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신전의 종이 새로운 아침을 알린 지 사흘 만에, 라엘을 성녀로 추대해달라는 청원서가 천 장을 넘었다.황후 집무실 책상 위에는 지역별로 묶인 청원서가 작은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아스테리아와 백관이 무너지고 세레나가 공식적인 성녀의 권위를 내려놓자, 불안해진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의 중심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천족의 힘을 버리고 인간이 된 라엘이었다.라엘은 청원서 첫 장을 읽다가 이마를 짚었다.“살아 있는 빛의 성녀 라엘께서 신성한 왕관을 쓰고 제국의 앞날을 축복해주시기를 청원한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화나셨어요?”“조금.”“사람들이 나쁜 뜻으로 쓴 건 아닐 거예요.”“알아. 그래서 더 곤란해.”라엘은 청원서를 내려놓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옛 대신전의 첨탑에는 더 이상 성녀의 깃발이 걸려 있지 않았다. 태양 문양과 흰 왕관을 새긴 깃발이 내려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자유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버려졌다고 느꼈다.신의 이름 아래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하는 법을 배워본 적 없는 이들은 또 다른 성녀와 또 다른 왕관을 원했다.에린이 두 번째 청원서를 펼쳤다.“이곳에서는 황후 폐하께서 하르벤의 종을 침묵시키신 일이 기적이라고 적었어요.”“종을 멈춘 건 루시안이야.”“세 번째 청원서는 폐하께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직접 보셨다고…….”“그건 부정하기 어렵네.”“네 번째에는 천족이셨던 폐하만이 진짜 신의 뜻을 아신다고 쓰여 있어요.”라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게 가장 위험한 말이야.”에린이 눈을 깜빡였다.라엘은 네 번째 청원서를 집어 들었다. 양피지 아래에는 작은 마을 주민 백여 명의 지장이 찍혀 있었다.“내가 신의 뜻을 안다고 믿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내 말을 의심하지 않게 돼. 내가 틀려도 따르겠지. 아스테리아도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성녀가 됐을 거야.”“
새로운 국호를 적어야 할 문서의 첫 줄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회의실에 모인 대신들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하르벤의 판결을 논하던 사람들 사이에는 적어도 명확한 적이 있었다. 사람을 납치하고 죽인 범죄자, 신의 이름으로 피를 요구한 교단. 그러나 지금 카시안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문제는 그보다 훨씬 오래되고 거대했다.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황제의 머리 위에 씌워진 왕관.수백 년 동안 법보다 높은 곳에 놓여 있던 신의 권위.카시안은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왕관에서 손을 뗀 채 대신들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황실 재무대신이었다.“폐하, 하르벤의 범죄와 황권의 정통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어떻게 다르지?”“백관은 신앙을 악용한 범죄 집단입니다. 그들이 신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해서 진정한 신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진정한 신성을 누가 증명하지?”재무대신의 입이 다물렸다.카시안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선대 황제인가? 성녀인가? 대신전인가? 셋 모두 아스테리아의 범죄를 알고도 침묵했거나 이용당했다. 그런데 그들이 내게 신에게 선택받은 피가 흐른다고 선언하면 그 말만은 진실이 되는 건가?”“그것은 오랜 전통이며 제국을 하나로 묶어온 믿음입니다.”“믿음이 아니라 거래였겠지.”카시안의 시선이 회의실 안을 천천히 훑었다.“황제가 신성하다는 거짓말을 유지하는 대신 신전은 세금을 면제받았고, 귀족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영지를 세습했다. 백성들은 정해진 질서에 복종하면 신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 배웠다. 그러나 그 보호가 필요했던 순간 신은 오지 않았다.”다른 대신이 급히 일어났다.“폐하께서 직접 기적을 보지 못하셨다고 해서 신의 존재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나는 신의 존재를 논하는 게 아니다.”카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신이 존재하든 말든, 인간이 저지른 일을 신의 뜻이라 부르지 않겠다는 거다.”반박하려던 대신의 입술이 굳었다.라엘은 카
하르벤의 공개재판이 열리기 전날 밤, 황후의 침실에는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침대 위에는 두 사람이 누울 자리보다 더 많은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북쪽 공동묘지에서 수습된 스물아홉 구의 유해에 관한 기록, 동쪽 수도원 지하에서 구조된 생존자 세 명의 진술서, 황궁의 도청실과 유리 온실에서 발견된 장부까지. 라엘은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명부를 한 장씩 대조했다. 옆에 누운 카시안은 그녀가 읽은 기록에 황제의 확인 인장을 찍었다.“셀레나 로웰. 열아홉 살. 재봉사.”라엘이 이름을 읽자 카시안이 유해 확인서에서 같은 이름을 찾아 표시했다.“신원 확인 완료. 남동쪽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야. 유족은?”“어머니와 남동생이 살아 있어. 내일 재판에도 참석하겠다고 했어.”“장례 비용은 피해자 기금에서 지급하고.”“유족이 원하면 아스테리아에게 몰수한 재산에서 먼저 지급해. 그 여자의 젊음을 유지하는 데 가장 오래 피를 빼앗긴 사람이니까.”카시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기록을 집으려던 라엘의 손 위로 그의 손이 겹쳐졌다. 따뜻한 손가락이 서류를 덮었다.“이제 자.”“세 명 남았어.”“한 시간 전에는 다섯 명 남았다고 했지.”“그러니까 두 명이나 끝냈잖아.”“그 속도면 동이 틀 때까지 끝나지 않아.”라엘은 서류를 놓지 않은 채 그를 흘겨보았다. 느슨하게 풀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단정하지 않은 셔츠 차림이 며칠 전까지 황제의 침실에 홀로 잠들던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결혼 후 카시안은 약속대로 황후의 방에 머물렀지만, 첫날 이후로는 정말 얌전히 잠만 잤다. 그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문제는 얌전히 누워 있기만 하는 남자가 밤마다 라엘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잠든다는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뿐, 아무것도 느끼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아니었다.라엘이 그의 손을 밀어냈다.“먼저 자.”“내가 먼저 잠들면 또 새벽까지 읽을 거잖아.”“안 그래.”“어제도 그 말을
