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고 도망친 그녀: Chapter 31 - Chapter 40

134 Chapters

#32. [참지 않는 남자와 거래하는 밤 ]

응급실 복도, 세상 어디에도 없을 달콤한 기류를 뿜어내는 태하와 경신. 그들의 토크 타임에 혹여 방해가 될까 봐 멀찍이서 숨을 죽인 채 지켜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사장님, 저거 봐요. 기적인가요?” “봉 실장, 이거 꿈 아니지?”태하가 사라져 한참을 헤매던 마호와 봉선규는, 뜻밖의 장소에서 경신과 ‘꽁냥’거리는 태하를 목격하고는 기염을 토했다. “둘이 사이가 안 좋았던 게 맞나 싶네요. 경신 양은 태하를 얼음처럼 대했었는데.” “경신 양은 기억을 잃은 상태니까 가능한거죠.”마호는 경신이 머리를 다쳤을까 봐 다른 의미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그러고 보니 경신 양의 성격도 완전히 바뀌었더라고.” “어쨌든 저런 모습은 정말 놀랍네요.”과거의 태하는 무조건 일방통행으로 마음을 밀어붙였고, 경신은 그를 거부하며 멀어지려고만 했다. 마호가 보기에 둘은 늘 벼랑 끝에 선 아슬아슬한 연인 같았다. 그런데 지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마주 앉아 있다니. 마호는 인간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태하를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태하의 진심이 하늘에 닿았나 봐.”오직 한 여자에게만 꽂혀 있는 태하의 집요한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호와 봉선규는 그가 행복하길 간절히 바랐다. *** 생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경신은 잘 알고 있었다. 태양처럼 빛나다 한순간 별처럼 저버린 남자로 인해 처절하게 아파본 그녀에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행위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하지만 태하는 결이 달랐다. 자신이 위험해지는 건 싫다니. 심장에 이토록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는 건 반칙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도자기를 다루듯 제 얼굴의 그을음을 하나하나 닦아내는 태하를 보며, 경신은 몸 둘 바를 몰라 발가락을 오므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Read more

#33. [이 남자가 좋아하는 치명적인 나]

현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JJ 엔터테인먼트 신사옥 앞의 작은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도어록을 누르는 지문 위로 식은땀이 들러붙어 몇 번이나 경고음이 울렸다.태하의 차량이 참혹하게 전복되던 사고 현장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쥐새끼처럼 도망쳐 나온 곳이 겨우 이 답답한 오피스텔이라니.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눌러써도 그렇지. 오늘도 돌아다니는 동안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대한민국 최고 걸그룹의 보컬이었는데. 그 유명세도 무색하게, 자신의 인지도만 없는 현실이 초라함으로 돌아왔다.‘그래도 그 년, 용기는 대단하네.’현수는 화장대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입술을 마구 짓씹었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눈동자가 흉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결국 그 남자는 살아났을 것이다. 그리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경신은 몸과 얼굴에 불이 그을린 채, 평생 끔찍한 화상 치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겠지.자신은 몸과 얼굴이 생명인 고귀한 연예인이니까 몸을 사리는 게 당연했다. 자신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명했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그렇게 합리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 가녀린 몸으로 태하를 끌어내던 경신의 잔상이 가슴속에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 내려가지 않았다.비겁하고 졸렬한 제 모습에 치가 떨렸고, 동시에 목숨을 걸고 남자를 얻어낸 그 여자에 대한 자격지심이 속을 새하얗게 태웠다. 똑- 똑-.그때, 침묵을 깨고 정적을 가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방문이 두드려졌다.[현수 씨, 나야! 보고 싶어서 왔어!]문 너머로 들려오는 도윤의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현수는 순간 흠칫하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래, 도윤 씨! 내 인생에는 당신이라도 있어야 해!’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4. [이건 은밀한 덫이야!]

