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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기록

  지온의 가게에서 돌아온 밤, 차율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러면 확인해.’ 버스 창에 이마를 기대고 오는 내내 그 말이 맴돌았다. 무엇부터 확인해야 할까. 목걸이를 언제 찾았는지 묻고 나면 그다음에는. 차율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스탠드를 켰다. 서랍에서 다 쓰지 못한 업무 수첩을 꺼냈다. 호빈이 준 다이어리는 그대로 덮어 두었다. 이 이야기를 거기에 적고 싶지는 않았다. 빈 페이지 한가운데 세로줄을 긋고 왼쪽에 ‘기억나는 것’, 오른쪽에 ‘들은 것’이라고 썼다. 회사에서는 늘 이렇게 나눠 적었다. 오른쪽 칸부터 채웠다. 지수 / 택시를 잡으며 시간을 확인했음. 열한 시쯤.부장님 / 노래 한 소절. 청첩장 얘기를 하다 울었음. 안경을 벗었음. 코트 단추가 어긋나 말해 줬더니 손사래를 침. 혼자 먼저 나갔고, 그 뒤는 술도 올라 잘 모름. 지온의 이름도 적었다가 줄을 그었다. 그날 아침 버스에서 통화한 건 맞지만, 지온이 본 일을 들려준 건 아니니까. 왼쪽으로 펜을 옮겼다. 이번에는 한 줄을 쓰고도 오래 멈췄다.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 비틀거리며 다가가던 자신. 누군가의 셔츠 깃을 붙잡던 손. 차율은 그 아래에 코트 단추를 채워 주던 손이라고 적었다. 잠깐 망설이다 옆에 물음표를 붙였다. 불과 며칠 전에 떠오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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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재방문

  며칠 동안 수첩은 가방 안쪽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일 가 보겠다고 생각한 밤이 지나고도 차율은 평소처럼 출근했다. 남은 점포의 정산 자료를 맞추고, 퇴근하면 씻고 누웠다. 손이 바쁜 동안에는 잊을 수 있었지만 잠들기 직전에는 수첩에 적은 마지막 줄이 떠올랐다. 맞은편 편의점 영상. 점포 외근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배너 위치를 확인하고 점장과 다음 행사 일정까지 맞추고 나니 네 시 반이었다. 당초 예상보다 한 시간이나 빨랐다. “시식대는 냉장 쇼케이스 옆으로 하면 동선이 안 막힐 거예요.”“좋네요. 당일 오전에 저희 쪽에서 한 번 더 연락드릴게요.” 점장이 시원한 음료까지 쥐여 주며 배웅했다. 차율은 인사하고 매장을 나와 설치 사진과 협의 내용을 팀 메신저에 올렸다. 복귀하면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듯해 현장에서 마쳐도 될지 물었다. 호빈이 확인했다는 답을 보냈다. [네. 오늘은 바로 들어가요.] 차율은 휴대폰을 넣고 역으로 내려갔다. 노선도 앞에서 집 쪽 방향을 확인하다가 손을 가방 안으로 넣었다. 수첩 모서리가 손끝에 걸렸다. 오늘도 그냥 가면 언제 올 건데. 차율은 반대편 승강장으로 돌아섰다.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골목은 오후 햇빛 아래서 낯설 만큼 평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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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다시 보기

  “그때 회사 사람들이랑 왔던 분 맞죠? 영상 보고 간.” 사장이 행주를 어깨에 걸치며 웃었다. 차율은 고개를 숙였다. “네. 그때 정말 감사했어요.”“아유, 뭘. 오늘은 무슨 일로?” 차율은 가방끈을 고쳐 쥐었다. 오는 내내 연습한 말인데도 사장을 마주 보니 입이 마르는 것 같았다. “그날 영상이 혹시 아직 남아 있을까요?” 사장이 눈썹을 올렸다가 카운터 쪽을 봤다. “있긴 있죠. 간판 건이 길어졌거든요. 차 주인이랑 수리비 갖고 몇 달을 실랑이해서, 폴더를 아직 못 지웠거든요.” 차율은 그제야 어깨에 들어간 힘을 조금 풀었다. 다행이다. 지워졌을 거라고 반쯤 각오했는데. “지난번에 맞은편 편의점 영상도 받아 보셨다고 하셨잖아요. 그쪽으로 제가 갔는지 궁금해서요.”“그건 편의점에 물어봐야 하고. 여기 있는 건 우리 가게 거예요.”“그럼 가게 영상부터 조금만 더 볼 수 있을까요? 지난번에는 제가 나가는 데서 멈췄는데, 그 뒤에도 누가 나왔는지 보고 싶어서요.” 사장은 팔짱을 끼고 차율을 바라봤다. 주방에서 직원이 채소 상자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다른 손님들도 찍혀 있어서 다 보여 주기는 좀 그래요.”“네. 제가 나간 직후만 확인할게요. 촬영하거나 복사해 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차율은 휴대폰을 가방 안쪽에 넣었다. 사장은 잠깐 생각하더니 카운터로 들어갔다. “그럼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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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다른 각도의 카메라(上)

