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고 도망친 그녀: Chapter 41 - Chapter 50

134 Chapters

#42. [그녀의 심연을 집착하는 그 남자]

 태하의 직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예리한 칼날처럼 심장을 긋고 지나갔다. 쇼팽이 작곡한 피아노곡의 연주가 끝나고 다른 곡이 울려 퍼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 뛰어가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과거, 그녀가 수줍게 들려주었던 미완성 선율의 편린. 그것이 비로소 완성을 넘어 신성한 경지까지 닿아 있었다. 경신이 확실했다. 기억이 돌아왔나? 태하는 너무 심장이 터질 듯 갑갑해져 왔다.   ‘그럼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가?’  어쩐지. 저 하늘의 신은 자신에게만 늘 가혹했다.  그럼 그렇지. 이리 달콤한 순간을 오래 줄 리가 없지.  태하는 병원 에스컬레이터를 뛰어가듯 올라탔고, 음악이 점점 크게 들리자 제 심장도 더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젠장!”  거친 욕설이 이 사이로 새어 나왔다. 통제되지 않는 분노가 태하의 눈동자를 암적색으로 물들였다.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는 사람들 뒤에는 수수한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새로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쓴 현수와 비슷한 캐주얼한 차림의 도윤까지 있었다.  저 인간들이 왜 여기에 있지? 경신은 저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피아노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연주하고 있었다.  피아노의 연주가 절정으로 치닫는 그 순간 현수와 도윤이 점점 그녀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듯. 마술피리 소리에 홀려 따라가는 아이처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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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엇갈린 화음이 빚어낸 파국]

태하의 심연 깊은 곳에서 피가 거꾸로 솟구칠 듯한 격동이 일었다.당장이라도 눈앞의 불청객들을 거칠게 보내고 싶었지만, 사방에 깔린 수많은 시선이 그의 이성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도윤이나 현수를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제 품에 안겨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인, 경신의 안위 때문이었다.“태하 님은 참 한결같네. 진짜 예쁜이 아끼나 봐. 우린 정말 곡 문제 때문에 온 거라니까. 진정해요.” “지금은 그런 대화 나눌 때가 아닌 것 같네요. 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현수는 공기 중에 감도는 살벌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태하의 눈 밖에 났다가는 제 커리어가 순식간에 매장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 않을 터. 현수는 서둘러 목례만 남긴 채 뒷걸음질을 쳤다. 복도를 벗어나는 내내 힐끔거리며 태하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이내 시야에서 가파르게 사라졌다.그러나 도윤은 달랐다.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느릿하게 다가왔다.“태하 님아, 이제 좀 알 것 같은데.”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고 어서 물러나.” “내가 무언가 대단한 걸 알아낸 것 같거든. 확실해, 이거.”도윤의 끈질긴 시선이 피아노 의자 옆을 파고들어 경신에게 고정되었다.태하의 참을성이 임계점에 다다른 바로 그 순간, 단단하게 굳어 있던 그의 팔 안쪽에서 미세한 온기가 움직였다.“······음.”잠겨 있던 경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열렸다. 안개 속에서 길을 찾듯, 그녀의 몽롱한 시선이 태하의 짙은 눈동자를 묵직하게 담아냈다. *** 정신을 차린 경신은 자신을 둘러싼 생경하고 기묘한 상황에 아득함을 느꼈다. 무거운 고개를 살짝 돌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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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숨결이 닿을 듯 밀착되어]

현수는 병원 벤치에 털썩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손끝으로 매끄러운 휴대폰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톡톡 두드리던 그녀가 마침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아 건성으로 닿는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윤 씨, 왜 안 와?”― 먼저 가.웃음조차 섞이지 않은 건조한 한마디. 현수는 기가 막혀 실소했다.“뭐? 먼저 가라니? 올 때도 따로따로 왔는데, 갈 때도 나 혼자 가라고?”자신을 완벽히 무시하는 도윤의 태도에 오한이 들 정도로 비참함이 밀려왔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딴 남자 하나에게 휘둘리는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난 아직 볼일 남았어.뚝.상대방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침없이 끊겨 버린 전화에 현수의 눈매가 사납게 치떴다. 병원에 입원한 태하와 경신을 좀 살펴보고 오겠다고 했다니 대뜸 여기서 만나자고 할 때는 언제고 먼저 가라니.이 제멋대로에 무자비한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불쾌한 짜증이 끓어올랐다.현수는 고개를 들어 병원 건물의 기다란 유리창을 쏘아보았다. 태하의 압도적인 위압감 속에서도, 그 피아노 앞에서 신들린 듯 손가락을 놀리던 경신의 모습이 환영처럼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같은 음악을 다루는 입장이었지만, 그 여자애가 토해내던 피아노 선율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아찔하고 강렬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도윤의 눈빛에 스치던 광기 어린 호기심이나, 태하의 그 오만하고 거침없는 눈동자가 왜 여자애의 재능에 고정되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사사건건 짜증 나는 계집애네. 쳇!”입술을 삐죽이던 현수의 눈빛에 오기와 욕망이 서서히 번져나갔다.도윤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신세는 여기까지였다. 태하가 저렇게 저기압인 데다 여자 하나에 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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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그녀가 닿기를 기다리는 폭군]

