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61 - Chapitre 70

82

61화

“통화 녹음, 지금 들을 수 있어요?”윤서하가 묻자 강태경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들을 수 있습니다.”“그럼 보내줘요.”“서하 씨.”“기억으로 설명하지 말고 기록으로 확인하자면서요.”태경이 더 말하지 않았다.잠시 뒤 파일 하나가 도착했다.통화녹음_43초.서하는 재생하기 전 상세정보부터 확인했다.날짜는 사고 당일.시각은 경찰 기록에 남은 사고 시간 직전이었다.통화 상대는 강태경.편집 여부를 확인할 방법까지 자신에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태경이 지금 새로 만든 설명은 아니었다.“형.”“네.”“같이 들어요.”“알겠습니다.”서하는 이어폰을 쓰지 않았다.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놓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빗소리부터 들렸다.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 사이로 이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형, 나 거의 다 왔어.”서하의 손가락이 테이블 끝을 움켜쥐었다.사진도 글씨도 아니었다.살아 있던 강이준이 운전하면서 형과 대화하고 있었다.태경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잡혔다.“자료는?”“다 가지고 있어.”“어디서 볼까.”이준이 장소를 말했다.태경과 약속했던 곳이었다.이어진 대화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했다.주차할 곳이 있는지.자료가 몇 묶음인지.시간이 얼마나 걸릴지.죽기 직전 사람의 마지막 말이라기보다, 몇 시간 뒤 약속을 잡는 사람의 통화였다.그러다 이준이 말했다.“이것만 넘기면 나 갈 데 있어.”태경의 녹음 속 목소리가 물었다.“어디.”잠깐의 공백.“서하한테.”윤서하는 숨을 멈췄다.이미 문자로 확인했던 내용이었다.오늘 다 끝내고 서하에게 갑니다.그런데 이준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전혀 달랐다.그는 추억을 말하지 않았다.‘갔어야 했다’고 과거형으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가겠다고 했다.몇 분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을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처럼.태경이 녹음 속에서 무언가 물었다.이준이 짧게 웃는 듯한 숨을 내뱉었다.“욕먹겠지.”“알면서 가?”“응.”“용서 안 하면.”잠시 뒤 이준이 대답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62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윤서하는 그 부분만 다시 재생하지 않았다.지난 며칠 동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사라진 블랙박스 하나로 누군가 사고를 꾸몄다고 의심했고, 강태성의 압박과 이준의 죽음을 너무 빨리 연결했다.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서하는 노트를 펼쳤다.통화 녹음에서 확인된 것.사고 직전까지 강이준은 태경과 통화 중이었다.취재 자료를 넘길 장소를 이야기했다.그 뒤 서하에게 가겠다고 말했다.갑작스러운 제동음이 들렸다.충격음 뒤 아이로 추정되는 높은 울음소리가 잡혔다.마지막 문장 옆에는 물음표를 붙였다.아이인지 확인되지 않음.그 아래에도 한 줄을 더 적었다.추격 차량 언급 없음.서하는 펜을 내려놓았다.분명한 사실만 놓고 보면 이준은 죽음을 예상하지 않았다.몇 분 뒤의 약속을 말했고, 자료를 넘긴 뒤 서하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그런 사람이 43초 뒤 사고를 당했다.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다.반대였다.이전에는 ‘죽었다’는 한 문장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그가 죽기 직전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도로를 달렸는지, 몇 초 전에 브레이크를 밟았는지까지 알게 됐다.죽음이 점점 구체적인 시간이 되고 있었다.서하는 강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지막 소리, 형도 들었죠?”“들었습니다.”“아이 같아요?”“그렇게 들릴 수는 있습니다.”“경찰은요?”“녹음도 넘겼습니다.”서하는 예상했던 말을 참았다가 물었다.“뒤차 영상에는 안 보여요?”“화면이 너무 멀고 비가 심합니다. 사고 직전 오른쪽에서 움직이는 형체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인지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그럼 아직 모르는 거네요.”“네.”태경의 대답은 짧았다.서하는 그 말이 답답하면서도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둬야 했다.“누가 이준 씨를 따라왔다는 증거도 여전히 없고요?”“없습니다.”“강태성 쪽 차량 기록은?”“사고 현장과 연결되는 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서하는 노트의 한쪽을 지웠다.며칠 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63화