  파일을 열려던 사장의 손이 멈췄다. 유리문이 열리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직장인 둘이 들어왔다. 뒤이어 한 무리가 더 들어서자 직원이 목청을 높였다. “어서 오세요!”“아이고, 시간이 벌써.” 사장이 난감한 얼굴로 차율을 돌아봤다. “저녁 장사 시작하면 정신이 없어서. 한 차례 빠지면 볼 수 있을 텐데, 기다리겠어요? 아니면 내일 오픈 전에 오든가.” 차율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하루 더 기다리면 또 돌아설 핑계를 찾을 것 같았다. 게다가 모니터에는 아직 열지 못한 파일이 있었으니까. “기다릴게요. 저도 밥 먹고 있을게요.”“그럴래요? 그럼 저 구석에 앉아요. 거기가 제일 조용해.” 사장이 안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차율은 벽 쪽 이인용 테이블에 앉아 된장찌개를 시켰다. 가게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숯불 연기가 환풍기로 빨려 올라가고 잔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차율은 물컵을 쥔 채 안쪽을 둘러봤다. 길게 이어 붙인 테이블이 보였다. 그날 팀이 앉았던 자리였다. 지금은 낯선 손님들이 둘러앉아 누군가 내민 휴대폰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날도 저렇게 시끄러웠을 것이다.그 속에서 자신은 청첩장 이야기를 하다 울었고, 노래도 불렀다고 했으니. 차율은 테이블 끝부터 눈으로 더듬었다. 기억보다 회식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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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다른 각도의 카메라(下)

  코트 자락이었다. 가로등 불빛 가장자리로 누군가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한쪽으로 기운 어깨와 대충 걸친 코트. 차율은 카운터에 댄 손을 멈췄다. 출입문 화면에서 본 자신의 모습이었다. 화면 속 차율은 눈 쌓인 차 사이를 지그재그로 걸었다. 보닛에 손을 짚었다가 발이 미끄러지자 팔을 벌려 균형을 잡았다.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주차장 끝으로 걸어가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역시나 혼자였다.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와 함께 나온 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차율은 자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시선을 떼고 주차장 입구를 봤다. 출입문에서 같은 쪽으로 갔던 남자도 들어올까. 일 분, 이 분. 화면에는 눈만 내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차율이 손을 짚었던 차 위로, 눈 위에 찍힌 발자국마저 금세 하옇게 덮였다. “그 사람은 이쪽으로 안 왔나 보네.” 사장이 중얼거렸다. 차율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대했던 것도, 두려워했던 것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 빨리 돌려 볼까요?”“네. 부탁드려요.” 사장이 재생 속도를 올렸다. 화면 구석의 숫자가 빠르게 바뀌었다. 열한 시 반을 지나 열두 시. 주차장 너머로 차 불빛이 스쳤고, 골목 입구에서는 오토바이 한 대가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차율은 화면 속 자신이 사라진 방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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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주차장

  남자의 손이 차율의 코트 앞섶으로 향했다. 차율은 카운터 모서리를 붙잡았다. 화면 속 자신이 그 손을 피하듯 몸을 비틀었다. 손사래를 치는 팔이 크게 허공을 갈랐다. 괜찮다고 했을까. 호빈이 들려준 그날의 자신도 그랬다. 단추가 틀렸다는 말에 괜찮다며 손사래부터 쳤다고.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붙잡지도 않았다. 차율의 팔이 내려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눈송이가 두 사람 사이를 비스듬히 지나갔고, 화면 속 시간은 12시 44분에서 45분으로 넘어갔다. 이윽고 화면 속 차율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고개가 남자 쪽으로 기울자, 남자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맨 위 단추였다. 흐린 화면에서도 손이 단추 하나를 풀고, 앞섶을 당겨 맞춘 뒤 다시 끼우는 게 보였다. 그리고 잠깐 멈췄다. 두 번째 단추. 풀고, 맞추고, 끼우고. 또 멈춤. 차율의 숨이 얕아졌다. 며칠 전 사무실에서 카디건 단추를 쥔 채 떠올렸던 장면이 그대로 겹쳐 왔다. 서두르지 않는 손. 단추 하나를 끼울 때마다 잠깐씩 쉬던 박자. 머릿속이 멋대로 만든 그림이 아니었다. 차율은 마른침을 삼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억인지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 한여름에 코트를 꺼내 입고도 끝내 알아채지 못했던 일을 지금 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저 손은 누구의 손일까. “거참, 꼼꼼하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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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화살표

