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형수는 내게만 허락돼: Chapter 51 - Chapter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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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처음 이긴 날

“문유건, 나랑 약혼한 날이 그렇게 기뻤어? 사랑해서가 아니라 형을 이겨서?”세령의 질문에 유건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안 나온다며 큰소리치던 남자가 ‘내가 처음 이긴 날’이라는 암호 힌트 앞에서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뭐라는 거야. 누가 그걸 약혼 날짜래?”“아직 아무도.”세령은 태블릿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도는 화면을 들여다보다 유건에게 물었다.“둘째 형, 어릴 때 내가 상 하나 받아오면 뭐랬는지 기억나?”“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큰형은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데, 자긴 한 번도 못 이긴다고 했잖아. 아버지가 큰형 칭찬할 때마다 형은 이길 날만 기다렸고.”유건의 얼굴이 굳었다. 태겸은 동생을 바라봤지만 끼어들지 않았다.“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형한테 처음 이겼다고 떠들던 날이 있었잖아. 약혼 발표하고 들어온 날.”세령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약혼을 발표한 날, 유건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오늘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남자야.’그녀는 웃으며 그의 목을 감았고, 유건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이마에 입을 맞췄다.그날 행복했던 건 분명했다. 유건은 차 안에서도 세령의 손을 놓지 않았고, 사람들 앞에서 너무 들떴다며 쑥스러워했다. 세령은 그가 자신과 함께 살 미래를 상상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지금 이도는 같은 날을 ‘이긴 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와 사랑을 약속하는 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얼굴부터 떠올렸다는 뜻일까. 속이 뒤틀렸다.“이도야. 확인해.”“형수님, 틀리면 바로 멈출게요.”유건이 손을 뻗었다.“야, 하지 마. 내 파일일 수도 있다며! 남의 자료를 왜 멋대로 열어?”세령이 그의 앞을 막았다.“당신 이름 붙은 폴더에 내가 왜 버림받았는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안에 사적인 자료가 있으면 그건 보지 않을게. 대신 먼저 확인할 거야.”“그게 말이 돼? 내 허락은?”“내 허락 없이 형한테 내 말을 대신 전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허락 타령이야?”태겸이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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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형의 전화 백업

“열지 마. 그건 형 전화잖아!”유건이 태블릿으로 손을 뻗었다. 세령은 기기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파일 이름은 ‘T_phone_backup’. 정작 전화 주인인 태겸은 가만히 있는데, 유건만 숨이 찼다.“문유건, 네 백업 폴더에 왜 아주버님 전화 자료가 들어 있어?”“해외 나간 형 대신 관리했잖아. 백업해둘 수도 있지.”“그럼 같이 확인하면 되겠네.”“당신은 왜 날 도둑놈 취급하는데!”“안 훔쳤으면 손부터 뻗지 마. 내가 직접 볼 거야.”이도가 둘 사이에 손바닥을 들었다.“형, 기계 부수면 새것 사주면 끝이지만, 7년 전 기록은 못 사. 제발 얌전히 있어.”“넌 네 형수 편이라며 온갖 참견 다 하더니 이제 기술자 놀이냐?”“아뇨. 오늘은 파일이 형보다 말을 잘할까 궁금해서요.”세령은 태블릿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의자를 바짝 당겼다. 방금 전까지 유건의 손아귀로 넘어갈 뻔한 기계였다. 