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고 도망친 그녀: Chapter 51 - Chapter 60

134 Chapters

#52. [소리 없이 휘몰아치는 운명의 소용돌이]

기계 너머로 전해지는 음성일 뿐인데도,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듯 생생한 질감에 경신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아가들아, 도와줘. 엄마가 사고 쳐놓고 말 한마디 못 하고 있어. 세상에 이런 바보짓이 또 있을까···.’심장 근처에 머무는 아가들의 기운 덕분일까. 수 초간의 고요 끝에 간신히 엉켰던 호흡이 정돈되었다. 경신은 떨리는 입술을 떼어 겨우 첫 마디를 뱉었다.“고··· 고마워서요.”- 키스가?“읏! 키스 아, 아, 아니요! 샤, 샤인머스캣이요!”- 훗.낮게 깔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며 타고 내려왔다. 심장은 이미 제 속도를 잊은 채 널뛰고 있었다. 태하라는 남자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듯한 이 농밀한 장난기는 기분 탓일까.- Coma mucho(많이 먹어).다정한 명령은 늘 위험했다. 사람을 자꾸만 착각하게 만들고, 임산부의 심장에 해로울 만큼 설레게 하니까. 경신은 다시 한번 심호흡하며 화제를 돌렸다.“아, 고맙습니다. 저기··· 과외는 그럼 언제부터 갈까요?”- 당장.“저기요, 자꾸 농담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응답해 주세요.”수화기 너머로 태하가 설핏 웃는 소리가 들리자, 경신의 온몸은 봄눈 녹듯 부드럽게 풀렸다. 그가 즐거워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묘하게 고조되었다.- viernes(금요일)에 데리러 갈게.“아, 네. 그럼 그때 봐요. 그리고 또···.”- 또 뭐, 키스?“아, 아니! 키스는 오늘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나지막한 웃음의 여운이었다. 그 소리가 왜 이리도 듣기 좋은지, 경신의 입가에도 어느덧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한껏 차오른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든 순간, 경신은 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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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반칙 같은 그대]

마지막 수업이 시작될 무렵, 태하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강의가 끝날 시각에 맞춰 사범대 강의동 앞으로 마중을 나오겠다는 짧은 메시지였다.이미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터였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심장 박동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고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그라는 남자가 의식되는 걸까.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싱숭생숭하게 들썩이는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얘들아, 월 600만 원이라니, 엄마가 정말 열심히 벌어볼게.’그야말로 꿈 같은 ‘꿀알바’였지만, 그 문이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일지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헬 게이트일지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다. 경신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다.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음에도 왜 이리 고민이 깊은 건지. 이제 갓 2cm를 넘긴 아이들이 얼마나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벌써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을 짐작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화야의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기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때, 강의실을 나오던 지제아가 경신을 발견하고는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어머, 경신아. 오늘 되게 바빠 보이네?” “제아야, 애들은 가라. 나 지금 알바하러 가야 해서 마음이 아주 복잡하거든.” “누가 보면 연애하러 가는 사람처럼 설레 보이는데?”제아는 눈치가 백단인 걸까, 아니면 촉이 남다른 걸까. 가슴을 찌르는 예리한 발언에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번졌다.“너는 그냥 명동에 자리 깔아도 되겠다. 존경한다, 정말. 그나저나 오늘 연두색 원피스 진짜 잘 어울린다.” “너도 예뻐. 저번에 그분 만나는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아무래도 경신은 지금, 타인의 눈에 단박에 답이 보일 정도로 긴장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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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욕망의 선을 넘는 사람들]

