이 차가운 신력 아래에서 거칠게 뒤엉키고 있었다.“언제부터지?”“일각 전입니다. 성직자들이 황궁 서쪽 결계를 공격했고, 근위대가 그쪽으로 이동한 사이 폐하의 침실에서 검은 연기가 솟았습니다. 시종들이 들어갔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습니다.”“침입의 흔적은?”“문과 창문은 모두 잠겨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저항하신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전령은 품 안에서 검은 천에 싼 물건을 꺼냈다. 천을 펼치자 반으로 부러진 황제의 인장이 드러났다. 금으로 만든 독수리의 몸통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카시안이 인장을 집어 들었다.손끝에 닿은 피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폐하의 피가 맞습니까?”다미안이 묻자 카시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의 피다.”라엘은 그의 손에 들린 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금빛 독수리의 날개 사이에 아주 가느다란 검은 실이 감겨 있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머리카락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아스테리아의 심장과 이어진 혈관이었다.라엘이 실을 잡으려 하자 카시안이 먼저 손목을 붙들었다.“맨손으로 건드리지 마.”“지금 누구 걱정할 때야?”“내가 걱정하고 싶은 사람을 결정하는 데 허락이 필요한가?”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라엘은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세레나와 함께 성화를 일으킨 탓인지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시야도 다시 완전한 어둠에 잠겼고, 팔다리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카시안은 그녀가 휘청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다미안.”“예, 전하.”“마차를 준비해. 가장 빠른 것으로.”“즉시 명하겠습니다.”“아니.”라엘이 카시안의 팔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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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버린 것

카시안이 돌다리를 박찼다.은빛 신력으로 감싼 검이 어린 성녀의 형상을 향해 곧게 뻗었다. 에리사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진한 얼굴로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검은 호수가 폭발하듯 솟구쳤다.콰아앙!수백 개의 손이 물결 사이에서 튀어나와 카시안의 팔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그는 공중에서 몸을 틀어 가장 먼저 닿은 손목을 베어 냈다. 잘린 팔이 검은 물로 돌아가기도 전에 다른 손들이 그의 군화와 제복 자락을 움켜쥐었다.“카시안!”라엘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발목을 감싼 가시가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카시안의 망토 위로 검붉은 피가 번졌다. 손등의 마지막 꽃잎에 생긴 금도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한 번만 더 충격을 받으면 꽃잎이 떨어진다.그러면 마지막 의식이 완성된다.라엘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금빛 신력이 손끝에 희미하게 모였다가 힘없이 흩어졌다. 대성전에서 세레나의 성화를 깨우며 너무 많은 힘을 사용한 탓이었다.“쓸모없을 만큼 약해졌네.”에리사의 목소리가 호수 위로 맑게 울렸다.열두 살의 모습을 한 소녀가 맨발로 검은 수면을 걸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흰 예복 끝이 붉게 물들었다.“천족도 별수 없구나. 남의 몸에 들어오면 그 몸이 견딜 수 있는 만큼밖에는 힘을 쓰지 못해.”“그래서 세레나의 몸을 노린 거야?”라엘은 발목의 가시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나를 약하게 만들려고?”“아니.”에리사가 고개를 갸웃했다.“네가 더러워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뭐?”“남의 몸을 빌려 정의로운 척하고, 세레나의 힘을 제 것처럼 쓰고, 결국에는 그 몸으로 황태자의 사랑까지 차지하는 모습.”에리사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그러면 너도 나와 다르지 않게 되잖아.”라엘의 손이 멈췄다.“너도 세레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게 될 테니까.”그 말은 라엘이 애써 외면해 온 가장 깊은 곳을 정확히 찔렀다.라엘은 세레나를 구하기 위해 내려왔다. 잠든 영혼을 지키고, 빼앗긴 힘을 돌려준 뒤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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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네 것이 아니야