경찰의 연락은 다음 날 오전에 왔다.현장 인근 CCTV 영상 확인이 끝났다는 말이었다.윤서하는 강태경과 함께 경찰서로 갔다.담당자는 두 사람 앞에 사고 당시 화면을 띄웠다.“화질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다만 사고 경위는 확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영상은 도로 건너편 높은 곳에서 찍혀 있었다.비가 내리고 있었다.차량 여러 대가 젖은 도로 위를 지나갔고, 화면 왼쪽에서 강이준의 차가 들어왔다.서하는 숨을 죽였다.뒤차 블랙박스에서 봤던 것보다 멀었다.그래서 오히려 도로 전체가 보였다.이준의 차는 차선을 따라 정상적으로 달리고 있었다.추격하는 차량은 없었다.옆에서 밀어붙이는 차도 없었고, 앞을 고의로 막는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서하의 손끝이 천천히 굳었다.경찰이 영상을 잠시 멈췄다.“여기 보시면 됩니다.”도로 오른편.인도 가장자리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처음에는 사람이란 것도 알아보기 어려웠다.영상이 다시 재생됐다.작은 형체가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었다.아이였다.그 뒤를 따라 성인 한 사람이 달려 나왔다.그 순간 이준의 차량 브레이크등이 켜졌다.차체가 크게 꺾였다.아이를 향하던 진행 방향에서 벗어나며 반대쪽으로 틀었고, 빗길에서 균형을 잃었다.그리고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다.영상이 멈췄다.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서하는 화면을 보다가 물었다.“다시요.”경찰이 재생 위치를 돌렸다.아이.브레이크.급하게 틀어지는 차.충돌.“한 번만 더.”세 번째도 같았다.누군가 이준의 차를 밀지 않았다.뒤에서 들이받은 차량도 없었다.누군가 도로 위에서 기다렸다가 사고를 만들지도 않았다.그저 아이 하나가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었고, 이준은 그 아이를 피했다.서하가 물었다.“저 아이는요?”“살았습니다.”목 안쪽이 막혔다.“같이 뛰어나온 사람은요?”“보호자로 확인됐고, 그분도 생존했습니다.”서하는 고개를 숙였다.살았다.그 둘은 살았다.이준만 죽었다.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64화

그럼 정말 그냥 죽은 거네요.윤서하는 어제 자신이 한 말을 노트에 적지 않았다.그 말부터 사실처럼 굳어버릴까 봐서였다.대신 경찰에게서 받은 자료를 다시 펼쳤다.사고 시각.현장 CCTV.후행 차량 블랙박스.구급대 출동 기록.이준의 차량이 아이를 피하려고 방향을 틀었다는 것까지는 영상으로 확인됐다.하지만 서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강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이랑 보호자 살아 있다고 했죠?”“네.”“확실히 확인된 거예요?”“확인됐습니다.”“경찰한테 들은 것 말고 기록 있어요?”잠시 뒤 태경이 문서 두 장을 보내왔다.개인정보는 가려져 있었다.사고 당일 구급대 활동 기록과 현장 조치 내용.서하는 날짜와 장소부터 맞췄다.같은 사고였다.차도로 뛰어든 미성년자 한 명.뒤따라 나온 보호자 한 명.둘 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상태로 확인.서하는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읽었다.살았다.영상 속에서 이준이 피했던 아이도.그 아이를 붙잡으려 뛰어들었던 보호자도.“다친 데는요?”“그 부분까지 서하 씨가 알 필요는 없습니다.”“죽지는 않았다는 건 확실하고요?”“네.”서하는 통화를 끊은 뒤 노트에 적었다.아이 — 생존.보호자 — 생존.강이준 — 중증 외상 후 뇌사.세 줄이 이상할 만큼 불공평해 보였다.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그 사실 때문에 더 화낼 곳이 없었다.아이가 차도로 뛰어들지 않았다면.비가 오지 않았다면.이준이 1초 늦게 그 길을 지나갔다면.그런 가정은 끝없이 만들 수 있었지만 어느 것도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서하는 그 페이지를 넘겼다.이번에는 장기기증 자료였다.강이준의 기증 일자.자신의 수술 일자.같았다.심장 기증 완료.윤서하 심장이식 완료.그 사이에 아직 확인되지 않은 한 줄이 있었다.강이준의 심장 → 윤서하.쓰지 않았다.확신은 이미 너무 커졌지만 공식 확인은 없었다.민재에게 다시 확인해도 답은 같았다.“날짜가 같고 정황이 많아도 신원을 제가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그럼 아니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65화

