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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선물을 준 사람

  다음 날 아침, 차율은 평소보다 이십 분 일찍 출근했다.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내 겉면을 다시 들여다봤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흐트러짐 없는 글씨였다. 아는 글씨인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팀원들의 손글씨를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니. 혜주가 출근하자 차율은 먼저 케이크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제 케이크 고마웠어요. 상자 접어 둔 것까지 보고 갔어요.”“에이, 그건 지수 씨랑 같이 한 거예요.”“그럼 혹시, 제 키보드 위에 봉투 두고 간 것도…….”“봉투요?” 혜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 자리에 앉던 지수도 고개를 저었다. “안에 꽃 책갈피가 있더라고요. 이름이 없어서.”“저 아니에요! 저였으면 어제 바로 말했죠!” 묻기도 전에 도윤이 손사래를 쳤다. 주함은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생일인 줄은 어제 점심때 처음 알았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복합기 앞에서 출력물을 기다리던 노 차장이 돌아봤다. “꽃? 내가 그런 걸 왜 해. 난 커피 쿠폰이면 끝이야.”“차장님은 생각도 안 했어요.”“그것도 좀 서운하네.” 웃음이 한바탕 지나갔다. 차율도 따라 웃으며 봉투를 서랍에 넣었다. 자리에 앉자 메시지 알림이 떴다. [물어봤어요? 누구래요?][다 아니래요.][그럼 나 경쟁자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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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비 오는 날의 데이트

  토요일은 아침부터 비 소식이 있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굵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호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뭐 먹고 싶어요? 생일이니까 홍 과장님이 골라요.] 차율은 휴대폰을 든 채 잠깐 멍해졌다. 녹현과는 늘 그가 예약한 식당에 갔었다. 메뉴를 두고 오래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걸 먹으면 됐으니까. [생선구이요. 망원시장 쪽에 숯불로 굽는 집이 있어요.][좋아요. 여섯 시에 데리러 갈게요.] 곧바로 온 답장에 차율은 식당 이름을 덧붙였다. 보내고 나서야 생선을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생선 안 좋아하세요?][좋아해요. 나 고등어는 한 마리 혼자 다 먹어요.] 차율은 웃으며 식당 위치를 전송했다. 자기가 고른 곳에 누군가 기꺼이 따라온다는 게, 이렇게 낯간지러운 일인 줄 몰랐다.  * * *  생선구이집은 시장 골목 끝에 붙어 있었다. 비닐 천막 아래 연탄 화로에서 고등어가 지글지글 익어 갔다. 기름 튀는 소리가 빗소리와 섞였고, 문이 열릴 때마다 젖은 시장 냄새가 들어왔다. 호빈은 셔츠 소매를 걷고 생선 가시를 발랐다. 차율의 밥 위에 두툼한 살점이 올라왔다. “제가 할게요. 호빈 씨도 드세요.”“이거 한 점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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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보고 싶었다는 말

  월요일 아침, 차율의 책상 위에 아이스 라테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컵에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아무 글씨도 없이 웃는 얼굴 하나만 그려진. 차율은 재빨리 포스트잇을 떼어 서랍에 넣었다. 그제야 혜주와 지수의 책상에도 같은 컵이 놓인 게 보였다. 팀 전체에 돌린 커피였다. 도윤은 벌써 빨대를 꽂고 부장님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팀장석의 호빈이 모니터 너머로 눈을 찡긋했다. 차율은 메일 창을 열고 빨대를 물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가리려니 괜히 한 모금 더 마시게 됐다. 커피는 팀 전체에 돌리기로 한 약속도 지켰다. 포스트잇만 조금 조심하면 되겠지. 오전 회의에서 호빈은 다음 분기 판촉 일정을 짚었다. 주함의 보고를 듣다가 근거가 빠진 수치에 관해 물었고, 답이 나오자 확인할 항목만 정리하고 넘어갔다. 차율은 회의록을 적으며 그의 말을 따라갔다. 자신에게 의견을 물을 때도 다른 팀원을 대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점심은 팀 전체가 근처 쌈밥집으로 갔다. 호빈이 차율 옆에 앉았고, 맞은편에는 청운과 도윤이 자리 잡았다. 쌈 채소 바구니가 돌자 호빈이 상추 몇 장을 집어 차율의 접시에 올렸다. “홍 과장님 상추 좋아하잖아요.” 차율은 물잔을 내려놓다 말고 맞은편을 봤다. 도윤이 바구니를 받으려던 손을 멈췄다. “부장님은 과장님 식성까지 아세요?”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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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좋은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

