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안에서 당신이 뛴다: Chapter 41 - Chapter 50

80 Chapters

41화

윤서하는 봉투를 바로 뜯지 않았다.기증자 가족의 두 번째 편지.첫 번째 편지도 아직 서랍에 보관하고 있었다.그 아이는 누군가가 살아주는 일을 원했을 겁니다.그 문장 하나 때문에 ‘사진을 좋아했습니다’라는 말까지 강이준과 연결했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서하는 봉투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안 읽어?”미경이 병실 의자에서 물었다.“읽을 거야.”“그런데?”“내가 또 보고 싶은 것만 볼까 봐.”미경은 더 묻지 않았다.잠시 뒤 간호사가 들어와 체온을 확인했다.37.2도.어젯밤보다는 내려가 있었다. 혈압과 맥박을 기록한 뒤 간호사는 검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담당 교수가 설명할 거라며 나갔다.문이 닫히자 서하는 그제야 봉투를 들었다.끝을 조심스럽게 뜯었다.안에는 한 장짜리 편지가 들어 있었다.첫 번째보다 길었다.서하는 첫 줄부터 천천히 읽었다.건강하게 지내고 계신다는 첫 편지를 여러 번 읽었습니다.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니까요.그 아이는 약속 시간을 이상할 만큼 잘 지켰습니다.어릴 때도 친구를 만나기로 하면 늘 먼저 나가 기다렸고, 커서는 바쁜 일을 하면서도 약속에는 늦지 않았습니다.그래서인지 저도 요즘은 시간을 자주 봅니다.약 드실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꼭 지켜주세요.그 아이가 남긴 것으로 누군가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면, 그 시간만큼은 잘 흘러갔으면 합니다.서하의 손가락이 그 문장에서 멈췄다.그 아이는 약속 시간을 이상할 만큼 잘 지켰습니다.강이준도 그랬다.약속이 오후 세 시면 두 시 오십 분쯤 이미 근처에 와 있었다.서하가 늦으면 재촉하는 대신 사진을 찍으며 기다렸고, 자신이 늦을 것 같으면 십 분 전부터 연락했다.한 번은 서하가 물었다.왜 그렇게 시간에 집착하냐고.이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서하는 편지를 내려놓았다.또 겹쳤다.사진.약속 시간.하나씩만 떼놓으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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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비가 오면 카메라부터 감쌌습니다.”윤서하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아침부터 세 번째였다.약속 시간을 잘 지켰다는 말까지는 우연이라고 밀어낼 수 있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시간을 지키는 사람도 많았다.하지만 비가 오면 카메라부터 감쌌다는 문장은 달랐다.강이준에게 너무 익숙한 행동이었다.서하는 곧장 기억을 붙잡지 않았다. 떠오른다고 해서 사실은 아니었다. 요즘 자신은 이준과 닮은 조각만 나오면 먼저 그에게 가져다 붙이고 있었다.그녀는 두 번째 편지와 첫 번째 편지를 나란히 펼쳤다.‘그 아이.’‘약 드실 시간.’‘살아가는 시간.’문장마다 누군가를 오래 돌봐온 사람의 습관이 배어 있었다.강태경의 말투와는 확실히 달랐다.태경은 늘 필요한 말만 남겼다.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고, 이준을 ‘그 아이’라고 부른 적도 없었다.서하는 휴대폰을 들었다.“편지 하나만 물을게요.”태경은 잠시 후 답했다.“무슨 편지입니까.”“기증자 가족에게 받은 편지요.”전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혹시 당신이 썼어요?”“아닙니다.”대답은 바로 나왔다.서하는 펜을 들었다.“처음 것도요?”“제가 쓴 편지는 없습니다.”“그럼 가족 중 누군지는 알아요?”“그건 확인해드릴 수 없습니다.”“또 규정이에요?”“이번엔 정말 그 문제입니다. 기증자 가족의 익명성을 내가 깨면 안 됩니다.”서하는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태경 작성 아님.’그 아래에 다른 문장을 쓰려다 멈췄다.‘이준의 어머니?’물음표까지 적었다가 곧 지웠다.그걸 확정하는 순간 기증자가 이준이라는 결론까지 한꺼번에 건너뛰게 된다.아직은 아니었다.병실 밖 복도에서 이식코디네이터를 만났을 때도 같은 확인을 했다.“두 편지, 같은 사람이 쓴 건 맞죠?”“같은 가족 측 창구에서 들어왔습니다. 그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남자예요, 여자예요?”코디네이터는 고개를 저었다.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그 아이’라는 호칭이 자꾸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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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비가 오면 카메라부터 감쌌습니다.윤서하는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문장을 읽을 때마다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여름이었다.