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고 도망친 그녀: Chapter 121 - Chapter 130

135 Chapters

#122. [비상, 그 남자가 필요한데]

서정민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과거 잠깐 스쳤던 도윤이 왜 하필 저 꼴 보기 싫은 현수 옆에 붙어 있는지, T.K라는 베일에 싸인 천재 작곡가가 어째서 태하 단독이 아닌 건지.게다가 슬쩍 보고 재미로 찔러 본 정기범은 왜 이리 제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지.화면 속 경신의 자태는 지독하게도 아름다웠고, 편곡된 곡은 완벽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 속이 비틀렸다. “악보도 없이 즉석에서 이런 어레인지를 해내다니, 경신 양은 정말 천재예요. 곡의 풍미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김 실장님?” “동감입니다, 봉 프로듀서님. 두 사람의 음색에 맞춰 톤을 영리하게 조율했더군요. 가창력이 무기인 DY와 수의 장점이 극대화되도록 음역대를 높여서 곡의 밀도가 풍성해졌어요.”평소 말수 적던 김기린마저 감탄을 숨기지 못한 채 봉선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두 사람의 찬사는 서정민의 귓가에 송곳처럼 박혔다. 오빠이자 JJ 엔터의 수장인 서정우가 지독하게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고, 배다른 동생인 자신을 남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는 냉혈한이었다. 애초에 서정민에게 반론할 권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자리에 함께한 안무가 스테파니 역시 흥분한 기색으로 서정우를 돌아보았다.“사장님, 비트가 빨라지고 섹시한 무드가 강해져서 안무도 훨씬 화려하게 짤 수 있겠어요. 이건 무조건 올여름 차트를 씹어 먹을 메가 히트곡이에요.”주변의 열띤 반응이 이어질수록 서정민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토트백에서 팩트를 꺼내 들어 피부 위로 파우더를 거칠게 덧발랐다.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 탓에 안 그래도 날 서 보이던 눈매가, 미간을 찌푸리자 걷잡을 수 없이 표독스럽게 변했다.금발의 긴 웨이브 헤어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그녀가 얼어붙어 있는 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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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화려함 뒤에 숨은 불협화음]

JJ 엔터테인먼트가 보유한 최고급 VIP 숙소 20채 중 한 곳의 주인이 어제부로 바뀌었다.기존 거주자였던 외국인 멤버 로이가 파격적인 조건으로 미국 현지 대형 기획사인 T사와의 이적 계약을 체결하며 이곳을 비우게 된 덕분이었다. 로이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 가도를 달린다면 향후 JJ와 다시 손을 잡겠다는 든든한 밑밥을 깔고 떠난 길이었기에, 아티스트와 소속사 모두에게 윈윈인 경사였다.그리고 그 귀하디귀한 빈자리를 단숨에 낚아챈 다음 주인공은 바로 현수였다. 서정우 사장의 과감하고도 파격적인 전폭 지원이 아닐 수 없었다.일요일 밤, 현수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성대한 집들이가 열리자 수많은 소속사 관계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곧 출격을 앞둔 듀엣곡의 어레인지를 T.K.가 맡아준다는 소식까지 더해져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고, 현수의 주가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치솟는 중이었다.게다가 최근 서정우 사장의 지독한 관심이 온통 현수에게 쏠려 있는 터라, 그녀는 명실상부한 JJ의 최고 히로인으로 급부상했다.마르고 슬림한 체형을 유독 선호하는 서정우 사장은 요즘 관리가 아주 훌륭하다며 현수에게 대놓고 칭찬을 건네는가 하면, 가창력에 물이 올랐다는 감탄까지 연발했다.사장의 전폭적인 푸시 덕에 VIP 숙소를 꿰차고 전속 계약까지 새로 갱신했으니, 눈치 빠른 직원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스케줄이 비는 이들마다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현수를 찾아와 축하 세례를 퍼부었다.연예계 생활 10년 만에 이토록 뜨겁고 화려한 환대를 받아보는 건 현수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폭풍 같았던 집들이 파티가 끝나고, 마지막까지 숙소에 남아 밤을 즐긴 사람은 도윤이었다. 그는 지금도 침대 위에서 현수의 가냘픈 몸을 품에 안고 달콤하게 지분거리는 중이었다.“현수 씨, 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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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위태로운 독점]

