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Chapter 21 - Chapter 30

55 Chapters

인간 라엘의 변론

“제 이름은 천족 라엘이 아닙니다.”라엘은 수천 개의 황금빛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인간, 라엘입니다.”그 순간 천칭 위에 놓인 푸른 실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가느다란 실을 따라 빛이 번져 나가자, 새하얀 재판정의 바닥에 인간계의 풍경이 아른거렸다.무너진 신전과 피로 물든 제단, 눈을 감은 채 기도하던 세레나, 라엘을 향해 손을 내밀던 카시안. 짧지만 선명했던 기억들이 빛의 파문 위로 차례로 떠올랐다.수천 개의 시선이 차갑게 흔들렸다.―정숙하라.여섯 쌍의 날개를 지닌 재판관이 지팡이를 내리쳤다.쾅!빛으로 이루어진 바닥에 금이 퍼지며 기억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천칭 위에서 타오르던 푸른 실도 다시 가늘어졌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스스로 인간이라 선언하는 것만으로 존재의 근원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대는 천계의 빛에서 태어났고, 천족의 이름을 받았으며,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하늘의 권능을 누렸다.“그 권능은 모두 버렸습니다.”―버린 것과 사라진 것은 다르다.“제 등에는 날개가 없고, 제 몸에는 피가 흐릅니다. 추위를 느끼고 배고픔을 느끼며, 상처를 입으면 아픕니다. 언젠가는 늙고 죽을 몸입니다.”―최초의 성녀 리아나가 하늘의 불꽃으로 빚어 준 금지된 육신일 뿐이다. 그것을 인간의 몸이라 부를 수 없다.라엘의 시선이 단상 위로 향했다.목소리도, 드러난 형체도 낯설었다. 그러나 긴 세월을 함께한 빛의 파동만은 숨길 수 없었다. 차갑게 눌러 놓은 어조 아래로 희미하게 떨리는 기운을 라엘은 알고 있었다.어린 시절 사고를 칠 때마다 그녀를 찾아냈고,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몰래 감싸 주었던 존재.천계의 첫째이자 질서의 수호자.“아르엔 오라버니.”재판정 전체가 술렁였다.여섯 쌍의 날개가 순간 굳었다. 황금빛에 가려졌던 재판관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라엘과 같은 은빛 머리칼, 감정을 억누른 금색 눈동자였다.아르엔은 한참 동안 라엘을 내려다보다가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이곳에서는 수석 재판관이라 불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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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버린 죄

천칭이 완전히 뒤집혔다.금빛 날개가 놓인 접시가 위로 솟구치고, 푸른 실과 인간들의 기억이 쌓인 접시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두 접시 사이를 이어 주던 황금 사슬이 거칠게 흔들리며 재판정 전체에 맑고 긴 울림을 퍼뜨렸다.죽음의 신은 라엘의 심장 위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이제 충분한가?”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심장이 뛰었다. 빠르고 불규칙하며,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유한한 생명의 박동이었다.쿵.쿵.라엘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소리가 천계의 적막 속에 선명하게 울렸다.아르엔은 굳은 얼굴로 뒤집힌 천칭을 바라보았다. 그를 둘러싼 천족들의 날개가 불안하게 떨렸다. 인간이 천족의 법정에 목소리를 전한 것도, 죽음의 지배자가 직접 증인으로 나타난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죽음의 영역은 천계의 재판에 개입할 수 없다.“또 그 말을 하는군.”죽음의 신이 무료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내게 증언을 요구한 것은 너희다. 이 아이가 필멸자인지 묻기에 답했을 뿐이지.”―라엘은 천계의 빛에서 태어났다. 근원이 사라지지 않은 이상, 그대의 영역에 속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그럼 확인해 보든가.”죽음의 신의 손끝이 라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피부를 찢은 것은 아니었다. 손은 검은 안개로 변해 살과 뼈를 그대로 통과했다. 하지만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차가운 감각에 라엘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윽……!”균열 너머에서 카시안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손 떼.”그가 당장이라도 천계의 틈을 찢고 넘어올 듯 푸른 실을 잡아당겼다. 검은 종의 파편이 박힌 손바닥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카시안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죽음의 신만을 노려보았다.죽음의 신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여전히 성질이 급하군, 황태자.”“그 손을 치우라고 했다.”“심장을 멈추게 하려는 게 아니다. 이 아이가 누구의 영역에 속하는지 보여 주려는 것이지.”그가 라엘의 심장 안에서 무언가를 끌어냈다.새하얀 불꽃이었다.리아나가 남긴 마지막 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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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사람의 약속

