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고 도망친 그녀: Chapter 21 - Chapter 30

134 Chapters

#22. [압도적인 그, 치명적인 그녀]

처음 쓰러졌을 때, 규련은 ‘건물주님’의 도움으로 그녀를 무사히 입원시켰다고 했다. 퇴원하는 날, 앞마당을 점령했던 멋들어진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 역시 그 정체 모를 건물주님의 선의였다.그 모든 호의의 배후가 태하라는 남자였다니. 경신은 차분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화야를 빤히 바라보았다. “표정 보니 이미 눈치채셨네요. 맞아요, 보살님.”“그럼 나 퇴원할 때 탔던 그 어마어마한 차도 혹시······.”“네. 보살님 쓰러지셨을 때 보살님을 직접 안고 병원까지 데려다준 것도 그 사람이에요.”탄식이 절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직접 안고 병원까지?악연만큼이나 무서운 게 인연이라더니, 어쩌면 이토록 우연이 겹치고 겹칠 수 있을까.“아, 어떻게 난 태하 씨에게 그런 신세를······.”처음 본다는 뻔뻔한 소리나 늘어놓고,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도망칠 궁리만 했다니. 경신은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태하 씨가 얼마나 애틋하게 구셨다고요. 공주님처럼 귀하게 대하셨어요. 보살님이랑 사이 안 좋다고 신신당부해서 그동안 입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다고요.”“허, 헐······. 나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니? 태하 씨가 나를 고, 고, 공주님처럼?”“대박 멋졌다니까요. 완전 영화 한편 찍었죠.&rd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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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갓물주와 밤에 피는 장미]

화려한 조명과 진한 향수 냄새가 엉킨 S방송국 JW소속사 위주로 쓰는 전용 대기실.서정민은 제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린 후배의 어깨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살결이 마찰하며 나는 은밀하고 축축한 소리가 단단히 닫힌 대기실 문 안쪽에 야릇하게 울려 퍼졌다.“선배님······ 진짜 미칠 것 같아요. 존경합니다.” “하흣, 말만 잘하지······.”입가에서는 매끄럽고 아찔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정민의 눈빛은 냉정할 만큼 서늘했다. 키스 한번도 안 하면서도 절정에 달해 번들거리는 남자의 표정을 마주하기 싫어 그녀는 유연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뒤에서 해줘.” “네, 선배님. 원하는 대로요.”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등 뒤에서 밀려드는 저돌적인 자극이 척추를 따라 찌릿하게 내달렸다. 어린 남자의 거친 패기를 즐기는 것은 정민에게 그저 팽팽하게 당겨진 일상의 지루함을 터뜨리는 가벼운 취미 생활에 불과했다.엎드린 그녀의 시선이 대기실 벽면에 걸린 모니터로 향했다. 화면 속에는 막 사전 녹화를 마친 초특급 신인 그룹 ‘에스트렐라’의 무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압도적인 비주얼, 거친 짐승 같은 피지컬, 완벽한 성량까지. 단숨에 가요계를 씹어 삼킨 사내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정민의 허리를 굳건히 잡고 속도를 올리던 후배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를 바라보며 헐떡였다.“······너, 에스트렐라랑 친해?”정민이 아래에서 밀려드는 쾌감에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낮게 묻자, 후배는 허탈한 한숨을 섞어 쓰게 웃었다.“아니요······ 같이 데뷔했지만 솔직히 넘사벽이라. 이제는 그냥 우러러볼 뿐이죠.” “너희도 꽤 대단하잖아.” “저희는 소속사 빨로 버티는 중이죠. 듣기로는 저 에스트렐라 멤버들, 집안까지 전부 엄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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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시, 그 남자의 영역으로]

화야와 학식을 먹자마자 버스에 오른 경신은 어느새 MH 엔터테인먼트 근처 정류장에 도달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걱정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무슨 낯짝으로 거길 다시 들어가나.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애초에 잡상인 취급을 받으며 문전박대당하면 어쩌나.경신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한 경우의 수로 가득 찼다. 규련에게 부탁해 한 다리 건너 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바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아가들아, 엄마가 온 게 정답 맞겠지? 이미 도착해 놓고 물어봐서 미안. 하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내가 직접 만회해야 하니까.’경신은 잠시 정류장 의자에 앉아 추위가 가신 3월의 봄 풍경을 무심하게 눈에 담았다. 과거의 자신이 수없이 겪어본 계절이었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가들과 함께 맞이하는 매 순간은 하루하루가 기적처럼 행복했다.‘과거의 외롭고 슬펐던 기억들이 거름이 되어 지금 내 행복을 키워낸 거야. 그리고 이제 난 혼자가 아니지.’경신은 소중하게 제 배를 문질러 보았다. 이래저래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 아가들에게 미안함이 컸지만, 지금 누리는 이 평화가 더없이 소중했다. 예전에는 늘 타인에게서 행복을 구걸하듯 살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조금 여유를 되찾은 경신은 상황별 행동 지침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묘했다.‘오늘,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이유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태하가 그곳에 있다면 고맙다는 인사는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경신은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건물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여학생들도 보이지 않고 주변이 한산했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가 시야에 들어왔다.“아! 있다, 저 차!”저 곳에 주차된 차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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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서질 시간, 거꾸로 뒤집힌 세계]