[홍콩에서 바빴어, 답장이 늦어 미안.]이렇게 답장을 받고 나니 경신은 너무 기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겨우 그의 연락이 늦은 이유가 납득이 된 경신은 이제 다른 즐거운 고민이 생겼다.답장을 바로 보낼까 말까,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가··· 계속 핸드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경신 안의 다중이들이 요란하게 날뛰는 바람에, 그녀는 핸드폰 키패드만 두드리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연애 세포가 무한 증식하고 있는 상태라 경신 자신도 스스로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나중에 너희들이 부담스러워서 태하 씨가 떠난다고 해도, 엄마는 오늘의 추억으로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아.’나름의 결론을 내린 경신은 태하에게 보낼 문자를 용기 내어 적어 보았다.[태하 씨, 잘 갔다니 다행이에요. 걱정했어]뭐라고 한마디 더 적으려던 순간, 마침 수업이 끝났는지 옆자리에 앉았던 학생이 경신의 팔을 툭 치고 지나갔다.그 바람에 손가락이 미끄러져 그만 전송 버튼이 눌리고 말았다.어쩔 수 없이 경신은 울며 겨자 먹기로 문자 한 글자를 더 보냈다.[요.]부끄러움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결국 경신은 오늘도 책상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마성의 학우님, 왜 갑자기 죽을상이야?” “애들은 가라. 언니가 ‘요’ 때문에 심란하니까.”엎드린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경신은 안중에도 없는지, 제아가 옆에서 소리를 질렀다.“학우님! ‘요’는 뭔지 모르겠지만, 그 왼손이 너무 눈부시게 빛나잖아!”경신은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제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연두색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제아의 모습이 유독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아!” “남자친구한테 받은 거야?”제아가 입에 올린 ‘남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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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마녀의 유혹에 호랑이가 넘어 갈까?]

음악 전문 방송 M사 스튜디오.생방송 녹화를 앞둔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대기실에서 나와 무대 아래 스탠바이 석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가요계에서 가장 뜨겁게 불타오르는 아이돌을 꼽으라면 단연 에스트렐라였다. 전곡이 기적 같은 역주행 신화를 쓰면서, 그들의 음악을 책임진 T.K.의 명성 또한 하늘을 찌를 듯 치솟는 중이었다.“주인공은 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며 무대를 완벽하게 공들여 찍어야 한다는 담당 PD의 고집 때문에 순서가 맨 끝으로 밀리자, 멤버들의 기다림도 한없이 길어지고 있었다.“도국이 형, 나 진짜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상의 탈의 퍼포먼스는 누굴 위한 거야? 이건 인권 침해야!” “시온아, 일단 이거라도 좀 먹어. 팬들이 대기실에 넣어준 거야.” “형은 진짜 근육 수저잖아! 형은 뭘 먹어도 죄다 근육으로 가지만, 난 조금만 방심해도 바로 똥배가 나온다고!” “그래도 넌 유전자가 워낙 훌륭해서 얼굴이 천사잖아. 난 농사꾼이야.” “난 근육 농사꾼이 백번 부럽다고! 아이돌에게 군살은 죄악이잖아.”시온은 혹독한 몸 관리 스트레스에 연신 투덜대면서도, 옆에서 세상 편하게 크림빵을 우물거리는 도국을 부러운 눈으로 흘겨보았다.그 옆에 앉아 있던 세용은 읽던 전공 서적을 덮고는 생수병을 열어 마른 목을 축이며 시온을 향해 혀를 쯧쯧 찼다.“그냥 먹고 칼로리 소모해.” “의대생이 그렇게 말하니까 확 와닿네. 참 이번에 건강 관리해 주는 관찰 예능 같은 거 출연해 볼까? 호랑 형한테 슬쩍 물어봐야겠다.”시온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기범을 불러 말을 붙여볼까 했지만, 도저히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기범은 팔짱을 낀 채 무대 아래 멀찍이 서서 한 곳만을 서늘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세용이 형, 호랑 형 왜 저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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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흑화한 호랑이의 나쁜 짓]

