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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정해진 사람

회장이 떠나고 나서야 사무실에 숨이 돌아왔다.주함은 넥타이를 풀며 의자에 털썩 앉았고, 도윤은 접은 동선표로 부채질을 했다. 혜주는 복도에 세워 둔 성과 보드를 돌아봤다.“사진 괜찮다고 하신 거 맞죠?”“사람 얼굴이 보여서 좋다고 하셨잖아요.”지수가 대답하자 혜주의 어깨가 내려갔다. 차율도 웃으며 보고서를 책상에 놓았다.“과장님은 안 떨리셨어요? 알아서 찾아보라는 얘기냐고 하실 때 저까지 놀랐어요.”“나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대답 잘했어.”노 차장이 들어오며 거들었다.“물어보시는 것만 얘기하면 돼. 설명 더 하겠다고 붙잡으면 그때부터 길어지는 거야.”“차장님도 붙잡아 보셨어요?”주함의 물음에 노 차장이 허리를 두드렸다.“내가 이 회사 이십 년 차다.”웃음이 터지는 사이 차율은 부장석을 봤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따로 불려 갔다는 호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메신저를 열자 어제 주고받은 보고 자료가 먼저 보였다. 잘 끝났냐고 쓰다가 지웠다. 끝났으면 자리로 돌아왔겠지 싶어서.차율은 창을 내려놓고 오전에 온 메일부터 확인했다.점심시간이 되자 팀원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지수가 같이 내려가자고 해 차율도 휴대폰을 챙겼다.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회장 이야기가 이어졌다. 넥타이를 안 맸더라는 둥, 생각보다 말씀이 적더라는 둥.마케팅1팀 이야기에 지수가 차율을 봤다.구내식당에 도착해서야 지수가 작게 웃었다.“벌써 다 아네요. 과장님 대답하신 것도 소문나겠어요.”“그런 건 안 나도 되는데.”차율은 냉모밀 그릇을 식판 안쪽으로 옮겼다. 면 사이에 젓가락을 넣으니 살얼음이 사각사각 부서졌다.그때 칸막이 너머에서 호빈의 이름이 들렸다.“백 부장은 아직 회장님하고 있나?”“집안 얘기도 하시겠지. 금 회장하고 워낙 가까우시잖아.”차율은 그릇에서 손을 뗐다.“그 댁 따님이 발레 한다고 했나?”“해외에 있다던데. 돌아오면 결혼시키려는 거 아니겠어?”“그거 옛날 얘기 아냐?”“글쎄. 우리 임원 모시고 갔던 자리에서도 두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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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오래된 친구

  답장은 짧게 보냈다. 점심은 먹었고, 오후에 보겠다고. 호빈은 오후 내내 회의실과 본부장실을 오갔다. 차율은 빈 부장석을 보다가 의자를 모니터 앞으로 당겼다. 세 시쯤 호빈이 책상에 결재 서류를 내려놓았다. 맨 위에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이따 얘기해요.] 차율은 옆자리에서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에 메모부터 떼었다. 반으로 접어 서랍에 넣고 나서야 서류를 펼쳤다. 퇴근 시간이 지나 메시지가 왔다. [늘 내리던 데서 기다릴게요.] 두 정거장 떨어진 버스 정류장 근처에 호빈의 차가 서 있었다. 차율이 조수석에 오르자 그가 에어컨 바람을 한 칸 줄였다. 뒷좌석에는 풀어 놓은 넥타이가 보였다. “오늘 고생했어요. 대답 잘하던데요.”“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전혀 안 그래 보였어요.” 차가 출발하자 호빈은 오후 회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소회의실에서도 물어보고 나서야 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았다. 오늘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차율은 가방 끈을 매만졌다. “부장님, 금초록 씨랑 정혼한 사이예요?” 핸들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호빈은 신호가 바뀌자 차를 몰아 가까운 공영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빈자리에 주차하고 라디오를 끈 뒤에야 차율을 돌아봤다.&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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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잘린 사진

  순시가 끝난 다음 날, 본부 복도의 사진 패널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서둘러 세운 패널에는 ‘푸드하임이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총무팀 직원들이 하나씩 받침대에서 빼내면 도윤이 벽 쪽으로 옮겨 놓았다. “과장님, 이것 좀 보세요.” 탕비실에서 커피를 들고 나오던 차율이 멈췄다. 도윤은 내려놓은 패널 앞에 쪼그려 앉아 사진 하나를 짚었다. “옛날 그래놀라 포장이래요. 글씨가 엄청 커요.”“도윤 씨, 총무팀에 방해되잖아요.”“총무팀에서 구경해도 된대요!” 도윤의 말에 잠깐 멈칫하다 패널 앞으로 다가섰다. 누렇게 바랜 사진에는 공장 착공식과 광고 촬영장, 직원 체육대회 등이 담겨 있었다. 도윤이 짚은 1세대 그래놀라 포장은 형광 주황색 바탕에 굵은 궁서체가 박혀 있었다. 레트로 감성이라는 게 있다지만, 전체적으로 촌스러웠다. 패널 사이를 걸으며 차율은 사진 속 얼굴들을 하나씩 훑었다.지금은 임원이 된 사람들의 앳된 신입 시절이 곳곳에 섞여 있었다. 그러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2002. 김천공장 준공식.’ 천막 아래 선 백근범 회장은 머리가 검었다. 어른들 앞에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여자아이는 분홍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동그랗게 틀어 올렸고, 오른쪽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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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초대받지 못한 자리

