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고 도망친 그녀: Chapter 111 - Chapter 120

135 Chapters

#112. [두 번째 첫날밤이 재앙이라니]

큰일이었다. 아니, 재앙에 가까웠다.경신은 간밤에 태하에게 지독하게 시달린 탓에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지 않는 상태였고, 심지어 차림새는 얇은 로브 딱 하나뿐이었다.반면 거실에 당당히 버티고 선 태하의 부모님은 지금의 경신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귀족적이고 고급스러운 의복을 걸친 데다, 범접할 수 없이 우아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만나기 부담스러운 존재들이 하필 이런 몰골일 때 나타나다니. 경신은 이 아찔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정중하게 눈인사를 건넨 뒤, 얼른 방으로 피해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경신은 들이치는 마른한숨을 삼키며 배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태하의 부모님이 기다리는 거실 중심으로 한 걸음씩 향하는데, 콩닥거리는 긴장감 속에서 문득 배 안쪽이 작게 꿈틀거렸다.‘······태동?’혼자가 아니었다. 뱃속의 아가들까지 우리는 셋이었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 하늘이 번쩍 트이듯 아득했던 머리가 산뜻하게 개었다.주눅이 들 필요는 전혀 없었다. 자신은 이제 당당한 두 아이의 엄마였다. 엄마가 될 사람이 첫 만남부터 나약하게 기가 죽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신데렐라처럼 가련하게 동정받는 역할 따위는 질색이었다.태하의 앞길을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경신은 비로소 고개를 당당히 쳐들었다. 책에서 임신 15주에서 18주 사이에 첫 태동을 느낀다고 했는데 이번 주말이면 정확히 15주였다. 아이가 보내온 작은 신호가 거짓말처럼 그녀의 긴장을 녹여주었다.“Encantado de conocerle. Buenos días.(만나서 반갑습니다. 좋은 아침이군요.)”누가 봐도 거대 기업의 회장직에 앉아있을 법한, 풍채 좋고 여유로운 50대 후반의 중년 남성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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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짐승남과의 은밀한 추억은 안비밀]

경신이 제일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것은 음악으로 마음을 전하는 일이었다.태하는 차를 준비해 왔고, 그의 부모님은 조용히 차를 마시며 경신의 연주를 기다렸다. 태하는 오늘따라 유독 아무 말이 없었다.피아노 앞에 앉은 경신은 숨을 고르며 손끝을 건반 위에 올렸다. 가족을 잃은 위로를 건네야 하나, 아니면 자신과 태하를 긍정적으로 봐 달라는 호기로움을 표현해야 하나. 많은 고민이 경신에게 몰려왔다. 하지만 발로 콩닥콩닥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아가들을 생각하자, 단 하나의 감정이 선명해졌다.경신은 피아노를 치기 전 몸을 돌려 태하 부모님을 향해 바르게 섰다.“Gracias por cuidar a Thiago con amor(사랑으로 티아고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경신은 태하의 부모님께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태하의 부모님은 의아한 듯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경신을 응시했다. 진심으로 경신은 태하라는 사람을 가슴으로 낳아 품어준 그의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한국을 떠나 낯선 나라로 향하던 소년 태하는 얼마나 마음이 쓸쓸했을까. 하지만 외국에서 새로운 부모를 만나 당당히 재력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너무나 근사한 신사가 되어 있었다. 태하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의 부모님 덕분이었다.피아노 의자에 앉아 경신은 천천히 손을 건반 위에 두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악상을 연주하기 시작했다.장송곡처럼 무겁지도, 세레나데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연주였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손끝을 타고 흘러나왔다. 가장 어두운 순간까지 함께해 준 이들을 위한 감사의 마음이었다.화려한 기교도 없었고 감정을 긁는 코드 진행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편안하게 사랑받은 클래식 고전의 기본적인 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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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팜므파탈, 진도는 빛의 속도로]

