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왕의 남총을 처분하는 법의 모든 챕터: 챕터 31 - 챕터 40

127 챕터

31화. 문득

한겸이 서도에서 올라온 세곡 장부를 읽고 있었다."작년보다 삼백 석이 줄었습니다. 관찰사는 흉년 탓이라 하나, 세곡선 선주 두 명이 곡식을 장삿배에 빼돌려 판 일을 사헌부가 적발했습니다. 관찰사가 알고도 묵인했는지는—"강진이 손을 들었다. 한겸은 읽던 곳에 손가락을 짚고 기다렸다.장부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 회랑을 지나던 여울의 숙인 고개가 떠올랐다. 옷깃 위로 드러났던 목, 유서를 읽었다는 말에 붉어지던 얼굴까지.보고 싶었다.선왕 생전에는 여덟 해를 버텼다. 찾아가지도, 소식을 묻지도 않았다. 이제는 정무를 듣는 중에도 그 얼굴이 끼어들었다."전하."강진은 팔걸이를 쥔 손을 폈다."관찰사를 불러라. 선주 두 명은 의금부로 넘기고."한겸이 명을 적은 뒤 다음 장을 펼쳤다. 강진은 끝까지 듣고서야 그를 물렸다.—도홍이 남은 문서를 거두자 강진이 일어섰다."나갈 것이다. 뒷문을 열어라."도홍이 문 쪽으로 가다가 멈췄다."서별당에는 화로를 하나 더 보내라. 내시부에서 보낸 것으로 하고.""예, 전하."강진은 선정당 뒤편에서 지붕에 올랐다. 낮에 이 길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마 아래로 내관들이 지나갈 때마다 몸을 낮추고 담 셋을 건넜다. 볕을 받은 기와가 손바닥에 뜨거웠다.서별당 용마루 그늘에 이르자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어제 뽑아 놓은 풀 옆에서 단이가 돌을 크기대로 고르고 있었다. 여울은 마루 기둥에 기대앉아 그 일을 구경했다."돌로 무얼 하려고.""쪽문까지 놓으려고요. 비 올 때마다 신이 엉망이 돼요."여울이 마루 끝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내려서려다 멈칫하자 단이가 달려와 팔을 받쳤다. 여울은 그 손에 기대 천천히 발을 디뎠다."오라버니는 여기 앉아 계셔요. 제가 가져올게요."돌무더기 곁에 앉은 여울이 납작한 돌 하나를 골랐다."이것은 어떠냐.""에이, 그건 너무 작아요.""네 발은 올라가겠다.""그럼 저는 물동이 들고 한 발로 뛰어다녀요? 오라버니가 한번 해 보셔요."여울이 웃으며 돌을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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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네 사람

강진이 서별당에 다시 가겠다고 이르기 전부터, 궁 안에는 영수전에서 보낸 밤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여울이 거처를 옮기던 날, 등불 꺼진 궁녀들 방에서 먼저 그 말이 나왔다."전하께서 영수전 곁방에서 밤을 보내셨대.""하여울이 있던 방에서?""봉인하기 전날 밤에. 봉수 내관이 단이를 데리고 내시부로 오는 걸 세답방 아이가 봤어."맞은편에서 이불이 바스락거렸다."서별당으로 옮겨 갈 때 목에 자국도 있었다더라."문 가까이 누운 궁녀가 쉿, 하고 막았다. 바깥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방이 조용했다.강진이 여울과 밤을 보냈다는 말은 내시부에서 승정원으로 건너갔다. 좌상 이헌의 사랑채에도 같은 소문이 들어왔다.—다음 날 아침, 이헌은 곽명을 불러 서별당 담 밖에 숨어 출입을 살피라고 일렀다."왕이 드는 날과 돌아가는 시각을 적어 와라. 다른 이가 음식이나 물건을 들여도 빠뜨리지 말고."곽명이 받으려던 종이 위에서 손을 멈췄다."전하의 행적을 적으라는 말씀이십니까.""조회에서 따질 근거가 있어야지. 발각되지 말고, 방 안의 사람에게는 손대지 마라."곽명이 물러가자 이헌은 사간원 정언 세 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폈다. 강진을 비판하는 상소에 앞세울 이들이었다. 명단에서 이름 하나를 바꾼 뒤, 그 아래에 상소에 넣을 말을 적었다.국상 중에 선왕의 남총에게 미혹되었다.선왕의 밀지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강진의 밤 출입은 곽명의 보고를 받아 조정에서 따질 수 있었다.—우상 윤척은 자경전에서 여울의 이송을 보고했다. 대비는 차를 따르며 듣고 있었다."그리고 전하께서 영수전 곁방에서 밤을 보내셨다는 말이—"찻물이 잔 밖으로 넘쳤다. 문 옆에 있던 최령이 닦을 천을 가지러 물러났다."들었다."윤척은 말을 그치고 누이의 손에서 찻주전자를 받아 내려놓았다. 남편의 발길이 끊긴 중궁전에서 스무 해 넘게 지낸 누이였다. 이제는 아들마저 같은 남총을 찾는다는 소문이 들어왔다. 윤척은 넘친 찻물 쪽으로 눈을 내렸다."좌상이 상소에 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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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옅어졌군

