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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내 봄을 빼앗은 궁: Chapter 1 - Chapter 10

13 Chapters

제1화

전각 구석의 청동 물시계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내 몸 아래로도 피가 그치지 않고 흘러 속바지를 붉게 적셨다.황후는 눈시울을 붉히며 서둘러 궁녀들에게 나를 침상에 눕히라 일렀다."정겸이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내가 잘 안다. 지금은 잠시 눈이 멀어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게야.""더구나 윤헌을 두고 갈 수 있겠느냐? 너를 친어미로 여기는 아이인데."나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침상 가장자리에 엎드렸다."소첩은 복이 없어 태자 전하를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황손의 어미 자리도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황후 마마, 공은 없어도 지난 육 년간 애쓴 정을 보아 주십시오. 죽기 전 마지막 소원만은 들어 주시기를 청합니다."육 년 전, 막 열다섯이 된 나는 이듬해 봄을 기다렸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던 노씨 집안의 젊은 장군에게 시집갈 날이었다.그때 자신이 내 아버지라는 남자 장경문이 불쑥 나타났다. 내 이름을 장나원으로 바꾸더니, 도성으로 돌아가 가문의 딸로 살게 해 주겠다고 했다.그러나 도성에 도착하자 황후와 아버지는 어머니의 목숨을 빌미로 나를 협박했다. 나는 떠밀리듯 동궁에 들어가 봉의(奉儀: 태자의 하급 후궁)가 되었다.병으로 세상을 떠난 적녀였던 언니가 남긴 어린 황손을 돌보라는 것이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다.실상은 황후와 아버지가 장씨 가문의 오랜 부귀를 지키려는 수작이었다.내가 원하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독을 다루는 의원에게 배운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 독을 먹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목숨을 건졌다.결국 황후는 나와 육 년의 기한을 약속했다.육 년 뒤, 황손이 자라면 자유롭게 놓아주겠다고.어머니를 살리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동궁에 들어간 지 삼 년째 되던 해, 진안왕이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조정겸을 살리려 그를 향한 칼날을 대신 맞았다.그 뒤로 겨울만 되면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조윤헌을 위해서는 한 걸음마다 무릎을 꿇으며 삼천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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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오랫동안 혼미한 잠에 빠져 있었다. 꿈결에 누군가 쉰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듯했다."나원아,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눈을 뜨니 조정겸 부자가 침상 앞에 서 있었다.귀하게 자란 태도부터 냉정함까지, 부자는 꼭 닮았다."이번 일은 내가 네게 잘못했다. 원이 동궁에 들어오면 너를 양제(良娣: 태자의 상급 후궁)로 올려 주마. 훗날 내가 즉위하면 단 한 사람 아래에만 있는 귀비가 될 것이다."양제든 귀비든,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나는 줄에 매인 인형처럼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조윤헌은 그 반응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장씨, 그게 무슨 태도야?"나는 아무 감정도 없이 조윤헌을 바라보았다.겨우 옹알이를 하던 아이를 내 손으로 키워, 이제 제법 훤칠한 소년이 되었다.친자식에게 쏟을 정성보다 더한 마음을 기울였건만.돌아온 말은 천한 사생아, 남의 자리를 차지한 가짜라는 욕설이었다.무심한 내 눈빛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조윤헌은 내 팔을 홱 잡아당겨 사납게 물었다. 살점이라도 뜯어 낼 기세였다.그래도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조윤헌이 멈칫했다."어머니, 아프지 않습니까?"살이 찢기는 아픔이 대수일까. 친자식처럼 여긴 아이에게 받는 모욕이 이토록 아픈데.조윤헌이 나를 비웃었다."하긴, 사생아 주제에 아이 하나로 평생 호강하게 됐는데, 이 정도 아픔이 대수겠어?"줄곧 말이 없던 조정겸이 호통쳤다."그만하거라, 조윤헌!"조윤헌은 옆으로 물러서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조정겸은 궁녀에게 태의를 불러 내 상처를 싸매게 하라고 일렀다."윤헌은 아직 어리다. 너까지 아이와 똑같이 굴 필요는 없다."나는 눈을 내려 깔아 그 안에 어린 조소를 감췄다."소첩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궁녀가 돌아오자 조윤헌이 다급하게 물었다."태의는 어디 있느냐?""유... 유정월 아씨께서 연못에 빠지셨습니다. 