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Chapter 41 - Chapter 50

55 Chapters

명령을 기다리지 마

댕―.댕―.댕―.열네 개의 종이 수도 전역에서 같은 간격으로 울렸다. 서로 다른 크기와 음색을 지닌 종들이었지만 이상할 만큼 하나의 소리처럼 겹쳤다. 성벽과 지붕, 좁은 골목 사이를 파고든 진동이 황궁의 유리창까지 떨게 했다.복도 끝에서 무릎을 꿇은 병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명령을 기다립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명령을…….”그의 동료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붙잡으려 하자 병사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사라진 눈이 라엘을 향했다. 그는 허리에 찬 검을 뽑으며 몸을 일으켰다.“가짜 성녀를 제거하라.”칼날이 번뜩였다.카시안이 라엘의 앞을 막아서는 것과 데미안이 병사의 손목을 쳐 내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검이 바닥을 긁으며 멀리 미끄러졌지만 병사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듯 맨손으로 달려들었다. 데미안은 그의 목을 치는 대신 팔을 비틀어 등 뒤로 꺾었다. 병사가 거세게 몸부림치자 기사 두 명이 더 달라붙어 겨우 바닥에 눌렀다.“정신 차려!”“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놓아라. 가짜 성녀를 죽여야…….”라엘은 벽에서 손을 떼고 그에게 다가갔다. 독기운이 남은 다리가 휘청였지만 멈추지 않았다.카시안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가까이 가지 마.”“이름을 확인해야 해.”“지금 널 죽이려 했다.”“저 병사의 의지가 아니야.”라엘은 카시안의 팔 안에서 병사의 제복을 살폈다. 가슴에 작은 나무패가 달려 있었다. 황궁에 근무하는 하급 병사의 이름을 새긴 표식이었다.“테온.”병사의 몸부림이 순간적으로 멈췄다.라엘이 다시 불렀다.“테온, 네 이름은 테온이야.”“명령을…….”“누구의 명령을 기다리는데?”병사의 입술이 떨렸다.“종이 울리면…… 명령을 기다려야…….”“그 종은 네 주인이 아니야.”라엘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카시안이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병사와 시선을 맞출 수 있는 높이까지 몸을 낮췄다.“네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지?”“지하…… 제단…….”“아니야. 바닥을 봐. 지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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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루시안의 보고가 끝나자 지휘실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탁자 위 초대장으로 향했다. 리아나의 무덤 앞에 두고 온 봉투에는 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모서리에는 들꽃의 흰 꽃잎 하나가 구겨진 채 남아 있었다.하르벤은 리아나의 무덤에서 초대장을 가져갔다.그것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었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안에 적힌 장소였다.황궁의 작은 유리 온실.카시안과 라엘이 혼인식 장소로 정한 곳이었다. 두 사람은 정식 초대장에도 장소를 적지 않았고, 의례부에도 후보지만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유리 온실을 실제 장소로 결정한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데미안이 물었다.“나와 라엘뿐이다.”카시안의 대답과 함께 방 안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곁에 있던 대신들과 기사들의 얼굴에 경계가 떠올랐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라면 황제와 라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해야 했다.데미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두 분께서 장소를 정하실 때 방 안에 시종이나 시녀는 없었습니까?”“없었다.”“문밖을 지키던 사람은요?”“호위 기사 둘과 시종 한 명이 있었다.”“세 사람을 격리하고 조사하겠습니다.”“그들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라엘은 루시안의 손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하의 중앙 사슬을 붙잡았던 손은 손바닥부터 손가락까지 깊게 찢어져 있었다. 왼쪽 어깨도 쇠사슬에 스쳐 붕대를 감았지만, 그는 치료가 끝나자마자 초대장을 들고 지휘실로 왔다.“하르벤은 우리가 유리 온실을 실제 장소로 정한 것까지 알아. 문밖에서 대충 들은 것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내용이야.”라엘은 카시안을 돌아보았다.“우리가 그 이야기를 어디서 했지?”카시안의 눈빛이 멈췄다.“침실.”두 사람은 리아나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밤, 황제의 침실에서 결혼식 장소를 정했다. 창밖으로 황궁 서쪽의 작은 온실이 보였고, 라엘이 저 정도 크기라면 초대받은 사람만 모이기에 충분하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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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 없는 결혼식

