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고 도망친 그녀: Chapter 61 - Chapter 70

134 Chapters

#62. [무방비하게 닿다니]

경신은 이번 주 내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중간고사가 채 2주도 남지 않은 데다, 컨디션마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글자를 읽어도 머리가 지끈거렸고, 몸은 바닥으로 가라앉듯 무거웠다.봄은 만개했지만, 경신의 몸 내부에서는 혹독한 열감이 몰아치고 있었다. 갑자기 심해진 입덧 탓에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 넘기기도 힘겨웠다.기운은 뚝 떨어지고, 이유 없는 열기와 함께 졸음이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침대로 다이빙해 긴장한 몸을 풀고 싶었지만, 경신은 꾸역꾸역 도서관으로 향했다. 다가올 주말, 태하와 마주 앉아 과외를 하려면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했으니까.S대 중앙도서관 관정관. 탁 트인 창가 쪽 소파에 자리를 잡고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잠시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태하에게 속절없이 휘둘리면서도 싫지 않은 자신이었다. 임신한 여자가 그것도 말하지 않은 채로 그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이 반응하는 지금, 경신 4회차 인생 내내 낯선 현상이었다.자신이 은인이라 잘해 주는 것일 수도 있는 태하에게 기대하면 안될 터였다.아직 젊고 대단한 남자라 그의 옆에 설 여자는 더 번듯한 집안에 갖춘 것이 많은 자여야 할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해.’당장 학점을 빠르게 이수하고 이번 학기가 끝나면 졸업을 해야지 마음먹으며 책장을 넘기던 그때였다.드르륵.맞은편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공기의 입자가 달라졌다.서늘하면서도 매혹적인 체향.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든 경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어? 어······ 태하 씨?”“반가워.”꿈에서도 상상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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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나에게 직진하지 마!]

그 시각, 지상파 음악 방송 녹화를 앞둔 무대 밑.방송 스태프와 수많은 가수가 얽혀 어수선한 와중에도 서정민의 신경은 오직 단 한 사람, 에스트렐라의 리더 정기범에게 쏠려 있었다.정상의 자리에서 10년 차, 온갖 잘난 남자들을 주무르고 제 이득을 위해 이용해 먹던 닳고 닳은 서정민이었지만, 눈앞의 23살짜리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 앞에서는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반가워요. 호랑이, 팬이에요.”서정민이 특유의 살가운 미소를 연출하며 다가섰을 때, 휴대폰만 내려다보던 정기범이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스쳐 지나가는 눈빛이 아니었다. 정기범의 짙은 동공이 서정민의 얼굴을 집요하게 박아 넣듯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신인 특유의 싹싹함도, 선배를 향한 상투적인 존경도 없었다.‘뭐지? 날 왜 이런 눈으로 봐?’서정민의 등에 차가운 식은땀이 흘렀다. 당황하여 움찔거리는 그녀의 귓가로, 정기범이 낮게 잘라낸 목소리를 꽂아 넣었다.“네, 선배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말은 바른 정석이었으나 어조는 가시처럼 날이 서 있었다. 옆에 있던 멤버 도국과 세용이 묘하게 달라진 리더의 공기를 눈치채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스페셜 MC로서 큐시트를 점검하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정기범은 완벽한 프로의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카메라의 온에어 불빛이 들어올 때면 누구보다 완벽하고 청량한 '에스트렐라의 호랑'이었지만, 컷 소리가 나고 서정민과 시선이 마주치는 짧은 찰나마다 정기범의 눈동자는 얼음송곳처럼 서늘하게 변했다.‘내가 정기범한테 실수한 적이 있나?’무대 뒤 좁은 스태프 동선으로 물러서던 서정민은 속내가 뒤틀려 기어코 정기범의 뒤편을 따라붙었다.조명이 닿지 않는 어두운 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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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외로운 이 남자 어쩌지?]