화면이 꺼질까 봐 충전선까지 다시 확인하는데, 옆에 선 태겸이 손을 뻗었다가 거뒀다. 세령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있으라고 했던 말을 지키는 몸짓이었다. 누가 대신 만지고 대신 판단하는 일만은 더 견딜 수 없었다.세령이 화면을 누르자 오래된 백업 항목들이 펼쳐졌다. 저장된 연락처, 동기화 날짜, 메시지 목록. 일부 내용은 빈칸이었고 삭제 표시가 붙은 대화도 있었다. 하지만 주고받은 방향과 시각은 남아 있었다.세령은 목록을 훑다 이도를 돌아봤다.“이 목록, 나중에 지워질 수도 있어?”“기계가 멀쩡하다는 보장도 없죠. 지금 보이는 화면부터 촬영해둬요. 원본은 건드리지 말고.”세령은 자기 휴대전화로 목록을 찍었다. 예전 같으면 손이 떨린다며 대신 찍어주겠다고 나섰을 남자였다. 오늘 세령은 그에게 휴대전화를 맡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받는 사람, 한세령.발신 번호, 태겸의 국내 번호.세령이 이별 문자를 받았던 바로 그날이었다.“내용은 없네.”목소리가 떨리자 이도가 조심스럽게 답했다.“네. 삭제된 항목이라 문장까지는 확인 안 돼요. 그런데 보낸 시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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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첫 번째 자백

“내가 보냈어. 됐어? 형 대신 그 문자 보낸 사람, 나라고!”유건의 고함이 별장 2층 빈방을 갈랐다. 세령은 태블릿을 쥔 채 움직이지 못했다. 남편은 증거가 있느냐며 비웃더니, 태겸의 비행 기록과 발신 시각이 맞아떨어지자 마침내 자백했다.“다시 말해. 누구 전화로 뭘 보냈다고?”“형 국내 휴대전화. 내가 가지고 있었어. 그날 네게 헤어지자는 문자 보낸 것도 나야.”이도마저 입을 다물었다. 태겸도 굳어버렸다. 탁자의 비행 기록과 문자 캡처가 비로소 하나로 이어졌다. 불륜이 결혼 뒤의 배신이었다면, 이 문자는 결혼의 시작을 뒤흔든 배신이었다.“너 지금까지 날 보면서 그 문자를 모른 척한 거야?”“말하려고 했어. 몇 번이나.”“몇 번? 신혼여행 갈 때? 내가 첫사랑 생각나서 미안하다고 울었을 때? 당신이 나더러 이제 행복해지라고 안아줬을 때?”유건은 대답하지 못했다. 세령은 그날 밤 남편 품에서 스스로를 탓하며 울었던 기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세령은 캡처를 펼쳤다.‘더는 기다리지 마. 우린 여기까지야.’이 두 줄을 읽던 날, 세령은 전시장 뒷문 앞에서 새벽까지 서 있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몇 번이고 답장을 쓰다 지웠다. 태겸이 자신을 버렸다고 믿은 뒤에야 유건의 위로를 받아들였다.“내가 그걸 읽고 어떻게 됐는지 알아?”“세령아, 그땐 나도 제정신 아니었어.”“나는 멀쩡했을 것 같아? 당신이 써놓은 이별 통보 때문에 밤새 울었어. 그다음 날 당신이 차 사 들고 왔을 때, 나는 당신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유건이 한 걸음 다가왔다.“그건 진심이었어. 네가 울어서 마음이 아팠어.”“울린 놈이 아파? 와, 그럼 상처 준 사람이 약까지 팔아먹은 거네.”이도가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라면 능청스럽게 거들었겠지만 이번엔 형수의 떨리는 손만 바라봤다.“딱 한 번이야.” 유건이 급히 말했다. “그 문자 하나. 화가 나서 보냈어. 형은 네가 그리워 죽겠다는 사람처럼 굴다가 집안일 생기니까 다 놓고 떠났잖아. 넌 그런 형만 기다리고.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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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양쪽을 끊은 사람

“몇 번 지웠어. 세령이가 형한테 보낸 문자도…… 내가.”유건의 자백이 끝나자 세령은 손에 쥐고 있던 태블릿을 놓칠 뻔했다. 한 번, 화가 나서 보냈다던 이별 문자.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7년은 무너졌는데, 남편은 이제 자신이 보낸 말까지 없앴다고 했다.“몇 번이라고?”“그때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네가 형만 찾으니까…….”“몇 번인지 물었잖아!”유건이 입술을 깨물었다. 세령은 그가 더듬는 변명조차 기다려줄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결혼 후 함께 보낸 4년보다 훨씬 오래전의 밤이 먼저 들이닥쳤다.그날 아침까지도 세령은 태겸을 의심하지 않았다. 