태하는 당혹감에 휩싸인 경신의 속내를 사정없이 파고들 듯, 느른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반면 경신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한 상태였다.‘성인 남녀가 한 집에 단둘이 있다니!’통상 과외는 집에서 하는 경우도 많다지만, 미리 장소를 확실히 지정하지 못한 제 불찰에 아차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자기 혼자 태하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속으로 달아오르고 있음을 반성하며 고개를 숙였다.차는 강남대로를 지나 테헤란로에 접어들었다. 금요일 오후의 공기는 완연한 봄기운을 품은 채 아찔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경신은 자신의 선택이 걷잡을 수 없는 후회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태하처럼 어린 나이에 도윤이나 현수 같은 이들이 곡을 받으려 줄을 서는 남자라면, 이미 최정상에 오른 셈이다. 이 아찔한 고객님께 제 지식을 아낌없이 베풀면 될 터였다. 묘하고 야릇한 딴생각을 품은 것은 제 쪽이었기에, 경신은 괜스레 배를 지그시 문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표정이 왜 그래?”태하의 나지막한 질문에 경신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공사 구분 확실히 해서 잘 지도해 드릴게요. 태하 씨가 원하는 방향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반영할 거고요.”“원하는 방향?”태하의 깊은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그가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짙은 텐션을 풍겨 오자, 경신은 숨이 턱 막혀 서둘러 정정에 나섰다.“저, 저기! 과외 이야기예요. 교재요!”“다른 짓은 내가 알아서 할게.”현기증이 도는 경신이었다.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그가 파놓은 은밀한 수렁에 깊이 빠져드는 기분이었다.입을 다물고 창밖을 보던 그때, 태하의 차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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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위험, 자꾸 침범하고 싶어]

도윤의 프라이빗 숙소를 나선 현수는 흘러내리지도 않는 옷매무새를 몇 번이고 신경질적으로 가다듬었다. 몸이 가루가 될 듯 뜨거웠던 관계가 끝난 후였다. 그 화려한 성채에 눌러앉아 잠을 청할 염치는 없었기에, 그녀는 또다시 자신의 좁고 초라한 오피스텔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희미한 달빛이나 겨우 스며드는, 쓸쓸한 그곳으로.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늘한 복도에 서 있는데,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기 싫은 불청객이 걸어 나왔다.“어머, 악녀. 아직도 도윤 씨 숙소 드나드는 거야?”서정민. 얄미울 정도로 당당한 걸음걸이와 오만한 눈빛으로 현수를 하찮게 바라보았다. 소속사 대표인 서정우의 동생이라는 강력한 배경은 물론, 직접 작사·작곡한 히트곡으로 저작권 수입을 올리는 명실상부한 특급 스타였다. 이곳 VIP 숙소의 당당한 주인 중 한 명이기도 했다.현수는 이를 악물고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그래도 저 여자는 도윤에게 차인 패배자였고, 자신은 어찌 됐든 도윤의 침실을 차지한 승자였다.“마녀, 그래. 도윤 씨랑 아주 잘 만나고 있어.”그 말에 정민의 붉은 입술이 삐죽 틀어졌다.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현수를 아래위로 훑어내린 정민이 나지막이 쏘아붙였다.“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도윤 씨는 여자 100일 이상 못 넘기는 아주 예쁘고 향기로운 쓰레기거든.”속에서 용암 같은 분노가 부글부글 치밀어 올랐다. 가슴이 턱 막히고 수치심이 솟구쳤지만, 현수는 턱을 빳빳하게 들며 정민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쳤다.“그 100일 동안이라도 난 공주 대접받으며 질리도록 즐길 테니 신경 꺼.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불쌍하고 헤픈 마녀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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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금기에 닿아 버렸어]

키스해도 되냐고?“······네?”그것은 질문이라기엔 너무나 노골적인 유혹이었고, 제안이라기엔 지나치게 달콤하고 아찔한 함정이었다.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펜트하우스, 그리고 그 은밀한 공간의 주인인 조각 같은 남자. 테헤란로의 마천루들이 뿜어내는 오만한 위용과 저 멀리 은하수처럼 짙게 흐르는 한강의 물결까지.온통 흑백의 대리석으로 채워진 세련되고 차가운 공간 안에서, 경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달콤한 독기마저 느껴지는 그 남자의 붉고 탐스러운 입술.태하의 등 뒤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은 마치 오직 그만을 위해 세심하게 연출된 배경화면 같았다.“대답한 것으로 칠게.”신박하다 못해 뻔뻔하고도 치명적인 해석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10초도 채 되지 않아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을 것만 같았다. 이 위험한 유혹에 속절없이 집어삼켜졌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경신은 떨리는 목소리에 온 힘을 실어 비명처럼 외쳤다.“···아, 아, 아니요!”경신은 다급하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홱 돌려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려버렸다. 본능적으로 그의 입술을 쫓으며 홀려 있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방어막이었다.예상외로 태하의 반응은 설핏 터져 나온 가벼운 웃음이 끝이었다. 이게 끝이라고?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경신은 갑자기 사고가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설마 진심이 아니라 나를 놀린 건가 싶어 서운함과 당혹감이 동시에 몰려왔다.“자꾸 나 놀리지 마요. 사람 마음 가지고 그러면 못써요.”“알았어.&rdq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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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키스는 끝이 아니라 시작]