시간이 흐르고.특히 꿈속의 경신은 늘 슬펐고, 누군가의 원망을 듣는 듯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경신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것은 그야말로 꿀맛 같은 단잠을 자서인지 몸이 개운한 상태였다.“어?”태하가 왜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거지?심지어 사방이 탁 트인 야외! 태하의 탄탄하고 단단한 허벅지를 목침 삼아 베고 학교 잔디밭에 누워 숙면까지 취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경신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우리 왜 여기 있나요? 이거 꿈인가요?”경신은 당황한 나머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꿈 아니야.”잔뜩 먹고 남자의 허벅지 위에서 푹 퍼져 잠을 자버린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 경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태하 씨, 항상 저는 왜 이렇게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나서 감당을 못하는 걸까요?”“이게 어때서.”태하는 얼굴을 가린 경신의 가느다란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 그의 단단하고 뜨거운 손가락이 닿자 피부에 아찔한 열기가 훅 올라왔다.Rrrr Rrrr Rrrr그때 태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기다리던 전화였는지, 반가운 표정으로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통화 버튼부터 눌렀다.“여보세요.”-안녕하십니까, 고객님!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전화기 밖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마음의 준비는 끝나셨습니까?태하가 마음의 준비를 할 일이 있었던 걸까?“아, 네.”-그럼 언제쯤 오시겠습니까?경신은 남의 통화를 엿듣는 취미는 없었기에, 편하게 통화하라는 의미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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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치명적으로 불길한 예감]

태하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경신을 보았다. 주차장에서 한달음에 1층 엘리베이터로 향해 가는 내내 경신은 손에 땀을 쥐었다.그런데, 그가 이끈 곳을 마주한 순간.“태하 씨? 여기는······?”“오늘, 강아지 입양할 거야.”그가 경신을 이끌고 들어선 곳은 거대한 동물병원과 애견 숍이 결합한 대형 동물 메디컬 센터였다.한 방 제대로 맞은 경신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 뒤를 따랐다. 대체 어떻게 '인간 아기'를 입양한다고 생각한 걸까. 착각의 늪에 빠져 보냈던 그 짧고도 치열했던 고뇌의 시간들이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오셨습니까? 드디어 결심을 굳히셨나 봅니다.”“네. 그렇게 됐습니다.”태하를 알아본 남자 간호사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며 앞장섰다. 경신은 여전히 경황이 없어 좀비처럼 무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끌려갔다. 안내를 받아 다다른 곳은 투명한 유리 공간으로 분리된 동물 대기실이었다.“녀석들이 아직 낮잠 중이네요.”간호사가 멈춰 선 곳에서 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신을 향해 손짓했다.“신, 여기 봐.”경신이 태하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도 작은 생명체 둘이 고르게 숨을 들썩이며 잠들어 있었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솜사탕처럼 엉겨 붙은 하얀 강아지 두 마리. 그 인형 같은 모습에 경신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어머나····&mid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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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귀염이가 던진 덫에 걸리다]

경신은 홀린 듯 강아지 두 마리를 따라 태하의 집으로 가기 위해 프라이빗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있었다.태하는 강아지 바구니에, 강아지 집까지 점원이 언급할 때마다 전부 최고급으로 구입했다. 손은 또 얼마나 큰지 심지어 강아지 전용 젖병도 10개나 샀다.경신은 한 번도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었기에 낭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태하는 부자니까 제 마음대로 돈을 쓰는 것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경신의 눈길이 태하의 양손에 들린 강아지 바구니에만 집중되어 있자, 뒤따라가는 동물 메디컬 센터 남자 간호사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그는 처음 반려견을 키우는 태하를 위해 급히 파견된 상태였다. 사료부터 배변 패드 등 온갖 용품을 사자마자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고, 지금도 집까지 동행하는 중이었다.“이 녀석들 이제 행복하겠네요. 좋은 엄마 아빠를 만나서요.”경신은 화들짝 놀라며 간호사를 바라보았다.엄마, 아빠라니.왠지 모를 민망함에 귓가가 화끈거렸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낯선 감각이 발끝을 간지럽혔기 때문이었다.“···하하, 아빠가 워낙 훌륭하신 분이라 아이들이 복을 받았네요.”어색함을 감추려 대충 둘러댄 경신의 시선은 여전히 바구니 속에서 꼬물거리는 강아지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옆에서 태하는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채, 그런 경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간호사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아련한 미소로 지켜보더니, 이내 태하를 향해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지난주에 워낙 힘든 일을 겪으셔서 견주분 마음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아직 눈에 선하네요. 테소로, 참 씩씩하고 예쁜 녀석이었는데.”테소로? 경신이 의아한 눈빛으로 태하를 돌아보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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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죄 많은 팜므파탈의 흔적]