예고 없이 소나기가 쏟아졌고, 우산 하나를 둘이 나눠 쓰다가 결국 둘 다 젖었다. 이준은 빗물이 떨어지자마자 재킷 지퍼부터 내렸다.서하가 당연히 자기 쪽으로 재킷을 덮어줄 줄 알았는데, 이준이 품 안으로 집어넣은 것은 카메라였다.“야, 강이준.”“잠깐만.”“나는?”“너는 조금만 기다려.”“지금 내가 카메라한테 밀린 거야?”이준은 렌즈까지 완전히 가린 뒤에야 자기 셔츠를 벗어 서하 머리 위로 씌웠다.“이제 됐지?”“됐겠냐?”“너는 말리면 되잖아.”“카메라도 말리면 되잖아.”“얘는 비싸.”그 말 때문에 서하는 며칠 동안 삐쳐 있었다.지금 생각하면 너무 사소한 일이었다.그런데 그런 사소함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약속 시간을 지키는 사람.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비가 오면 카메라부터 감싸는 사람.하나씩은 흔할 수 있었다.셋이 겹치는 것도 우연일 수 있었다.그런데 서하가 기억하는 강이준은 정확히 그랬다.그녀는 가슴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심장에서 답을 찾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대신 편지를 봉투에 넣고 휴대폰을 들었다.강태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잠깐 볼 수 있어요?]답은 십 분 뒤 왔다.[병원에 있는 겁니까?][네.][내가 갈까요?]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아니요. 제가 갈게요.]한 시간 뒤, 태경이 있는 세림의료재단 사무실 앞에 섰다.전날까지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있던 탓에 오래 걷지는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탔고, 약도 정해진 시간에 챙겼다.이준을 찾는다고 다시 자기 몸을 놓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로 했다.태경은 서하가 내민 편지를 읽지 않았다.“기증자 가족 편지입니다.”“압니다.”“안 읽어봐요?”“내가 읽을 편지가 아닙니다.”서하는 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비 오면 카메라부터 감싸는 사람이라네요.”태경의 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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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전부.”강태경의 대답이 떨어진 뒤에도 윤서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자기 가슴이 아니었다.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을 이준이었다.눈, 간, 신장, 그리고 심장.서하가 입술을 열었다.“전부라는 게 정확히 뭐예요.”태경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기증 가능한 장기들이요.”“심장도 포함해서.”“네.”“확실해요?”“확실합니다.”“어떻게 알아요.”“가족이니까요.”서하는 그 말로 넘어가지 않았다.“가족도 수혜자가 누군지는 모른다고 했잖아요.”“모릅니다.”“그런데 뭘 기증했는지는 알고 있고?”“그건 다른 문제입니다.”태경이 손을 깍지 낀 채 테이블 위에 올렸다.“기증 절차가 끝난 뒤 어떤 장기가 기증됐는지는 가족 측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누구에게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구분해야 했다.강이준의 심장이 기증됐다.자신도 같은 날 심장을 이식받았다.여기까지는 두 개의 사실이었다.그 심장이 자신에게 왔다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그런데 머리는 자꾸 두 사실 사이에 선을 그었다.“어머니가 직접 동의한 것도 맞아요?”태경의 얼굴이 굳었다.“네.”“이준 씨가 미리 등록해놨는데도요?”“가족과도 절차가 있었습니다.”“그날 어머니가 병원에 있었어요?”“있었습니다.”서하의 손끝이 테이블을 긁었다.편지 속 ‘그 아이’가 다시 떠올랐다.하지만 그 생각만큼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아직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른다.“그분이… 장기 다 기증하겠다고 했어요?”태경은 잠시 창밖을 봤다.“그날 어머니는 이준이 생전에 원했던 대로 해달라고 했습니다.”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생전에 원했던 대로.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이준은 서하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골랐다.그런데 자기 죽음 뒤에 남길 것에 대해서는 미리 선택해두었다.그 차이가 억울했다.“자기 몸은 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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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강이준.