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오후, 지수가 주함을 불렀다. “남 대리님, 창고에서 샘플 박스 두 개만 가져다주시겠어요?” 주함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 같았으면 왜 하필 자신이냐고 한마디쯤 했겠지만, 요즘은 그런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적어도 재발 방지안을 몇 번이나 퇴짜 맞은 뒤로는. 복도 끝 비품 창고에 도착한 주함이 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 열린 문틈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지하철역 지나서래요.”“쉿. 목소리.” 혜주와 도윤이었다. 선반 사이에 쪼그려 앉은 두 사람의 정수리가 A4 박스 위로 나란히 솟아 있었다. 주함은 일부러 인기척을 죽인 채 단숨에 문을 활짝 열었다.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둘이 이렇게까지 숨길 일이 있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두 분, 여기서 뭐 해요?”“으악!” 도윤이 움찔하는 바람에 손에 쥔 클립 통이 떨어졌다. 자르르, 은색 클립이 바닥 위로 쏟아져 흩어졌다. 혜주는 이마를 짚었고, 도윤은 클립보다 제 입부터 틀어막았다. 정작 떨어뜨린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아 주함이 먼저 통을 세워 놓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아무것도 아닌데 숨어서 할 얘기요?” 주함이 빈 상자를 옆으로 밀어 놓고 쪼그려 앉았다. 세 사람이 클립을 줍는 동안 도윤은
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21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