이 남자와 손을 잡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러운 일이었던가. 모든 유러피언의 스킨십이 원래 이렇게 농도 짙고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오직 태하만이 가진 특권인지 경신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태하는 마치 당연한 권리라도 행사하듯 경신의 손을 단단히 쥐고는, 갤러리처럼 넓고 적막한 거실을 가로질러 나갔다.“···대체 어디로 가는 건가요?”평소의 그는 얼음 조각처럼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곁에서 지켜본 그의 행동은 말도 못 하게 세심했다. 경신은 그 이질적인 매력에 자꾸만 시선이 머물렀다.“너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곳이 있어서.”그의 발걸음은 큰 키와 긴 다리에 걸맞게 성큼성큼 앞서 나갔지만, 뒤따르는 경신의 보폭을 배려해 속도는 한없이 다정하고 느릿했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룸 슬리퍼가 스치는 소리가 경쾌한 리듬을 만들었다. 지난번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그의 개인 작업실을 지나, 바로 옆에 굳게 닫혀 있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태하가 천천히 문을 열어젖히자, 경신은 그 안의 풍경을 마주한 순간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순간 팔등 위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이 남자에게 오늘은 정말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겠다는 결단이 필요할 정도로, 방 안의 풍경은 압도적이고도 노골적이었다.“아··· 이 방의 정체는 대체 뭔가요? 왜 나를···.”인테리어도 그렇고, 화장대와 화장품을 비롯한 침구까지도. 누가 봐도 여자를 위해서 구비된 물건이 이곳을 채우고 있었다.평소 다른 여자들도 태하의 집에 머물면 이 방을 이용하게 되는 걸까.태하는 조금 전까지 머금고 있던 인자한 미소와 장난기 섞인 얼굴을 지워냈다. 대신 아주 깊고 진지한 눈으로 경신을 내려다보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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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왕자님, 신데렐라는 질색인데요...]

태하와 함께하는 강아지 육아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차라리 처절하고도 숭고한 사투에 가까웠다.어느새 시침이 새벽 4시를 가리켰다. 꼬물이들의 우유 타임은 살인적일 만큼 정확했고, 또 살벌했다. 굳이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전해지는 작은 기척에 힘겹게 눈을 떴다. 거실 한복판에 넓게 펼쳐진 매트와 이불 위로 두 사람의 지친 몸이 널브러져 있었다. 각자 한 마리씩 품에 안고 젖병을 물리는 손길만이 분주하게 움직였다.“부모 노릇, 보통 일이 아니군.”잠에 취해 갈라진 태하의 낮은 저음이 고요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 경신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젖병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하하··· 멋진 아빠네요, 태하 씨는.” “···너도. 훌륭한 엄마야, 신.” “···제 희망 사항일 뿐이죠.”꿈결인지 현실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혼몽한 상태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의지하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경신은 강아지에게 우유를 물리면서도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한없이 다정하고 완벽한 이 남자를, 과거의 자신은 왜 그토록 밀어냈던 걸까. 평범한 여자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눈앞에 실체로 존재하는데 말이다.‘하지만 너무 대단한 남자니까 내가 물러서지 않았을까.’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무렵, 경신의 시선이 태하에게 머물렀다.그 역시 피로가 극에 달했는지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6시 타임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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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이 남자, 좀 계략적이네.]