도윤은 계속 머리가 지끈거렸다.이런 날 현수와 스트레스나 풀고 싶은데. 그녀는 오늘 또 사라지고 없었다. 지친 보컬 레슨을 겨우 마치고 잠깐 한가해진 틈을 타, 그는 프라이빗 숙소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닫히려던 문 사이에 손이 들어오더니 낯익은 인물이 올라탔다. 서정민이었다.“쳇, 오늘 재수 없네.”서정민의 입에서 흘러나온 흉흉한 소리를 듣던 도윤은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거칠게 누르며 쏘아붙였다.“헤어진 전 남친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이 마녀.”도윤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서정민은 피식 웃으며 비꼬듯 말을 덧붙였다.“예쁜 쓰레기님아, 그 악녀랑은 친하게 안 지내는 게 좋을 텐데. 끝이 안 좋을 거야.” “현수 씨 욕하지 마. 재수는 누가 없는데, 진짜.”도윤이 가시 돋친 말투로 받아치던 그때, 엘리베이터 내부 모니터에서 화려한 자막과 함께 반가운 뉴스가 흘러나왔다.[질주하는 ‘에스트렐라’, 그 비밀은 바로 띵곡에 있다!]귀를 파고드는 아찔한 멜로디와 더불어 화면 속 멤버들의 눈부신 모습을 보자 도윤은 속이 뒤틀렸다.자신이 히트한 곡 중 그 어떤 것도 서정민이 작곡한 건 하나 없었다.입술을 삐죽거리며 서정민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제발 좋은 곡이나 좀 써. 띵곡 하나 없는 10년 차 작곡가님!”말을 마친 도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아무거나 눌러 버렸다. 더는 같이 있기 싫어 문이 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훽 내려버렸다.“뭐! 정말 나랑 싸우자는 거야?” “아니, 싸우는 것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 거야. 잘 가, 마녀!”그는 서정민의 목소리는 더 듣기 싫어 바로 몸을 돌렸다. 복도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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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운명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다]

한편, MH 엔터테인먼트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현수는 건물을 빠져나온 태하가 자신의 검은색 SUV에 올라타 도로로 나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원래는 우연이라고 인사라도 하고 차라도 한 잔 할까 생각을 하던 차였는데.그 직후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현수는 온몸의 피가 마르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거대한 버스가 도로를 덮치며 태하의 차량을 그대로 박아 버린 것이다.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차체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뒤집히는 모습에, 곡을 받아 가려던 현수의 계획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현수는 다리가 풀려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어떡해! 태하 님!”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벌벌 떨렸다. 혹시나 차에서 불길이 치솟거나 2차 폭발이라도 일어나 자신에게 파편이 튈까 봐 겁이 난 현수는 얼른 눈에 띄는 근처 건물 안으로 기어 들어가듯 피했다.유리문 뒤로 숨어 숨을 죽인 채 밖을 내다보았지만, 휴대폰을 쥔 손만 덜덜 떨릴 뿐 119에 신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무섭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바로 그때, 연기가 자욱한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한 여자의 형체가 현수의 눈에 들어왔다.“뭐야? 저 여자…… 그 재수 없는 년이잖아?”현수는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매캐한 화염 속으로 들어가는 경신을 보며 비웃음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이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현수는 경악에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미쳤나 봐!”경신이 곧 폭발할지도 모르는 차에 다가가고 있었다.지금이라도 이곳에서 나가 태하를 도와야 하는데.이 참혹한 현장에서 그저 자신은 발을 빼고 싶었기에 현수는 건물 안 유리문 앞에서 그냥 머물렀다.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장면만 구경하게 되었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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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타오르는 불꽃, 피어나는 희망]

