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안에서 당신이 뛴다: Chapter 31 - Chapter 40

80 Chapters

31화

'살아.'윤서하는 파일명을 손끝으로 눌렀다가 떼었다.사진은 아직 열지 않았다. 이름 하나 때문에 의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삼 년 동안 자신을 버린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제 와서 단어 하나를 붙잡고 사정을 만들어주고 싶지도 않았다.그런데도 화면은 닫히지 않았다.다른 파일은 모두 숫자였다. 촬영 날짜와 순서대로 자동 생성된 이름. 마지막 한 장만 달랐다.살아.서하는 결국 사진을 열었다.새벽이었다.병원 뒤편 버스정류장에 자신이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종이컵을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어깨만 희미하게 드러났다.기억이 났다.헤어지던 날이었다.정확히는 이준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듣기 몇 시간 전.서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걸 언제 찍은 거야.”사진 아래 정보 버튼을 눌렀다.촬영 시각 오전 4시 18분.날짜는 이준과 끝난 바로 그날이었다.서하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우연일 수도 있었다. 파일명은 나중에 바꿨을 수도 있고, 촬영 시각도 잘못 저장됐을 수 있었다.그래서 이번에는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노트북을 켜 원본 파일을 내려받았다.촬영일, 수정일, 업로드 시각.하나씩 확인했다.촬영일 오전 4시 18분.원본 생성 시각 동일.수정 기록 없음.파일명 변경 시점도 업로드 당일이었다.서하는 의자에서 등을 떼었다.손끝이 차가워졌다.이준은 그날 새벽까지 자신을 찍었다.그리고 같은 날 저녁, 끝났다고 말했다.“말이 안 되잖아.”혼잣말이 새어 나왔다.다른 여자를 선택한 사람이 왜 몇 시간 전까지 자신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을까.더 이해할 수 없는 건 파일명이었다.살아.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사진 속 자신에게인지, 그때의 자신에게인지, 혹은 아무 의미 없이 붙인 이름인지.서하는 그 단어를 확대해 보는 대신 노트에 적었다.[확인된 사실]사진 촬영 시각: 헤어지던 날 오전 4시 18분.원본 파일 수정 흔적 없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2화

[만나서 사과할게.]정하린에게서 온 문장을 윤서하는 밤새 지우지 못했다.사과.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강이준과 사귄 일인지, 약혼 기사를 낸 일인지, 삼 년 동안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일인지.서하는 답장을 쓰지 않은 채 먼저 노트북을 열었다.마지막 사진의 원본 정보를 다시 불러왔다.촬영 시각 오전 4시 18분.파일 생성 오전 4시 18분.수정 기록 없음.공유 폴더 업로드 오전 5시 03분.헤어지던 날 새벽까지 이준은 자신을 찍고 있었다.이 사실 하나만큼은 더 이상 기억의 문제가 아니었다.서하는 사진 파일과 삼 년 전 병원 결제 문자, 이준이 보낸 [저녁에 보자] 메시지를 시간순으로 늘어놓았다.새벽 네 시 십팔 분, 병원 뒤 버스정류장.새벽 다섯 시 삼 분, 사진 업로드.오후 두 시 십일 분, 이준과 하린의 약혼설 기사.저녁, 이별.순서가 맞지 않았다.아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이야기와 맞지 않았다.기사에 실린 사진도 다시 열었다. 하린은 이준의 팔을 잡고 있었고, 약지에는 반지가 보였다. 서하는 사진의 게시 시각과 캡션까지 캡처해 옆에 붙였다.‘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그 문장을 삼 년 전에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준도 부정하지 않았으니까.그런데 같은 날 새벽의 원본 파일은 또 다른 사실을 들이밀고 있었다.그는 약혼설이 터지기 몇 시간 전까지 서하를 찍었다.둘 중 하나가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둘 다 사실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그게 더 이해되지 않았다.아침 일곱 시 약통이 울렸다.서하는 약을 삼키고 체온을 잰 뒤에도 노트북 앞을 떠나지 못했다. 미경이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가 화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밤새 그거 봤어?”“엄마, 그날 기억나?”“무슨 날.”“이준 씨랑 헤어진 날.”미경의 손이 식탁 위에서 멈췄다.“왜 갑자기.”“그날 새벽에 나 병원 갔었잖아.”“갔지.”“이준 씨도 왔어?”미경은 잠시 생각했다.“병원 안에서는 못 봤어.”“그럼 밖에서는?”“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3화