분수의 물이 검붉게 물들었다. 맑았던 물 아래에서 짙은 액체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수면 전체를 덮었다. 쇠 냄새가 유리 온실 안으로 퍼졌다. 초대받은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정원사와 시종으로 위장한 기사들은 일제히 무기에 손을 올렸다. 카시안은 단상에서 내려와 라엘에게 다가가려 했다. 라엘이 눈빛으로 그를 막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하르벤은 어딘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정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드러내면 그는 다시 모습을 감출 것이고, 수백 년 된 지하 통로 어딘가로 숨어들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길 수 있었다. 라엘은 드레스 자락을 쥔 채 예정대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카시안의 눈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당장 달려와 품에 감추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그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라엘이 단상 앞에 도착하자 카시안이 손을 내밀었다. “계속할 수 있겠어?”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하르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오직 라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라엘은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어.” “나가면 저 사람이 이겼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 이유로 남을 필요는 없어.”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야.” 라엘의 금빛 눈이 카시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 너랑 결혼하러 왔어.” 카시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푸른 눈에 짙은 감정이 번졌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손을 놓지 마.” “너도.”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단상 위로 올라갔다. 신관도, 신의 상징도 없는 단상이었다. 중앙에는 서약서를 올려놓을 작은 탁자만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루시안이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서약서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발아래에서 전해지는 검은 종의 진동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라엘은 그의 붕대 감긴 손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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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곁에서 잠드는 법

철컥.문이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라엘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푸른 눈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수많은 사람 앞에서 황제의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는 이제 없었다. 남은 것은 그녀의 남편이 된 한 남자뿐이었다.카시안이 천천히 다가왔다.한 걸음.그리고 또 한 걸음.라엘은 피하지 않았다.그의 손이 뺨 가까이 다가오다가 멈췄다. 손끝과 피부 사이에는 고작 손가락 하나만 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후회하나?”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라엘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 질문, 오늘만 벌써 세 번째야.”“세 번으로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그럼 내가 몇 번 대답해야 믿을 건데?”“네가 질릴 때까지.”라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멈춰 있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 위에 얹었다. 따뜻한 손바닥이 닿자 그제야 카시안의 숨이 조금 흐트러졌다.“후회하지 않아.”“라엘.”“그리고 앞으로 내게 닿고 싶을 때마다 죄를 고백하는 얼굴부터 하는 것도 금지야.”“……그건 명령인가?”“아니.”그녀가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살짝 눌렀다.“아내의 부탁.”푸른 눈동자가 짙게 흔들렸다.카시안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결혼식에서 나누었던 입맞춤과는 달랐다. 사람들의 시선도, 지켜야 할 예법도 없었다. 처음에는 확인하듯 가볍게 닿았던 입술이 이내 조금 더 깊어졌다.라엘의 손이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카시안은 그 작은 반응에도 곧바로 멈췄다.“아픈가?”“아니.”“불편하면 말해.”“카시안.”“응.”“한 번만 더 멈추면 내가 먼저 침대로 끌고 갈 거야.”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의 진동이 맞닿은 가슴을 통해 전해졌다.“그것도 나쁘지 않은데.”이번에는 라엘이 먼저 그의 입술을 당겼다.뒤꿈치를 들고 목에 팔을 감자 카시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가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완전히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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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하지 않은 재판

