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의 물이 검붉게 물들었다. 맑았던 물 아래에서 짙은 액체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수면 전체를 덮었다. 쇠 냄새가 유리 온실 안으로 퍼졌다. 초대받은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정원사와 시종으로 위장한 기사들은 일제히 무기에 손을 올렸다. 카시안은 단상에서 내려와 라엘에게 다가가려 했다. 라엘이 눈빛으로 그를 막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하르벤은 어딘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정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드러내면 그는 다시 모습을 감출 것이고, 수백 년 된 지하 통로 어딘가로 숨어들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길 수 있었다. 라엘은 드레스 자락을 쥔 채 예정대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카시안의 눈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당장 달려와 품에 감추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그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라엘이 단상 앞에 도착하자 카시안이 손을 내밀었다. “계속할 수 있겠어?”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하르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오직 라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라엘은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어.” “나가면 저 사람이 이겼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 이유로 남을 필요는 없어.”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야.” 라엘의 금빛 눈이 카시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 너랑 결혼하러 왔어.” 카시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푸른 눈에 짙은 감정이 번졌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손을 놓지 마.” “너도.”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단상 위로 올라갔다. 신관도, 신의 상징도 없는 단상이었다. 중앙에는 서약서를 올려놓을 작은 탁자만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루시안이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서약서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발아래에서 전해지는 검은 종의 진동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라엘은 그의 붕대 감긴 손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Last Updated : 2026-09-27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