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안에서 당신이 뛴다: Chapter 21 - Chapter 30

80 Chapters

21화

회신 접수 대기.윤서하는 그 네 글자를 한참 바라봤다.한 달 동안 아무 변화 없던 화면이었다. 자신이 보낸 편지가 전달됐다는 표시만 확인한 뒤부터는 일부러 앱을 자주 열지 않았다. 답을 기다리기 시작하면 하루 전체가 그 기다림에 먹힐 것 같아서였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회신 등록 가능.누군가가 편지를 읽었고, 답장을 보낼 수 있는 상태가 됐다는 뜻이었다.서하는 손가락을 화면에서 떼었다.아직 답장이 온 건 아니었다.그 사실부터 적었다.[확인된 것: 내 편지는 수신됨. 회신 가능 상태.][확인되지 않은 것: 답장을 썼는지, 누가 읽었는지.]수첩은 퇴원 뒤에도 계속 가지고 다녔다. 체온과 약 복용 시간, 외래 날짜 옆으로 이준에 관한 기록이 조금씩 늘어났다.오전 일곱 시 약.체온 36.4도.걷기 사십 분.외래 채혈 완료.살아 있는 쪽의 기록은 구체적이었다.죽은 사람 쪽만 늘 빈칸이 많았다.“윤서하 씨.”진료실 문이 열렸다.오민재는 검사 결과를 확인한 뒤 약 용량과 다음 외래 일정을 설명했다. 서하는 익숙하게 휴대폰 일정에 날짜를 넣었다.“요즘 걷는 건 어떻습니까?”“집 근처는 혼자 다녀요.”“무리해서 속도 올리지는 마세요.”“알아요.”“열이나 감염 증상 생기면 바로 연락하시고요.”예전 같으면 같은 설명을 반복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이제는 토를 달지 않았다. 살아남는 일에는 반복되는 주의가 필요했다.진료가 끝나려 할 때 서하가 휴대폰을 내밀었다.“이거 무슨 뜻이에요?”민재가 화면을 봤다.“서신 중개 상태네요.”“회신 가능이면 답장이 있다는 거예요?”“아닙니다. 상대 측에서 회신을 등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그러면 아직 아무것도 안 온 거고요.”“네.”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확인된 것 하나가 더 생겼다.아직 답장은 없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안심됐다. 무슨 말이 올지 준비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진료실을 나온 뒤에는 이식센터에 들렀다.코디네이터에게 같은 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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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봉투는 예상보다 얇았다.윤서하는 이식센터 창구 앞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손을 대지 못했다. 담당 코디네이터가 확인 절차를 설명했지만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내용은 중개 기준에 맞춰 확인됐고요.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없습니다.”서하는 봉투만 바라봤다.“누가 썼는지도 모르고요?”“네.”“부모인지, 배우자인지도요?”“그 부분도 공개되지 않습니다.”알고 있던 답이었다.그래도 마지막까지 물어보고 싶었다.코디네이터가 봉투를 밀어줬다.“여기서 읽으셔도 되고, 가져가셔도 됩니다.”서하는 결국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었다.접힌 종이는 한 장이었다.첫 줄에는 인사도 없었다.당신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서하는 그 문장을 읽고 잠시 멈췄다.자신이 보낸 세 문장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났다.그 아래에는 짧은 글이 이어졌다.당신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그 아이는 누군가가 살아주는 일을 원했을 겁니다.서하의 손끝이 종이 모서리에서 굳었다.그 아이.이름은 없었다.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그런데 ‘그 아이’라는 표현 하나 때문에 편지를 쓴 사람이 부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서하는 바로 스스로를 멈췄다.추정일 뿐이었다.지금까지 그렇게 몇 번이나 잘못 앞서갔는지 알고 있었다.“괜찮으세요?”코디네이터가 물었다.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목이 말랐다.다시 편지를 읽었다.당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합니다.잘 살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말이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요.다만 몸을 아끼셨으면 합니다.서하는 그 문장에서 오래 멈췄다.잘 살아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오히려 더 아팠다.자신은 첫 편지에 ‘잘 살아보겠습니다’라고 썼다. 그 약속이 상대에게는 위로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받는 사람은 그것조차 짐이 될 수 있다고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누군가를 잃은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의 부담부터 생각하고 있었다.