일요일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병실 안을 채웠다.잠시 스쳐 간 부끄러움은 반가움에 씻겨 내려갔다. 태하는 먼 길을 와준 규련과 화야를 위해 고급 일식 도시락을 주문해 점심을 대접했다. 그는 늘 그랬듯 직접 물수건으로 경신의 손을 닦아주는 것은 물론, 생선 살을 발라 입에 넣어주는 '식사 수발'을 기꺼이 자처했다.“나 락교랑 생강은 싫다니까요.”누가 보든 말든, 경신은 락교를 쏙 골라내며 투정 섞인 만행을 부렸다. 식사를 마친 태하와 규련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화야가 선물로 사 온 사과를 깎으며 입을 열었다.“보살님, 기숙사에 왜 안 오시나 했더니··· 으리으리한 VIP 병실에서 아주 알콩달콩 소꿉놀이 중이셨군요?” “화야, 잠깐 짚고 넘어갈 게 있어. 난 사람 구하다 다쳐서 정당하게 치료 중인 거야.”화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서슬 퍼런 칼날로 사과 껍질을 능숙하게 도려내며, 그녀는 경신의 속을 벅벅 긁어대기 시작했다.“반찬 투정에, 공주님 놀이라니. 세상 핑크빛 기류는 여기 다 모여 있네요.”화야의 냉철한 지적에 경신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하지만 태하의 호의만큼은 확실히 정의해야 했기에 경신은 다급히 한마디를 보탰다.“그건 그냥, 그가 목숨을 구해준 게 고마워서 보답하는 거라니까?” “과연 고맙기만 한 걸까요?”에이스가 던지는 시속 160km 직구처럼, 화야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사실 경신 역시 태하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여 밤잠을 설치던 참이었다.“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지만···.” “보살님, 남녀 사이 ‘몸정’이라는 게 무시 못 하는 거거든요.”몸정? 그런 원색적인 단어가 튀어나오다니! 경신은 새파랗게 질려 손사래를 쳤다.“야, 송화야! 그, 그건! 아직 손도··· 아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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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이 여자에게만 향하는 나만의 시간]

한규련은 지금 제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과 태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느라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건물주님이 과거에··· 너무 직진으로 밀고 나가시는 바람에 경 보살이 겁을 먹고 멀어지려 했다는 뜻입니까?” “핸드폰 번호까지 바꾸고, 내게서 도망쳤습니다.”규련의 마른침이 놀란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넘어갔다. 어찌 이리도 안타깝고 지독한 엇갈림이란 말인가. 하긴, 규련이 보기에도 태하는 너무나 압도적이고 완벽한 사내였다. 상대적으로 평범했던 경신은 그 거대한 존재감 앞에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은 때로 공포가 되기도 하니까.끝을 감도는 쌉싸름한 맛이 아침보다 훨씬 깊고 쓰게 느껴졌다.“괜찮습니다. 난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요.”심각해진 규련의 표정을 읽은 태하가 나직이 덧붙였지만, 그 말투에 서린 쓸쓸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건물주님. 어쩌면 그녀는 이번에도 도망갈지 모릅니다. 그녀에게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의 시간이 없거든요.’규련은 타들어 가는 속을 달래려 커피잔을 들었다. 맛도 느끼지 못한 채, 그는 얼음이 채 녹기도 전인 커피를 꿀꺽꿀꺽 전부 비워버렸다. *** 4월의 첫날. 잔인하리만큼 화창한 봄볕 아래, 드디어 경신이 병원을 벗어나는 날이 되었다.“와, 완전 탈출이네요!”태하와의 기묘하고도 슬기로운 VIP 입원 생활도 드디어 막을 내렸다. 국내 굴지의 대형 병원답게, 일상생활이 가능해진 경증 환자를 내보내고 위급한 이를 맞이하는 시스템은 철저했다. 태하는 경신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병원비를 정산하고 퇴원 수속까지 매끄럽게 마쳤다.주말 동안 규련과 화야가 다녀간 이후, 도윤이나 현수 같은 불청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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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당신과 나의 거리, 제로]