검은 꽃잎이 바닥에 닿았다.가벼운 꽃잎 하나가 떨어졌을 뿐인데 지하 묘역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검은 호수가 거꾸로 솟구쳐 천장에 부딪혔고, 초대 황제의 관을 둘러싼 석주들이 차례로 갈라졌다.라엘의 심장 위로 피어난 검은 장미가 활짝 벌어졌다.차가운 기운이 새로 만들어진 육체를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초대 성녀의 불꽃으로 짜인 흰옷 위에 검은 핏줄이 번지고,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이 목과 머리까지 치솟았다.“라엘!”카시안이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라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언가가 입안으로 밀려들어 혀와 목소리를 빼앗고 있었다.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가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했고, 자신의 기억 사이로 낯선 기억들이 억지로 파고들었다.신전의 가장 높은 창에서 내려다본 백성들.어린 성녀를 찬양하며 무릎 꿇은 사람들.성휘제가 끝난 뒤 피를 토하던 밤.자신을 데리고 달아나려 했던 소년의 다정한 손.그리고 그 소년의 가슴을 찌르던 칼날의 감촉.‘아니야.’라엘은 눈을 감았다.‘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그러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노엘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고, 어린 에리사의 손에는 피 묻은 의식용 단검이 들려 있었다.―왜…….소년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왜 그러셨어요, 성녀님?―도망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잖아.열두 살의 에리사가 울며 대답했다.―모두가 나를 사랑하는데. 모두가 내 앞에 무릎을 꿇는데. 왜 내가 그걸 버려야 해?―그건 사랑이 아니에요.노엘이 마지막 힘을 다해 에리사의 뺨을 감쌌다.―당신이 아픈 걸 보면서도 계속 기도하라고 하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그 순간 어린 에리사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단검이 더 깊이 들어갔다.―네가 뭘 알아.노엘의 몸에서 빠져나온 생명력이 에리사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창백했던 볼에 혈색이 돌아오고, 피를 토하던 몸에 힘이 생겼다.에리사는 그 따뜻함에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마신 순간이었다.라엘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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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성휘제

[성휘제는 오늘 자정 시작된다.]검은 피로 적힌 문장을 확인한 순간, 지하 묘역에 있던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본래 사흘 뒤 열려야 할 제국 최대의 축제가 불과 세 시간 뒤로 당겨졌다. 대신관 에드먼드는 의식을 잃은 채 대성전에 누워 있었으니, 그의 이름으로 선포문을 내린 것은 아스테리아가 심어 둔 신전의 협력자일 가능성이 컸다.“일정을 바꾼 선포문은 언제 배포되었지?”카시안이 묻자 다미안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한 시간 전부터 수도 곳곳에 붙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선포문을 들고 온 사제들은 백성들에게 자정까지 중앙 광장으로 모이라고 명했습니다. 불참하면 신의 빛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겁을 주면서요.”“대성전이 봉쇄된 뒤인데 어떻게 명령을 전달했지?”“선포문을 배포한 자들은 대성전 소속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구호원과 지방 신전에서 차출된 하급 사제들입니다. 자신들도 누구에게 명령을 받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손에 선포문이 들려 있었다는 진술뿐입니다.”죽음의 표식이었다.아스테리아는 오래전부터 수도 곳곳에 자신의 신자를 심은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몸 안에 명령을 심어 두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표식이 그들의 의식을 빼앗고 움직인 것이다.라엘은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꽃잎이 떨어진 자리는 깨끗했다. 검은 장미도, 흉터도 남지 않았지만 심장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아스테리아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쿵.아주 느리게.그러나 분명하게.중앙 광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아스테리아는 사라진 심장을 새로운 몸의 중심에 넣었어.”라엘이 말했다.“죽은 사람들의 팔다리를 아무리 이어 붙여도 심장이 없다면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 몸을 파괴하면 심장이 드러나겠지만, 아직 희생자들과의 연결이 남아 있어.”“심장을 공격하면 연결된 이들이 대신 죽는다는 뜻입니까?”다미안의 얼굴이 굳었다.“응. 대성전에서 절반가량 끊었지만 나머지는 그대로야. 지금 저 심장은 수백 명의 목숨을 갑옷처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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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거두는 밤

두 번째 종을 향해 추가 올라갔다.“종탑을 무너뜨려!”카시안의 명령과 동시에 성기사들이 움직였다. 다미안이 가장 먼저 계단을 뛰어올랐고, 뒤를 따르는 기사들이 시체 병사들을 베어 길을 넓혔다. 축성한 검이 검은 살을 가를 때마다 꿰매진 몸에서 피가 아니라 짙은 사기가 흘러나왔다.그러나 종탑의 계단은 오르기도 전에 무너져 내렸다.콰드득!돌계단 아래에서 수십 개의 팔이 솟아나 기사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다미안은 난간을 박차고 뛰어올라 종탑 벽면에 검을 꽂았다. 검자루를 발판 삼아 다시 몸을 띄운 그가 흔들리는 종의 추를 향해 손을 뻗었다.손끝이 닿기 직전이었다.댕―!두 번째 종이 울렸다.소리가 광장 전체를 덮쳤다. 라엘은 반사적으로 양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종소리는 고막이 아니라 영혼 안에서 울렸다.시야가 꺼졌다.눈앞에서 카시안의 모습이 사라지고, 군중의 비명도 끊겼다. 차가운 밤바람과 피 냄새, 허리를 붙들고 있던 카시안의 손까지 한순간에 느껴지지 않았다.완벽한 무감각이었다.자신에게 몸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두 번째 종은 감각을 빼앗는다.아스테리아의 목소리만 머릿속에서 선명했다.―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몸으로 무엇을 지킬 수 있을까?‘입 좀 다물어.’라엘은 마음속으로 대꾸하며 자신의 심장 박동에 집중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연결된 은빛 실은 사라지지 않았다.카시안이 가까이에 있었다.그 사실을 따라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허공을 몇 번 헤맨 끝에 손목을 붙잡는 온기가 아주 희미하게 돌아왔다.은빛 신력이 손끝으로 스며들었다.먹먹했던 감각이 조금씩 깨어났다. 가장 먼저 카시안의 손이 느껴졌고, 그다음에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팔과 단단한 가슴, 귓가에서 거칠게 울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라엘!”라엘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흐릿했던 시야가 열리며 카시안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한 손은 라엘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다른 손은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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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없어도 너를 선택한다