M 방송국의 JJ 소속사 전용 대기실 앞은 어느새 봉선규가 망을 보고 있었다.방금 기범이 서정민을 데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기에 봉선규도 움직인 것이었다. ‘도대체 기범이는 왜 서정민이 경신 양에게 위험하다고 한 것일까?’이유는 알 수 없지만 봉선규는 기범을 신뢰했다. 현재까지 서정민과 경신은 아무 사이도 아닐 텐데. 그래도 기범이 도와달라고 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져 휴대폰을 열었다.봉선규는 방금 기범에게서 도착한 문자를 확인하고는 눈을 희번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어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서정민은 조심해야 해요. 경신이에게 스트레스를 줘서 작곡을 더는 못하게 만들 사람이에요. 제가 좀 관리해 보려고요.]이런, 이게 사실이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경신을 위하는 것이 곧 태하를 위하는 길이었기에, 봉선규는 뭐라도 할 수 있었다. *** 경신은 축제 준비에 대한 협의를 하다가,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비용이 적어 개별로 돈을 걷자고 다수결로 결정되는 걸 듣자마자 바로 강의실을 나왔다.학생 식당을 갈까 하다 입맛도 없어 가방에서 기범이 준 죽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때 마침 태하에게서 전화가 온 덕분에, 즐겁게 거리를 걸으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태하 씨, 오늘 두 번 통화하니 좋네요.”- 어쨌든 JJ에는 꼭 나랑 같이 가야 해.경신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태하가 어지간히도 경신이 혼자 JJ 사람들을 만날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네, 혼자 안 갈 테니 걱정 마세요.”그가 벌써 보고 싶던 차에 바로 옆에서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아 설레었다. 귓가에서 울리는 태하의 음성이 너무 감미로워 경신은 그저 황홀할 뿐이었다.- 그래. 조금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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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그 짐승의 순애]

도대체 이 여자는 그동안 어떤 사랑을 해 온 것일까.한바탕 서로 절정을 느끼고 나서 옷을 추슬러 입으면서도 기범은 생각이 많아졌다.서정민을 품에 안는 순간, 생각보다 너무 가늘고 가벼운 몸에 묘한 부담감을 느꼈다. 지독할 정도로 가혹한 다이어트를 반복해 온 탓인지, 그의 넓은 품에 담긴 정민의 몸은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운 구석이 있었다.예전 전생에서부터 서정우는 소속 여자 연예인들에게 병적으로 마른 체형만을 강요하곤 했다. 이번 생 역시 그 비틀린 취향 하나는 참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자, 기범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거친 욕짓거리가 절로 치밀어 올랐다.사실 기범 자신도 지금 거칠고 뻔뻔한 척 센 체를 하고는 있지만, 여자와 제대로 사귀어 본 적도 짙은 스킨십을 나눠본 적도 없는 서툰 처지였다. 서정민이 이번 생에 그가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여자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오늘 제멋대로 날뛰게 내버려 둔 감정의 잔상 탓인지 기범은 문득 묘한 자괴감이 들었다.“그쪽, 뭐라도 좀 먹어야겠네.” “어머··· 너무 다정하잖아?”참 뜬금없는 소리였다. 기범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묵묵히 대기실 냉장고로 향했고, 목을 축일 만한 음료수를 꺼내 들었다.그때 정민이 소리 없이 기범의 뒤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뺨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기범 역시 밀어내지 않고 그녀의 부서질 듯 가녀린 허리를 잡고 숨결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진한 농도의 키스로 돌려주었다.긴 호흡 끝에 입술이 떨어지자, 서정민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아이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우리 호랑이, 되게 착하네.” “뭐가.”서정민은 기범이 건네는 주스 병을 받아들었다.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지 눈꼬리를 생글생글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여자 연예인에게 내 몸이 표준인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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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마성의 천사에게 향한 시선]