“끝까지 내 곁에 있겠다고 했지.”카시안의 손이 라엘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이제 그 약속을 지켜, 라엘.”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술 바로 앞에서 흘러내렸다. 라엘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사흘 동안 잠들어 있던 몸이 이제야 완전히 깨어나는 것 같았다.귓가에는 카시안의 숨소리가 들렸고, 얇은 잠옷 너머로 맞닿은 체온이 선명했다. 인간이 되어 처음 느끼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과 마른 입술, 허리를 감싼 손이 조금 움직일 때마다 몸 안쪽으로 번지는 낯선 열기까지.천족이었을 때도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기쁨과 슬픔, 분노도 느꼈다. 하지만 감정이 육신을 통해 이렇게 뜨겁고 직접적으로 밀려오는 것은 처음이었다.“그 약속을 지키는 것과 네 침대에서 이러고 있는 게 무슨 관계인데?”라엘은 태연한 척 물었지만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 입술로 느리게 내려갔다.“모르는 척하는 건가?”“정확히 듣고 싶어서.”“재판정에서는 그렇게 용감하더니.”그의 엄지가 라엘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이 눌리고, 손끝의 열이 닿은 곳마다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났다.“지금은 긴장했군.”“누구 때문에?”“내가 원인이면 마음에 드는데.”라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사흘 동안 환자 옆에 붙어 있더니 뻔뻔함만 더 늘었네.”“사흘 동안 네가 숨을 쉬는지만 확인했어.”장난스럽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카시안의 손이 입술에서 뺨을 지나 목덜미로 내려왔다. 손끝이 맥박이 뛰는 곳에 닿았다. 그는 그 작은 움직임을 확인하듯 잠시 손가락을 멈추었다.“숨이 조금이라도 느려지면 의사를 불렀고, 몸이 차가워지면 이불을 더 덮었지. 자리를 비우면 네가 다시 사라질 것 같아서 회의도 여기서 했다.”라엘은 그의 눈 아래에 드리운 그늘을 다시 보았다. 단순히 잠을 자지 못해 생긴 흔적이 아니었다. 눈을 감은 자신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까 봐 사흘 내내 두려움과 싸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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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그릇

“마지막 제단의 봉인이 열렸어요.”세레나의 말이 떨어진 순간, 소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움직였다.카시안은 검을 검집에 밀어 넣으며 다미안을 돌아보았다.“북쪽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봉쇄해. 성기사단은 발견된 열두 제단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공작부인의 구호원과 수도원 명단을 전부 가져와.”“예, 전하.”다미안이 곧장 회의실을 나갔다. 레오폴드 황제 역시 시종장에게 북부 관문을 폐쇄하고 황실 기병대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유리병이 깨진 자리에는 검게 변질된 신력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닥을 기어가듯 북쪽으로 길게 번지다가 서서히 사라졌다.라엘은 흔적이 끊어진 지점에 손을 댔다.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과거의 라엘이었다면 기운이 향한 방향뿐 아니라 거리와 이동 경로까지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계에서 권능을 거둬들인 지금, 손바닥에 닿는 것은 차갑고 매끈한 대리석의 감촉뿐이었다.그녀의 손이 잠시 굳었다.“무리하지 마.”카시안이 라엘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무리한 게 아니라 확인한 거야.”“지금의 네 몸에는 그것도 무리가 될 수 있어.”“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사흘 동안 의식이 없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군.”라엘은 반박하려다가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작게 숨을 삼켰다. 카시안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받친 손길이 단단해졌다.“침실로 돌아가.”“싫어.”“라엘.”“마지막 제단이 열렸어. 성녀의 힘을 담은 그릇이 깨어났고, 아스테리아의 추종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어. 그런데 나더러 침실에서 기다리라고?”“네게 권능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잊지 마.”냉정한 말이었다.라엘의 얼굴에서 잠시 표정이 사라졌다. 카시안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깎아내리려는 말이 아니라, 더는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경고였다.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따끔하게 아픈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안 잊었어.”라엘은 그의 손을 허리에서 떼어 냈다.“누구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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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죽지 않는 선택