전시가 끝나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고, 태겸은 세령이 좋아하는 차를 들고 나오겠다며 웃었다.‘이번엔 내가 먼저 기다릴게. 네가 늦으면 더 오래 보고 싶었던 셈 치지 뭐.’그 말이 좋아 세령은 전시장 출입문을 돌아봤다. 그런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등을 돌렸다고 믿어야 했던 것이다.전시장이 문을 닫고 모두 떠난 뒤, 세령은 입구 계단에 앉아 휴대전화를 붙잡았다. 태겸이 연락을 끊었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만 만나서 얘기해요’라는 문장을 썼다. 보내고 후회했다가, 답이 없어 다시 화면을 켰다. 바보처럼 새로고침하던 손가락이 아직도 기억났다.그때 그 문장들이 태겸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지워졌다면. 세령은 화면을 읽지 못한 그가 자신을 외면했다고 원망했고, 태겸은 직접 듣지도 못한 이별 통보를 그녀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그럼 내가 마지막으로 보낸 ‘기다릴게요’도 봤어?”유건은 눈길을 내렸다.“정확히 뭐라고 썼는지는…….”“내용도 기억 안 나면서 지울 땐 안 미안했어? 내가 그 한 줄 보내려고 얼마나 망설였는지 알아?”유건이 다가오려 하자 세령은 책상 모서리를 짚고 버텼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조차 이제는 입 밖으로 내기 지쳤다.“나는 당신이 날 위로하는 줄 알았어.”세령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내가 그 사람 기다린다고 울면 따뜻한 차 사 오고, 밤새 전화해주고. 자긴 안 떠날 거라고 했지. 그런데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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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형이 못 가진 여자

“형이 처음으로 원한 걸 내가 가졌어.”낯익은 남편의 목소리가 별장 2층 객실을 갈랐다. 세령은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음성 파일을 내려다봤다. 방금 임라온이 보낸 파일이었다. 불과 몇 분 전, 유건은 세령이 태겸에게 보낸 문자까지 지웠다고 자백했다. 그런데 그 뒤에 이런 말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녹음 속에서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취기가 오른 유건이 웃었다.“맨날 형이 먼저였잖아. 그런데 세령이는 내가 가졌어. 이번엔 내가 이겼다고.”재생이 끝났다. 유건이 달려들 듯 손을 뻗었다.“누가 보낸 거야? 라온이야? 그 여자 말 듣지 마. 술 취해서 헛소리한 거야!”“손 치워. 아직 안 끝났어.”세령이 재생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유건은 자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동안 입을 다물었다. 술잔을 부딪치며 웃던 그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이번에도 기억이 안 나? 아니면 라온이가 네 입에 대사를 넣었어?”“내가 취했었다고 했잖아!”“술 취하면 속에 없는 말도 나오는구나. 참 편리한 술이다. 거짓말할 때마다 마시면 무죄겠네.”세령은 파일 아래 이어진 라온의 문자를 읽었다.[변명할 자격 없는 거 알아요. 그날 저 말을 듣고 저도 관계를 끝내려고 했어요. 결국 못 끊은 것도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세령 씨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람이 뒤에서는 저런 식으로 자랑했다는 건 아셔야 할 것 같았어요.]세령은 재생을 멈춘 뒤 라온의 이름을 바라봤다. 그 여자에게 고맙다고 할 생각은 없었다. 남의 남편을 만난 사람이 늦게 진실을 보냈다고 그 밤들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녹음 속 유건의 목소리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이도는 유건이 세령에게 일부러 접근했다는 걸 알고 있었고, 태겸은 다른 말을 전달받았으며, 라온은 남편이 술에 취해 자신을 어떻게 자랑하는지 듣고 있었다. 정작 세령만 제 결혼의 첫 페이지에 어떤 말이 적혀 있는지 몰랐다.“문유건. 나랑 결혼한 게 형한테 이긴 일이었어?”“아니야. 처음엔 형이 좋아한다니까 궁금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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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반지를 놓다