서율이 이끄는 해시 순찰대가 서별당 담 밖을 지나갔다. 잠시 뒤 쪽문이 열리고 한 사람의 발소리가 마당으로 들어왔다.여울은 이부자리에 앉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마당을 건넌 걸음은 마루에 올라 잠깐 멎었다. 문이 열리자 여울이 엎드렸다. 검은 도포 차림의 강진은 문을 닫고 일어나라고 했다.일어나자 턱이 잡혔다. 얼굴이 등불 쪽으로 돌려졌고, 갈색 눈이 여울의 눈이 아니라 목으로 갔다. 첫 밤에 이가 닿았던 자리였다. 자국의 가장자리가 조금 흐려져 있었다."옅어졌군."강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울은 목에 닿은 눈길을 피하지 못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강진의 손이 옷고름에 왔다. 크고 마른 손가락이 매듭을 한 번에 풀고 옷을 어깨에서 벗겨 내렸다. 봉서는 어젯밤 마루 밑으로 옮겨 두었으니 안감이 드러나도 들킬 일은 없었다.바지가 내려가자 강진의 눈이 아래로 갔다. 여울의 것이 손도 닿기 전에 반쯤 서서 끝이 젖어 있었다. 강진의 입가가 비뚤어졌다."이건 옅어지지 않았군."가리려던 손이 잡혔다.벗겨진 어깨에 강진의 얼굴이 내려왔다. 이가 아니라 코였다. 목덜미에 코를 대고 오래, 깊이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강진의 입이 옅어진 자국 위에 정확히 내려앉았다."……읏."같은 자리였다. 첫 밤에 이가 닿았던 자리마다 다시 이가 왔다. 목, 쇄골 밑, 어깨. 옅어진 자국 위에 새 자국이 붉게 얹혔다.몸이 이상했다.첫 밤엔 어디가 아플지 몰라서 굳어 있던 몸이, 이번엔 어디가 어떻게 될지 알아서 먼저 굳었다. 강진의 손이 허리에 닿기도 전에 허리가 먼저 그쪽으로 기울었다. 여울은 그것을 알고 얼굴이 달아올랐다.강진이 그것을 알아챘다. 갈색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 그다음에 어깨를 잡혀 이부자리에 엎어졌다."……전하—""돌아보지 마라."등에 강진의 가슴이 붙었다. 그림자 속에서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왔다. 여울은 고개를 돌리려다 뒤통수를 눌려 도로 이부자리에 얼굴을 묻었다.이번엔 손가락이 먼저였다. 침을 바른 손가락 하나가 아직 다 아물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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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발소리

