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카시안이 돌다리를 박찼다.은빛 신력으로 감싼 검이 어린 성녀의 형상을 향해 곧게 뻗었다. 에리사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진한 얼굴로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검은 호수가 폭발하듯 솟구쳤다.콰아앙!수백 개의 손이 물결 사이에서 튀어나와 카시안의 팔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그는 공중에서 몸을 틀어 가장 먼저 닿은 손목을 베어 냈다. 잘린 팔이 검은 물로 돌아가기도 전에 다른 손들이 그의 군화와 제복 자락을 움켜쥐었다.“카시안!”라엘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발목을 감싼 가시가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카시안의 망토 위로 검붉은 피가 번졌다. 손등의 마지막 꽃잎에 생긴 금도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한 번만 더 충격을 받으면 꽃잎이 떨어진다.그러면 마지막 의식이 완성된다.라엘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금빛 신력이 손끝에 희미하게 모였다가 힘없이 흩어졌다. 대성전에서 세레나의 성화를 깨우며 너무 많은 힘을 사용한 탓이었다.“쓸모없을 만큼 약해졌네.”에리사의 목소리가 호수 위로 맑게 울렸다.열두 살의 모습을 한 소녀가 맨발로 검은 수면을 걸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흰 예복 끝이 붉게 물들었다.“천족도 별수 없구나. 남의 몸에 들어오면 그 몸이 견딜 수 있는 만큼밖에는 힘을 쓰지 못해.”“그래서 세레나의 몸을 노린 거야?”라엘은 발목의 가시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나를 약하게 만들려고?”“아니.”에리사가 고개를 갸웃했다.“네가 더러워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뭐?”“남의 몸을 빌려 정의로운 척하고, 세레나의 힘을 제 것처럼 쓰고, 결국에는 그 몸으로 황태자의 사랑까지 차지하는 모습.”에리사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그러면 너도 나와 다르지 않게 되잖아.”라엘의 손이 멈췄다.“너도 세레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게 될 테니까.”그 말은 라엘이 애써 외면해 온 가장 깊은 곳을 정확히 찔렀다.라엘은 세레나를 구하기 위해 내려왔다. 잠든 영혼을 지키고, 빼앗긴 힘을 돌려준 뒤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전령의 보고가 대성전 안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카시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라엘은 그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는 것을 보았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남자였으나, 가슴에 남아 있는 은빛 연결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놀람과 분노, 제때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이 차가운 신력 아래에서 거칠게 뒤엉키고 있었다.“언제부터지?”“일각 전입니다. 성직자들이 황궁 서쪽 결계를 공격했고, 근위대가 그쪽으로 이동한 사이 폐하의 침실에서 검은 연기가 솟았습니다. 시종들이 들어갔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습니다.”“침입의 흔적은?”“문과 창문은 모두 잠겨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저항하신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전령은 품 안에서 검은 천에 싼 물건을 꺼냈다. 천을 펼치자 반으로 부러진 황제의 인장이 드러났다. 금으로 만든 독수리의 몸통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카시안이 인장을 집어 들었다.손끝에 닿은 피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폐하의 피가 맞습니까?”다미안이 묻자 카시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의 피다.”라엘은 그의 손에 들린 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금빛 독수리의 날개 사이에 아주 가느다란 검은 실이 감겨 있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머리카락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아스테리아의 심장과 이어진 혈관이었다.라엘이 실을 잡으려 하자 카시안이 먼저 손목을 붙들었다.“맨손으로 건드리지 마.”“지금 누구 걱정할 때야?”“내가 걱정하고 싶은 사람을 결정하는 데 허락이 필요한가?”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라엘은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세레나와 함께 성화를 일으킨 탓인지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시야도 다시 완전한 어둠에 잠겼고, 팔다리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카시안은 그녀가 휘청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다미안.”“예, 전하.”“마차를 준비해. 가장 빠른 것으로.”“즉시 명하겠습니다.”“아니.”라엘이 카시안의 팔을