  가게를 나와 지하철에 오르고 나서야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부재중 전화 한 통. 부장님. 차율은 손잡이를 쥔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받았다. 아까 전화 안 받길래. 아직 밖이에요?“네. 회사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이제 들어가요.” 호빈은 무슨 볼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밥은 먹었는지, 들어가면 연락하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끝내 어디에 갔었는지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차율은 어두운 창에 비친 자기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집에 들어와 씻고 나와서도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앉았다. 젖은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책상 위에 동그랗게 번졌다. 가방에서 업무 수첩을 꺼내 펼쳤다. 며칠 전 적어 둔 세 칸이 그대로 있었다. ‘기억나는 것’ 칸의 한 줄에 시선이 멈췄다. 코트 단추를 채워 주던 손? 차율은 펜을 들어 물음표에 줄을 그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게 적었다. 영상으로 확인. ‘확인한 것’ 칸으로 펜을 옮겼다. 열한 시 이 분, 혼자 주차장을 지나 큰길 쪽으로 감.열두 시 사십삼 분, 키 큰 남자와 함께 주차장으로 돌아옴.남자가 코트 단추를 하나씩 다시 채워 줌.남자와 함께 주차장 구석으로 걸어감. 부장님 차 옆을 지나 화면 밖으로.부장님 차는 밤새 그 자리에 있었음. 쓰고 보니 처음으로 칸이 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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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역시

  마음이 정리되자 신기하게도 일이 손에 붙었다. 차율은 미뤄 둔 점포별 판매 분석을 이틀 만에 끝냈다. 시식 행사가 붙은 점포는 모두 판매가 올랐다. “과장님 요즘 표정 좋으세요.” 자료를 받아 가던 지수가 슬쩍 말했다. 차율은 그런가 하고 웃어넘겼다. 호빈에게도 조금 더 다정해졌다. 점심시간에 그의 책상 위에 비타민 음료 하나를 올려 두었고, 퇴근길에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며칠 동안 혼자 의심했던 게 미안해서. 호빈은 그 사실을 모르니 사과할 수도 없었다. 대신 할 수 있는 만큼 잘해 주고 싶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비타민에 메시지까지.][그냥요. 더우니까요.][그럼 매일 더웠으면 좋겠다.] 차율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웃었다. 이렇게 웃으면 되는 거였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 오후에는 청운이 수정한 판매 분석표를 메일로 보내왔다. [3페이지 점포 순서 바꿨습니다.] 차율은 표를 열어 보고 입술을 비죽였다. 행사 시작일 순으로 정렬해 두니 같은 기간의 실적을 비교하기가 훨씬 쉬웠다.그래도 한마디 설명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일 때문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말을 너무 아끼면 누구라도 신경이 쓰일 것이다. 업무 수첩은 서랍에서 꺼내지 않았다. 확인이 끝난 일을 다시 들여다볼 이유는 없었다. 서랍을 열 때마다 그 모서리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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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혼자 남은 2주

  호빈이 떠나고 사흘이 지나자 사무실은 생각보다 금방 새 리듬을 찾았다. 출장 공지대로 결재와 회의는 노 차장이 맡았다.노 차장의 결재는 호빈과 결이 달랐다. 서류를 받으면 첫 장보다 맨 뒤의 숫자부터 펼쳤고, 근거가 빠진 칸에는 말없이 빨간 동그라미만 쳐서 돌려보냈다. “이거 지난달 대비 몇 퍼센트야. 감으로 쓰지 말고.” 동그라미 세 개가 그려진 보고서를 받아 든 도윤이 자리로 돌아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수가 옆에서 근거 자료 폴더 위치를 조용히 짚어 주었다. 주간 회의도 노 차장 방식대로 짧고 건조하게 흘러갔다.노 차장이 보고서 두 장을 넘기는 동안 질문만 세 개가 나왔다. 차율이 마지막 수치를 설명할 때 화면에 호빈이 접속했다. “부장님, 뒤에 수영장 아니에요?”“수영장 아니고 호텔 로비 분수예요. 놀러 온 거 아닙니다.” 호빈이 억울한 얼굴로 해명하자 팀원들과 함께 차율도 웃었다. 그는 곧 이어폰을 고쳐 끼고 청운이 띄운 판매 비교표를 들여다봤다. 웃을 때는 가까이 있는 것 같더니, 질문 끝에 소리가 잠깐 끊기자 그제야 멀리 있다는 실감이 났다.  호빈에게서는 하루에 두세 번 메시지가 왔다. [오늘 미팅 세 개. 점심은 호텔 샌드위치.][보고 싶다. 차율 씨는요?][저도요. 저녁은 제대로 챙겨 드세요.] 이번에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호빈이 보낸 샌드위치 사진을 확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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