기증 일자.심장 — 기증 완료.윤서하는 휴대폰 화면을 끄지 못했다.강이준이 뇌사 판정을 받은 날.그의 심장이 기증된 날.자신이 심장이식을 받은 날.세 날짜가 같았다.그동안은 하나씩 따로 보려고 애썼다. 사진을 좋아했다는 것도, 약속 시간을 잘 지켰다는 것도, 비가 오면 카메라부터 챙겼다는 것도 우연일 수 있다고 적어놓았다.그런데 날짜는 달랐다.서하는 노트를 펼쳤다.강이준 뇌사 판정.강이준 심장 기증.윤서하 심장이식.같은 날짜.그 아래에 펜을 댔다.‘내가 받은 심장 = 강이준.’끝까지 쓰지 못했다.손끝이 떨렸다.심장이 갑자기 크게 뛰는 것 같았다.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박동 하나하나가 너무 선명했다.쿵.또 한 번.서하는 가슴을 누르지 않으려고 손을 무릎 아래로 밀어 넣었다.아니다.아직 아니다.한 병원에서 하루에 심장이식이 자신에게만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증된 심장이 반드시 같은 병원 수혜자에게 가는 것도 아니다. 날짜가 같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특정할 수 없다.머리로는 알았다.그런데 생각은 이미 가장 두려운 곳까지 가 있었다.이게 이준의 심장이면.삼 년 동안 미워한 남자의 심장으로 자신이 살아 있는 거라면.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대로 다시 앉았다.속이 울렁거렸다.병실 문을 열고 화장실까지 가려 했지만 몇 걸음 못 가 벽을 짚었다.미경이 놀라 일어섰다.“서하야.”“오지 마.”“왜 그래?”“잠깐만.”숨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심장은 빨리 뛰고 있었고, 그럴수록 서하는 더 크게 느꼈다.강이준.그 이름이 박동마다 붙는 것 같았다.서하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이건 자신의 기억이었다.심장이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몸이 먼저 겁을 먹었다.잠시 뒤 오민재가 들어왔다.서하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의자를 끌어왔다.“숨 천천히 쉬세요.”“교수님.”“네.”“제 기증자, 알죠?”민재의 움직임이 멈췄다.“왜 갑자기 그 질문을 합니까.”서하는 휴대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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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이제 네가 봐야 할 게 있다.”강태경이 상자를 밀어놓았지만 윤서하는 바로 손을 대지 않았다.낡은 갈색 상자에는 테이프를 뜯었다 다시 붙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뭐가 들어 있는데요.”“사고 당시에 이준이가 가지고 있던 것과 집에서 정리한 물건 일부입니다.”“왜 이제 줘요?”“처음에는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왜.”태경이 잠시 상자를 바라봤다.“네가 이준이 죽음을 네 방식대로 받아들이기도 전에, 얘가 남긴 걸 전부 쏟아놓는 게 맞는지 몰랐으니까.”서하는 웃지 않았다.“또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대신 판단했네요.”태경은 변명하지 않았다.“맞습니다.”그 대답 때문에 더 따질 말이 없어졌다.서하는 결국 뚜껑을 열었다.가장 위에는 검은 카메라가 있었다.모서리가 긁혀 있었고 스트랩 한쪽에는 오래된 얼룩이 남아 있었다. 여러 번 봤던 물건이었다. 이준은 밥을 먹을 때도 카메라를 옆 의자에 놓았고, 비가 오면 사람보다 먼저 재킷 안에 집어넣었다.손을 뻗다가 멈췄다.편지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비가 오면 카메라부터 감쌌습니다.서하는 카메라를 건드리지 않고 그 아래를 살폈다.작은 필름통 세 개.명함 몇 장.기차표와 항공권 출력물.그리고 두꺼운 취재 노트가 나왔다.“이게 사고 때 가지고 있던 거예요?”“카메라와 노트는 차에서 나왔습니다. 나머지는 작업실에서 정리한 겁니다.”서하는 여행표부터 집었다.사고가 난 날짜보다 뒤로 잡힌 일정도 있었다.지방 취재 이동표와 다음 달 항공권 예약 내역.“이 사람 어디 아팠어요?”질문이 갑자기 나왔다.태경이 서하를 봤다.“아니요.”“큰 병 같은 거.”“없었습니다.”“사고 전에 병원 다닌 적은?”“정기검진 외에는 내가 아는 게 없습니다.”서하는 상자 안을 다시 뒤졌다.약봉투도, 처방전도 없었다.취재 노트를 펼치자 해야 할 일이 빽빽했다.인터뷰 대상 이름.촬영 장소.자료 요청.다음 달 취재 일정.페이지 끝에는 새 렌즈를 수리 맡긴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죽음을 준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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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말해야 한다. 이제는.윤서하는 그 문장만 따로 사진으로 찍었다.그 위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서하에게 전화.사고 전날 저녁 일정이었다.