검은 손들이 카시안의 발목을 붙잡았다.뼈만 남은 손가락이 군화의 가죽을 파고들자, 그의 몸이 피의 제단을 향해 거칠게 끌려갔다. 카시안은 즉시 검을 바닥에 꽂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대리석을 긁으며 긴 자국을 남겼지만, 수십 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전하!”다미안이 달려들려는 순간, 대성전 바닥에서 검은 가시가 솟구쳤다. 그는 검을 휘둘러 가시를 베어 냈으나 잘려 나간 단면에서 또 다른 손들이 돋아났다.성전 밖에서는 비명이 이어졌다. 붉은 기도 끈을 찬 사람들의 피부 위로 검은 문양이 번지고 있었다.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이들은 제 손목을 쥔 채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렸다.라엘은 망설이지 않았다.“카시안!”그녀가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쾅!대성전 전체가 흔들렸다. 피의 제단 위에서 뛰는 심장이 라엘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크게 수축했다. 검은 손들이 카시안을 끌어당기는 힘이 더욱 거세졌다.라엘의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다. 손바닥이 찢어지며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다.“라엘, 놓아.”카시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누구 마음대로?”“이대로라면 너까지 끌려간다.”“그래서 놓으라고?”라엘이 이를 악물었다. 손끝에서 금빛이 번져 나와 카시안의 손목을 감쌌다.“당신은 내가 잡은 사람이야. 아스테리아에게 넘겨줄 생각 없어.”“그 말은 꽤 오해하기 좋군.”이런 상황에서도 카시안의 입가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라엘은 어이가 없어 그를 노려보다가 손에 힘을 더 주었다.“살아남으면 마음껏 오해해.”“명령대로 하지.”카시안이 바닥에 박았던 검을 비틀었다. 은빛 신력이 검신을 따라 폭발하듯 번졌다. 동시에 라엘의 금빛이 그의 팔을 타고 흘러 검에 뒤섞였다.금빛과 은빛이 하나로 엉켰다.콰아앙!바닥을 뚫고 나온 검은 손들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카시안의 몸을 끌어당기던 힘이 사라지자 라엘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차가운 바닥에 닿기 직전, 카시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두 사람의 숨이 가까이
대성전의 종이 갈라진 순간, 수도를 뒤덮은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검붉은 구름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태양을 집어삼켰다. 한낮이 되어 가는 시각인데도 황궁 안은 해가 진 것처럼 어두워졌고, 창밖에서는 놀란 사람들의 비명과 기도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라엘의 가슴에 새겨진 검은 장미가 거칠게 뛰었다.쿵.심장을 움켜쥐는 통증에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카시안이 즉시 허리를 받쳐 세웠다.“라엘.”“괜찮아.”“그 말은 네가 쓰러질 때마다 듣는군.”카시안은 라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황제 앞이라는 사실도, 침실에 내관들이 가득하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가슴이 어떻게 됐지?”“진명을 부른 것에 반응했어.”라엘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세레나의 몸에서는 장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영혼에 뿌리내린 가시가 사납게 뒤틀리는 감각만은 분명했다.“에리사라는 이름이 맞으니까 저주가 거부하는 거야.”“그렇다면 계약이 깨진 건가?”황제가 물었다.“아직 아니야.”라엘은 핏빛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진명을 빛 아래에서 불러야 해. 그런데 아스테리아가 수도에서 태양을 가렸어.”금서고의 기록에서 말한 ‘빛’은 단순한 햇빛이 아니었다. 신성제국의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빛, 죽은 성녀가 버리고 달아난 신의 권능을 뜻했다.현재 그 힘이 가장 강하게 모인 곳은 대성전이었다.하지만 대성전마저 죽음의 기운에 잠식된 상태였다.“저 붉은 결계를 걷어 내지 못하면 진명을 알아도 소용없어.”“결계는 어디에서 시작됐지?”카시안이 물었다.“종탑.”라엘은 갈라진 종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더듬었다.“아니, 종탑 아래에 있는 무언가야. 대성전 전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대신관은 황태자가 성녀를 감금했다고 주장하며 제국민을 대성전으로 불러 모았다. 단순히 여론을 선동하려는 것이 아니었다.사람들의 신앙을 이용해 결계를 완성하려는 것이다.대성전 앞에 모인 이들이 성녀를 돌려 달라고 외칠수록 그 간절함이 신력으로