여울은 판자에서 손을 떼고 이부자리를 끌어당겼다. 문밖에서 단이가 죽을 가져왔다고 알렸다."잠깐만 기다려라."마루 틈이 이불에 가려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열었다. 단이는 마루에 소반을 놓고 비켜 앉았다.죽을 비우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선왕의 곁에서는 물을 끓이고 말씀을 듣느라 밤을 보냈다. 이곳에서는 아침상을 물리고 나면 저녁까지 시킬 일도, 할 일도 없었다.단이가 마당의 돌을 다시 고르기에 여울이 불렀다."너는 세답방에서 하루를 어떻게 보냈느냐.""해 뜨면 빨래 걷고, 개고, 또 빨고 그랬어요. 저녁까지 다 못 널면 얼마나 혼났는데요.""여기서는 심심하겠구나.""하나도 안 심심해요. 오라버니는 심심하셔요?"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이는 돌에 묻은 흙을 털고 그의 곁에 앉았다.저녁에 봉수가 오자 여울은 내시부에서 맡길 일이 없는지 물었다."색적자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함께 일하다 정이 들면 처분할 때 곤란하다고 상선께서 그러십니다."봉수가 상을 놓으며 답했다."그럼 죽 그릇은 제가 씻겠습니다.""그것도 제 일입니다.""그릇 하나로 어른 일자리를 뺏겠습니까."봉수가 빈 그릇을 가져가자 단이가 여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우물가에서 씻으면 되잖아요. 거기까지 쫓아오시겠어요?"다음 날 아침, 여울은 먹은 그릇을 들고 단이와 쪽문을 나섰다. 단이가 물을 길어 대야에 붓고 곁에 앉았다. 여울이 씻은 그릇을 내밀자 손가락으로 안쪽을 짚었다."오라버니, 여기는 안 씻겼어요. 죽이 요만큼 남았잖아요."여울이 그릇을 도로 받아 그곳을 문질렀다."네가 옆에 있으니 어른께 들킬 틈도 없구나."단이가 웃으며 물을 더 부었다. 씻은 그릇은 단이가 말리고, 여울은 그동안 마당을 쓸었다. 봉수가 상을 거두러 왔을 때는 마루에 그릇이 엎어져 있었다. 그는 그릇 안을 살피고 빈 소반만 들고 갔다.—강진은 이틀 밤을 오지 않았다.저녁 시중이 끝나면 단이는 뒷방으로 물러났다. 여울은 혼자 이부자리에 앉아 해시 순찰이 지나가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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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어깨

도포가 벽 쪽으로 떨어지고 저고리가 그 위에 얹혔다. 여울은 누운 채 그것을 봤다. 검은 옷이 벗겨질수록 등잔불 아래 강진의 몸이 커졌다. 넓은 어깨, 검을 쥐던 팔, 땀이 흐르는 가슴. 벽에서부터 한 번도 빠져나가지 않은 것이 아직 안에서 뜨거웠다.강진이 여울의 두 다리를 잡아 제 어깨에 걸쳤다. 무릎이 접혀 여울의 가슴 쪽으로 밀렸고, 몸이 반으로 접혔다. 벽에서보다 더 깊었다. 그 깊이에서 강진이 멎었다."……전하, 이건, 하…….""뭐가."여울은 말을 못 했다. 접힌 몸 아래에서 강진의 것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배 위로 알 것 같았다. 강진이 그 배에 손바닥을 얹었다."여기까지 왔군."손바닥이 눌렀다. 안에서 강진이 움직였다. 밖에서 누르고 안에서 밀어 올려서 여울은 소리를 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아, 흐, 하아……!"닷새 만이었다. 그 닷새 동안 몸이 강진을 잊은 게 아니라 기다렸다는 것을, 안이 저 혼자 강진의 것을 조여 무는 것으로 여울은 알았다. 뭐야, 이게. 얼굴이 달아올라 팔로 눈을 가렸다. 강진이 그 팔을 걷어 냈다."기다렸느냐."벽에서 한 물음이었다. 여울은 고개를 저었다. 저으면서 안이 물었다. 강진이 짧게 웃었다. 소리는 없었고, 웃고 나서 허리가 거칠어졌다. 어깨 위의 다리가 흔들렸고, 발끝이 허공에서 오므라들었다.강진의 손이 배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두 사람 배 사이에서 젖어 있던 여울의 것이 그 손에 잡혔다. 강진은 안에서 밀어 올리는 박자에 맞춰 그것을 쥐고 훑었다. 위에서 오고 앞에서 왔다. 여울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하, 안, 안 돼, 전하, 흐읏……!""안 되는 게 어디 있느냐."여울의 것이 강진의 손 안에서 먼저 쏟아졌다. 흰 것이 제 배와 강진의 손등에 튀었다. 쏟으면서 안이 세게 조여들었고, 그 조임에 강진이 이를 악물었다. 이 사이로 짓눌린 소리가 하나 났다. 강진은 멈추지 않았다. 여울의 안이 늘어질 때까지 밀어 올렸고, 늘어진 뒤에도 밀어 올렸고, 어깨 위의 다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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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진맥