아침 일곱 시 약통 알람이 울렸을 때도 서하는 하린의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정해진 약을 삼키고 체온을 재자 36.5도였다. 노트에는 평소처럼 숫자를 적었지만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오늘 만나서 확인할 것은 하나였다.하린과 이준이 정말 연인이었는지.사진도, 반지도, 삼 년 전 기사도 직접 당사자의 입으로 다시 듣기 전까지는 사실로 확정하지 않기로 했다. 서하는 약통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정하린은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 있었다.윤서하는 카페 문을 열자마자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하린을 알아봤다. 삼 년 전 기사 속에서는 늘 웃고 있었던 여자였다. 지금은 커피에도 손을 대지 않은 채 휴대폰만 뒤집어 놓고 있었다.서하가 맞은편에 앉자 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와줘서 고마워.”“사과한다고 했죠.”인사부터 나눌 마음은 없었다.하린은 잠깐 숨을 고른 뒤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전날 메시지로 보낸 것과 같은 사진이었다. 이준의 팔을 잡고 있는 하린, 왼손 약지의 반지, 그리고 두 사람을 연인처럼 보이게 만든 거리.서하는 사진을 밀어놓았다.“이거 삼 년 동안 충분히 봤어요.”“그래서 가져왔어.”“뭘 설명하려고요.”하린은 사진 속 자기 손가락을 짚었다.“이 반지, 내 거 아니야.”서하의 눈이 멈췄다.“무슨 뜻이에요.”“촬영 소품이었어. 그날 내가 끝낸 작품에서 쓰던 거.”하린은 가방에서 오래된 공연 프로그램까지 꺼냈다. 의상과 소품 사진이 실린 페이지 한쪽에 같은 반지가 있었다. 작은 흠집의 위치까지 기사 사진과 같았다.서하는 두 사진을 번갈아 봤다.“약혼반지가 아니었다고요?”“응.”대답이 너무 빨라 오히려 믿기 어려웠다.삼 년 동안 배신의 증거라고 생각했던 물건이, 무대에서 쓰던 소품 하나였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럼 기사에는 왜 약혼이라고 났어요.”“우리가 그렇게 보이게 했으니까.”“우리?”“나랑 이준이.”서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지금 장난해요?”“아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4화

카페를 나온 뒤에도 윤서하는 정하린의 휴대폰에서 본 한 줄을 다시 열어보지 않았다.서하가 살아야 해.뜻을 붙이는 순간 또 누군가의 설명을 대신 만들어낼 것 같았다.하린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과, 이준이 왜 그런 거짓말을 선택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서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반지가 촬영 소품이었다는 거,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있어요?]답장은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사진 세 장이 도착했다.삼 년 전 공연의 소품 목록, 반지 확대 사진, 공연 종료 뒤 반납된 물품을 기록한 문서였다. 기사 사진 속 반지와 같은 형태였고 안쪽에 난 작은 흠집까지 같았다.마지막 기록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약혼설 기사가 나온 다음 날.서하는 사진을 확대했다.정하린이 약혼반지라고 보이게 끼고 있던 물건은 실제 약혼반지가 아니었다.확인된 사실이었다.노트를 펼쳐 한 줄을 적었다.‘정하린의 반지는 촬영 소품.’그 아래에 이어 적으려던 문장은 멈췄다.‘따라서 약혼도 거짓.’반지 하나가 거짓이라고 해서 당시의 모든 것이 자동으로 거짓이 되는 건 아니었다.서하는 펜을 내려놓고 강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세 번째 신호에 받았다.“무슨 일입니까.”“정하린 씨랑 이준 씨, 진짜 약혼한 적 있어요?”잠시 침묵이 흘렀다.“왜 묻습니까.”“반지가 소품이었대요.”이번에는 태경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서하는 기다렸다.“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두 사람이 실제로 약혼한 적 없습니다.”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알고 있었어요?”“그 당시에는 정확히 몰랐습니다.”“무슨 뜻이에요.”“기사 나고 이준에게 물었습니다. 하린 씨와 결혼할 거냐고.”“뭐라고 했는데요?”태경은 잠시 말을 고르듯 멈췄다.“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그럼 기사를 부정했어요?”“그것도 안 했습니다.”서하는 헛웃음을 삼켰다.“또 아무 말도 안 했네요.”“맞습니다.”“형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데요?”“당시에는 이준이 관계를 정리한 거라고 생각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5화