수업이 끝나고도 제아는 정신이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날아간 경신에게 다가와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존경스러워.”이번에는 제아의 입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은 어느 부분에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남자를 단숨에 함락시키는 거야?” “하, 함락?”경신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제아를 올려다보았다.“뭘 부끄러워해? 다 큰 성인인데 키스도 하고 다른 것도 할 수 있지.”장난스러운 제아의 한마디 한마디가 경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묘한 위로로 와닿았다.자신이 오늘 아침 태하의 부모님께 건넸던 그 피아노 연주도 조금은 그분들께 위로가 되었을까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내가 태어나서 본 잘난 남자들은 왜 전부 네 옆에만 있는 걸까? 부러워 죽겠어.”누가 누구를 부러워한다는 건지 원. 하지만 지금 자신이 매일 기적 같은 날들을 쓰고 있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래. 주변에 멋진 사람들이 많아서 나도 가끔 감당이 안 돼.” “그 대단한 정기범만 해도 소꿉친구라며? 저번에 실물 보고 감탄했잖아.”기범처럼 완벽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S대 출신에 거대 로펌을 운영하는 부모를 둔 배경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고, 워낙 성품이 바른 녀석이라 미담이 넘쳐나는 것도 당연했다.“게다가 저번에 온 JJ 소속사 서정우 사장님은 또 어떻고! 완전 대박이잖아. 하늘에서 남자를 너에게 내려 줬나 봐.”과거 경신은 서정우를 진심으로 존경했었다. 늘 일에 매진하는 워커홀릭에 회사 경영 능력 또한 탁월했으니까. 두 손을 꼭 모은 제아는 이제 궁극의 남자를 언급했다.“그리고 저번에 너 데리러 왔던 그분이 사실 최고였어.”역시 태하였다.“그래, 태하 씨는······ 최고의 남자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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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짐승남과 그림자]

태하는 루이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경신은 자리에 없었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잔잔한 감흥은 여전히 거실 안에 맴돌고 있었다.루이스가 마음에 둔 며느릿감이 스페인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태하는 경신을 그녀의 부모님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었다.“Ella era una niña que vino a África contigo para hacer trabajo voluntario(그 아이가 자원봉사를 하려고 너와 함께 아프리카에 왔던 그 소녀였다니)······.”루이스의 음성이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태하 역시 카를로스와 마찬가지로 경신의 부모님을 따라 아프리카 봉사 활동을 갔다가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아프리카까지 부모를 따라와 봉사하던 꼬마 경신을, 태하의 부모님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태하는 이번에도 말문을 닫은 채 파블로가 펼쳐 놓은 서류만 들여다보았다. 오늘 태하가 집으로 오라고 초대했을 때, 파블로와 루이스는 무척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들이 양손 가득 들고 온 선물의 양만 보아도 아들의 초대가 얼마나 기뻤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지금의 부모님은 진심으로 태하와 카를로스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사랑으로 돌봐주었다. 핏줄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입양한 순간부터 언제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강조했고, 이를 몸소 실천해 온 이들이었다. 게다가 막대한 재산까지 일찌감치 상속해 주었으니, 태하로서는 대단히 운 좋게 새 인생을 선물 받은 셈이었다. 카를로스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에게 이제 태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그래서일까, 태하는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부모님과 한 공간에 있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집은 온기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었다.잠시 거실에 고요한 적요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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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 이 남자]

악몽이라면 더 괴롭기 전에 얼른 깨워야 했다. 화야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경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다행히 열은 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잠이 아니라, 방금 전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는 그 남자가 아니겠는가. 화야는 경신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얼른 일어나 보세요. 건물주님 오셨대요.” “응?”이건 뭐 거의 자동 반사 수준이었다. 번쩍 눈을 뜨더니, 아직 잠이 덜 깬 얼떨떨한 표정으로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화야는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천천히 물러나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경신에게 짐짓 눈을 흘겼다.“그분 한정으로 눈이 이렇게 번쩍 열리다니.” “태하 씨가 왜?” “간식 들고 기숙사 앞에 오셨대요. 보살님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규련 오빠한테 대신 연락이 왔더라고요.”경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슬리퍼를 꿰어 차고는 곧장 문으로 향하려 했다. 화야는 엉망이 된 경신의 몰골을 보고 기겁하며 앞을 막아섰다.“보살님, 놉! 최소한 세수하고 양치질은 하고 가세요!”역시 남자친구 있는 사람은 보는 눈이 다르네 싶어, 경신은 아차 하며 타월을 챙겨 들고 욕실로 다급히 향했다.“역시 화야, 넌 지혜의 여신이야!” “네, 네. 얼른 씻기나 하세요.”화야는 정말이지 경신을 안 깨웠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욕실에서 씻는 동안, 화야는 경신의 옷장 속에서 가장 예뻐 보이는 티셔츠와 청바지를 미리 골라 침대 위에 꺼내 두었다.경신은 빛의 속도로 양치질을 끝내고 머리까지 감은 뒤, 정갈하게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건물을 나섰다. *** 기숙사 문을 열고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기분 좋게 경신의 뺨을 스쳤다. 샤워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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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그의 취향이 쿨한 이별인가?]