"처분이 정해졌습니까.""그것은 나도 모르오. 몸 상태를 먼저 기록하는 절차요."여울은 다시 앉아 무릎 위의 옷자락을 폈다. 허운은 맞은편에 앉아 상자에서 작은 베개를 꺼냈다.오른손을 올리자 짧은 소매 밑으로 손목이 드러났다. 손가락 모양의 멍이 누렇게 바래 가고 있었다. 허운은 그 자국 옆에 손가락을 대고 맥을 짚었다.마당을 쓸던 단이의 빗자루가 멎었다. 봉수는 문 옆에서 내려오지 않았다.허운이 고개를 들자 옷깃 위의 상처도 보였다. 굳어지는 얼굴을 여울이 살폈다. 여덟 해 동안 이 사람에게 진맥을 받았지만, 이런 표정은 낯설었다."무슨 병이 있습니까.""열은 없소. 왼손도 내주시오."허운은 다른 손목을 좀 더 오래 짚었다. 손을 놓은 뒤 작은 베개를 상자에 넣었다."여전히 죽만 드시오?""예. 밥은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잠은 어떻소.""여기 와서는 잡니다."여울이 소매를 당겼다. 손목을 덮기에는 짧았다. 허운은 상자 뚜껑을 닫다가 손을 멈췄다.선왕의 기침을 살피러 영수전에 들 때마다 곁방에도 왔다. 여울의 손목은 오래 짚어 보아 익숙했다. 전에 없던 멍을 알아보는 데는 맥을 짚을 필요도 없었다."선왕 때는—"말을 꺼내자 여울의 손이 무릎 위에서 포개졌다. 허운을 마주하던 눈이 그 손으로 내려갔다.허운은 단이 쪽을 돌아보고 말을 거두었다. 여울은 소매를 더 끌어 내리고 있었다."지금 말하기 어려우면 나중에 합시다."여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허운은 상자를 든 채 일어서려다 다시 내려놓았다."다친 곳이 아직 아프오? 손목 말고도.""괜찮습니다.""움직일 때 불편하면 봉수를 통해 내의원에 알리시오.""예."허운은 더 묻지 않고 상자를 들었다. 봉수가 그를 담 밖까지 배웅했다. 돌아와서는 마루 옆에 놓인 빗자루를 벽에 세웠다."어른, 병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다친 데를 걱정하신 겁니다."여울은 손목을 문지르려다 멈췄다. 봉수가 옆에 앉아 당겨진 소매를 펴 주었다.—내의원으로 돌아온 허운은 색적자 진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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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차