서하는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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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사진을 좋아했습니다.윤서하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접지 못했다.앞에 적힌 다른 문장들은 몇 번을 읽어도 그대로였다. 당신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말. 그런데 마지막 한 줄만은 자꾸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강이준.이름이 떠오르자 서하는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아직 아니다.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다. 카메라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만 사진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문장 하나로 기증자를 이준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구분해온 사실과 추측이 다시 뒤섞인다.서하는 새 노트를 펼쳤다.[확인된 사실]기증자 가족의 회신에 ‘그 아이’라는 표현이 있음.‘사진을 좋아했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음.[추정]작성자가 부모 세대일 가능성.기증자가 사진을 취미로 했을 가능성.마지막 줄을 쓰려다가 펜을 멈췄다.‘강이준일 가능성.’적지 않았다.그건 아직 사실에서 너무 멀었다.아침 일곱 시, 약통이 울렸다. 서하는 약을 삼키고 체온을 쟀다. 36.5도. 수첩에 기록한 뒤 집 앞 산책로를 걸었다.퇴원 직후에는 아파트 입구를 한 바퀴 도는 데도 여러 번 쉬었는데, 이제는 천천히 걸으면 십 분 넘게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계단은 여전히 피했고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고쳐 썼다.가슴은 잘 뛰었다.그럴 때마다 이준의 얼굴이 끼어들었다.비 오는 날 카메라를 비닐로 감싸던 모습, 서하가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자 렌즈를 내려놓던 손, 현상한 사진을 바닥에 늘어놓고 밤을 새우던 뒷모습.서하는 걸음을 멈췄다.이 기억은 심장에서 나온 게 아니다.자신이 그를 오래 사랑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장면이었다.그 사실을 확인한 뒤 다시 걸었다.집에 돌아오자 미경이 식탁 위에 놓인 편지를 보고 물었다.“또 읽어?”“응.”“뭐가 그렇게 걸려.”서하는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사진을 좋아했대.”미경은 그 줄을 읽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엄마도 이준 씨 생각나지?”“네가 먼저 그 이름을 꺼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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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강이준 / 흑백 36컷.윤서하는 재훈이 보내온 사진을 확대했다.낡은 종이 봉투의 가장자리에는 오래된 접힘 자국이 있었고, 안쪽으로 필름통 하나가 비쳐 보였다. 날짜는 사 년 전. 이준과 헤어지기 전이었다.서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그거 열지 마.”재훈이 받자마자 말했다.“나도 안 열었어. 네 거잖아.”“필름통 맞아?”“응. 흑백필름.”그 단어가 가슴을 눌렀다.흑백.이준은 색이 너무 많은 사진을 싫어했다. 사람이 숨길 수 있는 게 많아진다며 흑백필름을 고집했고,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닐 때도 중요한 사진은 꼭 필름으로 한 번 더 찍었다.서하는 눈을 감았다.‘사진을 좋아했습니다.’기증자 가족의 편지 마지막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서하야.”재훈이 불렀다.“듣고 있어?”“응.”“지금 또 이어붙이고 있지?”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사진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강이준 하나야?”“아니.”“흑백필름 쓰는 사람도 걔 하나 아니고.”“알아.”“아는데 왜 숨도 제대로 안 쉬어.”그제야 서하는 자신이 숨을 얕게 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가슴 안의 박동은 빠르지 않았다. 몸은 멀쩡한데 생각만 먼저 달리고 있었다.“필름은 내가 보관해둘게.”“가져다줘.”“지금?”“응.”“왜.”“내 거니까.”재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 필름 보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자신도 몰랐다.사진 속에 이준이 남긴 무슨 답이 있을 거라고 믿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편지 한 줄과 흑백필름이 겹친 순간, 머릿속에서 이미 결론이 만들어지고 있었다.