태하는 확실히 경신에게 있어 이미 당첨이 보장된 로또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과분한 행운 앞에 서면 왠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고, 감히 욕심내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하는 건 왜일까.긴장이 풀려 발끝에 힘이 빠지려는 순간이었다.“잠깐만.” “네?”태하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여유로움 대신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잠시 뒤에, 네가 실망할지도 몰라.”갑자기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실망이라니. 혹시 우리의 관계를 딱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으려는 걸까. 여태껏 태하에게서 이토록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본 적이 없었기에 경신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언제나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처럼 다정했던 남자가 왜 갑자기 얼어붙은 걸까.‘······밤을 함께 보냈어도 미래는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걸지도 몰라.’제대로 자신과 선을 그으려고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건 아닌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방금 전까지 흐르던 달콤한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히는 밀도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경신은 전혀 웃음기가 없는 태하를 설핏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태하는 에스코트하듯 경신을 조수석에 태운 뒤, 가만히 안전벨트를 매어주고는 시동을 걸었다. 미끄러지듯 출발한 차는 어둠이 짙게 깔린 교정을 가로질렀다. *** 차창 밖은 이미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곳곳에 가로등 불빛이 켜져 있었다. 똑같은 나무, 똑같은 건물, 늘 같은 시간에 마주했던 것들이 오늘따라 유독 특별하게 여겨졌다. 태하의 차는 기숙사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학부생들이 머무는 관악사 건물을 지나 차가 멈춰 선 곳은 조용한 운동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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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아방가르드한 매력적인 그대]

늦은 시각, 정민은 잠시 JJ로 찾아온 정기범과 마주 앉아 있었다.도윤과 현수는 자리에 없었다. 기범의 피처링 파트만을 집중적으로 체크하는 자리였기에, 스튜디오 내부를 채운 인원은 적었고 분위기는 제법 오붓하면서도 조용했다.정기범은 완벽하게 다려진 번듯한 블랙 슈트 차림이었다. 그는 여전히 먼저 말을 건네는 법 없이, 입을 다문 채 딱딱하고 서늘한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묻혀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흘러나오는 아우라만큼은 단연 압도적이었다.“와, 가창력이 너무 좋아요. 랩은 물론이고 박자감이 아주 대단해요.”옆에 있던 평소 조용한 보컬 실장 김기린이 녹음된 음원을 헤드폰으로 들으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그동안 정민은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정기범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지난번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표정도 살아 있던데.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 같았어.’그때, 가만히 헤드폰 소리에 집중하던 정기범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정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파트 괜찮네요. 감사합니다.”나지막하고 묵직하게 낮게 깔리는 음성. 옆에 다른 스태프가 있어서일까, 그가 평소와 달리 정중한 태도로 대답해 주자 정민의 눈에는 그가 한층 더 남달라 보였다.물론 알고 있었다. 저 남자가 경신을 바라볼 때의 그 아득하고 깊은 눈빛과, 자신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던지는 시선의 온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한때는 MH로 넘어가 태하를 차지하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깨끗이 접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MH에 들어가 경신과 비교당하며 비참해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그때, 김기린이 정민 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정민 씨, 기범 씨 파트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어차피 피처링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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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그냥 내게 와 줘, 제발]

“부모님께 해준 연주, 고마웠어.”태하는 경신이 자신의 양부모님께 진심을 담아 피아노를 연주해 드렸던 것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마움을 되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제가 말로 마음을 표현하기엔 조금 서툴러서 그랬어요.” “충분했어.” “앞으로 내가 태하 씨에게 잘해 줄게요.”태하는 물끄러미 경신을 바라보다가, 이내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네 존재만으로도 충분해.”갑자기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거대하고도 치명적인 고백을, 그는 참 무심하도록 나직한 목소리로 툭 뱉어냈다. 태하는 얼굴과 달리 손이 거칠고 투박했었다. 특히 손가락 끝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뜨거운 열정과 피나는 노력이 손끝에 고스란히 훈장처럼 남아 있었다. 경신은 그 거친 손끝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태하 씨, 정말 대단해요. 앞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를 꼽으라면, 태하 씨를 무조건 세 손가락 안에 넣을 거예요.”그 말에 태하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세 손가락?”숫자를 묘하게 의식하는 눈치였다. “하하! 쇼팽이랑 바흐, 그리고 태하 씨!”그제야 나름대로 납득했는지 태하가 만족스러운 듯 피식 웃었다.그는 조금 민망하고 멋쩍은지 시선을 돌리며 포크로 과일을 콕 집어 먹었다. 이 전위 예술을 표방한 도시락은 보기엔 완전히 으깨져 볼품없고 먹기에도 불편했지만, 맛 하나는 기가 막혔다. 최고급 식재료를 이토록 파괴적인 비주얼로 창조해 내기도 쉽지 않겠지만, 눈을 감고 먹으면 그만이었다.“미안, 비주얼이 이래서.” “상관없어요.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똥이······.” “뭐?” “아니에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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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찰칵! 반칙 같은 오늘]