철컥.문이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라엘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푸른 눈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수많은 사람 앞에서 황제의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는 이제 없었다. 남은 것은 그녀의 남편이 된 한 남자뿐이었다.카시안이 천천히 다가왔다.한 걸음.그리고 또 한 걸음.라엘은 피하지 않았다.그의 손이 뺨 가까이 다가오다가 멈췄다. 손끝과 피부 사이에는 고작 손가락 하나만 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후회하나?”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라엘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 질문, 오늘만 벌써 세 번째야.”“세 번으로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그럼 내가 몇 번 대답해야 믿을 건데?”“네가 질릴 때까지.”라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멈춰 있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 위에 얹었다. 따뜻한 손바닥이 닿자 그제야 카시안의 숨이 조금 흐트러졌다.“후회하지 않아.”“라엘.”“그리고 앞으로 내게 닿고 싶을 때마다 죄를 고백하는 얼굴부터 하는 것도 금지야.”“……그건 명령인가?”“아니.”그녀가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살짝 눌렀다.“아내의 부탁.”푸른 눈동자가 짙게 흔들렸다.카시안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결혼식에서 나누었던 입맞춤과는 달랐다. 사람들의 시선도, 지켜야 할 예법도 없었다. 처음에는 확인하듯 가볍게 닿았던 입술이 이내 조금 더 깊어졌다.라엘의 손이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카시안은 그 작은 반응에도 곧바로 멈췄다.“아픈가?”“아니.”“불편하면 말해.”“카시안.”“응.”“한 번만 더 멈추면 내가 먼저 침대로 끌고 갈 거야.”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의 진동이 맞닿은 가슴을 통해 전해졌다.“그것도 나쁘지 않은데.”이번에는 라엘이 먼저 그의 입술을 당겼다.뒤꿈치를 들고 목에 팔을 감자 카시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가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완전히 사
분수의 물이 검붉게 물들었다. 맑았던 물 아래에서 짙은 액체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수면 전체를 덮었다. 쇠 냄새가 유리 온실 안으로 퍼졌다. 초대받은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정원사와 시종으로 위장한 기사들은 일제히 무기에 손을 올렸다. 카시안은 단상에서 내려와 라엘에게 다가가려 했다. 라엘이 눈빛으로 그를 막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하르벤은 어딘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정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드러내면 그는 다시 모습을 감출 것이고, 수백 년 된 지하 통로 어딘가로 숨어들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길 수 있었다. 라엘은 드레스 자락을 쥔 채 예정대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카시안의 눈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당장 달려와 품에 감추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그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라엘이 단상 앞에 도착하자 카시안이 손을 내밀었다. “계속할 수 있겠어?”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하르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오직 라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라엘은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어.” “나가면 저 사람이 이겼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 이유로 남을 필요는 없어.”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야.” 라엘의 금빛 눈이 카시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 너랑 결혼하러 왔어.” 카시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푸른 눈에 짙은 감정이 번졌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손을 놓지 마.” “너도.”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단상 위로 올라갔다. 신관도, 신의 상징도 없는 단상이었다. 중앙에는 서약서를 올려놓을 작은 탁자만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루시안이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서약서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발아래에서 전해지는 검은 종의 진동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라엘은 그의 붕대 감긴 손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루시안의 보고가 끝나자 지휘실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탁자 위 초대장으로 향했다. 리아나의 무덤 앞에 두고 온 봉투에는 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모서리에는 들꽃의 흰 꽃잎 하나가 구겨진 채 남아 있었다.하르벤은 리아나의 무덤에서 초대장을 가져갔다.그것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었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안에 적힌 장소였다.황궁의 작은 유리 온실.카시안과 라엘이 혼인식 장소로 정한 곳이었다. 두 사람은 정식 초대장에도 장소를 적지 않았고, 의례부에도 후보지만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유리 온실을 실제 장소로 결정한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데미안이 물었다.“나와 라엘뿐이다.”카시안의 대답과 함께 방 안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곁에 있던 대신들과 기사들의 얼굴에 경계가 떠올랐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라면 황제와 라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해야 했다.데미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두 분께서 장소를 정하실 때 방 안에 시종이나 시녀는 없었습니까?”“없었다.”“문밖을 지키던 사람은요?”“호위 기사 둘과 시종 한 명이 있었다.”“세 사람을 격리하고 조사하겠습니다.”“그들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라엘은 루시안의 손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하의 중앙 사슬을 붙잡았던 손은 손바닥부터 손가락까지 깊게 찢어져 있었다. 왼쪽 어깨도 쇠사슬에 스쳐 붕대를 감았지만, 그는 치료가 끝나자마자 초대장을 들고 지휘실로 왔다.“하르벤은 우리가 유리 온실을 실제 장소로 정한 것까지 알아. 문밖에서 대충 들은 것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내용이야.”라엘은 카시안을 돌아보았다.“우리가 그 이야기를 어디서 했지?”카시안의 눈빛이 멈췄다.“침실.”두 사람은 리아나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밤, 황제의 침실에서 결혼식 장소를 정했다. 창밖으로 황궁 서쪽의 작은 온실이 보였고, 라엘이 저 정도 크기라면 초대받은 사람만 모이기에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