이준일지도 모른다.아니.이준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그 생각이 더 무서웠다.죽은 사람의 심장이 자기 안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사랑했던 사람을 기증자로 만들어야만 이 생존이 견딜 만해지는 마음.서하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가 곧 내렸다.“재훈아.”“어.”“나 지금 무서운 게 뭔지 알아?”“뭔데.”“이준 씨 심장이 아니면 실망할까 봐.”전화 너머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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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이준 씨 심장, 어디로 갔어요?”전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윤서하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강태경이 모른다면 모른다고 말할 것이고, 아니라면 아니라고 하면 됐다.그런데 돌아온 말은 엉뚱했다.“지금 어디입니까.”“그게 왜 중요해요.”“혼자 있습니까?”서하의 손가락이 굳었다.“내 질문부터 대답해요.”태경은 잠시 숨을 골랐다.“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또 그 말이네요.”“서하 씨.”“끊을게요.”서하는 먼저 통화를 끝냈다.확인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심장은 괜히 빨라져 있었다.그녀는 식탁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강이준 사고.뇌사 판정일과 자신의 이식 수술일이 같음.태경은 장기기증 여부를 부정하지 않음.기증자 가족은 ‘사진을 좋아했다’고 씀.이준은 사진가였음.이준은 흑백필름을 고집했음.여섯 줄을 적고 한참 바라봤다.전부 사실이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여섯 개의 사실을 한 줄로 이어놓으면 결론은 너무 쉬웠다.내 심장은 강이준의 것이다.서하는 그 문장을 쓰지 않았다.대신 목록 오른쪽에 하나씩 다른 말을 붙였다.같은 날 사고로 뇌사한 사람은 이준만이 아닐 수 있음.장기기증 여부는 공식 확인되지 않음.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음.흑백필름은 기증자 정보가 아니라 이준의 개인 취향.마지막 줄까지 쓰고 나서야 펜을 내려놓았다.재훈 말이 맞았다.자신은 맞는 것만 모아놓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일곱 시, 약통이 울렸다.서하는 약을 삼키고 체온을 잰 뒤 집 앞을 삼십 분 걸었다. 돌아와서는 손을 씻고 아침을 먹었다. 한 달 전에는 수술 자국 때문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이제는 혼자 샤워하고, 약을 챙기고, 가까운 곳까지 걸어 다닐 수 있었다.몸은 분명 달라지고 있었다.그런데 노트 속 여섯 줄은 밤새 그대로였다.오전에는 재훈이 맡아둔 필름을 찾으러 복원실 근처까지 갔다.“현상할 거야?”재훈이 종이 봉투를 내밀며 물었다.“아직.”“잘 생각했네.”서하는 봉투 앞면을 다시 봤다.강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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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오후 세 시가 되기 오 분 전, 윤서하는 해온대학교병원 1층 상담실 앞에 도착했다.강태경은 이미 안에 있었다.병원에 오기 전부터 서하는 노트를 몇 번이나 폈다 닫았다.이준의 뇌사 판정일과 자신의 수술일이 같다는 것. 기증자 가족이 ‘사진을 좋아했다’고 썼다는 것. 이준이 흑백필름을 고집했다는 것. 태경이 장기기증 여부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확인된 사실과 추측을 나눠 적었는데도 마지막 줄만은 지워지지 않았다.‘이준의 심장이 내게 왔을 가능성.’그 문장 옆에는 물음표 하나만 남겼다. 오늘은 그 물음표를 없애고 싶었다.테이블 위에는 서류봉투 하나와 낡은 카메라 스트랩이 놓여 있었다. 서하는 문을 닫자마자 의자에 앉지 않았다.“말할 수 있는 것부터 해요.”태경이 시계를 벗어 옆에 내려놓았다.“이준은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해둔 사람이었습니다.”서하의 손이 멈췄다.처음으로 들은 확실한 대답이었다.“언제요.”“오래전입니다.”“나 만나기 전?”태경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그 시점까지는 지금 말하지 않겠습니다.”서하는 헛웃음을 삼켰다.“그럼 또 반쪽짜리네.”“오늘 내가 확인해줄 수 있는 건 이준이 기증 의사를 밝혀둔 사람이었다는 것까지입니다.”“심장은요.”태경의 입이 닫혔다.“어디로 갔어요.”“그건 내가 말할 수 없습니다.”서하는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왜요. 가족이잖아요.”“가족이어도 수혜자 정보를 마음대로 확인하거나 공개할 수 없습니다.”“나는 수혜자예요.”“그래서 더더욱 내가 연결해줄 수 없습니다.”“연결해달라는 게 아니잖아. 맞는지 아닌지만 말해달라고.”태경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서하를 견딜 수 없게 했다.