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01 - Chapitre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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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

등잔 심지가 한 번 튀었고, 담 너머에서 밤바람이 처마 끝을 건드리고 지나갔다.강진은 여울에게서 빠져나와 몸을 일으켰다.여울은 눈을 뜬 채였다. 떠라, 하는 말에 뜬 눈을 감으라는 말이 없어서 그대로 두고 있었다. 강진이 그 눈꺼풀을 엄지로 쓸어내렸다.“자라.”감긴 눈 안쪽에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마루로 나가는 소리, 쪽문 빗장이 빠지는 소리. 담 밖 우물에서 두레박이 물을 치는 소리가 났을 때 여울은 눈을 다시 떴다.왕이 우물에 갔다. 곤룡포 차림으로.돌아온 강진은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물동이를 들고 있었다. 화로에 올린 물이 미지근해지는 동안 그는 여울 곁에 앉아 여울의 발목을 쥐고 있었다. 물이 데워지는 내내 그 손은 풀리지 않았다.젖은 천이 목에서 시작했다. 어깨, 겨드랑이, 옆구리. 허벅지 안쪽에서 여울이 다리를 오므리자 강진은 무릎을 손바닥으로 눌러 도로 폈다. 베를 감은 자리는 피해 갔다.천이 지나가는 곳마다 살이 오소소 돋았다. 여울은 그것을 감출 수 없었다.천은 한 곳만 지나쳤다. 턱 아래, 옷깃이 닿지 않는 자리였다. 강진은 그 자리를 닦지 않고 엄지로 한 번 눌러 보았다.“아직 붉군.”깨끗한 속옷이 여울의 팔에 꿰였다. 고름을 매던 강진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는 저고리 깃을 한 번 끌어 올렸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자국이 드러나는 자리까지.“날이 밝으면 의금부 사람이 온다. 도홍도 같이 보낸다.”“……예.”“조회에서는 서 있어라. 무릎 꿇지 말고.”곤룡포 자락이 이부자리를 쓸고 나갔다. 쪽문이 닫혔다.여울은 손을 들어 제 목을 만져 보았다. 뜨거운 데가 손끝에 걸렸다. 날이 밝으면 이 자리를 대신들 앞에 그대로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여울은 알고 있었다.—“오라버니, 이게 뭐예요!”세숫물을 들고 온 단이가 대야를 쏟을 뻔했다. 아이는 대야를 마루에 내려놓고 여울의 턱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이걸 어떻게 가려요. 분이라도 바를까요? 분이 어디 있다고. 수건, 수건을 두르면…….”“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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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내려라

곽명은 옷깃을 쥔 여울의 손을 끝까지 눈으로 좇다가 비켜섰다.“걸을 수 있나.”대답은 도홍이 먼저 했다.“가마를 내리라는 분부는 없으셨소. 천천히 걸어 들라 하셨소.”곽명은 도홍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군사 둘이 여울의 양옆에 붙었다.담 셋을 지나는 동안 곽명은 반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그 눈이 목덜미에 닿아 있다는 것을 여울은 알았다. 옷깃을 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아침 햇살은 휘정전 문턱까지만 들었고, 그 안은 서늘했다. 양쪽으로 갈라 선 대신들 사이로 어좌까지 가는 길이 멀었다.문턱을 넘자 곽명이 뒤에서 여울의 어깨를 눌렀다.“두어라.”어좌에서 난 목소리에 곽명의 손이 떨어졌다. 강진은 곤룡포 차림이었다. 간밤에 이부자리를 쓸고 나간 그 붉은 자락이었다.“무릎을 다쳤다. 서 있게 하라고 내가 일렀다.”좌상 이헌이 가슴 앞에 받쳐 든 상아 홀을 고쳐 쥐었다.“전하. 죄인이 어전에 서 있는 법은 없사옵니다.”“오늘은 있다.”이헌은 더 말하지 않고 여울을 돌아보았다. 이헌만이 아니었다. 홀을 든 손들이 조금씩 틀어지고, 사모 쓴 머리들이 문 쪽으로 기울었다. 얼굴을 보려던 눈들이 그 아래에서 멎었다.누군가 헛기침을 했고, 누군가 홀 뒤에서 입을 가렸다. 