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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누가 나랑 했을까?: Chapter 101 - Chapter 110

115 Chapters

제101화. 첫 출근을 마치고

새 회사의 첫 주가 끝났을 때 이서는 이름 석 자를 잘못 입력한 회의록을 세 번 고쳤다.이번 회사에는 자신이 누구와 졸업식 밤을 보냈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 대신 어떤 프로그램을 다뤄봤는지, 마감 전에 정리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첫날부터 잘하고 싶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단축키 때문에 표를 통째로 숨기기도 했다.***금요일 저녁, 퇴근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내자 태헌이 바로 전화를 걸었다.“끝났어?”“끝난 척하고 나왔어요. 내일 다시 볼 거예요.”“지금 데리러 갈까.”“지하철 탔어요. 한남동으로 갈게요.”태헌은 알겠다고 했다. 이서는 통화를 끊고 창에 비친 얼굴을 봤다. 웃고 있었다. 하루 종일 낯선 사람들 틈에서 긴장하다가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어깨가 내려갔다.집에 도착했을 때 도하는 저녁 강의가 있었고, 시현은 연구소 동료들과 약속이 있다고 했다. 태헌 혼자 주방에서 배달 용기를 접시에 옮기고 있었다.“직접 한 척하려고요?”“예쁘게라도 먹자고.”그가 대답했다. 이서는 코트를 벗고 손을 씻었다. 태헌이 첫날 어떤 실수를 했는지 묻자 그녀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는 웃다가 자기도 신입 때 회의 중 다른 부서 이름을 잘못 불렀다고 했다.“선배한테도 신입 때가 있었어요?”“나도 입사는 했거든.”“처음부터 상무였을 것 같아서.”태헌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서는 웃으며 밥을 먹었다. 자기 실수를 말했는데도 상대가 실망하지 않는 저녁이 좋았다.식사 뒤 태헌은 가족 식사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주 조부의 생신이라 몇 사람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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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식탁에 없는 약속

성북동 집에 가기 전 태헌은 세 번 설명했다. 조부 생신, 가족 여섯 명, 오래 머물지 않아도 되는 식사. 이서는 그 설명을 듣고 가겠다고 했다.차 안에서 그녀는 작은 과일 상자를 만졌다. 태헌이 더 비싼 선물을 준비하겠다는 걸 거절하고 직접 산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러 들어가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태헌이 가족과 완전히 끊어져야만 자신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현관에서 처음 만난 친척은 이서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언제 달라질지 살피는 자신을 알아차린 이서는 인사를 먼저 했다. 태헌이 옆에 서 있었다.조부가 앉을 안쪽 자리만 비워두고 다른 자리는 먼저 온 순서대로 앉았다. 이서는 태헌 옆에 앉았다. 조부는 새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고, 이서는 기업 자료를 분석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일이라며 웃었다.첫 접시가 비워질 때까지 식사는 무난했다. 문제는 후식이 나올 무렵 생겼다.“태헌이 이제 자리 잡을 때가 됐으니, 집안에서도 준비할 게 있겠네.”고모뻘 되는 친척이 말했다. 이서의 손이 멈췄다. 태헌이 바로 입을 열었다.“그런 약속으로 모신 자리는 아닙니다.”“아직 날짜는 안 정했겠지. 그래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일이 있으니 정리하는 게—”이서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사진을 결혼으로 수습할 수 있다는 말이 다시 눈앞으로 돌아왔다. 태헌의 손이 주먹으로 굳어지는 걸 보았지만 그녀가 붙잡지는 않았다.“제 삶을 정리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거라면, 제가 답하겠습니다.”그녀의 목소리가 식탁에서 또렷하게 울렸다.“저는 지금 혼인할 계획을 정하지 않았어요. 사진이나 소문 때문에 정할 생각도 없습니다.”상대의 표정이 굳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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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약속이 밀린 저녁

일요일 약속은 이서의 업무 때문에 두 시간 늦어졌다.새 회사의 자료 검토가 금요일에 끝날 줄 알았는데, 주말에 추가 수정 요청이 왔다. 이서는 오후까지 정리하고 나가려 했지만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태헌에게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표를 열었다.답은 짧았다. 알았어.그 짧은 말이 신경 쓰여 이서는 몇 번이나 휴대전화를 봤다. 미안하다는 말을 더 해야 할지, 일하는 동안까지 기분을 살펴야 할지 헷갈렸다. 결국 마지막 확인을 마친 뒤에야 전화를 걸었다.“많이 기다렸어요?”“응.”태헌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운동 중인 듯했다.“지금 끝났어요. 갈게요.”“급하게 오지 마.”말투는 차가웠다. 이서는 씻고 한남동으로 갔다. 주방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도시락 가방이 놓여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밖에서 먹으려고 준비한 것이었다.이서는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서운할 수 있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늦었다는 이유로 어떤 말을 들어도 되는 건 아니었다. 어느 쪽도 미리 결론내지 않고 운동실로 내려갔다.태헌은 샌드백 앞에서 글러브를 벗고 있었다. 이서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밥 먹었어?”그 질문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아직요.”“그러면 먹자.”태헌은 수건으로 땀을 닦고 먼저 문을 열었다. 소리 지르지도, 왜 다른 일을 자신보다 먼저 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는 못다 한 말이 있었다.태헌이 냉장고에서 도시락을 꺼내 식탁에 펼친 뒤 이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두 시간이나 늦어서 미안해요. 제가 시간을 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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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내 열쇠와 빌린 책