“한세령, 우리 결혼을 끝내겠다고? 이 반지 하나 빼놓으면 내가 네 남편이었던 4년까지 없어져?”유건이 탁자 위의 반지를 움켜쥐었다. 조금 전 세령이 목걸이에서 빼놓은 결혼반지였다. 라온이 보낸 녹음 파일은 아직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었고, 태블릿에는 7년 전 지워진 문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없어진다고 한 적 없어. 잊을 수 없어서 내려놓는 거야.”“그럼 다시 껴. 우리 좋았잖아. 당신 그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내가 알아.”유건은 반지를 손끝에 끼운 채 세령의 왼손을 잡으려 했다. 세령은 양손을 등 뒤로 감췄다.“손 치워.”“여보. 한 번만, 제발. 내가 처음 반지 끼워준 날 기억나지? 사이즈 틀릴까 봐 전날 밤새 잠도 못 잤잖아.”기억났다. 약혼 발표를 마치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유건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이 손은 평생 내가 잡을게. 늙어서 주름 생겨도 제일 예쁘다고 할 거야.’세령은 그 말을 듣고 먼저 입을 맞췄다. 지금 떠올려도 거짓이 아닌 행복이었다. 결혼식 당일에는 유건이 긴장한 탓에 서약문을 한 줄 건너뛰었고, 세령이 작게 웃자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내가 매일 다시 청혼할게. 오늘 틀린 건 내일 만회하면 되지.’세령은 그 말을 평생 믿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자랑하던 승리의 상대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라는 걸 이제 알았다.“그날 내가 웃었던 거 알아. 그래서 더 미워. 내가 당신을 선택했다고 믿은 날, 당신은 형을 처음 이겼다고 생각했잖아.”“그건 술 취해서 한 말이야!”“아까는 사랑했다더니, 이제는 술이야? 문자를 보낸 건 화가 나서 한 번, 지운 건 몇 번, 바람은 정리 중. 당신 잘못은 왜 늘 날짜랑 횟수만 줄어들어?”유건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가 흔들렸다. 그는 태겸을 노려봤다.“형은 좋겠어. 내가 이렇게 망가지니까 세령이 마음이 형한테 돌아가잖아.”“유건아, 그 반지 내려놔.”“형도 탐났잖아! 이 여자가 내 아내가 되기 전엔 형 여자였으니까!”세령이 탁자를 손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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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더 있다는 말

“제 결혼이 거짓말로 시작된 것도 모자라, 어머님은 아직 숨긴 게 더 있다는 거예요?”세령은 가방 손잡이를 붙든 혜란의 손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과거는 묻어두라던 시어머니였다. 그런데 반지를 내려놓고 떠나려 하자 그제야 모르는 이야기가 더 있다고 했다. 세령이 입었던 웨딩드레스의 단추를 직접 잠가주고, 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웃으라며 손을 잡아주었던 여자였다. 그 손이 지금은 가방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놔주세요.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시고요.”혜란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복도 끝을 살폈다. 정혁과 세 아들이 모두 서 있었다. 그녀는 누가 듣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였다.“오늘은 안 된다. 이번 주말 모임만 끝내자. 그다음에 내가 조용히 설명하마.”세령은 웃음이 터졌다.“또 기다리라고요? 저는 7년 전에 태겸 씨를 기다렸어요. 답장이 안 와서, 전화도 안 받아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새벽까지 기다렸다고요. 이번엔 어머님 차례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해요?”