태의들을 모두 그쪽으로 부르셨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정월이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얼굴을 가리고 가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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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 뒤 사흘 동안 조정겸 부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청소하던 궁녀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유정월이 감기에 걸려 태자와 황손이 밤낮으로 곁을 지킨다고.떠나기 이틀 전,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리고 입궁했다.동궁에 들어와 육 년 동안 단 하루도 뵙지 못한 어머니였다. 뜻밖에 다시 만난 어머니는 내 창백한 얼굴을 보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아란아, 고생이 많았구나."나는 어머니의 눈물을 닦으며 웃어 보였다."이제 고생은 끝났습니다. 어머니, 울지 마십시오."아버지는 첩을 내보내는 문서를 마련하려면 아직 밟아야 할 절차가 있다며, 서둘러 어머니를 데리고 나갔다.헤어지기 아쉬웠지만 이틀 뒤면 떠날 터였다. 황후 마마께서 친히 약조하셨으니,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유산 뒤로는 피 섞인 분비물이 멎지 않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조정겸이 태의들의 진료마저 막아 두어, 나는 직접 처방을 썼다. 궁녀에게 몰래 궁 밖에서 약재를 구해 달여 오게 했다.그날 저녁, 막 약을 먹으려는데 조정겸이 성난 얼굴로 들어왔다. 소매를 휘두르자 약그릇이 엎어졌다.뜨거운 약이 닿은 흰 손목이 순식간에 붉어졌다.조정겸의 눈에 아픔이 스쳤다가 이내 분노에 가려졌다."장나원, 어찌 저주로 윤헌을 해치려 했느냐?""네 손으로 키운 아이가 아니더냐?"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부인했다."소첩은 그러지 않았습니다."뒤따라온 유정월이 금침을 빼곡히 꽂은 저주 인형을 내 이마에 던졌다. 맞은 자리가 곧장 화끈거렸다."봉의, 내가 밉거든 나를 해치면 될 것을. 어찌 윤헌에게 이러는 것이오?""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유정월이 울부짖었다."제 자식의 유해까지 써 가면서! 어찌 그리 모질 수 있소?"끝내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힘없이 조정겸의 품에 기대었다.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말에는 독이 서렸다."전하, 고승께서 봉의의 딸이 윤헌에게 화를 부를 팔자라 하셨습니다. 저 인형과 함께 불태워야 우리 윤헌이 무사할 수 있답니다.""안 됩니다!"온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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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아득한 꿈을 꾼 것 같았다.푸른 하늘과 구름 아래 초원이 물결쳤다. 젊은 장군이 말을 달려와, 북쪽 설산의 늑대 우두머리를 잡아 혼인 예물로 주겠다고 했다.너무도 소중한 광경이라 오히려 꿈인 줄 알았다.'이 꿈속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그런데 누군가 내 손을 붙들고 울며 불렀다."아란아, 살아야 해. 이제 곧 집에 갈 거야."살아야 했다. 내게는 아직 어머니가 있었다.눈을 뜨니 침전이었다. 조정겸 부자가 침상 곁에 엎드려 있었다.꼭 닮은 두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피로도 감추지 못했다."나원아,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어머니, 어머니...!"조윤헌이 꿈에서 놀라 깨어나자 조정겸도 잠을 깼다."네 어머니께 사죄하거라."명령이 떨어지자 조윤헌은 곧장 무릎을 꿇고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누이만 생각하시고 저는 돌보지 않으실까 두려웠을 뿐입니다. 노여움을 풀어 주십시오."나는 대꾸하지 않고 조정겸에게 물었다."아기는 어디 있습니까?"조윤헌의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조정겸의 검은 눈에는 후회가 역력했다.한동안 말이 없던 조정겸이 겨우 입을 열었다."아기를 군주(郡主: 황족 여식에게 내리는 작위)로 봉해 달라 청했다. 호은사에 위패도 세웠으니, 다음 생으로 가는 길에 탈은 없을 것이다.""책봉 칙서도 이미 마련되었다. 이번 일은 윤헌의 잘못이나, 아이도 뉘우치고 있다. 어미인 네가 아이와 똑같이 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나는 샛노란 칙서를 받쳐 들고 허탈하게 웃었다.유골마저 흩어져 다시 태어날 길도 없는데.'죽고 나서 이런 허울뿐인 이름을 얻은들 무슨 소용일까?'"어머니."조윤헌이 내 소매를 붙들고 기대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내일이 생신이니, 아버지와 제가 함께 보내도 되겠습니까?"크고 작은 두 얼굴이 꼭 닮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마음에는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다. 