5월 초, 드디어 기다리던 대학 축제 당일이 밝았다.경신은 S대학교 관악캠퍼스 한적한 구석, 과 주막 옆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주막에서 팔 안주 재료를 열심히 다듬고 있자, 지나가던 과 친구들이 연신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네느라 주변이 온통 정신이 없었다.“경신아, 진짜 고마워!” “경신! 넌 진짜 우리 과의 구세주야!” “와, 진짜 대인배··· 넌 그냥 그늘에서 편하게 숨만 쉬라니까?” “오늘부로 너를 국어과 천사로 임명한다!”경신은 요 며칠 내내 동기들과 선후배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중이었다. 들을 때마다 쑥스러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배 속이 동동거리는 것을 보니 아가들은 엄마가 자랑스러운지 꽤 좋아하는 듯했다.사실 축제 준비 기간 내내 지옥의 레이스를 펼치느라 국어과 학생들은 하나같이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4년 내내 한 번도 주막을 열어본 경험이 없다 보니 모든 것이 서툴렀고, 경신을 비롯한 과 학생들 모두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 중이었다.게다가 이번 축제 때는 주막을 신청한 과가 폭증한 데다가, 하필 국어과가 배정받은 자리가 축제 메인 거리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구석이라 악재도 이런 악재가 없었다.더 최악인 것은 사전 티켓 판매량도 저조한 데다 물가까지 급등해 재료비를 대느라 과 학생회비가 계속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었다.이를 보다 못한 경신이 결국 과에 800만 원이라는 거금을 통 크게 기부해 버렸다. 마침 국어교육과 주막의 슬로건이 『저소득층 굶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자!』이기도 했다.수익의 절반을 좋은 곳에 기부한다는 취지 자체는 좋았으나, 애초에 적자가 나면 수익이고 뭐고 기부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돈이 궁한 학생들의 용돈을 쥐어 짜 모아 주막을 열려던 찰나, 경신이 구원투수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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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마음을 울리는 기적을 위하여]