도승지 한겸은 붓을 든 채 여울의 목을 보다가, 제가 무엇을 보는지 깨닫고 종이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여울은 옷깃을 더 세게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손을 내려라.”강진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전각 안이 그 목소리만큼 조용해졌을 뿐이었다.여울은 손을 내렸다.옷깃이 저절로 조금 벌어졌다. 대신들 쪽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줄지어 났다. 얼굴에 불이 오르고 귓불까지 뜨거웠다. 여울은 눈을 바닥에 두었다.“보았으면 됐다.”강진이 어좌 팔걸이에서 손을 거두었다.“모레 산릉에 가서 선왕께 고명 받은 것을 고한다. 재실에서 하룻밤 묵고 새벽에 고유를 올린다. 내관은 도홍만 따르고, 도승지는 승정원을 지켜라. 좌상은 도성에 남아 조회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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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 전

내시부 서고에는 묵은 종이 냄새가 가라앉아 있었고, 높은 들창으로 든 햇빛 속에서 먼지가 느리게 떠돌았다.곽명은 승전 기록을 넘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선왕이 내관을 통해 내린 명은 날짜별로 한 줄씩 적혀 있었다. 약을 들이라, 문을 닫으라, 영수전에 화로를 하나 더 넣으라. 승하 이레 전의 장에는 세 줄이 있었다.어느 줄에도 곁방에 두라는 말은 없었다.곽명은 장을 펼친 채 고개를 들었다. 서고 문 앞에 젊은 내관 하나가 불려 와 서 있었다. 상선 배원을 따라다니며 함을 드는 스무 살 남짓한 아이였다.“선왕 승하 뒤 곁방에서 색적을 읽던 날, 너도 거기 있었지.”“……예. 상선 어른 뒤에 있었습니다.”“늙은 내관 봉수가 선왕의 명이 있다고 했다. 처분 날 때까지 곁방에 두라고. 상선이 뭐라고 물었나.”젊은 내관의 손이 앞으로 모였다.“함께 들은 이가 있느냐고……. 봉수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상선 어른은 더 묻지 않으셨습니다.”곽명이 장부를 덮었다. 먼지가 일었다.“없는 명을 있다고 한 자가 있고, 그 말을 듣고도 덮은 자가 있다. 덮은 자 옆에 서 있던 너는 뭐냐.”젊은 내관의 얼굴이 하얘졌다.곽명은 그 얼굴을 보며 이것이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는 왕의 눈이 자기에게 올 것이었다.—같은 시각, 서별당 마루에는 볕이 길게 들어 있었다.“어른, 팔 좀 들어 보셔요.”단이가 봉수의 성한 팔이 아니라 다친 팔을 잡았다. 봉수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놔라, 놔. 그쪽은 아직이다.”“허운 나리가 날마다 들어 보라고 하셨잖아요.”“날마다 든다. 네가 안 볼 때.”여울은 마루 기둥에 기대 앉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조회에서 돌아와 겉옷을 벗은 뒤에도 목에 수건은 두르지 않았다. 단이가 한 번 두르려다 제풀에 걷었다.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왜 가려요, 하면서.봉수가 겨우 팔을 어깨 높이까지 들었다가 내렸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됐다. 이만하면 됐다.”“침은 언제 또 맞으십니까.”“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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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의 사랑채