  지온이 보낸 떡볶이 쿠폰은 결국 수요일 밤에 썼다. “생일 쿠폰을 왜 내가 먹어.” 차율네 거실 바닥에 앉은 지온이 투덜거리면서도 튀김부터 집었다. 배달 용기를 열자 매콤한 냄새가 퍼졌다. 차율은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왔다. “둘이 먹으라고 튀김까지 넣은 거 아니었어?”“그건 그렇지.” 지온이 캔을 땄다. 한동안은 가게 얘기를 하다가 느티나무 공원에서 자꾸 마주친다는 두부 보호자 얘기로 넘어갔다. “할머니한테 보낼 산책 기록을 나한테도 보여 줘. 어제보다 이 분 더 걸었다고.”“회사에서도 그래. 보고할 거 있으면 표정부터 달라져.”“너네 회사는 다 그렇게 귀엽냐.”“아니. 걔만.” 차율이 웃다가 떡볶이 하나를 입에 넣었다. 지온은 튀김 부스러기를 젓가락으로 모으며 물었다. “그래서 생일은 어땠는데. 생선구이 먹으러 갔다며.”“응. 맛있었어.”“그걸로 끝이야?” 차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지온이 기다리고 있어서, 내려놓고도 바로 젓가락을 집지 못했다. “잘해 줘. 부장님이.”“그건 알아.”“내가 말하면 들어 주고, 서운하다고 하면 사과하고. 생일 메뉴도 나한테 고르래. 내가 좋아하는 데 가서 자기도 맛있게 먹고.”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율은 캔 옆면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밀었다. “월요일에는 팀 사람들이랑 밥 먹다가 내 접시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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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첫 키스

  지온의 말은 며칠 동안 차율의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랑 좋아하는 사람.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점포 배너 사진을 확인하면서도 그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때마다 차율은 하던 일로 눈을 돌렸다. 사귀기 시작한 지 오래된 것도 아닌데, 벌써 마음을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하나. 회사에서의 호빈은 여전했다. 회의에서는 단호했고, 점심시간에는 팀원들 사이에서 크게 웃었다. 상추 일 이후로 커피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일도 없었다. 대신 퇴근 후에는 저녁을 뭘 먹었는지, 지금 뭘 하는지 묻는 메시지가 조금 길어졌다. 금요일 밤에는 함께 한강에 갔다. 비가 그친 뒤라 강바람이 선선했다. 잔디밭에는 돗자리를 편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다리 위로 차들의 불빛이 흘렀다. 호빈이 편의점에서 사 온 캔커피를 내밀었다. 블랙과 라테가 하나씩이었다. “라테는 시럽 안 들어간 거래요.” 차율은 블랙으로 가던 손을 멈췄다. 지난번 케이크도 최대한 달지 않은 걸로 골랐다고 했었다. 이번에도 뒷면을 들여다보며 골랐을 모습을 떠올리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럼 이거 마실게요.”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많이 안 달고.”“다행이다.” 그가 웃으며 옆에 앉았다. 차율은 차가운 캔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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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위화감(3)

  금요일 저녁, 호빈이 고른 곳은 망원동 골목 안쪽의 솥밥집이었다. “여기 기억나요? 우리 처음 둘이 밥 먹은 데.” 나무 문을 밀며 호빈이 웃었다. 자전거는 더위가 좀 가시면 타기로 했다. 대신 오랜만에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더니 여기였다. 창가의 2인용 테이블도 그대로였다. “그날 차율 씨 문턱에서 한참 서 있었잖아요. 내가 너무 부장님 같지 않다고.”“그걸 기억하세요?”“그럼요. 옷 고르느라 옷장 다 뒤졌는데.” 호빈이 짐짓 억울한 얼굴을 했다. 차율은 웃음을 터뜨렸다. 회사에서 늘 여유 있어 보이던 사람이 그날 옷장 앞에서 고민했다니. 솥밥이 뜸 드는 동안은 지난 회의 이야기를 했다. 남은 네 점포의 시식 행사가 끝났고, 현장 보고도 들어왔다고. “노 차장님이 보시더니 고개만 끄덕이시더라고요.”“그게 칭찬이에요?”“더 물을 게 없다는 거잖아요. 최상급이죠.” 차율은 웃으며 수저를 놓았다. 이 사람과 있으면 웃을 일이 많았다. 그건 처음부터 그랬다. 뚜껑을 열자 김이 확 피어올랐다. 호빈이 밥을 덜어 그릇에 옮기는 동안, 차율은 맞은편 벽에 걸린 낡은 메뉴판을 봤다. 그날도 저 메뉴판을 봤다. 그리고 물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날의 일을.  기억은 생각보다 선명하게 되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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