“누구지?”카시안의 검끝이 라엘의 심장을 겨누었다.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검을 쥔 손까지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흔들림 없이 뻗은 검신에는 언제든 상대의 급소를 꿰뚫을 수 있는 힘이 실려 있었다.라엘은 움직이지 않았다.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카시안은 공격할 것이다. 그가 아는 라엘은 사라졌고,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자신은 아스테리아와 싸우던 중 갑자기 그의 품을 붙잡은 낯선 여자일 뿐이었다.“내가 누구인지 정말 기억 안 나?”“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하지 마.”차가운 목소리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 손끝으로 더듬던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오늘 밤이 끝난 뒤에는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던 남자의 눈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예상했던 일이었다.여섯 번째 종이 가장 소중한 기억을 거둔다고 들었다. 카시안의 몸에서 빠져나간 은빛 조각이 모두 자신과 관련된 것이었다는 것도 보았다.그런데도 가슴이 아팠다.아스테리아의 웃음소리가 광장 전체를 뒤흔들었다.“어때, 라엘?”꿰맨 얼굴들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네가 영원까지 버리고 선택한 남자가 널 괴물처럼 보고 있네.”카시안의 시선이 아스테리아에게 향했다.“라엘?”“그래. 저 여자의 이름이야.”아스테리아는 다정하게 진실을 가르쳐 주는 척했다.“천계에서 내려와 성녀 세레나의 몸을 차지했던 악한 영혼이지. 세레나의 힘을 빼앗고 네 정신까지 홀렸어. 네 기억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속박에서 벗어날 기회야.”“거짓말이야.”라엘이 즉시 말했다.“증명할 수 있나?”카시안은 아스테리아가 아니라 라엘에게 물었다.불신이 담긴 질문이었지만, 적어도 한쪽의 말만 믿지는 않았다. 기억을 잃어도 신중함과 냉정함은 그대로였다.“세레나에게 물어봐.”라엘은 천천히 손을 들어 광장 반대편을 가리켰다.“저기 흰 불꽃을 들고 있는 여자가 진짜 성녀 세레나야. 나는 한동안 그 몸에 머물렀지만 빼앗지 않았어. 세레나의 영혼은 잠들어 있었고, 나는 그 아이가 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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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녀의 심장 속에서

피로 만들어진 세계에는 바닥이 없었다.라엘과 카시안은 서로의 손을 붙든 채 끝없는 어둠으로 추락했다. 주위에는 아스테리아가 빼앗은 기억들이 붉은 유리 조각처럼 떠다녔다. 피가 가득한 욕조에서 죽어 가던 소녀, 신전의 구호원에서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던 아이,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며 문을 두드리던 여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카시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보지 마.”“봐야 해.”라엘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우리가 심장을 부수면 저 사람들의 기억도 사라질 수 있어. 무엇을 돌려줘야 하는지 알아야 해.”“네가 전부 감당할 필요는 없어.”“그럼 나눠 가져.”라엘이 카시안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같이 들어왔잖아.”그는 잠시 라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어둠 속에 뜬 기억들을 함께 마주했다.두 사람은 한참을 떨어진 뒤에야 붉은 바닥 위에 내려섰다. 충격에 무릎이 꺾이기 직전 카시안이 라엘의 허리를 받쳐 세웠다.“다친 곳은?”“없어. 당신은?”“없다.”“이번에는 정말?”“확인해도 돼.”카시안이 두 팔을 아주 조금 벌렸다.라엘의 시선이 그의 가슴과 옆구리를 훑었다. 현실의 육체에 있던 상처는 영혼으로 들어온 뒤 보이지 않았지만, 가슴에 새겨진 죽음의 표식만은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검은 문양에서 뻗은 실 하나가 심장 세계의 깊은 곳으로 이어졌다.라엘이 표식 위에 손을 올렸다.“이건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깊어.”“끊을 수 있나?”“심장의 핵을 찾으면.”카시안의 손이 라엘의 허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있었고, 이곳에서까지 세레나를 의식하며 거리를 둘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이 여유롭게 서로의 체온을 느낄 상황은 아니었지만, 피와 기억만 존재하는 낯선 세계에서 맞닿은 온기는 서로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놓지 마.”라엘이 말했다.“내가 할 말인데.”“먼저 말한 사람 명령을 따르라고 했지?”카시안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나쁜 것만 빠르게 배우는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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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종은 울리지 않았다