털썩! 경신의 어깨 위로 묵직한 하중이 실렸다. 의식을 되찾은 태하가 그녀를 지지대 삼아 겨우 중심을 잡은 것이다.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태하가 이 와중에 손을 뻗어 반대편 조수석 쪽을 가리켰다.“가방······.”“태하 씨? 뭐라고요?”“······가방 가져가야 해.”경신은 기가 막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차에 나뒹굴고 있는 남성용 백팩을 챙기라는 게 아닌가. “아이고! 오늘 큰 거 하나 배우네요. 이래야 부자가 되나 보죠? 걱정 마세요, 태하 씨 가방 내가 책임지고 챙길 테니까!”경신은 태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팩을 낚아채 제 가방 위에 겹쳐 멨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상당했지만, 경신의 부축을 받은 태하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바닥을 짚으며 전복된 차 밖으로 몸을 뺐다.“자! 일단 여기서 피해요! 연기가 아까보다 훨씬 심해졌어요!”태하는 곁에서 저를 부축하는 경신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토록 무모하고 돌발적인 행동만 골라 하냐는 눈이었다.“위험한데··· 왜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몰라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자, 힘내세요! 우린 이제 살 수 있어요!”아직 완벽하게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다. 태하가 조금이라도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면 그대로 뒤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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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심장에 해로운 치명적인 남자]

각종 사이렌 소리가 합창하듯 울려대는 지금, 지옥이 따로 없었다. 경신은 귀가 먹먹해 비현실적인 고요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시야조차 확보되지 않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차갑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누워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니 저승길을 건너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20여 미터 떨어진 곳, 태하의 차는 이미 화마에 처참히 삼켜져 검은 불기둥을 내뿜고 있었다. 반대편 사고 현장에는 경찰차와 구급차, 소방차들이 섬광을 내뿜으며 집결해 있었다. 저 멀리 수십 미터 밖에서는 아까는 보이지 않던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핸드폰으로 이 비극을 찍어대고 있었다.비릿한 탄내와 함께 분노가 치밀었지만, 불경한 감정조차 태교에 해가 될까 싶어 집 나간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았다.“참! 태하 씨!”경신은 미처 몰랐는데, 그는 자신 옆에 그림자처럼 딱 붙어 손까지 부서질 듯 꽉 잡고 있었다. 옆으로 누워 거칠게 가슴을 들썩이는 태하의 모습은 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어도 지독하게 비현실적이고 근사했다.“다행이네요, 태하 씨. 정말 애썼어요.”경신이 떨리는 몸을 일으켜 부르자, 그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낮게 입을 열었다.“···신아. 너는?”폭발음 때문에 귀가 먹먹한 탓일까. 제 이름을 부르는 저음이 유독 진득하게 귓가를 파고들어 뒷목이 화끈거렸다. 과외를 할 때 그가 이렇게 이름을 불렀던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신아’라고 다정하게 부른 것 같았는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시야도 흐릿한데 귀까지 제구실을 못 하나 싶어 얼굴이 붉어졌다. 임신 중인 지금 남자의 미색에 설렐 때가 아니었다.“···저는 괜찮을 거예요.”크게 심호흡을 하고 손을 배에 갖다 대었다.구조대원에게 손짓을 하고 기다리며 태하와 마주하게 되자, 배 속의 아가들이 무사할지 걱정이 엄습했다. 만신창이가 된 제 몸보다 연약한 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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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지독하게 달콤한 명령]

큰일이었다.태하의 깊고 짙은 눈동자를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정말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당황으로 일렁이는 제 눈빛을 이 오만한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오기이기도 했다.태하의 크고 단단한 손이 경신의 가느다란 손목을 쥐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제 시야를 가린 그녀의 손을 옆으로 밀어내었다.“왜?”“부끄러워서 그래요. 보지 마세요.”사고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이 자신에게 있다는 진실이 날아와 박히자, 경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약 그를 구하지 못해 그가 잘못되었다면, 아마 남은 평생을 죄책감이라는 가시권 속에서 헤맸을 것이다.다시 내려다본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이마 옆으로 흐르는 붉은 피조차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치명적으로 어울려서, 경신은 윽, 소리를 삼키며 다시 그의 눈을 가려버렸다.“왜.”태하가 다시 손목을 밀어내며 왼쪽 입꼬리를 나른하게 올렸다.“내 표정 들키기 싫어서요.”“솔직하네.”달달하면서도 서늘한 그의 미소에 가슴이 터질 듯 요동쳤다. ‘아가들아, 엄마 심장이 제정신이 아니라 놀랐지? 걱정 마. 절대 이 남자한테 안 홀릴 거니까.’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경신의 호기심은 자꾸만 선을 넘었다. 경신은 주문을 걸 듯 배를 문지르며 시선을 돌렸다. 제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자신만만한 남자의 얼굴을 더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으로서, 그리고 사고의 원인 제공자로서 인사는 해야 했다.“태하 씨, Gracias(고마워요).”“나도.”연기와 메케한 냄새,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인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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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치명적인 오해]