그 시각 현수의 오피스텔.“······도윤 씨, 아침이야.”햇살이 얇은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오는 아침, 현수가 짐짓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도윤은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 가슴으로 이어지는 여린 살결을 지독하게 베어 물며 놓아주지 않았다.“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참아. 가야 하는데······.”도윤의 낮게 깔린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현수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입으로는 가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지만, 몸은 그를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오히려 그가 자신 때문에 지각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두 사람의 뜨거운 관계를 알아채 주길 바라는 음흉한 욕심마저 솟구쳤다.도윤은 현수의 허리를 거세게 쥐어 잡으며 그녀의 깊은 곳을 뜨겁게 파고들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을 어루만지며,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덮쳤다.“현수 씨, 너무 섹시해서 큰일이네, 진짜······.”밀려드는 강렬한 자극에 현수는 어제의 참혹했던 사고 현장과 짓눌렸던 자괴감이 씻은 듯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 좁고 초라한 오피스텔에, 감히 대단한 거물인 도윤이 친히 발걸음해 자신을 이토록 갈구해 주다니. 어제의 악몽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도윤 씨······ 내가 이런 좁은 곳에 있게 해서 미안······.”현수가 가련한 척 숨을 몰아쉬며 속삭이자, 도윤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맞아, 나 오느라 너무 피곤했어. 안 되겠다. 현수 씨 JJ 소속사 프라이빗 숙소로 옮겨달라고 사장님한테 당장 말해야겠어.”그 말에 현수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 소속사 내에서도 단 극소수의 톱스타에게만 허락된다는 그 럭셔리한 팬트하우스. 현수가 지난 10년간 갈망해 마지않던 꿈의 공간이었다.“어머, 도윤 씨도 참······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네.”현수가 수줍은 척 손으로 그의 가슴을 툭 치자, 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빛을 짙게 빛냈다.“두고 봐. 나 한다면 하는 남자라는 거 알잖아?”그의 확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5. [충돌, 집요함과 순수함 사이에서]

마호는 피부과 병동 환자 대기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태하와 경신을 먼발치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들고 있던 태하의 검사 결과지로 옮겨졌다.“태하 녀석, 천운이야 정말.”검사 결과는 기적에 가까웠다. 화재 현장에서 유해가스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직후 경신이 발 빠르게 씌워준 KF94 마스크 덕분에 폐 손상이 거의 없었다. 골절이나 혈액 검사 수치도 정상을 기록했다. 경신의 기지와 헌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마호는 이 아찔한 사고가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절대 근처에 나타나지 말라’는 태하의 서슬 퍼런 엄명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축배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림자처럼 몸을 숨기고 눈치 레이다를 가동하던 그때,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어, 봉 실장?”-네, 사장님.“좀 쉬어. 어제 고생 많았는데 토요일까지 이게 무슨 일이야. 오늘은 좀 릴랙스하라고.”-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게··· 사장님, JJ의 현수가 좀 이상합니다.봉선규의 한마디에 마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수는 요즘 왜 이리 자주 언급되는 지. 이름만으로도 공기를 차갑게 얼리는 그 남자의 언급에 마호는 통화 중인 수화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왜? 무슨 일인데.”-어제 서정우 사장님이 현수가 여기 온 것 같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아마 신곡 얻어 내려는 집념으로 온 것 같습니다.역시 서정우는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돈으로 사람의 영혼까지 묶어 두는 것 같았다.“그냥 MH에 올 수도 있지, 뭐 사장이 뒤를 밟고 그러지?”-아마 최근에 도윤이하고 친해져서 그런것 같습니다. 도윤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6. [아슬아슬 선을 넘기 일보직전]

오늘은 경신의 피부과 정밀 진료가 예정된 날이었다. 하지만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신의 미간은 좁아졌다.제 뒤를 그림자처럼 따돌리지 않고 당당하게 따라 들어오는 태하 때문이었다.“아니, 태하 씨. 처치실까지 뭐 하러 따라오는데요?” “보호자.”태하가 짧고 묵직하게 대꾸했다. ‘보호자’라는 단어 하나에 모든 권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듯,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경신을 응시했다. “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할 말이 없어진 경신은 의사 앞으로 다가갔다. 인자한 인상에 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동네 어디서나 볼 법한 할아버지 의사가 경신의 손바닥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떼어냈다.“학생, 이만하니 천만다행이야. 어때, 통증은 좀 가라앉았어?” “아, 네. 생각보다 괜찮아요.” “조금만 늦었어도 신경까지 다칠 뻔했어. 얼마나 뜨겁고 아팠겠어.”경신은 그때를 떠올렸다. 오직 태하를 구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지배해 통각조차 마비되었던 그 순간, 그녀는 가녀린 손으로 불길이 치솟는 차 문을 뜯어내듯 열어젖혔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무모하고도 절박한 순간이었다.“왜 이리 무모해?.” “연기 나는 차 안에 사람이 갇혀 있는데··· 죽게 놔둘 수가 없어서요.” “세상에, 이건 나라에서 상을 줘야 해.”백발의 의사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감탄했다. 경신은 민망함에 볼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상은 무슨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런데 저 뒤에 있는 오빠는 뭐 했어? 어린 동생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갑작스러운 화살이 태하에게로 향했다. 의사의 날카로운 지적에 태하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경신이 당황하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Read more

#37. [내 인생에 이레귤러]

