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안에서 당신이 뛴다: Chapter 11 - Chapter 20

80 Chapters

11화

정식 보행 재활이 시작된 날, 윤서하는 여섯 걸음 만에 주저앉았다.침대에서 복도까지 걸었던 것과는 달랐다. 재활치료실 바닥에는 손잡이와 거울, 일정한 간격으로 붙은 표시가 있었고, 치료사는 서하가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자세를 확인했다.“시선은 앞에 두세요. 발끝 보지 말고.”서하는 손잡이를 쥔 채 한 걸음 더 옮겼다. 오른발이 닿은 뒤 왼발이 따라왔고, 일곱 번째 표시를 넘으려는 순간 허벅지에서 힘이 빠졌다.몸이 아래로 꺼지기 전에 치료사가 팔을 받쳤다.“앉을게요.”“아직 할 수 있어요.”“지금은 앉는 게 하는 겁니다.”의자에 닿자 숨이 한꺼번에 몰렸다. 가슴은 빠르게 뛰었고, 흉골 안쪽이 당기면서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서하는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어제는 더 걸었는데.”“어제는 병실 복도였고, 오늘은 속도랑 자세까지 봤잖아요.”“그래도 여섯 걸음이에요.”“여섯 걸음을 걸은 거죠.”그 말이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서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봤다. 수술 전보다 얼굴은 더 말랐고, 환자복 아래 몸은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심장만 바뀌면 다시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줄은 몰랐다.“한 번만 더 할게요.”치료사는 잠시 서하의 호흡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두 번째에는 다섯 걸음에서 멈췄다.이번에는 고집하지 않았다.병실로 돌아왔을 때 오민재가 회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하가 침대에 눕자 그는 차트를 넘기며 말했다.“재활 기록 봤습니다.”“처참하던데요.”“수술 며칠 만에 걷는 사람이 마라톤 기록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서하는 대꾸하지 않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민재는 테이블 위 작은 약통을 가져왔다. 전날 받은 것이었다.“오늘부터 약은 직접 시간 확인하면서 드세요.”“평생이죠?”“면역억제제는 장기적으로 계속 관리해야 합니다. 임의로 줄이거나 끊으면 안 되고요.”서하가 약통 뚜껑을 열었다. 칸마다 다른 모양의 알약이 들어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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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당신이 살아서 다행입니다.”윤서하는 종이를 접지 못한 채 한참 들여다봤다.문장은 하나뿐이었다. 이름도, 날짜도,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흰 종이 아래까지 훑어도 더 적힌 것은 없었고, 봉투 겉면에는 자신의 이름만 반듯하게 쓰여 있었다.미경이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누가 보낸 거래?”“몰라.”“병원에서 온 거 아니야?”“그럼 왜 이름을 안 써.”서하는 봉투를 뒤집었다. 우표도 소인도 없었다. 외부 우편이라면 남아 있어야 할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간호사한테 물어볼게.”미경이 봉투를 가져가려 하자 서하는 먼저 접어 베개 옆에 넣었다.“내가 할게.”그날 아침 일곱 시, 약통이 울렸다.짧은 진동이 두 번 이어졌고 서하는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전날 오민재가 맞춰둔 시간이었다. 약통 화면에는 07:00이 떠 있었고, 첫 칸의 불이 깜빡였다.서하는 물을 받아 알약을 하나씩 삼켰다.“벌써 익숙해졌네.”미경이 말하자 서하는 빈 컵을 내려놓았다.“익숙한 게 아니라 안 먹으면 안 되니까.”약을 먹은 시간을 수첩에 적은 뒤 체온도 기록했다. 정상. 밤새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재활치료실까지는 휠체어로 이동했지만 돌아올 때는 절반을 걸었다.어제 여섯 걸음.오늘은 열한 걸음.숨이 찼고 다리는 후들거렸으나 쓰러지지 않았다.치료사가 의자를 내밀자 서하는 앉으며 웃었다.“일곱 걸음만 하려고 했는데.”“욕심내면 내일 못 합니다.”“내일도 해야 하네요.”“그다음 날도요.”살아 있다는 건 반복되는 일이었다.약을 먹고, 걸음을 세고, 체온을 재고, 상처를 확인했다. 어제 한 일을 오늘 다시 해야 했고 오늘 한 일을 내일도 해야 했다.그런데 몸이 하루치씩 앞으로 나가는 동안 이준에 관한 시간은 사흘째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 하린에게 보낸 메시지는 여전히 읽히지 않았고, 경찰도 사고의 세부 내용은 알려주지 않았다.서하는 휴대폰을 켰다가 곧 껐다.오늘만큼은 먼저 자기 몸이 하는 말을 듣기로 했다.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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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HUM-217.