댕—열세 번째 종이 울린 순간, 세레나와 에린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쿵.쿵.한 사람의 가슴에서 시작된 박동이 검은 가시를 타고 다른 사람의 심장으로 전달되었다. 세레나가 가슴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자 에린 역시 숨이 막힌 듯 몸을 웅크렸다.두 사람의 고통마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세레나!”라엘이 달려가려 했으나 카시안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동시에 제단실 바닥에서 검은 가시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카시안은 라엘을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검을 휘둘렀다. 푸른 검기가 두 사람 앞을 가로막은 가시를 잘라 냈다. 그러나 잘린 줄기에서 검은 피가 튀자 그의 붕대 감긴 손이 강하게 떨렸다.상처 속에 남아 있던 기운이 종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네 손…….”“괜찮다.”카시안은 짧게 대답하며 라엘을 자신의 뒤로 밀어냈다.다미안과 성기사단도 제단실 안으로 진입했다. 열세 명의 수녀는 기도가 중단되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발목과 손목에는 검은 장미 줄기가 깊게 박혀 있었다.“저들도 제단에 묶여 있습니다!”성기사 하나가 외쳤다.다미안은 수녀를 제압하려던 검을 돌려 바닥의 줄기를 베었다. 그러나 줄기가 끊기는 순간 수녀의 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검은 장미가 단순히 몸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혈관과 이어져 있었다.베아트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소용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새로운 성녀를 위한 제물입니다.”“새로운 성녀?”세레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에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당신은 이 아이를 성녀로 만들 생각이 아니에요.”그녀가 입가의 피를 닦았다.“제 힘을 담아 조종할 인형이 필요했던 거겠죠.”“아스테리아 님이 살아 계셨다면 이 제국은 다시 빛을 되찾았을 겁니다.”“그 여자가 만든 건 빛이 아니라 시체였어.”라엘의 냉정한 말에 베아트리스의 웃음이 멎었다.“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왜? 아직도 죽은 주인이 돌아올 거라고 믿어?”“그분은 죽지 않았다.”“죽었어.”라엘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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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맺는 약속

“나와 결혼해.”카시안의 청혼은 무너진 수도원 앞에서 이루어졌다.반지도, 꽃도 없었다. 그의 검은 제복에는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한쪽 손에는 피 묻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라엘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승마복 안쪽에서는 터진 상처의 피가 배어 나왔고, 장갑은 검은 가시에 찢겨 있었다.황태자의 청혼이라고 하기에는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그런데 라엘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것보다 눈앞의 남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카시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라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늘 명령하는 데 익숙한 남자가 자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절당할 가능성까지 받아들인 사람처럼.라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침묵이 길어질수록 카시안의 눈빛이 조금씩 굳었다.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으나 그녀의 손을 감싼 손가락에는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아니.”“그럼 왜 말이 없지?”“황태자도 초조해하는지 구경하고 있었어.”카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상황이 재미있나?”“조금.”“라엘.”낮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경고가 묻어났다. 라엘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천계의 법정을 찢고 들어오던 남자가 청혼 한 번 해 놓고 이렇게 긴장할 줄은 몰랐거든.”“천계는 검으로 상대할 수 있었지만, 너는 아니니까.”“나도 검으로 상대하려고 했어?”“가끔은 진지하게 고민했다.”라엘은 웃다가 옆구리의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카시안이 즉시 일어나려 하자 그녀는 그의 어깨를 눌렀다.“아직 대답 안 했어.”“상처부터 봐야 한다.”“조금 전까지는 대답을 재촉했잖아.”“네가 아프지 않다는 전제에서였지.”“그럼 빨리 끝내자.”라엘은 자신의 손을 잡은 카시안의 손가락을 마주 잡았다.“조건이 있어.”“말해.”대답이 너무 빨라 라엘이 눈썹을 들었다.“아직 뭔지도 모르잖아.”“네가 천계를 다시 열어 달라는 것만 아니면 들어주지.”“그건 나도 싫어.”라엘은 잠시 숨을 골랐다. 장난스럽던 눈빛이 가라앉았다.“나는 이제 천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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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황제