서하가 살아야 해.윤서하는 화면에 남은 한 줄을 몇 번이나 읽었다.그 아래 문장은 검게 가려져 있었다.그러려면 내가…서하는 곧바로 정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두 번 신호가 간 뒤 하린이 받았다.“사진 봤어?”“왜 잘랐어요.”하린이 잠시 말을 멈췄다.“전부 보여줄 수는 없어.”“왜요?”“이준이랑 약속했으니까.”서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또 약속.”“서하야.”“죽은 사람이랑 한 약속 때문에 산 사람한테 계속 거짓말하는 거예요?”“거짓말하려는 게 아니야.”“그럼 보여줘요.”“안 돼.”“내 얘기잖아요.”서하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첫 줄부터 내 이름인데 왜 내가 못 봐요?”하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삼 년 전과 너무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알고 있었고, 서하는 늘 결과만 받아야 했다.“그럼 하나만 대답해요.”“뭔데.”“나 살리려고 그 짓 한 거예요?”하린이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그 짧은 망설임으로 충분했다.서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진짜 미쳤네.”“서하야, 그때 이준이도—”“내가 죽을까 봐 다른 여자랑 약혼한 척하고, 나한테 바람났다고 믿게 만들었다?”“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어.”“뭐가 더 복잡한데요?”하린의 숨이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네가 계속 치료를 미뤘잖아.”서하의 손이 멈췄다.“뭐라고요?”“이식 얘기 나오면 피했고, 검사 일정도 자꾸 미뤘다고 들었어.”“누구한테.”하린은 입을 다물었다.“이준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그건 내가 말할 수 없어.”“그러니까 알고는 있었다는 거네요.”이번에도 부정은 없었다.서하는 창가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섰다.삼 년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심장이 점점 버티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고, 이식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고개부터 저었다.평생 약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두려웠고, 누군가가 죽어야 자신이 산다는 사실은 더 견디기 어려웠다.그때 이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남은 시간이 얼마든 그냥 같이 있으면 안 되냐고.하지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6화

바닥에 떨어진 컵은 손잡이만 멀쩡했다.윤서하는 깨진 조각보다 미경을 먼저 봤다.“엄마.”미경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손대지 마. 다쳐.”“방금 들었지?”“뭘.”“내가 하린 씨랑 한 말.”미경은 대답하지 않은 채 휴지를 여러 장 뽑아 바닥의 물부터 닦았다.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어젯밤부터 같은 방식이었다.누군가는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았고, 자신은 반응을 보고 진실을 짐작해야 했다.그 짓을 더 하고 싶지 않았다.“놔둬. 내가 치울게.”“넌 들어가 있어.”“엄마.”미경의 손이 깨진 조각 위에서 멈췄다.“왜 놀랐어?”잠깐의 침묵.“컵을 놓쳐서 놀랐지.”서하는 미경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지금 몰아붙이면 엄마는 더 입을 다물 것이다.먼저 확인해야 했다.강이준이 자신의 치료 거부를 정말 알고 있었는지.아침 일곱 시 약을 먹고 체온을 잰 뒤 서하는 병원 앱에서 삼 년 전 진료기록을 열었다.심부전 악화.심장이식 평가 권고.환자 치료 결정 유보.그 문장에서 손가락이 멈췄다.‘유보.’당시 자신은 그 말을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수술이 무서웠고, 평생 면역억제제를 먹는 삶도 겁났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의료기록에는 감정이 없었다.치료 결정 유보.이식 평가 일정 연기.사실만 남아 있었다.서하는 정하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준 씨가 내가 치료 미루는 걸 언제부터 알았어요?]하린의 답장은 한참 뒤 도착했다.[정확한 날짜는 기억 안 나.][약혼 기사 전이에요, 후예요?]이번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전.]서하가 곧바로 전화했다.“누가 말했어요?”하린이 한숨을 삼켰다.“그건 내가 들은 게 아니라 이준한테 들은 거야.”“뭐라고 했는데.”“네가 치료를 계속 미룬다고.”“그게 다예요?”하린은 머뭇거렸다.“이준은 네가 아예 치료를 포기할까 봐 무서워했어.”서하의 손이 굳었다.“난 포기한다고 한 적 없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7화