윤서하는 전날 밤부터 그 번호를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병동 데스크에 남아 있던 작은 스티커 하나가 괜한 기대를 키웠고, 아침이 되자 봉투와 종이를 다시 꺼내 나란히 놓았다.'당신이 살아서 다행입니다.'짧은 문장은 여전히 이상할 만큼 가까웠다.기증자의 가족이라면.그 생각이 떠오르자 서하는 곧 메모지에 선을 그었다.확인 전 추측.직접 적어놓고도 마음은 쉽게 따라오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굳이 병실까지 편지를 보냈다. 우연한 응원이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정확했다.아침 일곱 시, 약통이 울렸다.서하는 편지를 접어 베개 옆에 두고 약을 삼켰다. 체온을 재고 수첩에 기록한 뒤, 전날보다 조금 더 오래 복도를 걸었다. 열한 걸음에서 멈췄던 거리를 오늘은 열세 걸음까지 갔고, 돌아오는 길에는 한 번만 쉬었다.몸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그런데 살아나는 만큼 알고 싶은 것도 늘어났다.병실로 돌아오자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어제 물어보신 편지 확인됐어요.”서하는 물병을 내려놓았다.“누가 보낸 거래요?”“병원 자원봉사 프로그램에서 보낸 거예요.”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간호사가 봉투의 스티커를 가리켰다.“HUM은 자원봉사실 내부 분류 코드예요. 장기 입원 환자나 큰 수술 받은 환자들한테 응원편지를 보내는 프로그램이 있거든요.”“그럼 기증자 가족이 보낸 게 아니에요?”“네. 특정 가족이 쓴 편지는 아니에요.”서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누가 쓴 건지도 몰라요?”“봉사자 이름은 따로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여러 문구 중 하나를 전달하는 방식이래요.”여러 문구 중 하나.당신이 살아서 다행입니다.어젯밤 내내 붙잡고 있던 문장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자신만을 향해 온 말이라고 믿고 싶었던 흔적이 너무 쉽게 평범한 종이 한 장으로 돌아갔다.“알겠어요.”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간호사가 나간 뒤 서하는 편지를 접었다. 어제처럼 조심스럽게 접을 이유가 없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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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강태경은 분명 윤서하를 봤다.그런데 돌아섰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에도 서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재활치료사가 옆으로 다가와 팔을 받쳤고, 그제야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아는 분이에요?”“아마도요.”아마도라는 말이 스스로도 우스웠다.세림의료재단 관련 기사에서 본 얼굴은 맞았다. 강이준의 이복형, 법무총괄 강태경. 삼 년 전 이준과 헤어진 뒤 그 집안에 관한 기사를 일부러 피했는데도 몇 번은 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다.서하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했다.1층.이미 내려갔다.“다시 병실로 갈게요.”“오늘 걷는 양은 충분해요.”돌아가는 동안 발은 전날보다 안정적이었다. 열다섯 걸음을 넘긴 뒤에도 무릎이 꺾이지 않았고, 한 번 쉬고 다시 걸을 수 있었다.그런데 몸이 나아질수록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강태경이 왜 이 병원에 있었을까.자신을 알아본 건 맞을까.알아봤다면 왜 피했을까.병실에 도착한 서하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려다가 멈췄다.또 추측부터 하고 있었다.수첩을 펼쳤다.복도에서 강태경과 닮은 사람을 봄.서로 시선이 마주침.내가 이름을 부르자 돌아섬.마지막에 한 줄을 덧붙였다.본인 확인 안 됨.그때 오민재가 회진을 위해 들어왔다.서하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교수님, 세림의료재단 사람이 여기 왔었어요?”민재가 차트에서 눈을 들었다.“누구 말씀입니까?”“강태경이요.”“제가 병원 방문객을 전부 알지는 못합니다.”“저 보러 온 건 아니고요?”“그건 제가 확인해드릴 내용이 아닙니다.”서하는 수첩을 덮었다.“기증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죠?”“네.”“사고 날짜도.”“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정보는 제공하기 어렵습니다.”같은 대답을 몇 번째 듣는지 몰랐다.서하가 입술을 눌렀다가 물었다.“제가 직접 알아보는 건요?”민재의 손이 멈췄다.“윤서하 씨.”“병원에 알려달라는 게 아니라 제가 찾는 거요.”“그걸 권하지 않습니다.”“왜요?”