여울이 마루에서 내려섰다. 봉수가 문 옆에서 한 걸음 나왔다."색적자는 거처 밖으로—""마마의 부르심이다."봉수가 입을 다물었다. 최령이 돌아서서 걸었고 여울이 따라갔다. 봉수는 따라오지 못했다. 담 셋을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엎드렸다. 색적자에게가 아니라 대비전 상궁에게 엎드리는 것이었다. 여울은 그 사이를 걸었다.마루가 넓고 문이 높은 자경전의 문을 최령이 열자 안에서 차 냄새가 났다."들어가라."여울이 문 안쪽에서 엎드리려는데 최령이 말했다."서 있어라."여울은 굽히던 허리를 폈다.대비는 흰 상복 차림으로 방 안쪽에 앉아 있었다. 최령처럼 머리를 빈틈없이 매만졌고, 여울이 들어와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찻잔에 차를 따랐다. 상에는 잔이 하나뿐이었다.한 모금을 마신 뒤에야 찻잔을 내려놓고 여울에게 눈을 들었다."네가 그 아이냐.""예.""이름이.""하여울입니다.""여울."대비가 그 이름을 한 번 입에 올리고 차를 마셨다. 앉으라는 말은 없었다. 여울은 찻상에서 열 걸음 넘게 떨어진 문 안쪽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대비가 하나뿐인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따랐다."……쯧. 닮지도 않았구나."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와 닮지 않았다는 건지 대비는 말하지 않았고 여울도 묻지 않았다.대비의 눈이 여울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얼굴에서 발끝까지, 다시 얼굴로. 올라오던 눈이 목에서 멈췄다. 옷깃이 다 덮지 못한 자리였다. 여울은 손을 올리지 않았다."그건.""…….""진이가 냈느냐.""예."대비가 찻잔을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다."몇 살이냐.""스물여섯입니다.""열여덟에 들어왔지.""예.""열여덟."대비가 그 말을 또 입에 올리고 차를 마셨다."진이도 열여덟이었다. 그해에. 시강원 뒤뜰에서 같이 크던 애가 제 아비 침전으로 갔지."여울은 숨을 바꾸지 않았다. 그 이름을 이 궁에서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였고, 그 하나가 지금 여울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서 있느라 힘드냐.""아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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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빈 잔

"예.""고향이 어디냐.""북도 물목마을입니다.""서리의 아들이."대비는 거기서 말을 끊고 빈 잔에 눈을 내렸다가 다시 여울에게 올렸다."서리의 아들이 침전에 들어 여덟 해."선왕께서 부르셨다는 대답은 삼켰다. 대비 앞에서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나는 중궁전에 스무 해 넘게 있었다. 그동안 그 사람이 중궁전에 온 게 몇 번인지 아느냐.""모릅니다.""얼마 안 된다. 안 올 줄 알면서도 상을 차리고 기다렸다."대비가 빈 잔에서 눈을 들어 여울을 마주했다. 여울은 피하지 않았다. 선왕의 무릎에 기대어 조정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 방에서는 저 사람이 기다렸을 터였다. 무릎 앞에 모은 손을 더 깊이 감췄다."할 말이 없느냐.""없습니다.""변명도.""없습니다.""……그 사람이 너를 어찌 대했느냐."질책을 기다리던 여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소중히 대해 주셨습니다."대비는 입술을 다문 채 여울의 목을 다시 살폈다."그 사람은 너한테 저런 걸 남긴 적이 있느냐.""…….""물었다.""없습니다.""여덟 해 동안.""없습니다."대비는 한참 말이 없었다. 여울의 목에 머물던 눈길이 빈 찻잔으로 내려갔다. 잔을 쥔 손가락이 움직였으나 들어 올리지는 않았다."그래.""…….""그랬겠지."대비가 잔을 입에 댔다가 비어 있는 것을 알고 내려놓았다."가 보아라."여울이 절을 하고 일어서서 문 쪽으로 돌아섰다. 최령이 문을 열었다. 문턱을 넘는데 뒤에서 대비가 불렀다."여울아."여울이 멈췄다.그 사람이 축시에 벽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로 부르던 대로였다. 대비의 목소리는 그 목소리와 닮지 않았는데, 끝을 조금 내려 부르는 법이 같았다."아까 국화 이야기를 했지.""……예.""그해에 뜰지기가 심은 게 뭐였는지 아느냐.""모릅니다.""맨드라미였다."여울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비도 더 하지 않았다. 최령이 문을 닫았다.—돌아오는 길에도 최령의 걸음은 늦춰지지 않았다. 담 하나를 지났을 때 앞서 걷던 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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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목마름