태경이 가져온 상자는 아직 병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서하는 노트를 덮지 않은 채 물었다.“이 일정표, 언제부터 형이 가지고 있었어요?”“사고 뒤 유품 정리하면서 받았습니다.”“누가 손댄 적은요?”“가족이 확인한 것 말고는 없습니다.”“이 글씨도 이준 씨 거 맞고?”“맞습니다.”서하는 다시 노트를 내려다봤다.확인된 사실은 거기까지였다.이준은 사고 전날 자신에게 전화할 계획을 적어두었다.그리고 옆에 ‘말해야 한다. 이제는.’이라고 썼다.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았다.태경은 상자에서 같은 시기의 다른 노트도 꺼냈다. 서하는 날짜 표기와 숫자 쓰는 습관을 나란히 비교했다. ‘전화’의 받침과 문장 끝의 마침표까지 같은 손이었다. 누군가 나중에 덧붙였다고 의심할 만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복사본 아니죠?”“원본입니다.”서하는 그제야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메모가 실제라는 사실과, 메모의 뜻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형은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했어요?”태경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처음 봤을 때는 서하 씨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무슨 일.”“그건 추측입니다.”“추측이라도 말해봐요.”태경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또 이준 대신 이유를 만들어주면 안 될 것 같습니다.”그 말에 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한 시간 전까지라면 답답했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자신도 너무 많은 빈칸을 대신 채워왔다.배신.외도.희생.사랑.사실보다 먼저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에 맞춰 나머지를 해석하게 됐다.서하는 일정표를 휴대폰으로 찍고 상자를 닫았다.“이건 제가 가져가도 돼요?”“상자는 아직 내가 보관하겠습니다. 필요한 건 복사해드릴게요.”“왜요?”“이준의 취재 자료도 섞여 있어서요.”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는 억지로 빼앗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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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음성메시지 00:17]윤서하는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화면만 바라봤다.강이준의 목소리였다.적어도 정하린은 그렇게 말했다.죽었다는 사실을 안 뒤 사진도 봤고, 그가 남긴 글씨도 읽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달랐다. 누르면 삼 년 동안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사람이 다시 말을 시작할 것 같았다.서하는 먼저 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거 언제 받은 거예요?”“사고 전날.”“몇 시.”“밤 열 시 조금 넘어서.”“그 전에 통화했다면서요.”“응.”“무슨 얘기 했는데요?”하린은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우리 그만하자고 했어.”서하의 손이 멈췄다.“뭘.”“약혼한 척하는 거.”가슴 안쪽이 순간 크게 움직였다.서하는 의식적으로 손을 내려놓았다.“정확히 말해요.”“이준이가 먼저 끝내겠다고 했어. 기사도 더는 놔두지 않고, 나랑 아무 사이 아니었다는 것도 정리하겠다고.”“왜 갑자기.”“이제 너한테 말하겠다고 했으니까.”서하는 입술을 다물었다.사고 전날 일정표가 떠올랐다.서하에게 전화.말해야 한다. 이제는.두 문장이 이제 다른 기록과 맞물리고 있었다.그래도 아직 의미를 앞질러가고 싶지 않았다.“뭘 말한다고 했어요?”“전부.”“전부가 뭔데요.”“그건 이준이가 직접 말하겠다고 했어.”“죽었잖아요.”하린이 숨을 삼켰다.“알아.”“그래서 내가 묻는 거예요.”“나도 그날 들은 게 다는 아니야. 대신 한 가지는 분명해.”하린의 말이 이어졌다.“그날 이준이는 너한테 돌아가려고 했어.”서하는 곧바로 반박했다.“그건 하린 씨 해석이잖아요.”“맞아. 그래서 기록 보내준 거고.”“다시 만날 거라고 직접 말했어요?”“그 표현은 안 했어.”“그럼 돌아오려 했다고 단정하지 마요.”하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알겠어.”그 한마디 때문에 서하는 오히려 더 힘들었다.예전이었다면 누군가의 설명에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이준은 널 사랑했다.돌아오려 했다.모든 게 널 살리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정리하면 편했다.하지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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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이번엔 내가 욕먹어도 말할 거야.”