해가 지자 좌상 댁 앞뜰 석등에 불이 들었고, 대숲을 지나는 바람이 사랑채 장지문을 가늘게 흔들었다.곽명은 등잔 아래 무릎을 꿇은 채 좌상의 처분을 기다렸다.이헌은 진술서를 두 번 읽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느렸다. 종이를 넘기는 동안 그 얼굴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승전 기록에는 없고.”“예. 승하 이레 전 장에 세 줄이 있을 뿐입니다. 약, 문, 화로.”“상선은 캐지 않았고.”“함을 들던 내관이 그리 적었습니다.”이헌이 종이를 상 위에 내려놓고 손가락 끝으로 반듯하게 한 번 밀었다.“선왕의 유명을 사칭한 것은 대역에 닿는다. 그 거짓으로 색적자를 곁방에 붙들어 두었으니, 그 뒤의 일이 다 거짓 위에 서 있는 셈이지.”“예.”“그 늙은이가 선왕 곁에서 여덟 해를 지냈다. 곁방에 무엇이 남았는지 아는 자가 있다면 그자다.”곽명의 등이 조금 펴졌다.의금부에서 문서를 물을 때 여울은 숨 하나 바꾸지 않았다. 늙은이와 아이를 들먹여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도총관 얘기가 나오자 처음으로 눈을 들었다. 곽명은 그 눈을 잊지 않고 있었다.“잡아 오겠습니다.”“누구의 명으로.”곽명의 입이 닫혔다.“전하께서 왕명 없이 데려가면 의금부 관원에게 죄를 묻겠다고 하셨지. 누구를 두고 하신 말씀이냐.”“……서별당의 색적자입니다.”“그렇다. 내관은 내시부 사람이고, 선왕의 명을 사칭한 자는 누구든 의금부가 잡는다. 대역 죄인을 잡는 데 좌상의 글은 필요 없다.”곽명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좌상의 글이 없다는 것은 좌상의 이름도 없다는 뜻이었다. 등잔 불이 이헌의 얼굴 반쪽에만 닿아 있었다.“모레는 전하께서 산릉에 계시는 밤이다. 새벽 고유를 올리시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신다. 선왕께 고하는 자리를 버리고 나오시면 그것이 흠이고.”“늙은이는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여는 건 서별당 쪽이다. 네가 보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무엇에 눈을 드는지.”이헌이 진술서를 곽명 쪽으로 밀었다. 곽명은 두 손으로 받아 품에 넣었다.받고 나서야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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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할 말

강진은 들어오자마자 여울의 턱을 들어 올렸다.등잔을 끌어오지도 않았다. 엄지로 턱을 더 젖히고 그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붉은빛이 가시고,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번져 있었다.“옅어졌군.”“……예.”“아쉬워하는 얼굴은 아니고.”여울은 대답 대신 턱을 빼려 했다. 강진은 놓아주지 않다가, 여울의 목덜미가 붉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손을 거두었다.“내일 아침에 산릉으로 간다.”“조회에서 들었습니다.”“듣고만 있더군. 서서.”조회를 떠올리자 귓불이 다시 뜨거워졌다. 강진이 그것을 알아챘는지 소리 없이 웃었다.“내가 없는 동안 쪽문 밖에 나가지 마라. 우물 물은 단이가 길어라. 도홍은 나와 가고, 담 밖은 도총부가 선다.”“예.”“밤에 무슨 소리가 나도 문을 열지 마라.”“……예.”강진은 여울의 맞은편이 아니라 곁에 앉아 있었다.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여울이 다리를 펴 놓은 자리 옆으로 강진이 제 다리를 뻗었다.여울은 손끝으로 이불 가장자리만 매만졌다.“아버지께 고명 받은 것을 고한다.”등잔을 향한 강진의 옆얼굴이 굳어 있었다.“너도 전할 말이 있느냐.”여울의 손이 이불 위에서 멎었다.선왕께 전할 말. 여덟 해를 곁방에서 모신 분에게 할 말이라면 많았다. 그런데 입에서 먼저 나온 것은 그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전하께서 잘 계신다고 전해 주십시오.”강진이 고개를 돌렸다.“……무어라 했느냐.”“진지도 드시고, 고명도 받으시고, 조회에서는 목소리 한 번 안 높이시고 좌상 대감 입을 다물게 하신다고. 그렇게만 전해 주십시오.”강진의 얼굴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갔다가 다른 것이 들어왔다. 여울은 그것이 무엇인지 읽지 못했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강진이 여울의 손목을 잡았다.“내가 잘 있는 것을 아버지께 고하라고.”“예.”“네가 왜.”여울의 입에서 생각보다 먼저 나온 말이었다. 도로 주워 담을 수도, 까닭을 붙일 수도 없었다.“……그냥, 그렇게 생각했습니다.”