K본부 음악 방송 대기실 안. 테이블 위에는 팬들이 보낸 달콤한 쿠키와 알록달록한 케이크, 그리고 그윽한 향을 풍기는 꽃다발들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은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저마다 팬들의 사랑이 담긴 편지를 훑어보거나 디저트를 집어 먹으며 한창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형들! 들었어? JJ의 여신 서정민이 어제 인터뷰에서 대놓고 ‘에스트렐라 호랑 님 팬이에요!’라고 했대!”막내의 호들갑에 대기실 안에 있던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팀의 리더, 정기범에게 쏠렸다.“계속 귀찮게 구네.”옆에서 쿠키를 하나 쏙 빼먹던 도국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거들었다.“뭐 좋아하니 그렇겠지.”그때, 대기실 한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던 박세용이 안경테를 슬쩍 올려 세우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다른 소속사 같았으면 서정민이랑 엮어서 예능이나 이상한 행사 다 내보냈을 텐데, 사장님이랑 대표님은 나름 우리 보호해 주시면서 일 시키시잖아. 감사한 일이지.”다들 세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던 바로 그 순간.달칵, 하고 대기실 문이 열리며 수정용 메이크업 박스를 든 스태프가 들어왔다. 손길은 분주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방금 엄청난 소식을 접한 사람 특유의 경악이 서려 있었다.“어제······ 태하 대표님이 교통사고 나셨다면서요?” “네?”대기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렸다. 쿠키를 씹던 도국의 손이 허공에 멈췄고, 책을 보던 세용도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이어지는 코디의 다음 한마디는 대기실 안을 더한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근데 참 다행인 게······ 마침 과외 선생님이 소속사 오다가 구해주셨대요. 폭발 직전 차량에 들어가서요.” “······뭐라고요?”무슨 영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Read more

#38. [그 임산부의 무서운 호위 기사]

경신은 병원이 환자의 개인정보를 이토록 철저히 지켜준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한시름 놓였다는 생각과 함께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사고 당시의 복통이나 메스꺼움은 아니었지만, 극도의 긴장 상태를 견뎌온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아···.” “왜 그래?” “좀 어지러워서요.” “빈혈이라고 했지. 다른 곳은···.”태하는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은 표정이었지만, 끝내 입을 다물고 경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사실 어제 이미 진료를 받았음에도 박사를 다시 만나라는 말에 혹시나 아기들에게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던 경신이었다. 하지만 한지원의 노련한 센스로 비밀은 지켜졌고, 태하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으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경신의 입가에 방실방실 미소가 번졌다.산부인과 병동에 가득한 임산부들과 남편들이 여전히 두 사람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당당하게 복도를 걷던 경신은 문득 손목에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태하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의지가 되네.’그저 손목을 쥔 담백한 손길이었지만 그 어떤 접촉보다 든든했다. 경신은 태하의 손길을 굳이 뿌리치지 않았고, 태하 역시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보폭에 맞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을 벽 너머에서 뱀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여자가 있었다. ***‘뭐야! 저 얌전한 고양이! 완전 뒤로 호박씨 다 깠던 거잖아?’경신과 태하의 뒷모습이 복도 끝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현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Read more

#39. [찬란한 구속은 지금부터]

산부인과 병동을 나온 경신은 얼떨결에 태하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진료 일정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이마의 상처를 소독하는 처치실에 따라가 그가 통증을 견디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내과 검사를 받을 때는 대기석에 앉아 얌전히 그를 기다렸다.경신은 두 손을 배 위에 겸허히 모았다. 손바닥엔 두툼한 드레싱이 감겨 있었지만, 손가락은 멀쩡했기에 조심스레 배를 문지르며 생각을 정리했다.‘아가들아. 오늘도 한고비 넘겼다.’태하에게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다짐할수록 운명은 자꾸만 그와 그녀를 촘촘하게 엮어놓았다. 회귀한 첫날부터 그랬다. 쓰러진 그녀를 구해주고, 병원비를 내주고, 차량을 제공하고, 심지어 기억에도 없는 과외 선생 노릇까지.‘안경이랑 핸드폰을 전해주러 오다가 사고가 나서 이렇게 되어버렸네.’결국, 지금도 같은 입원실을 쓰게 되었다. 한 공간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공유하며 잠이 든다니.경신이 짝사랑했던 왕자님들은 마치 저주라도 걸린 듯, 그녀보다 1년 앞서 유명을 달리했다. 자신 역시 그 저주를 풀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1년을 버티다 죽었다. 그것도 아주 다양하고 잔혹한 방법으로.복잡한 상념을 깨운 건 단정한 노크 소리였다.똑똑—.“식사 시간입니다.”태하는 간병인에게 식판만 두고 나가라 지시하더니, 어느새 경신의 침상 위 테이블을 펼쳤다. 벌써 ‘식사 놀이’를 할 시간이었다. 그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경신의 손등을 정성스레 닦아준 뒤 식판 두 개를 나란히 올렸다.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남자의 표정이 경신 앞에서만 시시각각 새롭게 갱신되고 있었다.“저기, 저 당근 싫어해요. 감자채만 주세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Read more