음성은 거기서 끝났다.윤서하는 재생 버튼을 다시 누르지 않았다.강이준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사고 전날까지 거짓 약혼을 끝내려 했다는 말이 더 오래 남았다.그날 자신에게 온 세 번의 전화.밤 11시 41분.11시 47분.11시 52분.받지 않았다.당시에는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삼 년 동안 자신을 버린 사람이었고, 다른 여자와 약혼한 남자였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하든 듣고 싶지 않았다.그 판단을 후회해야 하는지조차 서하는 알 수 없었다.그때의 자신은 진실을 몰랐다.모르게 만든 사람이 이준이었다.다음 날 오전, 서하는 하린에게 다시 전화했다.“거짓 약혼 끝내겠다고 한 거, 통화로만 들은 거예요?”“아니.”“다른 기록 있어요?”“메시지도 있어.”“보내줘요.”잠시 뒤 캡처 몇 장이 도착했다.사고 전날 밤이었다.[강이준]이제 끝낼게.[정하린]갑자기 왜?[강이준]더 하면 안 될 것 같아.[정하린]서하 때문이야?그 뒤 대화는 한동안 끊겨 있었다.서하는 다음 캡처를 넘겼다.[강이준]내가 말할 거야.[정하린]뭘 어디까지?[강이준]처음부터.서하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처음부터가 뭐예요?”하린이 대답했다.“나도 그래서 물었어.”“근데?”“대답 안 했어.”서하는 눈을 감았다.또 비어 있는 자리였다.“하린 씨는 그때 이준 씨가 나한테 다시 만나자고 할 거라 생각했어요?”“처음엔 아니었어.”“처음엔?”“나는 그냥 거짓말을 끝내고 사실만 말하려는 줄 알았어.”“그럼 나중에는?”하린이 잠시 말을 고르더니 답했다.“너한테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느꼈어.”서하는 바로 선을 그었다.“그건 하린 씨가 느낀 거고.”“맞아.”“이준 씨가 직접 말한 건 아니고.”“응.”노트에 적었다.‘하린의 해석: 돌아가고 싶어 했다.’옆에는 괄호를 쳤다.사실 아님.하린이 씁쓸하게 웃었다.“넌 이제 아무 말도 그냥 안 믿네.”“삼 년 동안 그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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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음성메시지 01:08.윤서하는 이어폰을 꽂은 채 한참 재생 버튼만 바라봤다.첫 번째 음성은 열일곱 초였다.우리 이제 끝내자.서하한테 말할 거야.이번엔 내가 욕먹어도 말할 거야.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흔들렸다.이번 파일에는 이준이 왜 그 말을 했는지가 들어 있다고 했다.서하는 숨을 고른 뒤 재생 버튼을 눌렀다.잠깐의 잡음이 흐르고 강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하린아.”이번에도 자신에게 남긴 음성이 아니었다.정하린에게 보내진 메시지였다.“아까는 미안했다. 근데 이제 진짜 그만해야 할 것 같아.”잠시 침묵.서하는 이어폰을 더 깊이 눌러 끼웠다.“서하가 대기 절차까지 들어갔다고 들었어.”손끝이 멈췄다.대기.심장이식 대기.이준과 헤어진 뒤였다.그가 알 리 없다고 생각했던 시간이었다.음성은 계속됐다.“내가 원했던 건 걔가 치료받는 거였으니까… 여기까지만 하면 됐어.”이준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근데 이제 와서 사실 다 말하면, 서하가 지난 시간을 뭘로 견뎠는지까지 내가 다시 망치는 건가 싶다.”윤서하는 꼼짝하지 않았다.“그래도 말해야겠지.”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리고 이준이 다시 말했다.“서하가 이미 살고 있으니 이제 미움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서하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그 문장은 예상했던 고백과 달랐다.사랑한다는 말도 아니었고, 돌아가고 싶다는 말도 아니었다.죄책감에 가까웠다.자신이 만들어놓은 미움으로 서하가 버텼다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의 말.“내가 한 짓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이준의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다.“걔가 나 용서할 이유도 없어.”짧은 잡음 뒤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그래도 거짓말이었다는 건 말해야 돼.”음성이 끝났다.01:08.서하는 화면을 내려놓지 못했다.사랑해서 떠났다.그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있었다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그런데 이준조차 자신이 한 일을 사랑이라는 말로 덮지 않고 있었다.서하가 치료를 받게 하려고 거짓말했다.그 결과 서하는 그를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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