사진 찍는 소리가 들리자, 경신은 자신도 모르게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저 멀리, 여학생들이 밤하늘의 달을 찍고 있었다.그러고 보니 구름속에서 아련하게 내밀고 있는 달이 그렁그렁 빛나고 있었다.“오늘, 밤이 왜 이리 밝은가 했더니 보름인가 봐요.” “예쁘네. 달도 너도.”태하의 그 말에 경신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자신도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저도 오늘을 기억하고 싶어요.”손수 만든 도시락, 근사한 연주, 그리고 반지 선물까지. 경신은 오늘 느낀 이 벅찬 감동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사진도 몇 장이나 남겼다.“Iré a Hong Kong y arreglaré mi empresa, iré a España y volveré(홍콩에 가서 회사를 정리하고 스페인에 갔다가 올게).”어쩐지 큰 행사를 마쳤는데도 옷을 갈아입지 않고 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경신을 배웅하고 나면, 태하는 이 길로 곧장 공항으로 향할 터였다.“태하 씨, 정말 대단한 하루였어요.” “나도.”헤어지자는 통보일 줄만 알았던 밤이 이런 역대급 반전으로 이어질 줄이야. 경신은 벅차오르는 기분을 숨기지 않고 마음속에 있던 말들을 쏟아냈다. 태하 덕분에 너무 행복했고 고마웠기에, 전할 수 있는 인사는 전부 다 쥐여주고 싶었다.“이렇게 바쁜 와중에 도시락까지 손수 챙겨다 주고. 최고였어요.”태하는 ‘아방가르드’라는 단어에 움찔하며 슬그머니 귓바퀴를 붉혔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차 뒷좌석에서 다른 바구니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다음도 기대해.”아이처럼 표정이 반색하며 밝아진 태하를 보며, 경신은 조만간 그의 전위 예술 같은 도시락을 다시 마주하게 될 즐거운 상상을 했다.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질 테니, 그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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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질투를 부르는 반지의 여왕]

일요일 아침,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 경신은 깨끗하게 씻고 나와 송화야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 중이었다.화야는 샌드위치도 꺼내 놓은 동시에 마른 수건을 챙겨 들고 경신의 탐스러운 갈색 머리를 손수 말려주는 정성을 보였다.“화야, 서비스가 너무 과해. 뭘 삼키는데 머리가 사정없이 흔들리니까 어지러워.”경신이 알려준 로또 번호가 무려 2등에 당첨되었으니 물론 이런 호사는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이번엔 자그마치 8천만 원이래요, 8천만 원! 하하!” “뭐? 파, 파, 팔천만 원?”하지만 그렇게 큰 액수라니. 경신 역시 입에 물고 있던 샌드위치를 뱉을 뻔하며 벌떡 일어났다. 화야는 조심스레 경신의 어깨를 눌러 다시 앉히고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다루듯 머리를 정성껏 말리기 시작했다. 로또가 괜히 인생 역전의 대명사가 아니었다.“지금 규련 오빠도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우리 저녁은 셋이서 근사하게 외식해요!” “와, 확실히 액수가 크긴 크네.” “덕분에 이번 어버이날 용돈에 동생들 학비, 언니 학원비까지 제가 시원하게 한턱낼 수 있게 생겼어요.”내심 1등이었다면 인생의 항로가 통째로 바뀌었을 텐데 싶다가도, 과유불급이라 했으니 이 또한 예정된 운명일 것이라 여겼다.다만 경신은 전생의 기억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이 있는 데다, 앞으로 닥쳐올 위기 역시 비슷한 궤도로 흘러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마냥 해맑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나중에 내가 아기들과 편히 살 집 한 채 마련하는 것에만 집중하자. 정당하게 내 능력으로 벌면 되니까.’물론 태하라는 거대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 처지라, 그가 자신과 아이를 온전히 받아들여 준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질 것 같았다.하지만 연애를 하다가 태하가 자신에게 실망해 마음이 멀어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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