윤서하는 강태성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세림의료재단 본관으로 찾아갔다.예약이 없다는 비서의 말을 들은 뒤에도 돌아가지 않았다.“기다릴게요.”“회장님 일정이 언제 끝날지—”“상관없어요.”그날 사고 기록을 다시 읽고 나오면서부터 결정한 일이었다.아무도 강이준을 죽이지 않았다.그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마지막으로 붙잡고 싶은 사람이 남아 있었다.강태성.이준을 압박했고, 취재를 멈추라고 했으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들의 삶에 오래 개입했던 사람.사고를 만들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한 시간 가까이 지났을 때 비서가 회장실 문을 열었다.“들어가시죠.”강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윤서하 씨.”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거슬렸지만 서하는 묻지 않았다.앉으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맞은편 의자를 당겼다.“이준 씨 사고, 다시 확인했습니다.”태성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래서?”“타살 아니래요.”“그건 이미 경찰에서—”“압니다.”서하가 말을 잘랐다.“아이 피하다가 난 사고였어요.”태성은 입을 다물었다.“누가 차로 밀어붙인 것도 아니고, 쫓아간 사람도 없고, 재단에서 사고를 만들었다는 증거도 없고.”서하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회장님이 한 건 없더라고요.”“그 말을 하려고 찾아왔나?”“아뇨.”서하는 태성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럼 뭘 했는지 물으러 왔어요.”태성의 얼굴에서 움직임이 사라졌다.“이준 씨한테 나랑 헤어지라고 한 적 있습니까?”짧은 침묵 뒤 대답이 돌아왔다.“있다.”서하는 예상했으면서도 손가락을 움켜쥐었다.“언제요.”“네 상태가 많이 나빠졌을 때.”“왜.”“둘이 계속 붙어 있는 게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누구 마음대로.”“내 판단이었다.”“이준 씨한테 뭐라고 했는데요?”태성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네 치료에 방해되지 말라고 했다.”서하가 웃었다.어이가 없어서 나온 숨에 가까웠다.“회장님도 똑같았네요.”“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66화