“며느리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사람들이 모인 집에서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하니?”“그럼 사람이 없으면요? 그때는 말씀하실 거예요? 아니면 다음엔 명절 끝나고, 그다음엔 제 생일 지나고?”유건이 급히 다가왔다. 손에는 방금 세령이 내려놓은 반지가 쥐어져 있었다.“여보, 엄마가 말해주신다잖아. 오늘만 좀 쉬자. 당신 밤새 못 잤잖아. 내가 차도 끓여주고—”“문유건. 그 반지 다시 내밀지 마.”그가 손가락을 오므렸다. 예전 같으면 세령이 피곤한 날 먼저 이불을 덮어주며 ‘우리 마누라, 오늘은 생각도 쉬어’라고 장난치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다정함조차 진실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손처럼 느껴졌다.“내가 못 잔 건 차가 없어서가 아니야. 당신이 보낸 이별 문자 때문에 내 7년이 통째로 달라졌으니까.”“내가 잘못했다니까! 몇 번을 더 말해야 해?”“몇 번 사과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게 있다잖아.”정혁이 지팡이를 짚으며 끼어들었다.“세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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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태겸도 숨기는 것

“문태겸, 당신도 내 인생에서 뭔가를 지웠어?”혜란이 내뱉은 ‘네가 말하면 더 잔인해져’라는 말이 별장 복도에 남아 있었다. 세령은 시어머니의 손이 아니라 태겸의 얼굴을 봤다. 지금껏 그녀가 밝혀낸 거짓말은 모두 유건의 입에서 나왔다. 그런데 왜 혜란은 장남의 입까지 막으려 할까.“나한테 뭘 숨겼는지 물었어요.”“세령아.” 혜란이 다시 다가왔다. “태겸이는 이미 힘들 만큼 힘들었어. 그만하자.”“그럼 저는요?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이 집에서 아무도 안 궁금해요?”유건이 주먹을 쥐었다.“엄마, 형한테 뭔 얘기를 듣겠다는 거예요? 제가 한 일은 제가 인정했잖아요!”“네가 인정한 건 들킬 때마다 하나씩이었지.”세령은 태블릿이 든 가방을 발 옆에 내려놓았다. 더는 아무도 대신 쥐지 못하도록 손잡이를 발목 가까이 당겨뒀다.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 진실을 알려주면 숨을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고백 하나가 끝나면 침묵 하나가 뒤따랐다.태겸이 먼저 어머니의 손을 떼어냈다.“제가 말하겠습니다.”정혁이 미간을 찌푸렸다.“태겸아, 여기서 끝내.”“아버지. 이번에도 그 말씀 듣고 입 다물면, 전 7년 전이랑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세령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7년 전. 두 사람의 시간이 끊긴 그날을 태겸 역시 잊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유건이가 네게 이별 문자를 보냈다는 것도, 네가 내게 쓴 문자를 지웠다는 것도 난 몰랐어.”“그건 이제 알아요. 그래서 또 뭔데요?”태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네가 유건이와 약혼한 뒤, 집안에서 그 결혼을 멈추고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있었어. 내가 나서면 적어도 혼인 진행을 멈출 수 있었지.”유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뭐? 형이 무슨 자격으로 내 약혼을 멈춰?”“유건아, 지금 네 허락 구하는 얘기 아니야.”“그럼 그때 막지 그랬어! 이제 와서 형이 양보라도 해준 사람처럼 말하게?”세령은 남편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유건은 여전히 결혼을 빼앗고 빼앗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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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도 결국 나 대신 결정했네.”세령의 말에 태겸은 아무 변명도 하지 못했다. 별장 2층 복도에는 정혁과 혜란, 유건과 이도까지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세령에게 먼저 물었던 사람은 없었다. 7년 전에도, 지금도.“세령아, 난 네가 행복하기를 바랐어.”태겸의 말에 그녀가 웃었다.“행복했는지 확인은 해봤어요? 