강진은 손목을 놓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엄지로 손목 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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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 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자 서별당 마당에 찬 그림자가 길게 누웠고, 담 밖에서는 순찰 군사들의 발소리가 저녁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여울은 마루 끝에 앉아 쪽문을 보고 있었다.봉수는 아직 오지 않았다.부엌에서 냄비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단이가 죽을 두 번째로 데우고 있었다. 처음 데운 죽은 이미 식어 눌어붙었다.“어른이 침 맞고 누워 계신가 봐요. 허운 나리가 쉬었다 가라고 하셨겠죠.”“그래.”여울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봉수는 늦으면 늦는다고 사람을 보내서라도 기별을 넣는 사람이었다. 서별당에 온 뒤로 그 기별이 빠진 날은 하루도 없었다. 오늘은 해가 다 지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여울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끝이 차가웠다.“단이야. 내의원에 다녀와라.”단이가 치맛자락을 걷어 쥐고 쪽문을 나섰다.여울은 등잔을 켜지 않았다. 불을 켜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만 같았다.—단이는 울면서 돌아왔다.문턱에 걸려 넘어진 아이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마루까지 기어 와 여울의 소매를 붙잡았다.“어른이, 내의원 문 앞에서, 검은 관복 입은 사람들한테 끌려가셨대요. 팔을 잡으니까 다친 팔이라고, 그 말만 하셨대요.”여울의 손이 단이의 팔에서 미끄러졌다.검은 관복. 의금부였다.그때 쪽문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문 아래 틈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 사각거리며 밀려 들어왔다. 발소리는 금세 순찰 소리에 섞여 멀어졌다.여울은 등잔을 켜고 종이를 펼쳤다. 서리의 반듯한 글씨였다.내관 봉수는 선왕의 유명을 거짓으로 칭한 죄로 추국을 받는다. 처분 날 때까지 곁방에 두라 하셨다는 명이다. 승전 기록에 그런 명은 없다.다만 선왕께서 곁방에 남기신 것이 나온다면, 늙은 내관의 말이 참이었음이 밝혀질 것이다. 날이 밝기 전이면 늦지 않다. 의금부 도사.종이를 쥔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갔다.여울은 이 글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곽명이 원하는 것은 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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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릅니다

판자가 들렸다.눅눅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여울은 어둠 속에 손을 넣어 보자기를 더듬었다. 반년을 옷 안감에 꿰매 품었고, 서별당에 온 뒤로는 이 흙 위에 두었던 것이었다. 손끝에 봉한 자리가 걸렸다. 인장 두 개의 도드라진 테두리.때가 오면 주라고 하셨다. 누구에게 주라 하셨는지, 여울은 입속으로도 그 이름을 굴리지 않았다.뜯지 말라고 하셨고, 뜯지 않았다. 안에 무엇이 적혔는지 여울은 몰랐다.다만 이것을 곽명에게 들고 가면 그다음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봉서는 좌상의 손으로 간다. 선왕께서 아들에게 가라고 남긴 것이 아들을 치는 자의 손에 들어간다.그러고도 어른이 살아 나온다는 약속은 어디에도 없었다. 날이 밝기 전이면 늦지 않다고 했을 뿐이었다.그러면 제가 가면.여울은 제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쪽문 밖에 나가지 마라. 밤에 무슨 소리가 나도 문을 열지 마라.사흘 전 새벽에도 서쪽 협문으로 빠져나갔다가 골목에서 붙들려 온 몸이었다. 