“지금 가진 정보는 사고성 뇌사, 성인이라는 것뿐입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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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이준이는 죽었습니다.”강태경은 앉기도 전에 말했다.윤서하는 손에 쥐고 있던 약통을 내려놓지 못했다. 오후 두 시 알람이 막 끝난 뒤였고, 투명한 뚜껑 안에는 아직 먹지 않은 알약 두 개가 남아 있었다.태경은 병실 문을 닫고 맞은편 의자를 끌었다.“언제요.”자기 목소리인데도 낯설었다.“며칠 전입니다.”“며칠 전이 언제인데요.”태경이 날짜를 말했다.서하의 손가락이 약통 가장자리에서 멈췄다.수술받기 나흘 전.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날짜들이 한꺼번에 맞물렸다. 이준의 SNS가 멈춘 날, 경찰에게 전화가 온 새벽, 하린이 검은 리본을 올린 밤, 그리고 자신의 수술.서하는 약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교통사고였어요?”“네.”“어디서요.”“해온 외곽도로에서.”“혼자 있었어요?”태경의 대답이 잠시 늦었다.“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죠.”“왜 나중이에요.”서하가 몸을 일으켰다가 그대로 멈췄다. 흉골 안쪽이 잡아당겨졌고, 가슴 안에서는 새 심장이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다 죽고 나서도 순서가 있어요?”태경은 서하를 보면서도 대꾸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더 화가 났다.“삼 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던 사람이 죽었대요. 그런데 그 형이라는 사람은 병원까지 와서 날짜만 말하고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고.”숨이 가빠져 말끝이 끊겼다.“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데요.”태경이 물컵을 밀어줬지만 서하는 받지 않았다.“마지막에 어디 가고 있었어요?”“서하 씨.”“정하린한테?”태경의 눈썹이 움직였다.“아니요.”대답은 바로 나왔다.서하는 그 짧은 부정을 놓치지 않았다.“그럼 어디였어요.”“지금 그걸 들으면 다른 질문이 생길 겁니다.”“이미 너무 많아요.”서하는 침대 가장자리에 발을 내렸다. 바닥을 딛고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다.서하는 침대 난간을 붙잡은 채 다시 앉았다.일어서지도 못하는 몸으로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우스웠다.“장례식은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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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장기기증 했어요?”윤서하의 질문이 떨어진 뒤 강태경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천천히 접었다. 손목 아래로 낡은 가죽끈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오래 써 가장자리가 헤지고, 한쪽에는 검은 실밥이 드러난 카메라 스트랩이었다.서하는 단번에 알아봤다.이준이 쓰던 것이었다.비가 오던 날에도, 여행을 갈 때도, 자신을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들고 따라다닐 때도 늘 손목에 감겨 있던 것.서하의 눈이 그 끈에 머물자 태경이 손을 뒤로 거뒀다.“제 질문 못 들었어요?”“들었습니다.”“그럼 대답해요.”태경은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가 말했다.“기증에 관한 정보는 제가 서하 씨에게 확인해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서하는 그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확인해줄 수 없다.”“네.”“안 했으면 안 했다고 하면 되잖아요.”태경의 눈이 멈췄다.그것으로 충분했다.서하는 숨을 들이마셨다. 상처 부근이 당겼지만 이번에는 가슴을 누르지 않았다.“했네요.”“그렇게 단정하지 마세요.”“아니면 아니라고 해요.”태경은 다시 침묵했다.서하는 웃지도 못했다.며칠 동안 부정하려고 애썼던 것들이 한꺼번에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사고, 뇌사, 수술 전날의 검은 리본, 경찰이 가지고 있던 이준의 휴대폰, 그리고 지금 눈앞의 회피.희망인지 공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이준의 심장이 아니라면 안도해야 했다.그런데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허탈할 것 같았다.그 사실이 가장 끔찍했다.“언제 뇌사 판정 받았어요?”태경이 고개를 들었다.“그건 왜 묻습니까.”“사망한 날짜를 알아야 장례식 날짜도 맞잖아요.”잠깐의 망설임 끝에 태경이 날짜를 말했다.사고가 난 지 나흘째 새벽.서하의 수술이 있던 날이었다.손끝이 굳었다.“몇 시쯤이었어요?”“정확한 시간까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왜요.”