  이번 주말 데이트 장소는 차율이 정하기로 했다. 연남동 골목의 작은 덮밥집에 창가 자리를 예약하고, 근처 서점과 카페도 찾아뒀다. 차율은 적어 둔 동선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금요일 밤, 호빈에게 전화가 왔다. -미안해요. 내일 집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무슨 일 있어요?”-금 회장님 댁이랑 저녁 먹기로 했대요. 아버지가 점심부터 들어와 있으라고 하셔서요. 차율은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낮에 봤던 사진 속 분홍 원피스가 떠올랐다. -초록이는 없어요. 아직 해외에 있어요.“네. 다녀오세요.”-예약한 데는요?“취소해야죠.” 호빈이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음 주에는 꼭 가자고 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예약하겠다는 말에 차율도 알았다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 메모장을 열었다. 열두 시 덮밥집, 한 시 반 서점, 세 시 카페.카페 이름 옆에는 호빈이 좋아할 만한 케이크까지 적혀 있었다. 어젯밤 얘기해 달라고 했고, 오늘은 미리 알려 줬는데 막상 예약 취소 버튼을 누르려니 손이 쉽게 가지 않았다. 차율은 취소하자마자 가게 안내 페이지를 닫고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 토요일 아침이 되어서, 차율은 지온에게 연락했다. [오늘 잠깐 볼 수 있어?][다섯 시쯤 괜찮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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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늦은 답장

  답장은 일요일 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어서 왔다. [미안해요. 자리가 늦게 끝나서 들어오자마자 잠들었어요.][메시지 읽은 것도 기억이 잘 안 나요. 진짜 미안해요.] 차율은 이불 속에서 화면을 두 번 읽었다.읽었다는 표시를 보고 일어나 앉았던 시간이 떠올랐다. 잠결에 눌렀던 거라면, 자신은 오지도 않을 답을 기다린 셈이었다. 답장을 쓰기 전에 전화가 왔다. -일어났어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차율은 이불을 걷고 앉았다. “네. 방금요.”-오늘 점심 같이 먹을래요? 그 덮밥집 예약 페이지 보니까 열한 시 반에 두 자리 남아 있어요.“예약하셨어요?”-이제 하려고요. 어제 같이 못 간 거 많이 아쉬웠거든요. 차율은 입술을 깨물었다. 밤새 쌓아 둔 서운함이 어디서부터 녹기 시작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차율은 한참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지하철에서 지운 문장들이 떠올랐다. 서운했다는 말, 미리 말해 달라는 말.막상 목소리를 듣고 나니 그 말들을 꺼낼 자리가 금세 좁아졌다. 차율은 어제 입으려던 하늘색 원피스를 바라보다 옆에 걸린 흰 셔츠를 꺼냈다. …오늘은 조금 편하게 입고 싶었다. * 덮밥집의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자 간장 졸이는 냄새가 났다. 창가에는 호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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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달라진 주함

  주말 동안 혜주는 배너 시안을 세 번이나 다시 열었다. 수도권 열두 점포의 이름과 날짜를 차례로 읽고 나서도 파일을 닫으면 어느 줄을 빠뜨린 것 같았다. 월요일 오전에는 업체 담당자와 세 번째 통화를 했다. 수도권분은 이번 금요일, 지방분은 다음 주 금요일 입고였다. -수도권 것도 점포별로 나눠 포장하는 거죠?“네. 파일명에 있는 점포 코드대로요. 행사 날짜가 달라서 섞이면 안 돼요.” 그때 지수가 회의실 문 앞에서 손짓했다. 영업팀과 확인할 회의가 당겨졌다는 메시지도 와 있었다. 혜주는 수화기를 어깨에 끼우고 노트북을 챙겼다. 담당자가 지방분 이야기를 꺼냈지만 지수가 다시 시계를 가리켰다. “죄송해요. 회의 끝나고 제가 다시 전화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나니 마지막 질문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주소였나, 수량이었나. 혜주는 수첩 맨 위에 업체 이름부터 적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 뒤 자리로 돌아오자 모니터 아래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배너 업체 전화 옴. 10:42. 지방분 배송지 확인 요청. 승인된 발주서 주소 전달. 회의 후 확인 전화 부탁.] 그 아래에는 담당자 이름과 번호가 적혀 있었다. 혜주는 메모를 떼어 들고 옆을 봤다. “남 대리님이 받아 주셨어요?” 주함이 견적서를 내려놨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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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두부의 산책