지난 육 년에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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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하늘을 수놓은 풍등이 도성을 대낮처럼 밝혔다.조정겸은 눈길을 돌리다 우연히 성문을 빠져나가는 마차 한 대를 보았다.이유도 없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중한 무언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아버지."조윤헌이 그의 옷자락을 당기며 목소리를 낮췄다."소자는 어째서인지 오늘 밤 자꾸 마음이 불안합니다."조정겸은 궁중 내관에게 유정월을 성안으로 데려다주라 명한 뒤, 조윤헌과 함께 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마차 안에서 조윤헌의 얼굴에 비로소 제 나이 또래다운 불안이 드러났다."아버지, 오늘도 어머니와 한 약속을 어겼습니다.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하시지는 않겠습니까?"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함께 보내기로 약속하고, 아버지와 함께 풍등에 손수 글까지 써서 복을 빌었다.그런데 유정월이 갑자기 등불 구경을 가겠다고 나섰다.부자는 진국대장군의 반역 증거를 모으려 여러 날 동안 그녀에게 마음을 준 척해 왔다.이제 증거는 모두 모였고 대형원에 넘기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큰일을 위해서는 어머니가 참아 주어야 했다.조정겸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일이 끝나고 네 어머니가 진실을 알면, 반드시 우리를 용서할 것이다."조윤헌이 입술을 깨물었다."정말 그러시겠습니까?""그럴 것이다."조정겸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장나원은 누구보다 사려 깊었다. 나라의 운명 앞에서는 사사로운 정 따위가 대수롭지 않다는 것도 알 터였다.마차가 동궁 앞에 멈추자 부자는 기다렸다는 듯 장나원의 침전으로 달려갔다.뜰에 들어서니 전각 안이 온통 캄캄했다. 조정겸이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경화궁의 상궁이 앞을 막았다."봉의 마마께서는 이미 진상을 아셨습니다. 지금은 경화궁에서 황후 마마를 모시며 예법을 익히고 계십니다.""아직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데다 몸도 허약하시니, 황후 마마께서 이참에 푹 쉬게 하려 하십니다. 곧 있을 책봉식에 지장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 말을 듣고서야 조정겸 부자는 안심하고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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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조정겸 부자가 경화궁에 도착했을 때, 황후 곁에는 함께 차를 마시는 장경문만 있었다.장나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조정겸이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고 물었다."어마마마, 나원은 어디 있습니까? 몸은 좀 나아졌습니까?"황후는 찻잔을 내려놓고 거만하게 답했다."장나원은 이미 내보냈다. 사생아 따위는 훗날 국모가 될 자격이 없느니라.""장씨 가문의 적녀가 장성하면 그 아이를 네 태자비로 맞으면 된다."조윤헌은 멍해진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아버지, 어머니를 뵙고 싶습니다."조정겸은 문득 지난밤에 본 마차를 떠올렸다. 황후가 그녀를 내보냈다는 사실이 그제야 분명해졌다.예전에 동궁의 양제가 장원에게 독을 쓰도록 내버려 둔 때와 무엇이 다른가.장원이 가문의 본래 적녀가 아니라 적녀로 입적된 딸이라는 이유였다. 그 때문에 태자비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조정겸이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소자가 어렵게 마음에 둔 사람입니다. 어마마마께서는 기어이 하나도 남김없이 몰아내셔야겠습니까?""무엄하다!"황후가 바닥에 찻잔을 내던지며 낯을 굳혔다."지난날 장원 때문에 내 뜻을 거스르더니, 이제는 장나원 때문에 또 이러는 것이냐? 네 눈에는 어미도 보이지 않느냐?"전각 안이 고요해졌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장경문이 기어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태... 태자 전하,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신이 딸아이의 마차에 추적용 향을 묻혀 두었습니다.""말이 빠르지 않아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서둘러 말을 달리시면 따라잡으실 수 있습니다."조정겸이 곧장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황후가 불러 세웠다."태자!"조정겸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어마마마, 소자는 이미 원에게 잘못했습니다. 나원에게까지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황후는 맥없이 제 자리에 주저앉아 조윤헌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윤헌, 너도 가겠다는 것이냐?"