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은 카페에 갈 일을 만들지 않았다. 공사 진행 사진은 소장이 보내줬고, 자재 확인도 전화로 끝냈다.
그런데 오후 다섯 시가 넘어 거래처에서 생두 배달 완료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테스트 배전이라도 해놓아야 다음 날 상태를 볼 수 있었다. 결국 밤 아홉 시가 다 되어 카페로 향했다. 이 시간이면 아무도 없겠지.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현장 사람들은 모두 퇴근한 뒤였다. 카페 안은 낮과 달리 고요했다. 혜진은 뒤편 로스팅실에 불을 켰다. 생두를 덜어 로스터에 넣었다.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뒤 열을 받은 원두 특유의 냄새가 천천히 공간을 채웠다. 그때였다. 사각. 혜진의 손이 멈췄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사각. 다시. 2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혜진은 로스팅실을 나와 위층으로 올라갔다. 희미하게 켜진 작업등 아래 사람이 있었다. 이태오. 바닥에는 완성 직전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태오는 혼자 테이블 모서리를 다듬고 있었다. “뭐 해요?”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혜진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왜 왔어요?”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태오가 손에 묻은 나무 가루를 털었다. “이거 끝내려고요.” “내일 하면 되잖아요.” 태오가 사포를 내려놓았다. “나 내일부터 안 나와요.” “……왜?” 생각보다 대답이 빨리 튀어나왔다. “다른 현장 잡혔어요.” “갑자기?” “거긴 일당 더 줘요.” 별것 아니라는 말투였다. 혜진은 완성되어가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래서 이걸 오늘 끝내려고?” “내가 시작했으니까.” “다른 사람이 해도 되잖아.” “싫어서.” “뭐가?” 태오가 손바닥으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한번 쓸었다. “내가 하던 걸 다른 사람이 마무리하는 거.” 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묘하게 그다운 대답이었다. “몇 시까지 하려고 했는데?” “끝날 때까지.” “돈 더 주는 것도 아니잖아.” “돈 때문에 하는 거 아니에요.” 태오가 다시 사포를 들었다. 사각, 사각. 혜진은 그 옆에 서 있었다. “내일부터 진짜 안 와요?” 태오의 손이 멈췄다. “아쉬워요?” “또 시작이네.” “대답은 안 하시고.” “돈 더 준다는데 가야지.” “그렇죠.” 사각. 다시 소리가 났다. 그런데 조금 전보다 신경 쓰였다. 혜진은 돌아서 로스팅실로 다시 가려고 계단을 내려갔다. “커피 마실래요?” 뒤에서 대답이 왔다. “네.” “뭐로.” “윤혜진 씨가 마시는 걸로.” 혜진은 멈칫했다. 이제는 고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열한 시가 가까워졌을 때 테이블이 완성됐다. 긁힌 자국 몇 개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전혀 다른 물건이 되어 있었다. 혜진은 손바닥으로 상판을 쓸었다. 매끄러웠다. “마음에 들어요?” “응.” “다행이네.” 태오는 공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혜진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다음 현장은 어디인데?” “왜요?” “그냥.” “또 그냥.” 태오가 웃었다. “혜진 씨는 궁금한 게 많네.” 처음이었다. 윤혜진 씨도 아니고, 사장님도 아니었다. 혜진 씨. 혜진이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누가 그렇게 부르래?” 태오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부터 안 보잖아요.” “그래서?” “오늘까지만.” “뭐가.” “내 마음대로 부르게요.”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볶은 원두 냄새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혜진은 태오를 바라봤다. 스물한 살. 자기 아들과 불과 두 살 차이. 남편이 있는 자신과는 아무 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남자. 그런데 내일부터는 만나지 않는다. 그 생각이 이상한 면죄부처럼 느껴졌다. “이태오.” “네.” “너 아까부터 선 넘는 거 알아?” 태오가 잠시 혜진을 바라봤다. “알아요.” “아는데 그래?” “오늘이 마지막이라서.” 그 한마디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태오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혜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가라고 하면 갈게요.” “…….” “지금.” 조금 전까지 나무를 만지던 손이 혜진의 얼굴 가까이 올라왔다가 멈췄다. 닿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 “가요?” 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오가 기다렸다. 그게 오히려 비겁했다. 선택을 자신에게 넘기고 있었다. 혜원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거친 피부가 손바닥에 닿았다. 어젯밤 자신을 만졌던 남편의 손과 전혀 달랐다. 부드럽고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 그리고 지금 자신의 손안에 잡혀 있는, 굳은살투성이의 손. 혜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딱 오늘까지야.” 태오의 눈이 달라졌다. “뭐가요?” “모르는 척하지 마.” 잠깐의 침묵. 태오가 낮게 물었다. “후회 안 해요?” 혜진은 대답 대신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입술이 부딪쳤다. 처음부터 부드러운 키스는 아니었다. 이틀 동안 서로 모른 척했던 시선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처럼 거칠었다. 태오의 손이 혜진의 허리에 닿았다. 몇 번이나 바라봤던 손. 혜진은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궁금했던 것은 그의 손이 아니었다. 그 손이 자신에게 닿으면 어떤 느낌일지, 그게 궁금했던 거였다. “혜진 씨.” 입술이 떨어진 순간 태오가 이름을 불렀다. 혜진 눈을 감았다. “말하지 마.” “왜요.” “그냥.” 다시 입술이 닿았다.“알아요.” “아니. 제대로 들어.” 혜진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아무리 원해도, 나는 내 가정을 버리지 않아.” — 넌 잃을 것이 없잖아. 순간 혜진은 흠칫했다. 태오의 상황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있었구나. 태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한테는 남편도 있고, 가족도 있고, 돌아갈 집도 있으니까.” “태오야.”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그곳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데. 태오의 머릿속에 정우와 수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두 사람. 