태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제 감정을 전부 담아 경신에게 뜨겁게 퍼부었다.지금 그녀가 과거로 돌아가는 가장 강력한 트리거를 당긴 것이 아닌가 싶어 멈춰야만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그녀의 감각을 하나하나 깨우고,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떠났던 야속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배려 따윈 없는 이기적인 키스를 이어갔다. 말캉한 입술의 촉감, 뜨거운 입속의 열기, 그리고 억눌린 듯 새어 나오는 그녀의 희미한 신음까지. 그 모든 것이 태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자극이 되었다. 제발 경신에게 자극을 주어 현재에 의식이 머물도록 만들기 위해 그녀의 숨결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집어삼켜 냈다.어느새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다. 거실을 휘감던 선율이 사라진 자리엔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그 순간.경신의 감겨 있던 눈이 동그랗게 열리며 태하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서울의 하늘은 비명을 지르듯 붉은 노을이 넘실거렸다.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찬란한 빛에 물든 도시의 풍경은 치명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경신에게는 그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분명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뒤로는 정신없이 선율 속에만 빠져 있었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난데없이 제 온몸을 휘감는 대단한 ‘어른의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니.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 남자였다. 태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당당한 시선으로 경신을 내려다보며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을 건넸다.“신, 돌아와서 다행이야.”뭐가 다행이라는 것인지.태하의 깊은 눈동자 속에는 붉게 물든 찬란한 하늘과 더불어, 입술이 발갛게 부은 채 눈이 휘둥그레진 경신의 볼썽사나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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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욕망이 꿈틀꿈틀]

그 시각 JJ엔터테인먼트 프라이빗 숙소를 찾아온 서정우의 날 선 경고가 이어졌다.“정신 똑바로 차려. 회사에서 완전히 방출시키기 전에!”“······네.”“어디서 근본 없는 게 들어와서 망신만 시키고 있어! 실력도 바닥인 주제에!”실력이라는 게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닌데.서정민은 이를 악물고 고개만 숙였다.쾅!서정우가 문이 부서져라 닫고 나가고 나서야 정민은 떨리는 손으로 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워 들이켰다.요즘 들어 스케줄이 눈에 띄게 줄어든 탓에 프라이빗 숙소에 갇혀 진한 위스키를 마시며 혼자 고함을 지르는게 취미라면 취미였다.하필 그때 서정우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무서운 피붙이이자, 배다른 오빠. 자신은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집안의 수치이자 근본 없는 자식이었다. 서정우가 아니었으면 어디서 뭘 하고 살지도 모를 평범한 인생이었다.그런 인물이었기에 지난 10년간 ‘싱어송라이터’, ‘실력파 여가수’라는 껍데기 이미지로 피 터지게 버텨온 것이었다. 어느덧 스물아홉.현수는 그래도 걸그룹 출신이라 화려한 무대를 숱하게 서봤고, 적어도 가창력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여자였다. 반면 자신은 노래도 평범, 춤도 평범, 심지어 작사·작곡 실력조차 그저 그랬다. 무대 위에서 혼자 빛나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원래는 자신도 걸그룹으로 데뷔하려 했으나, 워낙 성격이 모나고 지랄 맞아 몇 번이나 판을 뒤집어엎고 튕겨 나왔었다.독한 술기운이 치밀어 오르자 아까 현수가 비웃듯 던졌던 말이 귓가를 찢고 들어왔다. 정민은 손에 쥐고 있던 위스키 잔을 벽에 집어 던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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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이런 짓, 저런 짓]