이서는 태헌의 집 서재에서 택배 상자를 열었다. 새 원룸의 기존 책장 옆에 놓을 낮은 보조 책장이었다. 판매처가 배송지를 한남동으로 저장해 둔 탓에 이쪽으로 왔다.태헌은 상자 크기를 보자 바로 한숨을 쉬었다.“이걸 어떻게 가져가.”“분해된 거예요. 차에 들어가요.”“그냥 여기 두고 쓰면 안 돼?”이서가 박스 칼을 내려놓았다. 사소한 말이었는데 마음이 걸렸다. 태헌은 그 표정을 보고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알아차렸다.“네 집 없애라는 뜻은 아니야.”“알아요. 그래도 자꾸 그런 말 하면 제가 설명해야 하잖아요.”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한남동에 더 자주 머물면 좋겠다는 마음을, 굳이 불편한 집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말로 바꿔 내놓고 있었다.“그냥 네가 여기 있는 날이 좋다는 말이었어.”“그럼 그렇게 말해요.”이서는 상자를 다시 열었다. 태헌이 옆에서 부품을 꺼냈다. 손은 빨랐지만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아 선반을 거꾸로 끼웠다. 그녀가 지적하자 그는 뺨을 긁고 다시 풀었다.책장 하나를 맞추는 동안 두 사람은 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태헌에게 집은 누구에게 말하면 늘 준비되는 공간이었다. 이서에게는 자신이 돈을 내지 못하면 잃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도 둘이 느끼는 무게는 달랐다.“내가 안 나가도 되는 자리를 갖고 싶어요.”이서가 말했다.“누가 저한테 화났다고 방을 못 쓰게 될 걱정 안 하는 자리요. 선배가 그런 짓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느끼려면 시간이 필요해요.”태헌은 나사를 조이던 손을 멈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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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돌아오는 시간

4월의 짧은 여행은 태헌이 잡은 숙소 때문에 한 번 다툰 뒤 시작됐다.이서는 조용히 걷고 밥 먹을 수 있는 곳이면 된다고 했는데, 태헌은 독채 전체를 빌렸다. 직원이 상주한다는 설명을 듣는 순간 그녀가 예약 화면을 다시 봤다.“우리 둘 쉬러 가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해요?”태헌은 그제야 자신에게 편한 방식이 상대에게는 부담일 수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는 한숨을 쉬고 예약을 바꿨다. 작은 객실과 별도 테라스가 있는 숙소였다.차 안에서 이서가 먼저 말했다.“비싼 거라서 무조건 싫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원하는 건 물어봤으면 좋겠어요.”“알아. 이번엔 빨리 해결해놓으면 좋아할 줄 알았어.”태헌은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예전 같으면 그 시간까지 계산해 멋진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오늘은 휴게소에 들를지부터 물었다.두 사람은 오후 내내 걸었다. 태헌은 걷는 속도를 맞추는 데 몇 번 실패했고, 이서는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왔다. 예상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저녁을 먹을 때 이서에게 도하의 메시지가 왔다. 다음 주 만나기로 한 날짜를 하루 바꿀 수 있느냐는 연락이었다. 그녀는 달력을 확인하고 답했다. 태헌의 시선이 잠깐 휴대전화에 갔다가 돌아왔다.“신경 쓰여요?”그녀가 물었다.“응. 근데 그걸 네가 없던 약속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태헌은 물을 마셨다. 괜찮은 척하는 얼굴이 아니어서 이서는 고마웠다.“오늘은 선배랑 있어요.”“알아.”그가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적어도 이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이겨서 얻은 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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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먼저 보여주는 화면