“그들이 국경군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황실 기록관의 보고가 떨어진 순간, 대회의실을 뒤덮었던 소란이 거짓말처럼 멎었다.카시안은 라엘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기록관을 바라보았다.“공동 선언에 이름을 올린 자들은?”“북부의 브레노르 대공, 서부의 하르덴 공작, 남서 국경의 로베르 후작입니다.”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세 제후였다. 그들이 보유한 병력만 합쳐도 황실 직속군과 비슷한 규모였다. 수도로 이어지는 세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한다면, 황실은 병력을 나누어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다미안이 기록관에게서 문서를 받아 펼쳤다.“공식적인 진군 목적은?”“신성한 계약을 파기한 황실로부터 제국의 신앙을 지키고, 정통성을 잃은 황태자의 즉위를 막는 것이라고 합니다.”기록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그들은 네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폐하의 abdication 선언 철회, 황실과 신전의 계약 복구, 새로운 성녀의 즉위…….”그의 시선이 에린에게 향했다가 곧바로 내려갔다.“그리고 라엘 님을 이단 심문을 위해 신전에 넘기라는 요구입니다.”카시안이 웃었다.웃음소리는 낮았지만 대회의실의 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그의 손에 잡힌 라엘의 손가락이 조금 아플 만큼 눌렸다.“마지막 요구는 거절하기 쉬워서 다행이군.”“전하.”“나머지 셋도 다르지 않다.”카시안은 기록관이 든 공동 선언문을 빼앗아 빠르게 훑었다. 세 제후의 인장이 찍힌 문서는 겉으로는 제국의 신성을 걱정하는 충성스러운 간언처럼 꾸며져 있었다.그러나 결론은 명백했다.카시안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새로운 황제를 세우겠다.라엘은 그의 어깨 너머로 선언문을 읽었다. 낯선 정치적 표현들 사이에서 익숙한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새벽의 빛이 거짓된 태양을 몰아내고, 피로 세운 왕관이 진정한 주인을 택하리라.새벽.피로 세운 왕관.아스테리아의 제단과 베아트리스가 사용하던 표현이었다.“잠깐.”라엘이 선언문을 가져왔다.귀족들은 황태자가 들고 있던 문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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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제2황자

“제2황자가 있었어?”라엘의 물음에 카시안의 얼굴에서 모든 온기가 사라졌다.“죽은 줄 알았지.”그가 피로 그려진 이름을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십오 년 전에.”집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뜨거운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카시안은 구겨진 편지를 다시 펼쳐 차기 황제로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루시안 아르테온.라엘은 그 이름이 적힌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필체는 다른 문장과 달랐다. 검은 잉크가 아니라 마른 피로 쓰였고, 이름 아래에는 황실의 문양을 흉내 낸 작은 태양이 찍혀 있었다.흉내라고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아르테온 황실의 태양 문양에는 열두 갈래의 빛이 뻗어 있었다. 그런데 편지의 태양에는 열세 갈래가 있었다.흰 왕관의 숫자였다.“동생이야?”라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카시안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이 굳게 다물리고, 편지를 쥔 손등 위로 핏줄이 솟았다.“다섯 살 아래의 친동생이었어.”과거형이었다.카시안은 책상 가장자리로 걸어가 두 손을 짚었다. 라엘은 재촉하지 않고 그의 곁에 섰다.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먼저 닿는 것이 부담이 될까 싶어 멈추었다.그 순간 카시안의 손이 라엘의 손목을 붙잡았다.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왔다. 라엘의 손바닥 아래로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겉으로는 침착했지만 몸은 아니었다.“루시안은 여덟 살에 죽었다.”카시안의 시선은 여전히 책상 위의 편지에 고정되어 있었다.“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였지. 대신관은 황자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신성을 확인해야 한다며 우리를 동쪽 신전으로 불렀어.”“신성을 확인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황실의 피가 신과 얼마나 가까운지 검사한다는 명목이었지. 나는 열세 살이었고, 이미 몇 번이나 같은 의식을 받아 봤어. 손바닥에 작은 상처를 내고 피를 성배에 떨어뜨리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다.”카시안의 목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출발하는 날 아버지가 국경 문제로 나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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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칼도 되지 마

