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천족 라엘이 아닙니다.”라엘은 수천 개의 황금빛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인간, 라엘입니다.”그 순간 천칭 위에 놓인 푸른 실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가느다란 실을 따라 빛이 번져 나가자, 새하얀 재판정의 바닥에 인간계의 풍경이 아른거렸다.무너진 신전과 피로 물든 제단, 눈을 감은 채 기도하던 세레나, 라엘을 향해 손을 내밀던 카시안. 짧지만 선명했던 기억들이 빛의 파문 위로 차례로 떠올랐다.수천 개의 시선이 차갑게 흔들렸다.―정숙하라.여섯 쌍의 날개를 지닌 재판관이 지팡이를 내리쳤다.쾅!빛으로 이루어진 바닥에 금이 퍼지며 기억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천칭 위에서 타오르던 푸른 실도 다시 가늘어졌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스스로 인간이라 선언하는 것만으로 존재의 근원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대는 천계의 빛에서 태어났고, 천족의 이름을 받았으며,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하늘의 권능을 누렸다.“그 권능은 모두 버렸습니다.”―버린 것과 사라진 것은 다르다.“제 등에는 날개가 없고, 제 몸에는 피가 흐릅니다. 추위를 느끼고 배고픔을 느끼며, 상처를 입으면 아픕니다. 언젠가는 늙고 죽을 몸입니다.”―최초의 성녀 리아나가 하늘의 불꽃으로 빚어 준 금지된 육신일 뿐이다. 그것을 인간의 몸이라 부를 수 없다.라엘의 시선이 단상 위로 향했다.목소리도, 드러난 형체도 낯설었다. 그러나 긴 세월을 함께한 빛의 파동만은 숨길 수 없었다. 차갑게 눌러 놓은 어조 아래로 희미하게 떨리는 기운을 라엘은 알고 있었다.어린 시절 사고를 칠 때마다 그녀를 찾아냈고,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몰래 감싸 주었던 존재.천계의 첫째이자 질서의 수호자.“아르엔 오라버니.”재판정 전체가 술렁였다.여섯 쌍의 날개가 순간 굳었다. 황금빛에 가려졌던 재판관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라엘과 같은 은빛 머리칼, 감정을 억누른 금색 눈동자였다.아르엔은 한참 동안 라엘을 내려다보다가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이곳에서는 수석 재판관이라 불러
Last Updated : 2026-09-19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