현관문이 열리자 윤서하는 식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미경은 장바구니를 내려놓다가 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엄마.”“왜 그렇게 앉아 있어.”“강이준 씨 만났지.”미경의 손이 멎었다.서하는 휴대폰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에는 태경이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그 시기, 이준이 윤미경 씨를 따로 만난 기록이 있습니다.]“삼 년 전에.”미경은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의자를 빼 앉았다.“태경 씨가 말했어?”“맞아?”짧은 침묵 뒤 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 한마디가 이상할 만큼 쉽게 나왔다.서하는 손끝으로 식탁 가장자리를 눌렀다.“왜 만났어.”“네 얘기하려고.”“내 무슨 얘기.”미경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서하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직접 듣고 싶었다.“내가 치료 안 받는다고 말했어?”“안 받는다고만 한 건 아니야.”“그럼.”“네가 치료를 포기하려는 것 같다고 했어.”서하의 입술이 굳었다.“내가 언제 포기한다고 했는데.”“검사 미루고, 이식 얘기만 나오면 화냈잖아. 병원 예약도 두 번이나 취소했고.”“무서워서 그랬어.”“알아.”“아니. 엄마는 몰랐어.”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무서운 건지 죽고 싶은 건지 구분도 안 하고 강이준 씨한테 가서 말했잖아.”미경도 따라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그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뭘.”“이준 씨만 있으면 된다고 했어.”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미경의 다음 말은 더 느렸다.“‘그 사람이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남은 시간이 얼마든 충분하다’고.”기억이 돌아왔다.삼 년 전 병원 주차장.이식 평가를 받아보자는 엄마에게 서하는 소리를 질렀고, 차 문을 닫기 직전 그렇게 말했다.그와 함께면 남은 시간으로 충분하다고.그때는 사랑을 말한 줄 알았다.엄마에게는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말로 들렸던 모양이었다.“그래서 이준 씨 찾아갔어?”“응.”“뭐라고 했는데.”미경은 두 손을 맞잡았다.“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8화

집을 나온 뒤 서하는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서야 휴대폰을 확인했다. 미경에게서 전화가 두 번 와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대신 약통 알람이 화면 위에 떠 있었다.[복약 시간 19:00]서하는 알림을 지우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바람이 차가웠다. 평소라면 집 앞을 삼십 분 정도 걷고 돌아왔겠지만 이날은 계속 걸었다. 머릿속에는 미경의 말만 남아 있었다.그 사람이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남은 시간이 얼마든 충분하다.분명 자신이 한 말이었다.그런데 서하가 기억하는 그 문장은 사랑에 가까웠다.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이준과 같이 있고 싶다는 뜻이었다.미경에게는 달랐다.딸이 치료를 포기하려는 말이었다.같은 문장을 두 사람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서하는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나만 확인할게요.”“응.”“이준 씨가 내가 뭐라고 했다고 전했어요?”하린은 잠시 생각했다.“정확한 문장은 다 기억 안 나. 그런데 오래 사는 것보다 자기랑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했다고 했어.”서하가 입술을 깨물었다.“그 말을 이준 씨가 직접 들었다고 했어요?”“그건 모르겠어.”“모른다고요?”“응. 내가 들은 건 이준한테서였으니까.”“그럼 엄마가 말했는지, 내가 직접 말했는지도 모르네요.”“그래.”하린의 대답은 확실하지 않았다.서하는 전화를 끊고 노트 앱에 적었다.‘하린: 이준에게 전해 들음. 출처 모름.’그 아래에 ‘엄마: 직접 이준을 만나 치료 포기를 걱정한다고 말함’이라고 썼다.사실은 조금씩 갈라졌다.그날의 자신도 하나가 아니었다.미경이 기억하는 서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딸이었고, 하린이 전해 들은 서하는 사랑 때문에 오래 살 생각을 놓은 사람이었다.정작 서하는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무서웠다.이식 수술도, 대기 명단도, 누군가의 죽음 뒤에 생명을 받는 일도.그 공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을 뿐이었다.벤치 옆 편의점에서 물을 샀지만 뚜껑을 연 채 몇 모금 마시지도 못했다. 유리문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39화