하르벤의 공개재판이 열리기 전날 밤, 황후의 침실에는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침대 위에는 두 사람이 누울 자리보다 더 많은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북쪽 공동묘지에서 수습된 스물아홉 구의 유해에 관한 기록, 동쪽 수도원 지하에서 구조된 생존자 세 명의 진술서, 황궁의 도청실과 유리 온실에서 발견된 장부까지. 라엘은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명부를 한 장씩 대조했다. 옆에 누운 카시안은 그녀가 읽은 기록에 황제의 확인 인장을 찍었다.“셀레나 로웰. 열아홉 살. 재봉사.”라엘이 이름을 읽자 카시안이 유해 확인서에서 같은 이름을 찾아 표시했다.“신원 확인 완료. 남동쪽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야. 유족은?”“어머니와 남동생이 살아 있어. 내일 재판에도 참석하겠다고 했어.”“장례 비용은 피해자 기금에서 지급하고.”“유족이 원하면 아스테리아에게 몰수한 재산에서 먼저 지급해. 그 여자의 젊음을 유지하는 데 가장 오래 피를 빼앗긴 사람이니까.”카시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기록을 집으려던 라엘의 손 위로 그의 손이 겹쳐졌다. 따뜻한 손가락이 서류를 덮었다.“이제 자.”“세 명 남았어.”“한 시간 전에는 다섯 명 남았다고 했지.”“그러니까 두 명이나 끝냈잖아.”“그 속도면 동이 틀 때까지 끝나지 않아.”라엘은 서류를 놓지 않은 채 그를 흘겨보았다. 느슨하게 풀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단정하지 않은 셔츠 차림이 며칠 전까지 황제의 침실에 홀로 잠들던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결혼 후 카시안은 약속대로 황후의 방에 머물렀지만, 첫날 이후로는 정말 얌전히 잠만 잤다. 그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문제는 얌전히 누워 있기만 하는 남자가 밤마다 라엘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잠든다는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뿐, 아무것도 느끼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아니었다.라엘이 그의 손을 밀어냈다.“먼저 자.”“내가 먼저 잠들면 또 새벽까지 읽을 거잖아.”“안 그래.”“어제도 그 말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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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을 지운 나라

새로운 국호를 적어야 할 문서의 첫 줄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회의실에 모인 대신들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하르벤의 판결을 논하던 사람들 사이에는 적어도 명확한 적이 있었다. 사람을 납치하고 죽인 범죄자, 신의 이름으로 피를 요구한 교단. 그러나 지금 카시안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문제는 그보다 훨씬 오래되고 거대했다.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황제의 머리 위에 씌워진 왕관.수백 년 동안 법보다 높은 곳에 놓여 있던 신의 권위.카시안은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왕관에서 손을 뗀 채 대신들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황실 재무대신이었다.“폐하, 하르벤의 범죄와 황권의 정통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어떻게 다르지?”“백관은 신앙을 악용한 범죄 집단입니다. 그들이 신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해서 진정한 신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진정한 신성을 누가 증명하지?”재무대신의 입이 다물렸다.카시안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선대 황제인가? 성녀인가? 대신전인가? 셋 모두 아스테리아의 범죄를 알고도 침묵했거나 이용당했다. 그런데 그들이 내게 신에게 선택받은 피가 흐른다고 선언하면 그 말만은 진실이 되는 건가?”“그것은 오랜 전통이며 제국을 하나로 묶어온 믿음입니다.”“믿음이 아니라 거래였겠지.”카시안의 시선이 회의실 안을 천천히 훑었다.“황제가 신성하다는 거짓말을 유지하는 대신 신전은 세금을 면제받았고, 귀족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영지를 세습했다. 백성들은 정해진 질서에 복종하면 신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 배웠다. 그러나 그 보호가 필요했던 순간 신은 오지 않았다.”다른 대신이 급히 일어났다.“폐하께서 직접 기적을 보지 못하셨다고 해서 신의 존재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나는 신의 존재를 논하는 게 아니다.”카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신이 존재하든 말든, 인간이 저지른 일을 신의 뜻이라 부르지 않겠다는 거다.”반박하려던 대신의 입술이 굳었다.라엘은 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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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가 궁을 떠나겠다고 했다