대한 종합병원 로비 앞, 보호자 전용 임시 정차 구역에 은밀하게 비상등을 켠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차 안에는 봉선규와 마호가 마치 첩보 작전을 수행하는 스파이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태하와 경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하고 달뜬 기류를 감상하는 그들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잔잔하게 번졌다.“태하가 저렇게 멍해질 정도로 다정한 표정을 짓다니. 안구에 습기가 찰 지경이군.” “하하, 사장님. 이 기세라면 두 사람, 이번엔 확실히 결실을 보겠습니다.”세상에서 가장 냉혹하고 황량한 바람만 불 것 같던 태하였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를 지켜봐 온 두 사람에게 지금의 변화는 경이롭다 못해 아찔하기까지 했다. 태하는 여전히 타인에게 단 1cm의 틈도 허락지 않는 얼음성 같았지만,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그의 모든 시선은 오직 경신 하나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이게 다 봉 실장 덕이야. 자네가 경신 양의 바뀐 번호를 알아낸 게 결정적이었어.” “에이, 사장님. 그건 경신 양이 서류 부탁하면서 직접 적어준 거라 제가 한 건 없죠. 오히려 사장님이 오작교 역할을 제대로 해내신걸요.” “그런가? 하하, 그럼 우리 둘의 완벽한 합작품이라고 해두지.”호탕하게 웃으면서도 두 사람의 눈빛 한구석엔 짙은 우려가 감돌았다.과거의 태하는 경신에게 과하다 싶을 만큼,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제 마음을 쏟아냈었다. 제삼자가 보기에도 숨이 막힐 듯한 그 집요한 애정에 견디다 못한 경신은 결국 도망치듯 자취를 감추지 않았던가. 그 바람에 끈 떨어진 연처럼 위태로워졌던 태하를 지켜보며, 마호는 지난겨울 몇 번이나 심장을 졸여야 했다.“남녀 사이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경신 양이 워낙 차갑고 까칠했어야지. 저러다 기억이라도 돌아올까 그게 참 두렵군.”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태하 님이 이번에는 완급 조절을 잘하셔야 할 텐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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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 남자의 위험한 급발진]

교정의 벚꽃이 눈처럼 휘날리고, 불과 며칠 사이에 학교 곳곳은 연분홍 봄물이 들어 화사하게 눈을 정화해 주고 있었다. 이 찬란한 계절의 정점에서, 경신 앞에도 꽃보다 고운 남자가 서 있었다. 붉은 입술을 곱게 제 입에 대고는 전생과 전전생, 그리고 이번 생애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첫 키스'의 역사를 새겨준 남자.하지만 감동은 찰나였다.이런 무지막지한 급발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봄날의 흐드러진 정취에 취해 이성마저 마비된 것일까?잘난 사내의 기행에 휘말려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날아간 정신줄을 겨우 부여잡은 경신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조수석 구석 끝까지 몸을 밀어 넣은 그녀가 떨리는 두 손으로 제 입술을 가렸다.“저, 저, 저기요! 태, 태하 씨!”이 남자! 사고는 본인이 쳐놓고 지금 저리 해맑게 그리고 우아하게 웃고 있다니.“아니, 갑자기 그렇게 막 입술을···!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네가 원해서.”경신은 얼굴을 가린 채 잠시 사고 회로를 돌렸다. 맙소사, 설마 자신이 원했다니.“아, 아니, 제가 스페인 문화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제가 뭘 어쨌다고요?” “내 입술을 계속 봤잖아.”입술을 바라보면 외국에서는 다짜고짜 키스부터 하나? 경신은 억울함과 당황함이 뒤섞여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하지만 태하 씨! 얼굴이 너무 잘나셔서 구경한 것뿐이에요. 모태솔로··· 아니, 아무리 그래도 숙녀에게 키스를 막,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라고요!”당황한 입술 사이로 말이 사정없이 꼬여 나왔다. 하지만 태하의 미소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표정은 더욱 짙고 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당황했어?” “나한테는 이게 첫 키스란 말이에요!” “풋.”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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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거짓말처럼 남자들이 자꾸 나타나]

“오늘부터 1일이라니.”경신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태하라는 남자가 워낙 속내를 읽기 힘들고 종잡을 수 없는 부류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건 궤를 달리하는 문제였다. 당사자 간의 민주적인 합의나 감정의 빌드업은커녕, 전광석화처럼 ‘1일’을 선포해버리다니.[태하 씨, 정말 당황스럽네요. 갑자기 1일이요?]스마트폰 화면 위로 경신의 떨리는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간지러운 고백도, 수줍은 승낙도 없었다. 서사의 필연적인 과정인 ‘기-승-전’을 통째로 생략한 채, 그는 오직 ‘결(結)’이라는 종착역에 무혈입성해 있었다.[비밀은 한 번에 하나씩.]액정 너머로 답장이 도착했다. 매번 암호 해독 수준의 고난도 추론을 요구하는 태하 특유의 화법에 경신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그 찰나, 천재 작곡가다운 기민한 뇌세포가 스파크를 일으켰다.‘설마… 어떤 짓을 하면 현재 나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하나씩 알려주겠다던 그 제안 때문인가?’머리 회전이 비정상적으로 빠른 자신이나 겨우 유추해낼 법한 논리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오해하기 딱 좋은 발언이었다. 방금 나누었던 그 입맞춤의 대가로, 우리가 과거에도 입을 맞추던 ‘연인 사이’였다는 비밀 하나를 잠금 해제해준 모양이었다.[자꾸 오해하게 하시면 곤란해요. 심장 떨린단 말이에요. 알겠어요, 이해했으니까 잘 지내세요.][너도.]대화가 끝나자마자 경신은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단 두 마디에 기가 쏙 빨리는 기분이었다. *** 수업시간 내내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첫 키스를 했으니까.사실, 태하처럼 압도적인 남성미를 풍기는 재벌가 출신 대표와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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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너의 입술로는 부족해]