병원은 규정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민재도 같은 이유로 선을 그었다. 이제 이준의 형까지 눈앞에 앉아 알고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다들 자신을 보호한다는 얼굴로 정보를 잘라냈다.정작 자기 몸 안에서 뛰는 장기의 주인은 자신만 모른 채였다.“당신들도 똑같네요.”“무슨 뜻입니까.”“내가 감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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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기다리라는 말은 대답보다 오래 남았다.윤서하는 상담실을 나온 뒤에도 강태경의 말을 몇 번이나 되짚었다.네가 알아도 되는 방식으로 알게 될 때까지 기다려.누가 정한 방식이고, 누구에게 허락받아야 알 수 있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병원은 규정을 말했고 태경은 순서를 말했다. 정작 자신의 몸 안에서 뛰는 장기의 주인을 모르는 사람은 서하뿐이었다.집에 돌아오자마자 노트를 펼쳤다.[확인된 사실]강이준은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해둔 사람이다.사고 뒤 뇌사 판정을 받았다.뇌사 판정일과 자신의 심장이식 수술일이 같다.[확인되지 않은 사실]강이준의 심장이 누구에게 이식됐는지.자신의 기증자가 강이준인지.마지막 줄 아래에 펜을 대고 한참 망설이다가 적었다.강태경은 알고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그건 사실이라기보다 판단에 가까웠다. 서하는 괄호를 치고 ‘추정’이라고 붙였다.화를 내고 돌아왔어도 확인된 것은 늘 그만큼뿐이었다.저녁 일곱 시가 되자 약통이 울렸다.서하는 정해진 약을 삼킨 뒤 체온을 쟀다. 36.6도. 수첩에 기록하고 물컵을 씻었다. 손을 씻고, 다음 날 먹을 약이 충분한지 확인한 뒤 식탁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몸은 이전보다 훨씬 잘 움직였다.한 달 전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누군가의 손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혼자 약을 챙기고 외래에 다녀오며 짧은 산책도 했다.그 변화가 이상할 만큼 분했다.자신은 계속 살아나는데 이준에 관한 답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미경이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가 식탁 위 노트를 봤다.“태경 씨 만났어?”“응.”“뭐래?”서하는 약통 뚜껑을 닫았다.“이준 씨가 장기기증 등록은 해뒀대. 근데 심장이 어디로 갔는지는 말 못 한대.”미경의 손이 장바구니 손잡이 위에서 잠깐 멈췄다.“그럼 거기까지만 알아.”“엄마도 기다리라고?”“기다리라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걸 답으로 만들어놓고 네가 먼저 무너지지 말라는 거야.”서하는 반박하려다 그만뒀다.엄마까지 같은 편이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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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시작한 녹음은, 어느새 강이준을 찾는 일이 되어 있었다.윤서하는 침대에 누운 채 작은 녹음기를 가슴 가까이에 댔다.00:00:06.희미한 옷 스치는 소리 사이로 박동이 잡혔다.한 번.조금 뒤 또 한 번.서하는 화면의 숫자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퇴원한 뒤 집에서 자는 밤은 병실보다 조용했다. 기계음도, 새벽마다 문을 여는 간호사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가슴 안쪽의 움직임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처음에는 불안해서 녹음했다.잘 뛰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다음부터는 잠들기 전에 한 번씩 듣는 습관이 됐다.문제는 어느 순간부터였다.박동을 들으면 이준이 떠올랐다.비 오는 날 젖은 카메라를 품에 안고 뛰던 모습, 흑백필름을 빛에 비춰보던 손, 사진 찍기 싫다는 서하에게 렌즈를 내리던 얼굴.서하는 눈을 떴다.“아니야.”녹음기를 가슴에서 떼었다.오민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이식된 심장이 기증자의 기억이나 성격을 전달하는 건 아닙니다.알고 있었다.지금 떠오른 장면은 심장이 보여준 게 아니라 자신이 기억한 것이다. 날짜를 맞춰보고, 기증자 가족의 편지를 읽고, 이준의 필름을 다시 손에 쥐었으니 머리가 그를 불러낸 것뿐이었다.그런데도 서하는 녹음을 끄지 못했다.00:01:24.숫자가 계속 늘어났다.그날 밤 파일 이름을 정하지 못해 날짜만 저장했다.다음 날 아침 일곱 시, 약통 알람이 울렸다.서하는 약을 삼키고 체온을 쟀다. 36.5도. 노트에 기록한 뒤 집 앞을 천천히 걸었다. 예전보다 훨씬 오래 걸을 수 있었고, 중간에 멈추는 횟수도 줄었다.몸은 회복하고 있었다.그 사실만큼은 누구에게 확인받을 필요가 없었다.점심 무렵 재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필름은 아직 안 건드렸지?]서하는 서랍을 열었다.강이준 / 흑백 36컷.봉투는 그대로였다.