조윤헌은 옷자락을 걷어 무릎을 꿇고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황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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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아버지가 마차에 수작을 부릴 줄은 알고 있었다.성문을 나서자마자 다른 마차로 갈아탔다.다만 조정겸 부자가 이토록 빨리 쫓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새로 빌린 마차가 이 리도 못 갔을 때, 말을 달려온 부자가 앞길을 막았다.황제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황태자가 마차 밖에 섰다.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나원아, 내려서 나와 돌아가자."조윤헌은 마차 문을 붙들고 붉어진 눈으로 나를 불렀다."어머니, 저희와 함께 돌아가 주시겠습니까?"어머니는 본래 겁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늘 내가 지켜 드려야 했다.그러나 딸을 지켜야 하는 순간, 어머니는 물러서지 않았다.발을 걷어 올리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전하, 제 딸은 이미 병이 깊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놓아주십시오!"조정겸은 고집스레 같은 말만 했다."나원아, 내려라."그러고는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끌어내게 했다.나는 급히 말렸다. 한마디 할 때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태자 전하, 황손 전하. 어머니 말씀대로 저는 곧 죽을 몸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떠나게 해 주십시오."조정겸이 마차의 발을 움켜쥐고 한 자 한 자 내뱉었다."나원아, 나를 원망하든 미워하든 좋다. 네게 잘못한 것은 나다."딸을 잃고 육 년을 헛되이 바친 끝에 돌아온 것이 잘못했다는 한마디라니.우스웠다.조정겸의 두 눈이 붉어지고 눈물이 고였다."진국대장군은 황위를 노렸다. 딸을 보내 나를 홀리려 했지. 아바마마께서는 연로하시고, 나도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윤헌과 함께 그자를 함정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나라를 위해 네게 참아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유정월이 내가 너를 아끼는 걸 알아채면 네가 위험해질까 두려웠다. 네 목숨을 걸고 모험할 수는 없었어.""그 여자에게 마음을 준 척했을 뿐이다. 홍화 탕약을 먹인 일도 내 뜻은 아니었다. 그건 사실 보약이었어. 유정월이 약을 바꾸어 네가 아이를 잃게 될 줄은 몰랐다.""그날 피로 젖은 침상에 누운 너를 보며,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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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조정겸이 따라왔을 때, 나는 차갑게 식은 어머니를 안고 벼랑 끝에 앉아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치맛자락이 금방이라도 나와 함께 날아갈 듯했다.조정겸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나원아, 돌아가지 않아도 좋으니 우선 이리로 와 주겠니?"호위들에게 가로막힌 조윤헌도 울며 빌었다."어머니, 제발 뛰어내리지 마십시오."나는 하늘 끝의 저녁 해만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옅은 안개처럼 가벼웠다."조정겸, 조윤헌. 사실 저는 동궁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내다보이는 것이라고는 네모난 하늘뿐이었습니다. 그 안에 제 삶이 갇혀 버렸습니다.""어머니를 살리려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하지만 여러 해를 함께 지내면서는 두 분을 정말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아기를 가진 걸 알았을 때는, 우리 네 식구가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이제 아기도 없고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떠나야 합니다."조정겸은 가슴을 얻어맞은 듯 멍하니 나를 보다가 애처롭게 말했다."나원아, 네가 살아 있기만 한다면... 살아만 있어 준다면...""떠나도 좋다."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놓아주실 필요 없습니다. 갈지 남을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고작 스물한 해를 산 내 인생은 열다섯이 되던 해에 둘로 갈라졌다.그전에는 변방의 작은 마을에 사는 맹아란이었다. 독을 다루는 의원에게 배우며, 드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누렸다.그 뒤로는 장씨 집안의 둘째 딸이었다. 황후의 친정에서 난 귀한 몸이라면서도, 내 뜻대로 살 수는 없었다.이제야 이 목숨을 내가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조정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귀한 황태자의 위엄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주기만을 비는 초라한 사내가 있을 뿐이었다."