5월의 어느 저녁, 시현이 이서에게 작업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한남동 지하 방은 예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모니터 하나는 세로로 세워두었고, 다른 화면에는 공개 가능한 시연 자료가 떠 있었다. 회사의 제한된 시스템에 접속하는 공간은 따로 두었다. 책상 옆에는 두 사람이 맞추다 만 퍼즐 상자가 그대로 있었다.그는 문 앞에서 방문용 의자를 꺼냈다.“여기는 마음대로 앉아도 돼요.”이서가 웃었다.“앉을 자리까지 설명해야 해요?”시현이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미리 설명하지 않아 그녀가 불안해질까 봐 준비한 말이 오히려 딱딱해진 모양이었다.그가 보여준 것은 다음 달 연구 심포지엄에 발표할 실험이었다. 한 사람이 가진 권한을 전부 믿는 대신, 실제 사용 범위에 따라 확인하는 구조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서는 기술적인 세부까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겪었던 업무와 닿은 부분이 있었다.“사람이 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다른 정보도 다 봐도 되는 건 아니라는 거네요.”“네. 기술 설명은 더 복잡하지만, 출발은 그 질문이에요.”시현은 이전의 자기가 누구보다 그 반대로 살아왔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미 둘 다 알고 있었다. 오늘은 과거를 이용해 연구를 특별하게 보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이서가 질문을 하면 시현은 설명을 줄여 다시 말했다. 예전에는 그녀의 반응을 미리 계산하려 했지만, 실제 질문은 예상과 달랐다. 한참 뒤 그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물어볼 줄은 몰랐어요.”“그래서 사람한테 물어보는 거겠죠.”그녀가 답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에 그려준 그림은 서툴렀지만, 화면만 보여줄 때보다 말이 잘 통했다.설명이 끝난 뒤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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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사진에 없는 표정

이서는 시현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새 회사 프로필에 넣을 증명사진은 따로 있었다. 이번에는 그냥 주말의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부탁을 들은 시현은 처음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둘이 사진을 함께 볼 때마다 시각과 모서리부터 확인했던 기억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제 휴대전화로요. 찍고 같이 봐요.”이서가 기기를 건넸다. 시현은 카메라 앱만 열고 화면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이서는 창가 의자에 앉았다. 밖에는 잎이 무성해진 나무가 보였다.첫 사진에서 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두 번째는 고개가 어색했고, 세 번째는 시현이 초점을 잘못 잡았다. 이서가 결과를 보고 웃었다.“전문가라더니.”“전문가라고 한 적 없어요.”시현도 웃었다. 카메라를 든 자기 손이 누구에게 보이는 상태로 사진을 찍는 일이 생각보다 떨렸다. 누가 사진을 남길지, 무엇을 지울지는 자신 혼자 결정하지 않았다.이서는 네 번째 사진을 골랐다. 크게 웃어 입매가 흐트러진 얼굴이었다.“이거요.”“다른 사진이 더 단정하게 나왔는데.”“이게 오늘 제 표정 같아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나온 얼굴을 고르는 기준조차 자신과 다를 수 있었다.그녀는 남길 사진과 지울 사진을 직접 정리한 뒤 휴대전화를 돌려받았다. 시현에게는 선택한 사진 한 장만 보냈다. 그는 자기 배경 화면으로 써도 되느냐고 물었다. 이서는 조금 생각하다 좋다고 했다.사진을 보낸 뒤 이서는 민우에게 받은 졸업사진도 같은 앨범에 넣었다. 서로 다른 계절의 얼굴이 나란히 보였다. 시현이 옆에서 한 장을 가리키려다 멈췄다.“이것도 같이 봐도 돼요?”“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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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질문을 끝까지 듣는 사람

6월 제주 심포지엄에 앞서 열린 5월 말 서울 연구 세미나에는 마흔 명 남짓 모였다. AI·정보보안 연구원 권시현. 사회자가 실제 소속과 연구 주제를 읽은 뒤 그를 불렀다.이서는 맨 앞이 아니라 중간 통로 쪽에 앉았다. 발표를 방해하지 않고 듣고 싶었다. 시현은 단상에 올라 한 번 그녀를 찾았다가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의 청중은 이서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처음에는 목소리가 조금 건조했다. 실험 조건을 설명하는 중간에 누군가 질문하자 익숙한 속도로 돌아왔다. 이서는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말을 어떻게 고르는지 관찰했다. 사적인 긴장 속에서 보던 얼굴과 다른 집중이 있었다.질의응답에서 어려운 질문이 나왔다. 연구원이 실험 환경과 실제 적용 환경의 차이를 지적했다. 시현은 바로 반박하려다 질문을 끝까지 들었다. 준비한 결과가 그 상황까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걸 인정했다.“그 조건에서는 추가 검증이 필요합니다. 지금 결과만으로 일반화하지 않겠습니다.”그가 말했다. 청중은 실망한 탄식을 내지 않았다. 질문한 사람은 다음 검증에 참고할 자료를 알려주었다. 시현은 그 제목을 적었다.이서는 자기 무릎에 놓인 수첩을 봤다. 사람 앞에서 모른다고 말해도 그 사람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 역시 리허설에서 배웠던 일이었다.발표가 끝난 뒤 시현은 바로 이서에게 오지 못했다. 몇 사람이 남아 질문했고, 그는 준비실 대신 열린 강의실에서 대답했다. 이서는 밖에서 물을 사와 그의 책상 끝에 놓았다. 시현이 고개를 들어 짧게 웃었다.삼십 분쯤 지나 둘은 건물을 나왔다. 시현은 아까 받은 질문을 계속 생각하는 얼굴이었다.“제일 날카로웠던 질문이 뭐였어요?”이서가 물었다.그는 한참 설명하다가 멈췄다.“또 너무 길게 말했죠.&rdquo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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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다시 보는 제주