  두부는 현관을 나서자마자 납작 엎드렸다. “두부야. 가자. 산책이야, 산책.” 도윤이 목줄을 살살 당겼지만 하얀 몰티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앞발을 쭉 뻗고 턱까지 바닥에 붙인 채 올려다보는데, 꼭 억울한 일을 당한 얼굴이었다. 할머니가 무릎 수술을 받은 뒤로 두부는 한 달째 도윤의 원룸에서 지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문제는 딱 하나, 밖에만 나오면 이렇게 돌덩이가 된다는 것. “할머니랑은 잘 걸었다며. 나랑은 왜 안 걷는데.” 두부가 하품을 쩍 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까지 웃자 도윤은 목줄을 느슨하게 놓고 쪼그려 앉았다. “안아 달라고?” 도윤이 팔을 벌리자 두부는 무릎으로 앞발을 올렸다. 안아 드니 꼬리가 팔을 연달아 때렸다. 걸을 힘은 없어도 꼬리 흔들 힘은 있나 보지. 도윤은 한숨을 쉬며 헬로펫 쪽으로 발을 돌렸다. 딸랑.유리문을 열자 벽 너머에서 드라이기 소리가 웅웅 넘어왔다. 카운터 직원이 예약을 확인하려 하자 도윤은 두부를 고쳐 안았다. “…미용은 아니고요. 사장님께 잠깐 여쭤볼 게 있어서요.”“지금 미용 중이세요. 이십 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네. 기다릴게요.” 의자 끝에 앉아 두부를 내려놓자마자 목줄이 팽팽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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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느티나무 공원

  지온이 느티나무 공원을 지나간 건 동물병원 때문이었다. 단골 손님이 병원에 주문해 둔 노견의 귀 세정제를 대신 찾아 주기로 했다. 내일 아침 강아지를 맡기러 올 때 받아 가겠다고 해서, 가게 문을 닫자마자 나선 길이었다. 공원을 가로지르면 오 분쯤 줄었다.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공기는 후끈했다. 그늘진 흙길에서는 열기가 덜 올라왔고, 풀벌레 소리가 발소리 사이로 찌르르 파고들었다. 벤치 근처에서 하얀 털 뭉치가 종종종 걸어왔다. 두부였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코를 땅에 댄 채 걷고 있었다. 엎드리지도 않고, 안아 달라고 보채지도 않고. 그 뒤에는 목줄을 쥔 도윤이 있었다. 다른 손에 든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두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잘한다! 두부야, 십이 분째야!” 지온은 걸음을 늦췄다. 지나가던 커플이 돌아보는데도 도윤은 두부가 한 발 움직일 때마다 칭찬을 보탰다. 저러다 두부보다 먼저 목이 쉬겠네. 두부가 고개를 들고 지온 쪽으로 달려왔다. 도윤도 목줄을 따라 두어 걸음 뛰다가 지온을 발견했다. “어? 사장님!”“안녕하세요. 두부 잘 걷네요.”“그렇죠! 말씀해 주신 대로 늦게 나왔더니 걸어요!” 도윤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산책 앱에는 사흘 치 기록이 나란히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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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토끼풀꽃

  봉투는 풀칠도 되어 있지 않았다. 덮개를 살짝 안쪽으로 끼워 넣었을 뿐이었다. 차율은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덮개를 열었다. 사무실 어딘가에서 복사기가 절전 모드로 들어가며 웅, 낮게 울었다. 안에서 나온 건 얇은 책갈피 한 장이었다. 반투명한 필름 사이에 말린 꽃 몇 송이가 눌려 있었다.하얗고 동그란 꽃송이, 그 아래로 가느다란 줄기와 세 갈래로 갈라진 잎. 토끼풀꽃이었다. 봄마다 동네 둑방에 하얗게 피던 꽃이었다. 엄마는 그 앞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쪼그려 앉아 꽃대를 엮어 반지를 만들고, 차율의 약지에 끼워 주곤 했다.  ‘이게 클로버 꽃이야. 네 잎 찾는 것보다 이게 더 예뻐.’ 그때 엄마는 웃는 얼굴이었다. 네 잎 클로버 펜던트도 그 웃음을 따라 흔들렸다. 어린 차율은 꽃반지가 망가질까 봐 손가락을 쫙 편 채 집까지 걸었다. 그런데 아침이면 꽃잎 끝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울상이 된 딸에게 엄마는 내년 봄에 또 피니까 괜찮다고 했다. 엄마가 떠난 뒤로 차율은 그 둑방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책갈피를 형광등에 비춰 보니 꽃잎 끝이 조금 바래 있었다. 가장자리 필름도 살짝 비뚤었다. 누군가 직접 꽃을 따서 말린 걸까. 차율은 필름을 엄지로 가만히 쓸었다. 꽃반지를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본 적도 있었다. 손대자마자 부스러져서 버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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