모두 내 잘못이다. 내가 너를 저버렸어. 그렇다고 나 때문에 목숨까지 걸고 고집을 부리지는 마라."조윤헌도 거들어 애원했다."어머니, 원망이 있으시면 소자에게 마음껏 푸십시오. 제발 뛰어내리지 마십시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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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조정겸이 다급히 몸을 날렸지만 장나원의 옷자락조차 붙잡지 못했다.찬 바람이 불었다.눈앞에는 바닥도 보이지 않는 깊은 벼랑뿐이었다. 환하게 웃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나원아!"조정겸의 목에서 피가 치밀었다. 울컥 피를 토한 몸이 곧장 뒤로 쓰러졌다."아버지!"조윤헌과 호위들이 즉시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조정겸은 조윤헌의 팔을 움켜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말이 끊어져 나왔다."윤헌아... 명이다... 반드시 네 어머니를 찾아라...""살아, 살아 있으면 데려오고, 죽었으면 시신이라도 찾아라!"조윤헌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따르겠다고 답했다.조정겸은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며 의식을 잃었다.꼬박 엿새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그 엿새가 한바탕 허망한 꿈 같았다. 꿈속은 온통 장나원으로 가득했다.처음 동궁에 들어온 해, 장나원은 경계와 원망이 서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태의들이 살려 냈다.그때는 신경 쓰지 않았다. 후궁 하나가 더 들어왔을 뿐이라고 여겼다.마지막으로 목숨을 건진 뒤, 장나원은 무언가 마음을 정한 듯했다.사막에 갓 떠오른 해처럼 생기 넘치던 사람. 장원이 떠난 동궁에 작은 빛을 가져다주었다.조윤헌도 그녀를 따랐다. 좀처럼 다정한 기색을 보이지 않던 황제 폐하마저 심성이 순박하고 곱다며 칭찬했다.그래도 조정겸에게는 장씨 가문이 조윤헌을 돌보라고 보낸 장기 말 하나일 뿐이었다.궁 안에서 부림을 받는 궁녀나 상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대체 언제부터 달라진 걸까?'취기를 핑계로, 문득 이는 마음에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던 밤이었을까. 고개를 숙이자 울어서 붉어진 소녀의 눈이 보였다.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작은 소리로 빌었다."아픕니다. 조금만 살살 해 주실 수 없습니까?"아니면 그 밤이었을까. 자신을 향한 칼날을 대신 맞고 품에 쓰러지면서도 웃으며 달래 주었던 밤."소첩은 아프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무사하시면 됩니다."...육 년 동안 함께한 나날은 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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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변방의 작은 마을, 어느 별채.침상에 누워 눈을 뜨자 낯익으면서도 낯선 푸른 비단 휘장이 보였다. 잠시 머릿속이 흐릿했다.그날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운명이 내 편을 들어 주었다.벼랑에는 오래전부터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떨어지다가 그 줄기에 걸린 뒤 강으로 떨어졌고, 나를 찾아온 노영찬이 물에서 건져 주었다.내 스승은 독을 다루는 의술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서백헌이었다.구조되었을 때는 온몸의 뼈가 여러 군데 부러지고 바위에 얼굴까지 상한 데다 묵은 병도 가득했다. 그래도 스승님은 나를 살려 내셨다.다만 일 년을 혼수상태로 보냈고, 얼굴은 예전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달라졌다.깨어나 노영찬의 검은 눈을 마주한 순간, 그날 꿈결처럼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아란아, 살아야 해. 이제 곧 집에 갈 거야."어린 시절, 마을의 못된 아이들이 나를 버려진 집 안에 가둔 적이 있었다. 그때도 노영찬은 영웅처럼 불쑥 나타났었다.반짝이는 눈으로 내게 손을 내밀면서."아란아, 집에 데려가려고 왔어."이번에도 젊은 장군은 나를 집으로 데려와 주었다.깨어난 이튿날, 노영찬이 말해 주었다. 궁중 내관을 매수해 아기의 시신을 바꾸어 두었고, 아이와 어머니를 한곳에 묻어 드렸다고.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뒤, 나는 노영찬과 함께 어머니와 아기의 무덤을 찾았다.돌아오는 길에 노영찬이 물었다."아란아, 이제 어찌할 생각이니?"끝없는 초원을 바라보자 막막해졌다.이토록 넓은 세상에 내 몸 하나 머물 곳이 없었다.노영찬은 그런 나를 보고 들뜬 마음을 누르며 제안했다."요 몇 년 변방에 싸움이 잦았어. 어르신께서는 연로하시고, 너는 그 의술을 온전히 배웠잖니. 군에 남아 일을 거들어 드리는 건 어떻겠니?"이 세상에 내 혈육은 이제 없었다.길러 주시고 목숨까지 구해 주신 스승님께는 은혜를 갚아야 했다. 남은 생을 곁에서 모시며 일을 거들어 드리면, 그 짐도 덜어 드릴 수 있을 터였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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