태하의 단호한 명령에 구조대원 여럿이 경신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경신의 외상과 골절을 살피느라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저 차 상태 좀 봐! 사람이 살아 있는 게 용하네.” “저 불덩이에서 탈출했다고? 천운이군, 천운이야!” “저기 실려 가는 여자가 그 탈출한 주인공인가 봐요!”주변의 웅성거림에 경신은 아찔해졌다. 그녀는 다급히 태하를 가리키며 외쳤다.“전 정말 괜찮아요! 이 남자부터 응급실로 데려가 주세요!” “나보다 이 여학생부터 부탁합니다!”하지만 태하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경신의 외침을 집어삼켰다. 그를 보던 대원들이 경신을 확인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져 어수선하게 움직였다.“여자 환자분, 진짜 심각하네요!” “학생! 정신 차려요! 어떻게 이 상태로 버틴 거야!” “세상에! 미안합니다, 학생! 우리가 늦어서 이렇게 방치되다니!”착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경신은 민망함에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저기요, 저 폭발한 차에 타고 있던 분은 이 남자고요, 전 그냥 옆을 지나다가…….”참다못한 경신이 팩트를 날리자, 그제야 대원들의 시선이 태하에게 닿았다.“아! 맙소사! 늦어서 죄송합니다! 1차 충돌 차주 분이십니까?” “네. 하지만 절 사지에서 끌어낸 건 이 여학생입니다.”태하의 뻔뻔하리만치 차분한 증언에 경신은 기가 찼다. 사고 당사자가 저렇게 어필을 해대니, 졸지에 자신은 목숨 걸고 화마에 뛰어든 세기의 의인이 되어버렸다.“충격이 상당했을 텐데 남자분도 응급실로 모시겠습니다! 잘 버티셨습니다!” “이분을 구조하느라 엉망이 되셨군요! 손바닥도 엉망이십니다!”실제로 경신의 양 손바닥은 화상으로 짓물러 있었고, 옷은 잿더미를 뒤집어쓴 넝마나 다름없었다. 결국 경신은 ‘전국구 의인’ 타이틀을 달고, 태하는 입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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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 남자 앞에서는 Estúpido(바보)]

병원 응급실 복도의 디지털시계는 이미 토요일 새벽 1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손을 다친 경신은 세수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시커먼 그을음을 뒤집어쓴 채 무력하게 의료진을 기다릴 뿐이었다.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공평한 선물은 시간이라지만, 경신에게 오늘의 시간은 유독 길고도 가혹했다. 차디찬 침상 위에서 깜빡깜빡 졸다 깨기를 반복하던 경신은 서서히 밀려오는 현실적인 통증에 몸을 떨었다. “아이고, 힘드네···.”당장이라도 기숙사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대형 사고로 마비된 응급실에서 경신의 차례는 아직 멀어 보였다. 그때, 경신의 병상 근처 의자에 어린아이와 아주머니 한 분이 자리를 잡았다. 모자는 경신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엄마, 저 누나 무서워.” “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임산부지만 아직 스물한 살의 청춘이라 ‘누나’ 소리를 듣는 건 다행이었으나, 이어지는 대화는 마냥 웃어넘길 수 없었다.“화상을 입었나 봐. 온몸에 그을음 좀 봐라. 쯧쯧, 얼마나 아플까.” “그럼 죽어?”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살아. 하지만 엄청 고생하겠네.”흉흉한 대화가 귓가를 스쳤다. 경신은 못 들은 척 눈을 감았지만, 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고스란히 마음을 긁어내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상을 보냈는데, 하마터면 삶의 궤적을 뒤트는 사건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엄마, 집에 가고 싶어. 병원 무서워.” “거봐, 너도 이제 아무거나 입에 넣지 마. 구슬 삼키면 큰일 난다고 엄마가 말했지?”아주머니는 가방에서 주스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스를 쭉쭉 빨아먹는 동안, 아주머니는 아이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수납 영수증을 든 아이의 아빠가 미안한 기색이 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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