[응.][잘했네.][근데 궁금해.]잠시 뒤 전화가 왔다.“뭐가.”“안에 뭐가 찍혔는지.”“그건 나도 궁금하지.”“현상해볼까?”재훈은 바로 답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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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강이준.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이 너무 선명해서 윤서하는 한동안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녹음기는 아직 켜져 있었다. 가슴 가까이에 둔 기기에서 숫자가 계속 올라갔다.00:03:41.박동은 일정했다.서하는 먼저 녹음을 멈췄다. 그리고 휴대폰 알림을 다시 읽었다.[공유 폴더 활동 알림]공유자: 강이준.손끝이 차가워졌다.죽은 사람이 방금 무언가를 올린 것처럼 보이는 문장이었다.서하는 바로 알림을 누르지 않았다.“그럴 리 없어.”이준은 죽었다.휴대폰도 유품이 됐고, 태경이 정리하고 있었다. 이 알림이 정말 새 활동이라면 누군가 계정에 접속했거나, 시스템이 오래된 기록을 다시 띄운 것뿐이었다.그 이상으로 생각하면 안 됐다.민재의 말도 떠올랐다.박동 소리에는 기증자의 기억이 들어 있지 않다. 무엇이 떠오르든 그것은 서하가 가진 기억이다.서하는 녹음기를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심장이 뛴 직후 이준의 이름이 나타났다고 해서 두 일이 연결되는 건 아니었다.그렇게 정리하고 나서야 알림을 눌렀다.로그인이 필요하다는 화면이 떴다.삼 년 넘게 쓰지 않은 계정이었다.비밀번호를 두 번 틀리고, 예전 이메일로 인증번호를 받은 뒤에야 접속할 수 있었다. 화면이 열리자 곧바로 공유 폴더가 나타나는 대신 안내창 하나가 먼저 떴다.[장기 미사용 계정의 보관 자료를 복원 중입니다.]서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새 활동이 아니었다.누군가 방금 접속한 것도 아니었다.오래 잠들어 있던 계정이 다시 열리면서 예전 공유 자료가 복원되는 중이었다.안도감이 왔다가 곧 사라졌다.혹시 태경이 이준의 계정에 들어간 건 아닐까 싶어 고객센터 안내까지 찾아봤다. 공유자가 사망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폴더가 움직이는 건 아니며, 장기 미접속 계정을 다시 열면 보관된 공유 기록이 복구될 수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최근 접속 기록도 새로 잡힌 것은 없었다.서하는 그 문장을 노트에 그대로 옮겼다.‘이준의 신규 활동 아님.’밑줄까지 긋고 나서야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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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폴더를 여는 순간, 윤서하는 첫 번째 사진에서 손을 멈췄다.자신이었다.복원실 창가에 앉아 오래된 문서를 들여다보는 모습. 머리는 대충 묶여 있었고, 한쪽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한 흔적은 없었다.서하는 파일 날짜부터 봤다.삼 년 전.헤어지기 나흘 전이었다.다음 사진도 자신이었다.퇴근길 횡단보도 앞에서 가방을 끌어안고 서 있는 모습, 편의점 창가에서 물을 마시는 모습, 택시 뒷좌석에서 고개를 기대고 잠든 모습.화려한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더 이상했다.그 시기라면 강이준은 정하린과 만나고 있다고 했다. 며칠 뒤에는 두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이 기사에 올라왔고, 이준은 서하 앞에서 관계가 끝났다고 말했다.그런데 공유 폴더 안에는 그 직전까지 찍힌 서하의 하루가 차곡차곡 남아 있었다.서하는 사진을 빠르게 넘기다 멈췄다.한 장에는 자신이 약 봉투를 들고 병원 건물에서 나오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얼굴은 지쳐 있었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다.그런 자신을 이준은 길 건너편에서 찍고 있었다.“왜 이런 걸 찍었어.”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답할 사람은 없었다.화면을 확대해도 사진 속 이준의 마음까지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렌즈가 무엇을 향했는지만 남아 있었다.서하는 노트를 꺼냈다.[확인된 사실]공유 폴더 사진 대부분이 헤어지기 직전 촬영됨.피사체는 윤서하.폴더 공유가 해제되지 않음.그 아래에 한 줄을 적으려다 멈췄다.‘이준은 헤어지기 직전까지 나를 사랑했다.’쓸 수 없었다.사진이 사랑을 증명하지는 않았다.대신 이렇게 고쳐 적었다.‘사진만으로 촬영 의도는 확인할 수 없음.’펜을 내려놓고 다시 화면을 봤다.그렇게 써놓고도 마음은 말을 듣지 않았다.외도 중이던 남자가 왜 헤어질 여자 사진을 이렇게 많이 남겼을까.그것도 몰래.오전 일곱 시 약통 알람이 울렸을 때도 서하는 폴더를 보고 있었다. 약을 삼키고 체온을 잰 뒤 휴대폰을 뒤집었지만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손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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