대신전의 종이 새로운 아침을 알린 지 사흘 만에, 라엘을 성녀로 추대해달라는 청원서가 천 장을 넘었다.황후 집무실 책상 위에는 지역별로 묶인 청원서가 작은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아스테리아와 백관이 무너지고 세레나가 공식적인 성녀의 권위를 내려놓자, 불안해진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의 중심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천족의 힘을 버리고 인간이 된 라엘이었다.라엘은 청원서 첫 장을 읽다가 이마를 짚었다.“살아 있는 빛의 성녀 라엘께서 신성한 왕관을 쓰고 제국의 앞날을 축복해주시기를 청원한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화나셨어요?”“조금.”“사람들이 나쁜 뜻으로 쓴 건 아닐 거예요.”“알아. 그래서 더 곤란해.”라엘은 청원서를 내려놓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옛 대신전의 첨탑에는 더 이상 성녀의 깃발이 걸려 있지 않았다. 태양 문양과 흰 왕관을 새긴 깃발이 내려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자유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버려졌다고 느꼈다.신의 이름 아래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하는 법을 배워본 적 없는 이들은 또 다른 성녀와 또 다른 왕관을 원했다.에린이 두 번째 청원서를 펼쳤다.“이곳에서는 황후 폐하께서 하르벤의 종을 침묵시키신 일이 기적이라고 적었어요.”“종을 멈춘 건 루시안이야.”“세 번째 청원서는 폐하께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직접 보셨다고…….”“그건 부정하기 어렵네.”“네 번째에는 천족이셨던 폐하만이 진짜 신의 뜻을 아신다고 쓰여 있어요.”라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게 가장 위험한 말이야.”에린이 눈을 깜빡였다.라엘은 네 번째 청원서를 집어 들었다. 양피지 아래에는 작은 마을 주민 백여 명의 지장이 찍혀 있었다.“내가 신의 뜻을 안다고 믿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내 말을 의심하지 않게 돼. 내가 틀려도 따르겠지. 아스테리아도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성녀가 됐을 거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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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아니라 조사관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 작아 숨소리와 구분하기 어려웠다.라엘은 열린 바닥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곁에 있던 성기사가 등불을 아래로 내리려 하자 손을 들어 막았다. 갑자기 빛을 비추면 지하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 수 있었다.“그래. 조사관이야.”라엘은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말했다.“백관 피해조사위원회에서 왔어.”어둠 속에서 마른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그 사람들도……처음에는 조사관이라고 했어요.”라엘의 눈빛이 굳었다.구호원장과 경비대장이 신분을 속여 피해자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다는 뜻이었다. 구조하러 왔다는 말을 쉽게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라엘은 허리에서 은빛 신분패를 풀었다.“이걸 아래로 내려보낼게. 잡으려고 따라 내려가지는 않을 거야.”그녀는 신분패에 가느다란 줄을 묶어 천천히 지하로 내렸다. 금속이 돌바닥에 닿는 작은 소리가 난 뒤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잠시 후 무언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누군가 기어서 가까이 오고 있었다.줄이 살짝 당겨졌다. 라엘은 손에서 힘을 빼 신분패를 완전히 놓아주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은빛 표식 위에 아주 희미한 빛이 반사됐다.“황실 문장이 있어요.”“임시국호가 정해지기 전에 만든 거라 그래. 하지만 황실 조사단은 아니야. 황제가 아니라 위원회가 나를 보냈어.”“황후가 왔다고 들었는데…….”목소리가 조금 가까워졌다.“황후도 맞아.”지하가 다시 조용해졌다.라엘은 자신이 한 대답이 오히려 불신을 키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분을 숨기고 평범한 조사관인 척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사실을 말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지만,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황후는 안전보다 더 큰 권력을 의미할 수 있었다.“하지만 너희를 궁으로 데려가려고 온 건 아니야.”라엘은 열린 바닥문 가장자리에 손을 올렸다.“나오고 싶다면 나오는 걸 돕고, 아직 나오고 싶지 않다면 음식과 물부터 내려보낼게. 어디로 갈지도 너희가 정할 수 있어. 수도의 보호소, 다른 지역의 치료소, 원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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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자리