아침부터 회의가 한창인 JJ 엔터테인먼트 세미나실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다 못해 살벌했다. 도윤과 현수의 듀엣곡 발표를 앞둔 긴급 점검 회의였지만, 대표 서정우의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 하나에 임직원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워낙 현수를 싫어했기에 서정우는 현수를 아예 회의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게다가 서정우는 요즘 JJ의 독주에 제동을 거는 T.K.와 그가 속한 MH 엔터테인먼트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중이었다. 갑자기 작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곡가 태하도 눈엣가시였지만, 에스트렐라라는 그룹은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인재들이었다. 그들이 왜 JJ의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마호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것은 그에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마호, 그 여우 같은 놈이 대체 어디서 저런 보석들을 캐온 걸까.’돈을 쏟아부어 갈고 닦아 놓은 자사 연습생들이 오늘따라 서정우의 눈에는 한참 미달로 보였다. 회의실 왼쪽에는 안무가 스테파니, 보컬 트레이너 김기린, 프로듀서 봉선규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도윤과 최훈 홍보 실장이 자리했다. 서정우가 전문가의 식견을 빌려 폭풍 같은 독설을 쏟아내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만 흘렀다. 오직 단 한 명, 도윤만이 그 서슬 퍼런 기세 속에서 여유롭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사장님, 잘할게요. 현수랑 듀엣 시켜주셔서 감사해요.”도윤은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스스럼없이 요구 사항을 던졌다. 서정우의 서슬 퍼런 시선이 도윤의 얼굴에 머물더니, 이내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JJ에서 현재 가장 높은 주가를 달리며 사옥 건립에 일등 공신인 도윤은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예외가 허용되는 인물이었다.“너희 둘, 별로 안 어울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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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유리 구두를 벗은 찬란한 그녀]

빛 한 점 새어 들지 않는, 완벽한 방음이 보장된 밀실 같은 작업실. 태하는 이 방의 모든 조명을 환히 밝히고, 잠들어 있던 기기들에 생명을 불어넣듯 하나둘 전원을 올렸다. 기계들이 부팅되는 수십 초의 짧은 시간 동안, 공기 중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드라마 PD들, 내로라하는 아이돌, 심지어 대형 영화 제작사까지···. 최근에는 DY, 수, 그리고 네 친구 호랑까지 모두 T.K.의 곡을 원했어.”세팅이 끝나자 태하는 모니터 위에 수많은 음원 파일이 담긴 폴더를 열었다. 경신은 그의 설명을 듣다 문득 생경한 이름들에 멈칫하며 물었다.“네? 잠깐만요. DY? 수? 그리고 호랑? 그게 대체 누구예요?”태하는 마우스를 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경신을 바라보았다.“도윤, 현수, 기범. 그들이 업계에서 사용하는 예명이야.”“네? 그 사람들이··· 이미 유명한 가수였다고요?”“그래. 그것도 아주 영향력 있는.”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경신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찾아 쥐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들의 가수 활동을 눈치채지 못했던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도윤, 현수, 기범··· 그 이름들이 예명이라니.”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하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기사들을 확인하던 경신은 일순 머리가 휘청거리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바닥과 천장이 뒤섞여 회전하는 듯한 지독한 현기증이었다.“Todos son muy famosos(그들은 모두 유명해).”태하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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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왕관을 쓴 어느 남자의 고백]

같은 시각, MH 엔터테인먼트 사장실 안에는 짙은 에스프레소 향이 묵직하게 감돌고 있었다. 소파 테이블 위에는 정체불명의 악보들과 계약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그 중심에서 마호와 봉선규가 마주 앉아 있었다.“테소로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마음이 말이 아니셨을 텐데, 그나마 태하 님이 새끼들을 맡아주셔서 천만다행입니다.”봉선규가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마호는 창밖을 응시하다가 낮게 읊조렸다.“태하, 그놈이 원래 그래. 어린 시절에 부모를 일찍 여의어서 그런지, 제 처지랑 비슷한 존재들한테는 유독 마음이 약해지거든.”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던 봉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악보들을 정돈했다.“수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상속받은 지금의 태하 님 모습에선 도저히 상상도 못 할 과거네요. 그늘 한 점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마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그 그늘을 걷어내 준 게 바로 경신의 부모님이었어. 보육원 시절, 태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부어준 유일한 어른들이었지.”“인권 변호사 출신 사회사업가라고 하셨죠?”“그래. 그래서 태하는······.”마호가 말을 멈추고 봉선규를 빤히 바라보았다.“······스스로 스페인 자산가의 양자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한 거야. 경신 양을 지킬 수 있는, 완벽한 힘을 갖고 싶어서.”봉선규는 마른침을 삼켰다. 등골을 타고 오싹할 정도의 전율이 일었다.그렇다면 지금 태하가 이룬 모든 부와 명성도, 결국 단 한 사람, 경신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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