“지금도 이미 너무 많이 이어붙이고 있으니까.”서하가 고개를 저었다.“내가 붙이는 게 아니잖아요. 날짜가 붙는 거잖아.”말이 높아지자 병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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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윤서하는 달력을 닫지 못했다.같은 칸 안에 두 줄이 나란히 있었다.강이준 뇌사 판정.윤서하 심장이식 수술.밤새 몇 번이나 화면을 켰다가 껐지만 글자는 달라지지 않았고, 날짜가 같다는 것뿐인데 머릿속에서는 자꾸 그다음 문장이 따라붙었다.그럼 혹시.서하는 결국 그 말을 메모하지 않았다.아침 일곱 시가 되자 약통이 울렸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약을 삼킨 뒤 체온을 재자 36.6도였다. 수첩에 숫자를 적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까지 혼자 걸었다.며칠 전에는 몇 걸음마다 숨을 골랐는데 오늘은 병실 문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었다.몸은 하루씩 앞으로 가고 있었다.마음만 수술 당일에 붙잡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오늘 컨디션 괜찮으시면 복도 한 바퀴 더 가볼게요.”재활치료사가 말하자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해볼게요.”걸음은 스물세 번까지 이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가 묵직해졌지만 주저앉지는 않았고, 치료사가 팔을 내밀었으나 서하는 손잡이를 잡은 채 끝까지 병실 문턱을 넘었다.“어제보다 훨씬 나아요.”“심장만 그런 거죠.”“다리도요.”서하는 잠깐 웃었다가 숨을 골랐다. 손목에 손가락을 얹자 맥박이 일정했다.잘 뛰고 있었다.그래서 더 무서웠다.병실로 돌아온 뒤 휴대폰을 켜자 어제 본 태경의 손목이 떠올랐다.낡은 카메라 스트랩.기억만 믿고 싶지는 않았다.서하는 검색창에 강이준의 이름과 예전 사진전 제목을 입력했다. 몇 년 전 인터뷰 사진이 나왔고, 이준은 카메라를 든 채 오른쪽 손목에 가죽 스트랩을 감고 있었다.화면을 확대했다.가장자리의 헤진 부분, 검은 실로 한 번 덧댄 자리까지 어제 태경이 들고 있던 것과 같았다.서하는 메모지에 적었다.‘태경이 가지고 있던 스트랩은 이준이 실제 사용하던 물건과 동일해 보임.’곧바로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붙였다.‘그 사실만으로 기증 여부는 알 수 없음.’펜끝이 멈췄다.사랑했던 사람의 유품을 보고도 슬퍼하기 전에 증거부터 나누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아니,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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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검색 결과를 연 뒤 윤서하는 한동안 화면을 내리지 못했다.뇌사 판정.장기 배정.이송.이식 수술.절차를 설명하는 문장은 생각보다 건조했다. 혈액형과 체격, 응급도와 대기 상황 같은 조건이 맞아야 하고, 수혜자는 기증자의 신원을 알 수 없다는 내용이 반복됐다.강이준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당연한 일이었다.그런데 서하는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기증자의 신원은 보호된다.수혜자에게 직접 공개되지 않는다.알아내고 싶어서 찾았는데, 검색할수록 알 수 없다는 사실만 선명해졌다.서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검색 기록을 지우려다가 멈췄다. 지운다고 날짜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확인했고 어디서부터 추측했는지 남겨두는 편이 나았다. 수첩 가장자리에 검색한 항목을 적었다.뇌사 장기기증 절차.심장 배정 기준.수혜자 기증자 신원 공개.세 번째 항목 옆에는 짧게 ‘확인 불가’라고 썼다.가슴 안에서 심장이 일정하게 뛰었다.한 번.두 번.그 순간 이준이 카메라를 들고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서하는 바로 손을 가슴에서 뗐다.“아니야.”심장이 기억한 게 아니었다.사진을 봤고, 태경이 들고 있던 스트랩을 봤고, 며칠째 그의 이름만 생각했으니 떠오른 것이다.기억한 건 자기 머리였다.그 사실을 소리 내 확인하고 나서야 숨이 조금 고르게 돌아왔다.아침 약을 먹고 체온을 적은 뒤 재활치료실로 내려갔다. 오늘 목표는 병동 복도 한 바퀴였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절반을 지나자 다리가 무거워졌고, 서하는 벽 손잡이를 잡고 숨을 골랐다.“멈출까요?”치료사가 물었다.“조금만 쉬고 갈게요.”“무리하시면 안 됩니다.”“알아요.”서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몸은 어제보다 분명히 나아지고 있었다. 몇 걸음 못 가 주저앉던 때와 달리 이제는 쉬었다가 다시 걸을 수 있었다.그런데 마음은 반대로 더 좁아지고 있었다.사고 날짜.뇌사 판정일.수술일.장기 배정 시각.