검은 혈관이 세레나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다.세레나는 피하지 못했다. 발밑에 펼쳐진 죽음의 문양이 두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고, 허공에서 뻗은 검은 사슬이 손목과 목을 휘감았다. 흰 성화가 사슬에 닿을 때마다 불꽃이 검게 물들어 꺼졌다.“성녀님!”마리안이 세레나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녀 역시 손목의 표식 때문에 제대로 서 있지 못했지만, 사슬에 끌려 올라가는 세레나를 놓치지 않으려 바닥에 엎드린 채 버텼다.검은 혈관 끝이 세레나의 가슴에 닿았다.날카로운 가시가 피부를 파고들자 붉은 피가 흰 성녀복 위로 번졌다.세레나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안 돼!”다미안이 사슬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축성한 검날이 검은 사슬과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지만, 아스테리아의 심장과 직접 연결된 계약은 끊어지지 않았다.오히려 충격이 세레나에게 전해졌다.가슴을 파고들던 혈관이 더 깊어졌다.“멈추세요!”세레나의 외침에 다미안이 급히 검을 거두었다.아스테리아의 꿰맨 몸에서 수십 개의 입이 동시에 웃었다.“소용없어.”그녀는 갈비뼈를 벌린 채 심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라엘과 카시안의 영혼이 들어간 뒤 몸은 거의 움직이지 못했지만, 마지막 종을 울릴 힘만큼은 남아 있었다.“세레나는 내 힘을 담았던 그릇이야. 몸과 영혼 어디에 어떤 틈이 있는지 내가 가장 잘 알지.”가슴에 박힌 심장이 거칠게 수축했다.세레나의 몸에서 연보랏빛 신력이 뽑혀 나왔다. 희미하게 돌아오던 힘이 혈관을 타고 아스테리아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세레나의 얼굴이 빠르게 창백해졌다.마리안은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울었다.“성녀님, 정신을 놓으시면 안 돼요!”“괜찮……아요.”“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요.”“그래도…….”세레나는 떨리는 손을 아래로 뻗었다. 마리안의 머리카락에 손끝이 닿았다.“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니까요.”그 말을 들은 마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세레나의 치맛자락을 놓는 대신 사슬에 직접 손을 뻗었다.검은 기운이 손바닥을 태웠다.“마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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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 뒤, 나는 사라진다

“누구 마음대로 데려가.”카시안의 손이 천계의 사슬을 움켜쥐었다.“라엘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아.”치이익—!살이 타는 소리가 섬뜩하게 번졌다. 황금빛 사슬과 맞닿은 손바닥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카시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에 힘을 주어 사슬을 더욱 세게 틀어쥐었다.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크게 요동쳤다.―필멸자가 천계의 집행을 방해하는가.감정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 무심한 울림에 무너진 광장 전체가 진동했다. 깨진 석판들이 잘게 떨리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던 사람들이 다시 주저앉았다.“필멸자?”카시안의 입술이 사납게 비틀렸다.“방금 그 필멸자들이 너희가 방치한 괴물을 죽였다.”―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내게는 같은 문제야.”카시안의 손등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솟았다. 살이 타들어 가는데도 푸른 눈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너희가 버린 인간들을 라엘이 구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죄를 묻겠다고?”―라엘은 하늘의 법을 어겼다. 천족의 영원을 버리고, 인간의 육신을 얻었으며, 금지된 방식으로 필멸자의 운명에 개입했다.“그 법 때문에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둬야 했다면, 그런 법은 잘못됐어.”―하늘의 법은 인간의 판단을 구하지 않는다.황금 사슬이 날카로운 빛을 토해 냈다.카시안의 팔을 타고 금빛 균열이 번졌다. 피부 아래로 파고든 빛이 뼈를 태우듯 번뜩였다. 그 순간 라엘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놓아.”“싫어.”“이대로면 네 팔이 타 버려.”“그 정도로 끝난다면 싸게 먹히는군.”그답지 않게 무모한 대답이었다.라엘은 이를 악물었다. 가슴속이 뜨겁게 타올랐다. 죽음의 신을 마주했을 때도, 아스테리아의 심장 속에 갇혔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 목을 조였다.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이 남자가 자신을 붙잡다가 망가지는 게 두려웠다.라엘은 카시안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밀어내는 힘보다 그를 살리려는 마음이 먼저 닿자, 둘을 이어 놓은 영혼의 연결이 거칠게 진동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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