구조가 끝났다고 해서 조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벨루아의 아침은 분주했다. 구호원장은 지하 감금과 납치, 살인 미수 혐의로 임시 구금소에 갇혔고, 경비대장은 조사를 받기도 전에 자신이 가진 장부의 위치부터 실토했다. 마을 회계관과 치안관, 구호원에 물자를 공급하던 상인까지 모두 같은 장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백관이 몰락한 뒤 그들은 신앙을 버렸지만, 범죄까지 버리지는 않았다.보호소 운영비로 지급된 돈을 빼돌리고, 돌아갈 곳 없는 피해자들을 다른 지역의 불법 노동장에 팔아넘겼다. 신전의 명령이라고 둘러댔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돈이 목적이었다.라엘은 마을 관청의 문을 봉인한 뒤 관련 장부를 전부 압수했다. 벨루아의 치안권은 인근 도시에서 파견된 임시 관리관에게 넘기고, 구호원 수색에 참여했던 지역 경비대원들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직무에서 배제했다.“이번 일은 백관의 범죄로만 기록하면 안 돼.”라엘이 조사관들에게 말했다.“구호원장은 흰 관의 신도였지만, 함께 장부를 조작한 사람들 가운데 절반은 신도조차 아니었어.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범죄야.”한 조사관이 기록하다가 고개를 들었다.“백관의 잔당 사건과 분리하라는 말씀이십니까?”“응. 전부 사교의 영향이라고 적으면 다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신앙 문제만 찾게 돼. 이 사람들은 권한을 감시할 사람이 없었고, 돈의 흐름을 확인하는 절차도 없어서 범죄를 계속할 수 있었어.”“그러면 보호시설 전체를 조사해야 합니다.”“그래야지.”“제국 전역에 등록된 곳만 백스물세 곳입니다.”“오늘부터 시작해.”조사관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곧 단단해졌다.“알겠습니다.”라엘은 압수 목록 아래에 서명하려다가 붕대를 감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화상은 심하지 않았지만 손바닥을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당겼다. 결국 펜을 왼손으로 옮겨 서툰 글씨로 이름을 적었다.끝 글자가 옆으로 길게 기울어졌다.맞은편에 있던 데미안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황제 폐하께서 서명을 알아보시겠습니까?”“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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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의 법안은 부결되었습니다

제국민 권리조사원 설립안은 첫 번째 표결에서 부결됐다.찬성 스물여덟.반대 서른하나.기권 아홉.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회의장 안이 크게 술렁였다. 귀족원 쪽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시민 대표석에서는 노골적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몇몇 사람은 재표결을 요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귀족들에게 결정권을 준 것이 잘못이었다고 소리쳤다.라엘은 발언대 앞에 선 채 표결판을 바라보았다.법안이 부결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원에서 반대 의견이 쏟아질 것이라 예상했고, 각 지역 대표를 직접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그러나 표결 결과를 눈앞에서 확인하자 속이 서늘해졌다.반대표를 던진 사람 중에는 며칠 전까지 설립안에 찬성하겠다고 약속한 시민 대표도 있었다. 찬성표를 던진 귀족도 예상보다 많았지만, 법안을 통과시키기에는 세 표가 부족했다.의장이 망치를 두드렸다.“정숙하십시오. 제국민 권리조사원 설립안은 의결 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했으므로 부결되었습니다.”“피해자를 보호할 기관을 만들자는 법안입니다!”서부 노동자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귀족원의 허가가 없으면 귀족을 조사할 수 없는 지금의 제도로 무엇을 바꾸겠다는 겁니까?”맞은편에 있던 북부 후작이 즉시 반박했다.“황후 폐하께서 지휘하는 조사기관이 황실과 무관하다고 믿으라는 말입니까? 황제의 배우자가 원장이 되어 제국 전역의 귀족을 소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황권의 확대입니다.”“설립안 어디에도 황후 폐하께서 원장이 된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모두가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후작의 말에 회의장 곳곳에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라엘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동안 제국민 권리조사원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라엘이 원장을 맡으리라 생각했다. 백관 피해조사위원회를 이끈 경험이 있고, 벨루아 사건까지 해결했으니 당연하다고 여겼다.라엘 역시 그것을 분명하게 부정하지 않았다.원장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책임지는 편이 빠르다고 생각했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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