숫자 네 개가 머릿속에서 계속 겹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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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안내문에는 이름을 쓰지 말라는 문장이 가장 먼저 적혀 있었다.윤서하는 같은 줄을 두 번 읽었다.수혜자와 기증자 가족의 신원은 직접 공개하지 않습니다.서신은 병원을 통해 중개되며, 전달 여부와 회신 여부는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그 아래에는 적지 말아야 할 항목이 이어졌다. 주소, 연락처, 직장, SNS 계정처럼 상대가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정보들.서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편지를 쓸 수는 있는데 이름은 알 수 없다.연결되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길에도 끝까지 벽이 세워져 있었다.아침 일곱 시 알람이 울렸다. 서하는 약통을 열어 정해진 약을 삼키고 체온을 쟀다. 36.5도. 수첩에 숫자를 적은 뒤 오늘 보행 목표도 적었다.서른 걸음.며칠 전 여섯 걸음에서 주저앉았던 몸은 이제 병실 문에서 복도 창가까지 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숨이 찼지만 난간을 잡고 버텼고, 치료사가 의자를 가져오려 하자 손을 저었다.“조금만 쉬면 돼요.”“욕심내지 마세요.”“어제보다 두 걸음만 더 갈게요.”결국 서른두 걸음을 채웠다.병실로 돌아왔을 때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기분은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몸은 숫자로 확인할 수 있었다. 체온도, 걸음도, 약 먹은 시간도 기록하면 됐다.이준에 관한 것만 숫자로 적을수록 더 모호해졌다.사고일.뇌사 판정일.자신의 수술일.날짜는 겹치는데 이름은 없었다.서하는 수첩의 ‘추측’ 칸을 펼쳤다.내 심장이 이준의 것일 수 있다.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 안에서 박동이 한 번 크게 올라왔다. 동시에 이준이 카메라를 들고 자신을 따라오던 여름날이 떠올랐다.서하는 곧바로 펜을 들었다.‘지금 떠오른 장면은 내 기억.’그 아래에 밑줄까지 그었다.심장이 무언가를 보여준 게 아니었다. 며칠째 같은 사람을 생각했고, 그의 사진과 유품을 봤으니 기억이 따라 나온 것뿐이었다.그 구분을 놓치는 순간 자신은 어떤 우연도 이준에게 맞춰버릴 것 같았다.점심 뒤 이식센터 코디네이터가 병실을 찾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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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편지지는 생각보다 넓었다.윤서하는 첫 줄을 쓰고도 한참 다음 문장을 적지 못했다.기증자 가족께.그 아래가 비어 있었다.고맙습니다.써놓고 보니 너무 쉬운 말 같았다. 종이 위에서는 네 글자면 끝났지만, 그 말 뒤에는 누군가의 장례와 자신의 수술이 붙어 있었다.서하는 결국 선을 그어 지웠다.다시 썼다.당신의 가족이 남긴 장기로 제가 살아났습니다.이번에도 펜이 멈췄다.‘남긴’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죽음을 준비해 두고 건네준 물건처럼 들렸다. 그 사람이 어떤 사고를 당했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조차 자신은 알지 못했다.종이를 새것으로 바꿨다.세 번째 편지지에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당신의 가족이 살린 사람이 잘 살아보겠습니다.한 줄을 쓰고 나자 손끝이 떨렸다.살겠다는 말이 이렇게 무거울 줄 몰랐다.미경이 병실로 들어왔다가 책상 위에 구겨진 편지지를 봤다.“아직도 쓰고 있어?”“이게 세 번째야.”“긴 편지 쓰려고?”서하는 고개를 저었다.“짧게 쓰려고 하는데 그게 더 어려워.”미경은 버린 종이를 펼쳐보지 않고 그대로 모아 쓰레기통에 넣었다.“잘 쓰려고 하지 마.”“못 쓴 말 때문에 상처받으면 어떡해.”“그쪽도 네가 완벽한 말 해주길 기다리는 건 아닐 거야.”서하는 답하지 않았다.기증자 가족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편지를 받고 싶어 하는지도 아직 몰랐다.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더 비겁하게 느껴졌다.서하는 다시 펜을 들었다.수술 뒤 처음으로 걸은 날을 쓸까 했다. 약을 제시간에 먹고 있다는 말도, 오늘 서른여섯 걸음을 걸었다는 사실도 적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씩 붙일수록 편지가 자기 생존을 자랑하는 글처럼 보여 모두 지웠다.마지막에 남은 것은 세 문장이었다.당신의 가족이 살린 사람이 잘 살아보겠습니다.아직은 살아 있다는 일이 미안할 때가 더 많습니다.그래도 이 삶을 함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서하는 마지막 문장에서 오래 멈췄다.함부로 버리지 않겠다.그건 기증자 가족에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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