“저를 살리려면…….”검끝이 카시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형님이 죽어야 합니다.”붉은 피가 흰 예복 위로 번졌다.“카시안!”라엘이 달려들려는 순간, 카시안이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동시에 맨손으로 검날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장갑을 가르고 손바닥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그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루시안의 팔이 거칠게 떨렸다.검을 더 밀어 넣으라는 듯 그의 목에 새겨진 흰 장미 문양이 맥박쳤다. 머리 위에 떠오른 백색 관에서는 검붉은 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성력이 아니었다. 신성한 기운을 흉내 내고 있을 뿐, 살아 있는 자의 공포와 증오를 먹고 자라는 저주였다.“어서 찌르십시오, 전하!”제단 아래에 선 브레노르 공작이 외쳤다.“당신을 버린 자입니다. 당신의 자리를 빼앗고, 당신의 죽음을 이용해 황태자가 된 자란 말입니다!”루시안의 검이 한 치 더 나아갔다. 피에 젖은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예배당 안에 선명하게 울렸다.카시안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검날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루시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래. 내가 미우냐?”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루시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본래의 푸른색과 저주에 잠식된 검붉은색이 불안하게 뒤섞였다.“대답해, 루시안.”“입 다물어…….”“저들이 시키는 말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입 다물라고 했습니다!”루시안이 소리쳤다. 그의 의지와 반대로 검을 쥔 팔에는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 칼날을 붙잡은 카시안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그때, 라엘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브레노르가 명령할 때마다 루시안의 목에 새겨진 장미가 빛났다. 그러나 카시안이 질문할 때에는 머리 위의 관이 흔들렸다. 루시안의 몸을 완전히 지배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반응이었다.저주는 그의 육체를 붙들고 있었지만, 선택까지 빼앗은 것은 아니었다.정확히는, 그가 스스로 내린 선택이라고 믿게 만들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저주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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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을 돌려드립니다

댕.댕.댕.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종이 신성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성휘전의 갈라진 천장 너머로 검붉은 빛기둥이 솟구쳤고, 레오폴트의 머리 위에 떠오른 관은 그의 생명력을 뿌리째 빨아들이듯 맥동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황제의 피부가 창백해지고, 금빛이 섞여 있던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희어졌다.“아버지!”카시안이 빛의 장막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콰앙!신성력이 폭발하며 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가슴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솟구쳤지만, 카시안은 바닥에 한쪽 무릎이 닿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두 번째로 검을 들려는 그의 팔을 루시안이 붙잡았다.“안 됩니다.”“놓아.”“저 장막은 공격을 받을수록 안쪽의 생명력을 더 빠르게 흡수합니다.”루시안의 목에 남은 장미 문양이 검게 꿈틀거렸다. 십오 년 동안 백색 관과 연결되어 있던 탓인지, 그는 누구보다 저주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형님이 한 번 더 공격하면 폐하의 심장이 먼저 멎을 겁니다.”“그럼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냐?”카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정이 푸른 눈을 뒤덮었다. 그는 불과 잠시 전까지 레오폴트가 저지른 죄를 알지 못했다. 친동생이 살아 있을 가능성을 감추고, 제국의 안정을 위해 죽음을 확정 지은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진실을 고백한 바로 그 아버지가 지금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미워할 시간도, 따질 시간도 없이.“죽음으로 도망치게 두지 않아.”카시안은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들었다.“카시안, 잠깐만.”라엘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막지 마.”“막으려는 게 아니야. 저게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봐야 해.”“아버지의 목숨을 원한다고 직접 말했어.”“아니.”라엘은 검붉은 관을 올려다보았다. 관에서 뻗은 빛줄기 일부는 레오폴트의 몸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갈라진 바닥과 벽, 제단 뒤의 오래된 성화로 퍼지고 있었다. 황제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의식이라면 필요하지 않을 움직임이었다.“저건 폐하를 죽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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