한 글자.‘에.’세레나의 손가락이 라엘의 손바닥 위에서 멈췄다.검은 가시가 그녀의 목을 휘감아 꽃밭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고통으로 흔들렸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목소리 대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세레나!”라엘은 멀어지는 손을 붙잡았다.검은 가시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팔까지 휘감았다. 날카로운 끝이 피부를 찢고 영혼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라엘은 손을 놓지 않았다.꽃밭 아래에서 떠오른 거대한 눈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검은 눈동자 안에는 수백 명의 얼굴이 비쳤다. 아스테리아에게 피를 빼앗긴 사람들, 죽은 뒤에도 영혼을 붙잡힌 희생자들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내 진명을 입에 담는 순간, 세레나의 영혼부터 찢어질 테니까.’아스테리아의 웃음소리가 하얀 세계를 뒤흔들었다.‘그 아이가 네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니?’검은 가시가 더욱 거세게 세레나를 끌어당겼다. 발밑의 꽃들이 썩어 가며 검게 변했다.라엘은 세레나의 손목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말하지 않아도 돼.”세레나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이름은 내가 찾을게.”‘라엘…… 님.’“그러니까 버텨.”라엘의 몸에서 금빛이 터져 나왔다.가시가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하나를 끊으면 두 개가 돋아났고, 두 개를 끊으면 네 개가 세레나의 영혼을 휘감았다.이곳은 세레나의 내면이었지만 이미 절반 이상 아스테리아의 저주에 잠식되어 있었다. 라엘이 무리하게 힘을 쓰면 세레나의 영혼도 함께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아스테리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해 봐.’검은 눈이 즐겁다는 듯 휘어졌다.‘그 아이를 구하려고 힘을 쓸수록 네가 직접 세레나를 찢게 될 테니.’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가시를 태우던 금빛이 흔들렸다.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박동이 들렸다.쿵.세레나의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라엘의 영혼과 연결된 또 하나의 심장.카시안이었다.‘라엘.’현실에서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하얀 세계까지 닿았다.‘눈을 떠.’은빛 실이 어
검은 장미에서 떨어진 꽃잎 하나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로 변했다.라엘의 가슴에 남은 꽃잎은 세 장.성휘제까지 남은 시간도 사흘이었다.‘꽃잎이 모두 떨어지는 밤, 네 몸은 나의 것이 된다.’아스테리아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라엘의 심장을 파고들던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나 표식은 지워지지 않았다. 검은 장미의 가시는 새로 만들어진 육체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아래로 느리게 뛰는 심장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카시안이 망토 자락을 여며 라엘의 몸을 가렸다.“표식을 옮길 수 있나?”“다른 사람한테?”“내게 돌려놔.”라엘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제 눈에 담은 카시안의 얼굴은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 훨씬 단단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아래로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고, 피가 묻은 얼굴에도 흐트러짐이 거의 없었다.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차갑지 않았다.걱정과 분노, 조금 전 자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느꼈던 두려움까지 감추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싫어.”라엘이 잘라 말했다.“왜지?”“겨우 빼앗아 왔는데 다시 줄 것 같아?”“그건 빼앗은 게 아니라 떠넘겨진 거다.”“결과는 같아. 아스테리아는 이제 너보다 나를 원하고 있어.”“그 사실이 마음에 드나?”“적어도 네 심장을 뽑겠다는 계획은 미뤄졌잖아.”카시안의 표정이 굳었다.“네가 대신 죽는다면 아무 의미 없다.”“죽을 생각 없다니까.”“아까 심장이 멎었다.”“그건 세레나의 몸이고, 지금 나는 멀쩡해.”라엘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자신의 심장이 분명하게 뛰고 있었다. 세레나의 약한 육체를 빌리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박동이었다.그러나 카시안은 안심하지 않았다.“해가 뜨면 이 몸은 사라진다고 했지.”“응.”“그럼 표식은?”라엘의 손이 멎었다.그 부분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표식은 세레나의 육체가 아니라 라엘의 영혼을 따라왔다. 해가 뜬 뒤 임시 육체가 사라져도 저주는 영혼에 남을 가능성이 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