여울은 굽히던 무릎을 펴고 섰다."자경전에 갔다 오는 길이오?""예.""혼자.""최 상궁께서 여기까지 데려다주셨습니다."서율은 여울의 얼굴을 오래 살피다가 옷깃 밖의 자국에 눈을 멈췄다. 칼집에 얹은 손이 굳었다. 걱정만으로 보기에는 너무 가까이 다가선 터라 여울은 반걸음 물러났다. 궁 안에서 저를 그런 눈으로 대하는 사람이 드물지는 않았다."안색이.""…….""자경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소."서율 뒤의 군사들까지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대비가 빈 잔을 입에 대던 일을 이들 앞에서 옮길 수는 없었다. 여울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차를 못 얻어 마셨습니다."서율이 말을 잃었다. 뒤에서 군사 하나가 소리를 냈다가 참았다."……허. 차를.""예. 찻잔이 하나였습니다.""그래서 안색이 그렇소?""목이 말랐습니다."서율이 군사 쪽으로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여울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물을 가져오라 하려던 참이오.""저 문만 열면 제 그릇이 있습니다."여울이 쪽문을 가리키며 웃었다. 묶은 머리에서 빠져나온 잔머리가 뺨에 붙어 있었다. 서율은 그것을 떼어 주려던 손을 칼집에 내려놓았다."잠깐 서서 마시고 가면 되지 않소.""찬 물 한 그릇인데, 군사까지 달리게 하십니까."서율은 대답 대신 같이 웃었다. 문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붙들어 두고 있었다. 여울은 기다려 주었으나 더 나눌 말은 서율 쪽에서 찾지 못했다.서율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자 길이 났다."가시오.""예."여울이 지나갔다. 서율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울이 서별당 쪽문까지 갔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따라왔다."물은 있소?"여울이 돌아봤다."예. 우물이 담 밖에 있습니다.""그러면 됐소."군사들의 발소리가 나란히 멀어졌다.—쪽문으로 들어서니 단이가 마당에서 뛰어왔고 봉수가 마루에서 일어섰다. 둘 다 여울의 얼굴을 살피고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울이 마루에 앉자 봉수가 물그릇을 가져다줬다. 한 그릇을 다 마셨다. 봉수가 한 그릇 더 가져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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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돌려보내다

"어? 오라버니, 누가 두고 갔어요?"찬합 뚜껑 안쪽에 서(徐) 자가 적혀 있었다. 어제 담 앞에서 제 안색을 살피던 서율이 보낸 것이었다. 여울은 떡에 손을 뻗으려던 단이를 말리려 했다.봉수가 죽 그릇을 들고 들어오다 그것을 보고, 그릇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말했다."덮어라."단이가 덮었다."어디서 났느냐.""쪽문 밖에 있었습니다."봉수는 죽 그릇을 마루에 놓고 찬합을 보자기로 도로 싸서 매듭을 짓고, 그것을 들고 쪽문으로 나갔다. 여울이 마루에서 일어섰다."어른. 어디 가십니까."봉수는 돌아보지 않았다."도총부에 갑니다.""어른이 직접 가십니까.""제가 아니면 누가 갑니까."봉수가 나가고 여울은 마루에 서 있었다. 죽에서는 김이 더 나지 않았다.봉수는 한 시진 뒤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마루에 올라와 앉아 다리를 펴면서 끙 소리를 냈다."돌려드렸습니다. 도총관이 안 계셔서 부장한테 맡겼습니다. 도총관이 색적자한테 정을 주면 도총관이 죽는다고, 그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여울의 눈이 봉수에게 꽂혔다."그 말을 어른이 하셨습니까.""제가 했습니다.""부장 앞에서 하셨습니까.""예.""군사들도 있었겠지요.""글쎄요, 넷인가 다섯인가."여울은 마당으로 내려섰다가 봉수 쪽으로 돌아섰다. 광대뼈 위가 붉었다."어른.""예.""그러면 어른은 어찌 됩니까."봉수가 대답하지 않았다."도총관이 정을 주면 도총관이 죽는다고, 그 말을 도총부 한가운데서 하셨지요. 그러면 어른은 뭡니까. 여덟 해 동안 죽을 나르고, 곁방에 두라는 선왕의 명이 있다고 상선께 거짓말하고, 오늘 도총부까지 걸어가서 돌려주고. 그건 정이 아닙니까.""…….""어른이 죽으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목소리가 컸다. 단이가 마당 구석에서 빗자루를 놓쳤다. 여울은 제 목소리를 듣고 멈췄다. 봉수에게 목소리를 높인 것은 처음이었다.봉수는 마루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 얼굴로 여울을 보다가, 한참 있다가 말했다."저야 벌을 받더라도 저 하나로 끝납니다.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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