제가 간다고 어른을 놓아줄 곽명도 아니었다. 돌바닥에 꿇는 사람이 하나 더 늘 뿐이었다.보자기를 쥔 손이 떨렸다. 여울은 그것을 흙 위에 도로 내려놓고 판자를 덮었다. 이부자리를 끌어 그 위에 폈다.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명치를 눌렀다.내게 고했으면 됐다.중독에서 깨어난 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여울은 그날은 안 오신다 하지 않으셨느냐고 대꾸했었다.오늘도 안 계셨다. 산릉 재실에서 선왕께 올릴 새벽을 기다리고 계실 것이었다. 선왕께 고하는 자리를 버리고 나오시면 그것이 흠이 된다는 것쯤은 여울도 알았다.그래도.다음에는 나를 불러라.여울은 상 위의 벼루를 끌어당겼다. 향낭 밑그림을 그리던 먹이 반쯤 남아 있었다. 물을 붓고 먹을 가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종이는 무명 자투리를 싸 두었던 것이었다.붓을 들었지만 무엇이라고 써야 할지 몰랐다. 왕에게 올리는 글의 격식을 여울은 배운 적이 없었다. 아는 것은 있었던 일과 청할 것뿐이었다.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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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한겸은 붓을 내려놓고 일어섰다.“말을 내라.”잠결에 되묻는 서리에게 한겸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도포 위에 관복을 걸치며 문 앞의 아이에게 일렀다.“서별당으로 돌아가 있어라. 글은 내가 전하께 올린다.”단이가 이마를 바닥에 찧듯이 절했다. 한겸은 그 절을 받지 않고 지나갔다.—산릉의 밤은 깊어서, 솔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와 멀리 계곡물 소리만이 재실의 창호를 건드렸다.재실의 등잔은 하나였다.강진은 흰 옷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새벽 고유까지는 몸을 씻고 말을 아끼고 잠을 줄이는 것이 법도라, 도홍도 문밖에 물러나 있었다.강진에게는 줄일 잠도 없었다.“전하. 도승지가 왔습니다. 급한 글이라고.”강진이 눈을 떴다. 한겸이 도성을 비울 까닭은 없었다. 좌상이 조회를 망쳤다면 날이 밝아도 됐다.“들라.”문턱 안에 엎드린 한겸의 관복 자락이 흙투성이였다. 그가 두 손으로 올린 종이를 강진은 받아 펼쳤다. 무명 조각을 싸 두었던 종이였고, 먹이 번져 있었다.전하. 봉수 어른이 의금부에 잡혀갔습니다.강진은 끝까지 읽었다. 읽는 동안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마지막 두 줄에서, 종이를 쥔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전하. 재계 중이시니 고유는…….”“올린다.”강진이 종이를 접었다.“새벽에 올리고 곧장 의금부로 간다. 좌상과 상선 배원을 의금부로 부르라. 사람을 먼저 보내라.”“예, 전하.”물러나려던 한겸이 멈추었다. 강진이 그를 보고 있었다.“네가 가져왔느냐. 처분하라던 사람의 글을.”한겸은 답하지 못했다. 흙 묻은 옷자락을 펴는 것도 잊고 엎드려 있었다.“잘했다.”한겸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물러났다.“현.”등잔불이 흔들렸다. 방 한구석 어둠에서 검은 옷의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암위장 현이었다.“의금부로 가라. 늙은 내관 곁에 서라. 날이 밝을 때까지 누구도 그 사람에게 손대지 못하게 해라. 곽명이 묻거든 왕명이라 하고, 더 묻거든 내가 간다 해라.”강진이 허리에서 왕의 표신을 끌러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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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 명