실체도 없는 신기루를 움켜쥔 채, 그것을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인 양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태오에게는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는 자신이 정해 놓은 선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남편과의 생활도, 태오와의 관계도.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느 쪽에도 상처 입지 않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작 그 선을 가장 자주 넘나드는 사람은 혜진 자신이면서. 제 뜻대로 관계를 끌고 가려 하면서도 끝내 자신을 놓지 못하는 모습이, 태오에게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는요?” 태오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당신을 잃으면 뭘 남겨야 하는데요?” 혜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당신이 원할 때만 만나고, 남편 앞에서는 아무 사이도 아닌 척하고, 그러다 당신이 그만하자고 하면 그만두는 거?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예요?” 혜진은 폐부를 찔린 기분이었다. “알겠어요.” 태오가 의자를 뒤로 밀었다. 혜진은 뜻밖의 반응에 그를 바라보았다. “뭘 알겠다는 거야?” “당신이 뭘 원하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정우 씨 앞에서 그런 말 안 할게요. 곤란하게 만드는 일도 없을 거예요.” 혜진은 안도해야 했다.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었으니까. 그런데 태오가 돌아서자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태오야.”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럼 우리…….” 혜진은 말을 끝맺지
어느 순간부터 편지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보고 싶다는 말이 부쩍 많아졌다. 그런데도 수연은 좀처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다녀왔는지, 길을 걷다가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태준이 생각났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날짜 사이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지유는 편지 한 장을 내려놓고 다음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두 통에 이르렀을 때, 잠시 숨을 멈췄다. 짧은 문장이었다. 지유는 그 아래를 읽었다. 수연은 앞으로 어디에서 지낼지,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태준을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마지막 편지는 유독 짧았다. 지유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태오. 왜 하필 그 이름이었을까. 편지에는 수연이 실제로 임신했는지 알 만한 내용이 없었다. 다만 편지들이 끝을 향해 갈수록 수연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태준은 답장은 물론 수연의 모든 연락을 차단했던 거 같았다. 수연의 편지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 말을 건네는 사람의 쓸쓸함이 짙게 배어 나왔다. 지유는 마지막 편지를 내려놓았다. 편지 속 글자 한 획 한 획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 — 태오. 지유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그리고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태오. 레스토랑에서 늘 마주치는 그 얼굴이었다. 지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멀쩡히 가족이 있는데. — 설마. 그녀는 다시 폴라로이드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 수연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 [고객님이 지금 전화를 받으실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몇 번째 전화인지도 모르겠다. 혜진은 자신의 전화뿐만 아니라, 문자까지 모두 외면 중이
지유는 태준의 커다란 티셔츠 한 장을 걸친 채 서재에 앉아 있었다. 벽과 천장, 책장까지 온통 나무로 마감된 공간이었다. 제법 넓은 방이었지만 차갑거나 휑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목재 특유의 색감과 은은한 향 덕분에 아늑했다. 간간이 다이닝룸 쪽에서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그 소리마저 지유의 마음을 고요하게 했다. 지유는 의자를 뒤로 돌려 책장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경제서와 역사서, 두꺼운 외국어 원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사이에서 유독 낡은 양장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책등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 무슨 책이지? 호기심에 책을 꺼내 펼쳤다. 그 순간, 책장 사이에서 편지와 쪽지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어?” 지유가 놀라 몸을 숙였다. — 뭐야. 학창 시절에 주고받은 연애편지라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에 피식 웃으며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누렇게 바랜 편지 봉투, 반으로 접힌 메모지, 모서리가 닳은 작은 종이들. 그사이에 사진 한 장이 섞여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지유는 무심코 사진을 집어 들었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찍은 듯했다. 두 사람의 뒤로 테이블과 조명이 희미하게 보였다. 사진 속 여자는 꽤 어려 보였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앳된 얼굴.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웃음이었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사진을 보는 사람마저 따라 웃게 만들 정도였다. 그 옆에는 태준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입가와 눈매에는 희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지유는 사진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나. 사진 아래쪽의 흰 여백에는 작고 동그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태준 오빠,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한 장뿐인 이 사진은 오빠가 간직해.