과외가 끝난 뒤 금요일 한밤중.태하의 차는 이미 남부순환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째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가깝게만 느껴지는지. 깊은 밤의 도심은 낮의 소란을 지워낸 듯 한산했다.사실 아까부터 그녀와 와인을 한잔하고 싶었고, 내친김에 자고 가라는 말을 목구멍까지 차오르도록 밀어 올렸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랐을 그녀가 다시 거리를 둘까 봐, 태하는 짐승 같은 욕망을 애써 억눌렀다.“태하 씨, 바쁘신 분이 마중까지 나오시면 제가 민망하네요.”“난 안 바빠.”거짓말. 경신은 그가 건물을 가진 자산가이자 얼마나 치밀하게 살아온 사람인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일단 과외 한 달만 먼저 해볼게요. 원칙은 선불이지만··· 혹시 맘에 안 든다고 잘리면 환불해 드리기 번거로우니까, 특별히 후불로 할게요.”“한국말 어려워.”“하하, 돈 나중에 주셔도 된다고요.”선심 쓰듯 말하는 그녀는 머릿속으로 주당 150만 원이라는 거금을 4주로 나눌지, 달로 계산할지 분주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태하는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알맹이는 그대로네.’과거의 경신도 그랬다. 500만 원이라는 금액이 과하다며, 이건 한 학기 등록금이 아니라 1년 치 학비와 맞먹는다며 펄펄 뛰었었다. 저작권료가 들어오면 반드시 돌려주겠다던 고집스러운 눈빛.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날카로운 가시 대신 달콤한 향기를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날 서게 만들었을까. 태하는 자신의 생일날 벌어졌던 그 의문의 사건을 떠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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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수컷VS수컷]

소속사의 빈 연습실. 태하는 기범과 마주 서 있었다. 단둘뿐인 이 텅 빈 공간은 차가운 적막이 흘러야 마땅했으나, 바로 옆방에서 방음벽을 뚫고 터져 나오는 열기 덕분에 분위기는 오히려 터질 듯 꽉 찬 느낌을 주었다.벽 너머에서는 에스트렐라의 신곡 음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고, 국내 최고의 안무가가 초빙되어 지옥 같은 레슨이 시작된 참이었다. 멤버들이 어찌나 열을 올리며 발을 굴리는지, 태하와 기범이 서 있는 곳까지 지면의 진동이 상당했다. 혈기 왕성한 건장한 사내들이 날뛰니 견고한 나무 바닥이 남아날 리 없었다.주변의 소란스러움은 오히려 태하에게 반가운 요소였다. 만약 이곳이 죽은 듯 적막했다면, 기범을 향한 그의 신경은 날카롭다 못해 베일 듯 예민해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방을 메운 거울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는 찰나를 수만 개의 각도로 반사해 냈다. 이 소속사의 실질적인 지배자라 할 수 있는 태하도 사실 따지고 보면 현역 아이돌을 해도 무방할 만큼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군림하는 위치에만 서 있었던 태하에게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압적인 아우라가 흘러나왔다.기범 역시 바른 정자세로 서서 태하를 마주했다. 하지만 기가 죽었다거나 태하의 눈치를 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범의 표정에는 전투적인 당당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동안 태하는 기범과 단독으로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다. 태하는 녹음할 때만 잠시 나타날 뿐, 곡을 준 가수들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며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그저 태하가 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고, 모든 소통은 마호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오늘 같은 독대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더욱 극명하게 체감하게 했다.“몸은 어떻습니까? 사고가 크게 났다고 들었습니다.&rdq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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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자꾸 상상했잖아]

경신은 휴대폰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른 ‘태하’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것을 느꼈다.귓가를 기분 좋게 간질이는 고동 소리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야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이고, 이제 슬슬 씻어야겠네요.”화야는 역시 눈치가 빨랐다. 편하게 통화하라며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대놓고 자리를 비켜주었다.경신은 긴장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한 채 ‘여보세요’라며 운을 떼려던 찰나였다.-신, 자고 있었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태하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중저음이었다. 낮게 긁히는 그 단단한 음성이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순간, 불과 몇 시간 전 차 안에서 나눈 열기 어린 입맞춤이 잔상처럼 번졌다.마치 몇 날 며칠은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의 차갑고 달콤한 얼굴이 지독하게 그리워졌다.“태하 씨 덕분에 화야랑 샌드위치 먹으면서 놀고 있었어요. 아, 화야는 지금 씻으러 가서 저 혼자예요.”'혼자'라는 말을 굳이 내뱉은 스스로가 한심해 경신은 제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자중하자, 자중해.’ 속으로 되뇌는 그녀의 귓가에 다시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박혔다.-맛은?“당근이 없어서 정말 좋았어요.”풉, 하고 태하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진동처럼 진하게 울리는 그 숨결에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보지 않아도 그의 완벽한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또 사줄게.무심한 듯 은근하게 젖어드는 그의 대답에 경신은 다시금 경계심을 세웠다. 이대로 그에게 휩쓸려 착각 속에 빠지면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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