새벽 이슬이 의금부 마당의 돌바닥을 적셨고, 동쪽 담 위로 해가 오르자 그 물기가 희게 빛났다.봉수는 거적 위에 앉아 있었다.밤새 돌바닥에 꿇었던 무릎을 펴지 못해 옆으로 비스듬히 기운 채였다. 다친 팔은 옷 속에서 늘어져 있었다. 곽명의 서리가 소매와 버선까지 뒤졌으나 나온 것은 없었다.봉수는 한마디만 했다. 선왕께서 곁방의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 하셨소.자정이 지나 검은 옷의 사내 하나가 표신을 들고 들어온 뒤로, 아무도 봉수에게 손대지 못했다. 그 사내는 지금도 봉수 곁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곽명은 마당 한가운데서 진술서를 쥐고 있었다. 잠을 못 잔 눈이 붉었다. 그래도 등은 곧았다.왕이 온다고 했다. 이번에는 왕이 자기 앞에 설 것이었다.문이 열렸다.강진은 흰 옷 그대로였다. 능 앞 풀에 젖은 옷자락이 마르지 않아 무겁게 끌렸다. 뒤로 한겸과 도홍, 좌상 이헌, 상선 배원이 따라 들어왔다. 마당의 군사들이 일제히 엎드렸다.강진은 곽명 앞을 지나쳤다.거적 앞에서 멈추었다. 봉수가 몸을 일으키려다 무너지듯 엎드렸다.“무슨 죄냐.”곽명이 한 걸음 나섰다.“선왕의 유명을 사칭한 죄입니다. 처분 날 때까지 색적자를 곁방에 두라는 명을 들었다 하였으나 승전 기록에 없고, 함께 들은 자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덮은 자가 있어 진술을…….”“상선.”배원이 나와 무릎을 꿇었다.“그날 네가 곁방 문턱에 있었다지. 들었느냐.”“소인은 봉수가 들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선왕께서 승하 이레 전 곁방에 드셨던 것은 사실이옵니다. 그 방에서 무슨 말씀이 오갔는지는 그 방에 있던 사람만 압니다.”“승전 기록은 내관이 받아 적은 명이다.”강진이 곽명에게 말했다. 눈은 여전히 봉수에게 두고 있었다.“곁방에서 늙은 내관 하나에게 하신 말씀까지 거기 오르느냐.”곽명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그 말로 그 사람이 곁방에 더 머문 것이 보름 남짓이다. 그 뒤 서별당으로 옮긴 것도, 처분 칸을 비워 둔 것도 내 명이다. 선왕의 명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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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시

해가 서별당 담 위로 높이 올라 마당의 그늘이 짧아졌을 때, 가마꾼들의 발소리가 쪽문 밖에 먼저 닿았다.여울은 문턱 안쪽에서 고개를 들었다.나가지 마라, 해서 문턱 바로 안쪽까지만 나와 밤을 새운 참이었다. 곁에 쪼그려 졸던 단이가 발소리에 벌떡 일어났다.쪽문이 열렸다. 흰 옷의 강진이 먼저 들어섰다. 젖은 옷자락 끝에 흙이 묻어 있었다. 강진은 문턱 안쪽에 앉은 여울을 내려다보고 걸음을 멈추었다.뒤에서 가마가 내려앉았다. 가마 문이 열리고, 도홍이 봉수의 성한 팔을 받쳐 끌어냈다.여울은 일어서려다 무릎이 꺾였다. 그대로 기어가듯 봉수에게 갔다.“무릎, 무릎 굽히지 마십시오. 허운 나리가…….”봉수가 먼저 손을 내저었다. 의금부 돌바닥에서 밤을 새운 사람이 제일 먼저 걱정한 것이 여울의 무릎이었다.여울이 봉수의 소매를 잡았다. 소매 끝이 떨렸다. 봉수의 떨림인지 제 손의 떨림인지 알 수 없었다.밤새 참았던 것이 왈칵 쏟아졌다. 여울은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단이는 소리 내서 울었다. 봉수는 두 아이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에구, 에구, 하며 성한 손으로 이 등 저 등을 두드렸다.강진은 그것을 한동안 두고 보았다. 여울의 무릎이 흙바닥에 닿아 있는 것을 보고도 일으키라고 하지 않았다.봉수가 먼저 몸을 돌렸다. 여울의 손을 소매에서 가만히 떼어 내고, 강진 쪽으로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고개를 들었다.도홍이 숨을 들이켰다. 여울도 울음을 멈추었다. 왕 앞에서는 늘 이마부터 바닥에 대던 봉수였다.“전하. 그 명은 소인이 지어낸 것이옵니다.”“안다.”봉수의 입이 벌어진 채 멎었다.“알고서 의금부에서 내가 이은 명이라 했다. 이제 그건 선왕의 명이 아니라 내 명이다. 누가 물어도 그렇게 답해라.”강진은 도홍에게 봉수를 뒷방에 눕히고 허운을 부르라 일렀다. 부축받아 가면서도 봉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뒷방 문턱에서 한 번 멈춰 강진을 돌아보고서야 들어갔다.—밤이 되어도 강진은 가지 않았다.흰 옷을 벗고 검은 도포로 갈아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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