'37.8.'체온계의 숫자를 본 순간 윤서하는 곧바로 이식팀에 전화를 걸었다.“심장이 계속 빨리 뛰어요.”간호사는 몇 가지를 연달아 확인했다.“흉통은 있으세요?”“없어요.”“숨이 차거나 어지러운 건요?”“조금 답답한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어요.”“오늘 면역억제제는 정해진 시간에 드셨습니까?”서하의 손이 약통 위에서 멈췄다.저녁 칸은 아직 닫혀 있었다.“아니요.”“얼마나 지났어요?”휴대폰을 확인했다.밤 아홉 시 십칠 분.“두 시간 조금 넘었어요.”“지금 임의로 드시지 마시고요. 담당팀 확인할 테니까 바로 병원으로 오세요.”전화를 끊자 현관문이 열렸다.미경이었다.“서하야.”딸의 얼굴과 식탁 위 체온계를 번갈아 본 미경이 그대로 굳었다.“열나?”“병원 가야 돼.”미경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가방을 집고 자동차 키부터 챙겼다.차 안에서도 두 사람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가장 아픈 말을 쏟아냈는데, 이제는 미경이 신호가 바뀔 때마다 서하의 얼굴을 확인했고 서하는 창밖만 바라봤다.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그 박동을 느낄 때마다 불안이 더 커졌다.혹시 잘못된 건 아닐까.혹시 이 심장이 버티지 못하는 건 아닐까.그 생각 끝에 강이준의 이름이 따라붙으려 하자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지금은 누구의 심장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자신이 살아야 했다.응급진료 구역에 들어가자 채혈부터 시작됐다.심전도 패드가 가슴에 붙었고, 간호사가 혈압과 산소포화도를 확인했다. 잠시 뒤 오민재가 들어왔다.“오늘 많이 움직였습니까?”“평소보다 오래 걸었어요.”“몇 시간 정도요?”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시간을 재지 않았다.집을 뛰쳐나온 뒤 계속 걷다가 병원 근처까지 갔다.민재는 차트를 확인했다.“복약 시간도 놓쳤고요.”“두 시간 정도예요.”“한 번 늦었다고 바로 거부반응이 생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서하가 그를 봤다.“그럼 아니에요?”“그것도 지금은 모릅니다.”민재는 말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40화

기증자 가족의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을 본 뒤에도 윤서하는 바로 열람하지 않았다.검사 결과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누구의 심장인지 확인하려고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심장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서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편지 안 볼 거야?”옆에 앉아 있던 미경이 물었다.“지금은.”“왜.”“하나씩 할래.”미경은 더 묻지 않았다.잠시 뒤 오민재가 검사실에서 나왔다.“열은 조금 내려갔습니다.”“거부반응이에요?”서하가 곧바로 물었다.“아직 그렇게 판단할 단계는 아닙니다.”민재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심장 기능은 우선 확인 중이고 혈액검사 결과도 더 봐야 합니다. 오늘 밤까지 관찰하고 내일 다시 판단하겠습니다.”“입원해야 해요?”“오늘은 병원에 계시는 편이 안전합니다.”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재가 차트 화면을 넘기다가 물었다.“면역억제제 복용 시간을 놓친 건 오늘이 처음입니까?”“네.”대답하고 나서 잠깐 망설였다.“아마도요.”“아마도면 안 됩니다.”서하는 휴대폰을 열어 복약 기록을 확인했다.퇴원 뒤 모든 날짜에 체크가 되어 있었다.저녁 일곱 시.매일 같은 시간.어제만 비어 있었다.“처음이에요.”“얼마나 늦었죠?”“두 시간 조금 넘게요.”민재는 기록했다.“한 차례 지연됐다는 사실과 오늘 증상을 바로 원인과 결과로 묶지는 마세요. 대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서하는 고개를 숙였다.“알아요.”“아는 것보다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그 말이 유난히 아프게 들렸다.최근 며칠 동안 자신은 계속 과거를 확인하느라 현재를 놓쳤다.사진 날짜.약혼 기사.이준의 메시지.엄마가 했던 말.누가 먼저 알고 있었는지, 누가 거짓말했는지.그걸 하나씩 맞추는 동안 정작 자기 약 먹을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민재가 자리를 뜬 뒤 미경이 물었다.“어제 일부러 안 먹은 건 아니지?”서하가 고개를 들었다.“엄마는 왜 자꾸 그런 걸 물어.”“네가 화나서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Read more
PREV
1234568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