6월의 제주에는 비가 짧게 내렸다가 그쳤다. 공항에서 시현은 이서의 가방을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바퀴가 잘 굴러간다며 직접 끌었다.공항에서 렌터카를 인수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시현은 연구 심포지엄의 발표자였고, 이서는 자기 휴가를 써서 동행한 사람이었다. 회사 출장 비용과 함께 머물 시간의 비용은 미리 구분해두었다.차창 밖으로 바다가 나타났을 때 이서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지난가을 빌라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가 떠올랐다. 시현도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목적지에 바로 갈지, 잠깐 쉬어갈지 물었다.“호텔로 가요. 오늘은 짐부터 풀고 싶어요.”그녀가 말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발표는 다음 날 오후였다. 시현은 밤새 자료를 고치지 않고 정해둔 시각에 노트북을 덮었다. 이서는 아침에 근처를 혼자 걷고 관람 가능한 세션에 맞춰 들어가기로 했다.“제가 없어도 시작해야 해요.”“알아요.”그는 웃었다. 자기 발표가 그녀의 방문을 붙잡는 구실이 되지 않게 하려는 말이었다.심포지엄에서 시현은 큰 박수보다 긴 질문을 받았다. 해외 연구자와 국내 개발팀이 서로 다른 적용 조건을 물었다. 공동 연구자의 이름을 소개할 때 그는 화면을 한 번 더 넘겼다. 결과가 혼자 만든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빠뜨리지 않았다.이서는 뒤쪽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어느 누구의 모든 데이터를 지배하는 천재가 아니라, 설명을 하고 질문을 받는 연구원이었다. 그가 좋은 답을 찾았을 때 얼굴이 조금 밝아지는 것이 좋았다.리셉션이 끝난 뒤 시현은 방에 돌아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명함을 테이블에 펼쳤다가 다시 모았다. 오늘의 질문 중 어떤 부분을 틀리게 설명했는지 되짚는 얼굴이었다.“계속 확인하고 싶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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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빈 공책의 다음 장

시현은 이서에게 공책을 한 권 건넸다. 오래전 문구점에서 샀던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이서는 공책을 열었다. 첫 장도 비어 있었다.“무슨 기록이에요?”“아직 없어요.”그가 대답했다. 예전에는 그녀의 생활을 알아내기 위해 기록을 만들었다. 요즘 쓰는 공책에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말과 읽은 책의 문장, 발표 뒤 수정할 내용이 섞여 있었다. 이서에게 보여주고 싶은 쪽만 따로 표시했다.“제 공책도 한번 보여주고 싶었는데, 전부 넘기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이건 같이 쓸까요?”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로의 모든 사생활을 공유하자는 제안은 아니었다. 함께 가고 싶은 곳과 같이 본 영화 정도를 적어두자는 말이었다.이서는 첫 장에 제주에서 갔던 카페 이름을 적었다. 길을 잘못 들어 돌아온 곳이라고 덧붙였다. 시현은 그 아래에 빵이 맛있었다고 썼다.“분석이 너무 짧은데요.”그녀가 놀렸다.“같이 있었으니까 설명을 길게 안 해도 되잖아요.”시현의 대답에 이서가 웃었다. 둘은 몇 장을 더 채우려다가 멈췄다. 아직 하지 않은 일까지 목록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그날 오후, 시현은 연구소에서 받은 수정 의견을 읽었다. 예전보다 관리 권한은 적었지만 개발자로서 실제로 손댈 부분은 많았다. 동료가 그의 코드를 고친 흔적을 보며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바뀐 이유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서는 자기 회사의 메일을 정리했다. 둘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의 화면을 볼 필요는 없었다. 중간에 차를 마시고, 각자 다시 일했다.이서가 화면을 닫기 전 저장한 파일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시현은 물을 가지러 나갔다가 자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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