“이건요?” 지유가 장식장 위의 작은 물건을 가리켰다. 태준은 잠시 그것을 바라봤다. “그건…….”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지유의 질문에는 단순히 물건의 이름을 묻는 것 이상의 호기심이 있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왜 이런 것을 샀는지, 어째서 여기에 두었는지. 그러고 보면 태준 자신도 이유를 잊어버린 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 필요해서 샀던 것인지,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던 것인지조차 가물가물한 것들. 지유가 묻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별생각 없이 그 자리에 두었을 것이다. “왜요? 기억 안 나요?” “그러게. 이걸 왜 샀더라.” 태준이 웃자 지유도 따라 웃었다. “집에 있는 물건인데도 몰라요?” “오래 살다 보면 그래.” “얼마나 오래 사셨는데요?” “십 년은 넘었지?” “와.” 지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통창 너머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키가 제법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정원 한편에는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뒤로 낮은 담장이 이어졌다. 혼자 살기에는 꽤 넓은 단독주택이었다. 아마도 넷, 아니 그 이상의 가족 구성원을 염두에 두고 구입한 집이리라. 5개의 방과 4개의 욕실은 좀 오버야. “안 무서워요?” “뭐가?”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지는 않았지만, 가끔 지나치게 조용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 “나라면 맨날 거실에만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방은 들어갈 일도 없겠는데요?” “나도 그래.” “그럼 나머지 방은 왜 있어요?” 태준은 웃으며 거실 통창 앞에 서있는 지유의 실루엣을 눈에 담았다. 정원에서 스며든 오후의 햇빛이 그녀의 어깨와 머리카락 가장자리에 엷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태준은 느릿하게 웃었다. “잘 어울려서. 우리 집이랑.” 지유는 입술을 샐쭉 내밀더니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정우는 셔츠를 벗어 던졌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태오의 침대 밑에서 발견한 목걸이와 혜진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붉은 흔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우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느새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혜진은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찻잔을 꺼내는 뒷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이 익숙했다. 정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태오 집에는 가끔 가?” “응?” 혜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고 있었다. 태오의 아슬아슬한 질문이 못내 화가 났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일까. 정우가 조금만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어디까지 허용하고, 언제 끝낼 것인지. 이제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했다. 자신은 결국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고, 오랫동안 일구어 온 생활이 있는 세계. 잠시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거의 안 가지. 그건 왜?” “아니, 뭐. 태오 혼자 있으면 적적하잖아. 민재도 없고, 나도 거의 일에 매여 있고.” 정우는 주방 조리대에 한 손을 짚었다. “당신은 카페 오가는 길에 가끔 들러 주면 좋을 것 같아서.” 말투도, 내용도 한없이 다정했다. 그러나 혜진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달랐다. 사소한 표정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혜진은 티백을 꺼내 찻잔에 넣느라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아마 보았더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금 정우가 걱정하는 것은 태오의 외로움 따위가 아니다. 그리고 혜진 자신이 경계해야 할 사람은 태오가 아니라는 것을. 정우가 조리대를 돌아 혜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붉은 흔적은 티셔츠의 목선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화장이 거의 지워진 탓에 오히려 아까보다 선명했다
그날 혜진이 먼저 정우에게 다가온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섹스는 없었다. 물론 수진을 만나는 간격이 유독 짧아진 탓에 정우로서는 아쉬울 겨를도, 안하게 된 기간을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혜진과는 잘 맞았다. 첫 만남부터 혜진은 섹스에 있어서는 꽤 대담했고, 즐겼다. 하지만 평소의 그녀는 조신하고 단정한 축에 속했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확연한 여자. 정우는 그 이중적인 면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혜진 역시 정우와의 관계를 꽤 만족해했었다. 한 번으로 만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우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혜진은 아쉬운 듯 웃으며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곤 했다. —그런데 정우는 올리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먹어? 회사에서 뭐 먹고 왔어?” 혜진이 의아한 듯 정우의 접시를 들여다봤다. 음식은 반 넘게 남아 있었다. 어느새 다음 메뉴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 있었다. “점심 먹은 게 아직 소화가 안 됐나 봐.” “뭐 먹었는데?” “삼계탕” 정우의 시선이 문득 혜진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목걸이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공허한 목덜미에서 쇄골까지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화장에도 채 가려지지 않은 붉은 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모를 수가 없다. 상대의 입술이 집요하게 머물렀을 때, 특히 피부가 연약한 여자에게 남곤 하는 흔적이었다. 정우 자신도 수없이 보아 왔고, 남기기도 했던 자국. 울혈. 정우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왜?” 혜진이 그를 바라봤다. 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목덜미에 머물러 있었다. “어디 아파?” 혜진이 물었다. 그제야 정우는 눈을 거두었다. “아니.” 그는 레몬수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올리브의 짠맛과 레몬의 신맛이 전혀 어우러지지 않은 채 입 안을 맴돌았다. “참, 다음 주에 부부 동반 모임 있는 거 알지?” 혜진은 새로 서빙된 도미 필레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껍질은 노릇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