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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2 11:05:27

등 뒤로 단단한 것이 닿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나란히 바라보고 있던 테이블이었다. 혜진의 손바닥이 상판을 짚었다.

“이거…….”

숨이 흐트러진 채 혜진이 중얼거렸다. 태오가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봤다.

“왜요?”

“오늘 완성한 거잖아.”

“그러니까요.”

“망가지면 어떡하려고.”

태오가 웃었다.

“안 망가져요.”

그의 손바닥이 상판을 짚었다.

“내가 만들었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태오가 혜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순간 몸이 들리며 혜진이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이태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경고인지, 허락인지,

“내일이면 끝이야.”

혜진이 말했다.

“알아요.”

“다시는 안 보는 거야.”

“네.”

“그러니까 오늘 일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입술이 다시 겹쳤다. 혜진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천천히 태오는 혜진을 테이블 위로 눕혔다.

치맛자락이 흐트러졌다. 거친 손이 매끄러운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순간 혜진의 몸이 잠깐 움찔했다. 멈출 수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혜진은 태오의 두 팔을 붙잡았다.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태오는 한동안 혜진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은 채 올라오지 않았다. 숨결이 닿을 때마다 혜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태오가 혜진의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까지 자신을 밀어넣었다. 강렬한 자극에 혜진이 몸부림쳤다. 손바닥 아래로 매끄럽게 갈린 나뭇결이 느껴졌다. 이제 더이상 벽이 아닌 테이블. 혜진은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 나무와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번 자리를 벗어난 것은, 아무리 원래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어도 다시 그 자리에 꼭 맞게 돌아갈 수 없었다.

--------------------

오전 여덟 시 십 분. 정우가 회의실에 들어오자 먼저 와 있던 임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세요.”

재킷 단추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 비서가 태블릿과 자료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시작하죠.”

화면에 이번 분기 실적이 떴다. 영업본부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서 영업이익은요?”

설명이 멈췄다.

“전년 대비 8퍼센트 감소했습니다.”

“매출은 늘었는데.”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정우는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그가 소리 지를 때보다 이렇게 조용해질 때를 더 어려워했다.

“김 전무.”

“우리가 많이 팔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팔아서 얼마를 남겼느냐가 중요한 거니까.”

정우가 펜을 내려놓았다.

“재협상하세요.”

영업본부장이 고개를 들었다. 정우는 담담했다.

“팔수록 손해 보는 고객을 붙잡고 있는 건 고객 관리가 아닙니다.”

정우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회의가 다시 진행되었다.

회의가 끝난 것은 열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임원들이 빠져나가자 정우가 휴대폰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오늘 저녁 일곱 시. 잊지 않았지?]

곧 답장이 왔다.

[뭘?]

정우가 피식 웃었다.

[저녁]

잠시 뒤.

[아]

예상했던 답이었다. 정우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 혜진이 받았다.

“역시 잊었네.”

—뭘?

오늘 혜진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었다. 정우가 꽤 오랫동안 지켜본 아이였다. 어쩌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던 아이.

-------------------

그걸로 끝이었다. 태오는 다음 날부터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혜진은 안도했다. 카페를 다시 열고 일주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로 바꾼 동선을 점검하고, 직원들과 메뉴를 맞추고, 밀려드는 손님을 상대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그 와중에 태오를 생각하는 건 하루 중 아주 잠깐뿐이었다. 주로 2층에 올라갈 때였다.

그가 완성한 원목 테이블. 혜진은 그 위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다가도 문득 손을 멈추곤 했다. 손바닥 아래 매끄러운 나뭇결이 느껴질 때면 그날 밤이 떠올랐다.

격렬한 관계가 끝나고 한참을 태오를 바라봤다. 창밖에서 들어온 달빛이 그의 벗은 상체 위에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현장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다져진 몸이었다. 과장되게 크지도, 보기 좋게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움직일 때마다 선명해지는 잔근육과 곳곳에 남은 작은 상처들. 그 몸이 가끔 이상하게 보고 싶었다.

처음 며칠은 기다렸던 것도 사실이다.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손님들 사이에 섞여 들어오지는 않을까. 커피 한 잔을 핑계 삼아서라도. 하지만 태오는 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고 혜진 역시 그를 찾지 않았다. 그게 맞았다. 그 하루의 기억이면 충분했다. 오히려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아름다운 일도 있다고 혜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도 편해졌다. 바쁜 와중에 남편과의 약속을 잊은 건 어쩌면 당연했다. 정우에게 전화가 왔다.

—설마 잊은 건 아니지?

혜진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잠시 생각했다.

“……뭘?”

정우가 웃었다.

—역시 잊었네.

그제야 생각났다. 저녁 약속. 그러고 보니 오늘 누군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누구 소개한다고 했었나?”

—오면 알아.

“당신은 꼭 그런 식이더라.”

—일곱 시. 늘 가는 데.

정우가 말한 ‘늘 가는 곳’은 청담동의 한우 다이닝이었다. 독립된 룸이 있어 정우가 특히 좋아했다. 직원이 혜진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대표님 먼저 와 계십니다.”

“네.”

“이쪽입니다.”

혜진은 직원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여기입니다.”

직원이 문을 열었다. 정우가 먼저 보였다. 셔츠 소매를 단정하게 내린 채 앉아 있던 남편이 그녀를 발견하고 웃었다.

“왔어?”

“미안. 좀 늦었지.”

“괜찮아. 우리도 얼마 안 됐어.”

우리— 그제야 혜진의 시선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정우의 말을 듣고 있던 젊은 남자. 익숙한 옆얼굴. 혜진의 걸음이 멎었다. 그 순간 남자도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태오였다. 정우가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며 말했다.

“혜진아, 인사해.”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서도 아주 잠깐 무언가가 사라졌다. 놀람인지 당혹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태오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이 되었다.

정우가 말했다.

“내가 전에 얘기했던 보육원 있지?”

혜진은 태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응.”

“거기서부터 오래 봐온 애야.”

그리고.

“이태오.”

혜진의 손가락이 가방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태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혜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았다. 끝난 줄 알았던 그 하루가, 끝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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