그립고도 반가운 이름 하나가 경신의 입술 사이로 마법처럼 흘러나왔다.“······기범아.”검은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캡 모자를 깊게 눌러썼음에도, 청바지에 항공 점퍼를 걸친 기범의 실루엣은 강의실의 공기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런웨이에서 막 내려온 모델 같기도, 공항 패션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톱스타 같기도 한 비현실적인 아우라였다.“어머!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옆에 있던 제아는 어느새 볼을 발그레 붉힌 채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경영대 킹카 정기범의 위엄은 이번 생에서도 유효했다. 전생에서도 그는 입학하는 순간 S대 새내기들 사이에서 ‘초특급 미남’으로 통하며 전설을 써 내려가지 않았던가.황홀한 표정을 짓던 제아는 경신에게 의미심장한 윙크를 날리고는, 방해꾼이 되지 않겠다는 듯 다소곳하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인맥이 넓지 않은 경신에게 기범은 단 하나뿐인 소중한 ‘남사친’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지금 나랑 두 살 차이니까, 스물셋쯤 됐으려나?’부모님들끼리 막역한 사이였기에 꽤 가깝게 지냈다. 자연스레 경신의 어린 시절은 그를 향한 짝사랑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대한민국 굴지의 로펌가 자제인 ‘금수저’에, 명석한 두뇌와 훈훈한 외모를 무기로 배우와 가수를 넘나들던 완벽한 남자. 그러나 안타깝게도 직전 인생에서 그는 스물여덟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었다.“저기, 기범아. 나 얼마 전에 사고로 기억을 좀 잃었어. 머릿속 정보가 아주 흐릿하거든. 혹시 내가 실수하더라도 미리 사과할게.” “역시.”기범의 반응은 경신이 기억하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선량하고 맑은 눈빛. 경신은 차가웠던 몸속으로 따스한 온기가 차오르는 안정감을 느끼며 그를 마주 보았다.“응. 눈 떠 보니 병원이었거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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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관자놀이가 젖어 드는 긴장의 온도]

사범대 강의동 복도. 낡은 자판기가 덜커덕거리는 소란을 피우며 캔 두 개를 뱉어냈다. 경신은 싱그러운 청포도 주스를, 기범은 서늘한 블랙커피를 쥔 채 복도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기범아, 잘 마실게.” “이게 뭐라고.”내 가방을 대신 들어준 것도 모자라 음료수까지 먼저 챙기는 기범의 배려가 고마웠다.심지어 돈을 낸 건 기범인데도, 녀석은 마치 귀한 유리그릇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운 눈길로 내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신아, 너 정말 크게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다.” “걱정해줘서 고마워.”현생의 고단함 속에서 마주한 소중한 친구는 그 존재만으로도 벅찬 위안이었다. 지난 생애, 이 녀석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얼마나 많은 밤을 후회로 지새웠던가. 기범이에게 고백이라도 해볼걸. 아픈 곳은 없는지 한 번 더 물어볼걸. 소속사에서 무리하게 일감을 몰아줄 때 앞뒤 재지 않고 말려볼걸. 후회는 늘 늦게 찾아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곤 했다.“···몸은 좀 어때? 소문에는 꽤 심각하다고 하던데.” “소문? 국어과 음침녀가 크게 다쳐서 입원했다더라고 그렇게 났나?” “신아, 음침이 아니라 넌 오만한 도도녀였어.”기범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짙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낯설고 신비한 생명체를 탐구하는 듯한 시선이었다.지금 이 묘한 친밀감은 경신이 알던 거리감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신이 변한 만큼, 기범의 시간에도 어떤 균열이 있었던 걸까.“도도녀라니, 참 낯설다. 기억 잃기 전의 나를 아는 사람은 태하 씨뿐인 줄 알았는데, 한 명 더 늘었네.”순간, 복도를 채우던 공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기분 탓일까. 그의 눈가에 아주 잠깐, 쓸쓸한 잔상이 스치고 지나갔다.기범은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를 느릿하게 갈무리하더니, 조금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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