제가 유건이랑 약혼한 날, 진짜 웃고 있었는지라도 물었냐고요.”“못 물었어.”“왜요? 대답이 무서워서?”“그래.”한마디가 정직해서 더 아팠다. 세령은 약혼 소식이 퍼지던 날을 기억했다. 미래가 마지막으로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 세령은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태겸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면, 정말 끝난 사람이 될 것 같아서였다. 누구라도 그때 “네가 원하는 건 뭐야?”라고 물었다면 그녀는 울면서라도 기다리겠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세령을 대신해 답을 골랐다.예전의 태겸은 세령이 전시장에서 밤을 새우면 몰래 사과 향 차를 가져와 ‘우리 감독님, 나랑 결혼하면 야근수당은 매일 입맞춤’이라며 웃던 남자였다. 그렇게 마음을 읽어주던 사람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만 그녀의 마음을 묻지 않았다.유건이 비웃었다.“형, 이제 와서 순정남 행세 그만해. 세령이랑 결혼한 건 나야.”“문유건. 넌 지금도 승패부터 따져?”세령이 돌아서자 유건의 얼굴이 굳었다.“넌 형 번호로 날 버리고, 내가 형한테 보낸 문자까지 지웠어. 그러고는 내 앞에 나타나 평생 안 떠나겠다고 했지.”“널 사랑했으니까! 적어도 나는 네 옆에 있었어!”“네가 잘라놓은 다리 앞에서 울고 있으니까 업어준 거잖아. 그걸 사랑이라고 우기지 마.”유건은 입술을 떨었다. 결혼 첫해 세령이 감기로 앓으면 밤새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주던 손, 매일 아침 그녀가 좋아하는 반숙 달걀을 내놓던 얼굴까지 기억났다. 다정함은 거짓이 아니었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 시작에 묻은 거짓말이 더욱 잔인했다.유건은 생일이면 직접 쓴 쪽지를 케이크 밑에 숨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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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네 남편이 형을 지웠어

“문유건, 내가 버림받았다고 울던 날, 넌 내 눈물 닦아주기 전에 이별 문자부터 썼어?”세령이 태블릿을 유건 앞으로 밀었다. 복원된 기록에는 태겸의 국내 번호와 ‘더는 기다리지 마’라는 문장, 그 문장을 입력한 유건의 계정이 나란히 남아 있었다.“그거…… 내가 전에 인정했잖아. 화가 나서 딱 한 번 보냈다고.”“문자 한 번 보냈다고 했지. 나한테서 형한테 가는 말까지 지웠다는 건 몇 번인지도 못 말했잖아.”이도가 저장 내역을 펼쳤다. 빈 메시지들 옆에 남은 작업 기록이 나타났다. 세령의 번호에서 들어온 답장 몇 개, 그 뒤에 이어진 삭제 표시. 처리 계정은 같은 이름이었다.문유건.이도는 발신 기록을 눌러 오래된 동기화 정보를 펼쳤다. 태겸의 번호로 발신됐지만 기기 안에서 문장을 작성한 계정은 유건의 것이었다. 세령은 제 휴대전화에 남은 캡처와 시간을 하나씩 맞춰봤다. 숫자가 모두 같았다. 남편은 바로 옆에서 그것을 보고도 손을 뻗지 못했다.“형, 아까는 남의 이름 붙여놓은 폴더일 수도 있다며. 그럼 이 계정도 남이 쓰고, 시간까지 맞춘 거야?”“문이도, 넌 좀 닥쳐!”“닥치면 기록이 없어져? 형수님한테 설명이나 해.”“형수님, 내용 전부가 복원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건 발신 기록이고, 이건 수신된 답장을 삭제한 기록이에요. 둘 다 둘째 형 계정에서 처리됐어요.”세령은 날짜를 손끝으로 짚었다. 이별 문자를 받고도 태겸을 포기하지 못해 연락했던 밤들이었다. 읽히지 않은 줄 알았던 말들은 애초에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나 그때 ‘무슨 일인지 만나서 말해달라’고 보냈어. 기억나?”유건은 대답하지 않았다.“‘화가 났으면 나한테 화내라. 얼굴 보고 끝내자’고도 썼어. 답이 없어서 내가 너무 매달렸나 자책했지.”태겸이 그녀를 버린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걸어가던 길목에 유건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의 마음부터 의심했다.그날 세령은 전시장에서 돌아와 젖은 양말도 벗지 못한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태겸이 좋아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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