JJ 엔터테인먼트 로비에는 항상 택배와 배달 물품이 산을 이루었다. 회사의 규모가 워낙 거대한 대기업이다 보니 일반적인 우편물이나 퀵 서비스만 해도 원래 상당한 양이었다. 게다가 소속 연예인 앞으로 전국 각지의 팬들이 보내오는 편지와 꽃, 음식 선물까지 매일 쏟아져 입구에는 이를 따로 분류하고 관리하는 전담 인력까지 상주할 정도였다.그런데 오늘 이례적으로, 배달된 특별한 물품을 직접 수령하기 위해 서정민이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다들 수고가 많으세요.”무대 의상과 메이크업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라 한눈에 봐도 바빠 보이는데, 퀵 서비스를 직접 받으러 내려온 톱스타의 등장에 물품 관리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달려왔다.“직접 내려오시다니요. 숙소나 대기실로 바로 올려다 드리려 했습니다.” “제가 워낙 기다리던 거라서요.”서정민은 탐스러운 장미꽃 100송이가 꽂힌 바구니와 그사이에 놓인 작은 쇼핑백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향기로운 꽃내음을 맡으며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그녀는 이내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아, 궁금해서 못 참겠네.”쇼핑백 안을 슬쩍 보니 주먹만 한 정사각형 물건이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정민은 바구니를 잠시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어내다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머, 영양제잖아? 하하!”꽃바구니 속에는 그 흔한 카드 한 장 없었지만, 누가 보낸 물건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 받았던 문자 한 통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오늘 15시 로비에 퀵 서비스 도착 예정. 하루에 세 번 섭취할 것. 다 먹었을 때 연락 바람. -tigre]티그레(tigre)는 스페인어로 호랑이를 뜻했기에, 기범이 제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보낸 것임이 분명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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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눈을 감으면 그대가 보여]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고 있어도 경신은 오로지 음악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비가 온 탓에 관객은 많지 않았다. 워낙 지나다니는 인원이 적었기에 과 학생들이 전부였다. 비 오는 날의 추억이라니.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저 빗방울처럼 흐릿하게 흩어지는 기억들뿐이었다.피아노 앞에 앉은 경신의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자, 오늘 하루의 실망감이 선율 위로 툭툭 흘러내렸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허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남은 것은 위로가 필요한 외로운 음표들뿐이었다. 마치 빗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선율은 빗속으로 아스라하게 퍼져나갔다.마지막으로 에스트렐라의 멜로디를 나지막이 울려내었다.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경신의 해묵은 감정들도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성공이 그리 쉬울 리가 없다. 그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지난하기에, 마침내 도달했을 때의 빛이 더욱 찬란한 법이니까. 하늘이 무심하다고 원망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쏟아지는 빗방울 하나조차 놓치기 싫은 듯, 경신은 온전히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했다. 연주가 깊어질수록 마음의 응어리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Umm Umm경신의 뒷주머니에서 나직한 진동이 울렸다. 평소엔 그저 시계 대용으로만 쓰던 핸드폰이 울리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연주를 멈추고 제 정신을 찾아갈 때쯤 왼손 약지에 걸린 반지가 은은한 주막의 불빛을 반사하며 애틋하게 반짝였다.설마 하는 대담한 예감이 스쳤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역시나 태하였다. *** 서정민과 황도윤, 그리고 JJ 소속사 걸그룹이 출동한 대학 축제 공연은 불행 중 다행으로 실내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공연이 끝나자 스태프들이 하나둘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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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그 남자를 길들이는 법]

다음 날, 비는 여전했다.경신은 주막을 열기 전 낮 시간을 이용해 혼자 우산을 쓰고 교정 여기저기를 거닐며 축제 현장을 눈에 담았다.다른 과의 주막들을 찬찬히 구경하기도 하고, 솜사탕이나 와플 꼬치를 파는 가판대 앞을 서성거리기도 했다.아직 가시지 않은 입덧 탓에 섣불리 무언가를 삼키기가 조심스러워 그저 눈으로만 달콤함을 즐겼다. 실내 강당에 마련된 일일 찻집이나 디저트 카페는 테이크아웃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활기가 넘쳤다. 각 동아리에서 준비한 다채로운 공연들도 실내에서 진행된 덕에 그야말로 대흥행을 기록하고 있었다.전생에 경신은 인생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에 이번이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리는 축제일지도 몰랐다. 남은 학점을 모두 이수하고 졸업을 맞이하면, 출산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삶의 궤도에 진입하게 될 터였다. ‘어디 보자, 체육관에서 하는 기범이 공연만 구경하고 주막으로 돌아가야겠다.’주막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을 떠올린 경신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한 뒤, 축제의 마지막 코스로 발길을 옮겼다.이미 본 공연이 시작되었는지, 체육관은 쿵쾅거리는 비트와 함께 건물 전체가 들썩이는 듯했다. 오롯이 팬의 입장으로 연예인의 무대를 관람한다는 것 역시 전생에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유쾌한 유희였다.경신은 기쁜 마음으로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다만 인파가 몰린 스탠딩 좌석은 임산부의 몸으로 다소 부담스러웠기에, 한적한 2층 관람석으로 올라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그때, 주머니 속에서 나직한 진동이 번졌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자 역시나 태하였다.“여보세요, 태하 씨.”- 재미있어?“그럼요. 비가 계속 와서 조금 야속하긴 하지만요. 그리고···.”경신은 하마터면 당신이 곁에 없어서 조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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