#40. [은밀하게 펼쳐진 미친 전주곡]

일요일 아침.“밥.”누워 있는 경신에게 오늘도 태하는 지독하리만큼 효율적인 언어생활을 실천했다. 포근한 이불을 뺏긴 경신은 몸을 감싸던 온기가 사라지자 더는 모르는 척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의 상처도 꽤 아물었는데, 이 으리으리한 병실에 감금되어 강제로 ‘소꿉놀이’에 참여해야 한다니.‘퇴원- 퇴원-.’ 경신이 노래를 불러도 돌아오는 건 ‘안 돼- 안 돼-.’라는 태하의 단호한 거절뿐이었다.태하는 간병인에게 식사만 두고 나가라 지시하더니,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 경신의 병상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그가 다가오는 거리가 어제보다 한 뼘 더 가까워진 건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이 남자는 잠도 안 자는 걸까? 언제 씻었는지 그에게선 늘 싱그러운 비누 향이 풍겼다. 죄 많은 남자. 이런 친절을 함부로 베풀다간 주변 여자들 여럿 울렸을 게 분명했다.“입맛이 좀···.” “밥.” “알았어요, 태하 씨. 먹을게요. 그나저나 나 얼굴은 좀 괜찮지 않아요?” “안 괜찮아. 세수.”씨알도 안 먹혔다. ‘세수 놀이’는 더 무서운데. 어젯밤 태하는 경신의 머리까지 직접 감겨주었다. 어찌나 야무진 손길로 두피를 자극하며 드라이까지 해주던지, 경신은 그 노곤함에 취해 속수무책으로 잠에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음악 방송이라도 보려던 야심 찬 계획은 꿈나라로 직행하며 무산되었다.그래도 아름다운 건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법. 안 먹어도 배부른 태하의 보배로운 얼굴을 감상하며 경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이 남자는 원래 이렇게 잘 웃었나? 아니, 이건 미소라기보다 비웃음에 가까운가.경신은 가끔 자신이 하는 행동이 그에게 너무 실없어 보일까 걱정됐다. 평생 돈도, 사람도, 정(情)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경신에게 누군가의 돌봄은 황송할 만큼 낯설었다.마치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Read more

#41. [첫날밤을 기억하는 어느 포식자]

대한 종합병원 3층, 소독약 냄새가 섞인 건조한 공기 사이로 낯설고도 압도적인 선율이 균열을 만들었다.작은 카페테리아 옆 구석, 오랫동안 정물처럼 놓여있던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가 제 주인을 만난 듯 비로소 울부짖기 시작한 것이다.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러나 결코 흔치 않은 유려한 음색이 1층 로비까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일요일의 정적을 깨우는 연주는 지나가던 이들의 발걸음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첫번째는 경신의 작곡한 곡이 이어져 이번에는 누구나 귀에 익숙한 클래식 곡이 연주되었다.쇼팽의 ‘Fantaisie – Impromptu’. 본제인 ‘즉흥곡’보다 부제인 ‘환상’이 더 어울리는 선율이 병원 곳곳의 해묵은 고통을 어루만졌다.이미 일주일 동안 안경 없는 맨얼굴에 익숙해진 경신은, 고무줄을 잃어버려 제멋대로 흘러내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생각도 못한 채 피아노 삼매경에 빠졌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과거의 '천재 음악가' 그대로였다. 수십 년간 피아노 외길만을 걸어온 거장의 혼이 빙의된 듯, 그녀의 손끝은 쇼팽이 악보에 숨겨둔 미세한 기교와 처절한 감성까지 고스란히 길어 올렸다. 왼손이 6연음을 고르게 깔아주는 동안 오른손이 8개의 음이 연주되는 복합적인 리듬은 마치 어긋난 운명을 조율하는 과정 같았다. 손바닥의 통증은 오히려 감각의 날을 더 예리하게 세워줄 뿐이었다. 16분음표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했고, 엇박자의 미학은 서정성을 더해 청중의 심장을 조여왔다. 아, 이렇게 행복할 수가. 경신은 원래 이렇게 건반 위에서만 온전히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직 음악을 통해 세상을 위로하고, 자신의 마음을 선율로 녹여내는 존재.마지막 왼손의 G와 C음이 낮고 묵직하게 마침표를 찍자, 정적 끝에 파도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휠체어를 탄 환자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Read more
PREV
123456
...
1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