“네가 받은 심장이 이준 것이라고 누가 말했나?”윤서하는 강태성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그 질문 자체가 마음에 걸렸다.알고 있어서 묻는 건지.모르기 때문에 확인하는 건지.둘은 전혀 달랐다.“회장님은 알고 있어요?”태성의 눈길이 멈췄다.“뭘.”“이준 씨 심장이 누구한테 갔는지.”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어차피 지금 태성의 말만으로 결론을 내리면 또 같은 실수를 하게 된다.“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자리에서 일어난 서하는 회장실을 나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휴대폰 메모를 열었다.확인할 것.강태성이 이준에게 서하와 헤어지라고 압박했는가.그 압박이 이준의 거짓 약혼과 직접 연결되는가.강태성은 이준의 장기 수혜자를 알고 있는가.세 가지를 적고 마지막 줄에는 굵게 표시했다.추측 금지.병원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가장 먼저 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강태성이 이준 씨한테 나랑 헤어지라고 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직접 들은 적은 없어.”“그럼 이준 씨한테 떠나달라고 했을 때 강태성이랑 얘기한 적은?”“없어.”미경의 대답은 분명했다.서하는 다음으로 하린에게 물었다.하린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회장님이 너랑 끝내라고 압박했다는 말은 이준한테 들은 적 있어.”“언제.”“거짓 약혼 시작하기 전쯤.”“그래서 그걸 했다고 했어?”“아니.”서하의 펜이 멈췄다.“확실해?”“응. 회장님 때문에 너랑 헤어진다고 말한 적은 없어.”“그럼 왜 했는지는?”“그때는 제대로 설명 안 했어.”하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오히려 아버지가 자기 인생에 끼어드는 걸 싫어했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사람은 아니었고.”통화를 끊은 뒤 태경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아버지가 압박한 건 사실입니다.”“얼마나.”“서하 씨와 관계를 정리하라고 했고, 치료에 방해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도 했습니다.”“그러면 결국 아버지 때문에 떠난 거잖아요.”태경은 곧바로 부정했다.“그렇게 단순하게 묶으면 안 됩니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67화

다음 날 오전, 윤서하는 다시 세림의료재단 본관을 찾았다.이번에는 기다리지 않았다.비서가 곧장 회장실 문을 열어줬고, 강태성은 전날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책상 위에는 얇은 서류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서하는 앉자마자 물었다.“어제 왜 그렇게 물었어요?”“무슨 말이지.”“내가 받은 심장이 이준 씨 거라고 누가 말했냐고.”태성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회장님은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모른다.”짧은 대답이었다.서하는 태성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정말요?”“그걸 확인하려고 다시 온 것 아닌가.”“이 병원 재단 회장이잖아요.”“그래서?”“이준 씨 아버지고.”태성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멈췄다.“그 두 가지가 수혜자 정보를 볼 권리를 주지는 않아.”서하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이준 씨가 장기기증한 건 알고 있었죠.”“사고 뒤에 알았다.”“어디까지요.”“기증 절차가 진행됐고, 실제로 여러 장기가 기증됐다는 정도.”“심장도?”“그렇다.”“그 심장이 어디로 갔는지는?”“알 수 없었다.”서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알아보려고 안 했어요?”태성의 입가가 아주 조금 굳었다.“했다.”그 한마디가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다.“어떻게.”“기관에 문의했다.”“재단을 통해서요?”“개인적으로도, 가족으로서도.”“그래서 뭐라고 했는데요.”“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서하는 천천히 등을 의자에 붙였다.태성이 말을 이었다.“기증자 가족에게 알려주는 건 제한적이다. 어떤 장기가 기증됐고, 이식이 이루어졌는지 정도. 수혜자의 이름이나 병원 기록까지 가족이 요구한다고 내놓는 구조가 아니야.”“회장님인데도요?”“회장이면 안 되는 게 되는 줄 아나.”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솔직히 조금은 그렇게 생각했다.세림의료재단 회장.병원과 재단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준이 살아 있을 때는 아들의 일에 끊임없이 개입했고, 서하와의 관계까지 정리하라고 압박했던 사람.그 정도 힘이 있다면 장기배정의 결과도 알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68화

윤서하는 강태성에게 받은 서류를 바로 믿지 않았다.장기기증 희망등록 확인서.강이준의 이름이 찍혀 있었지만, 사본이었다.사고 뒤 가족이 보관하고 있던 서류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했다.회장실을 나온 서하는 복도 의자에 앉아 휴대폰부터 꺼냈다.강태경에게 등록증 사진을 보냈다.[이거 본 적 있어요?]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있습니다.][원본도요?][유품 정리할 때 봤습니다.]서하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사고 뒤에 새로 만든 건 아니죠?”“아닙니다.”“아버지가 기증 절차 때문에 만든 것도 아니고?”“아니에요. 이준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서류입니다.”“확실해요?”“원본을 직접 봤습니다.”서하는 사본 상단의 등록번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이 번호로도 확인할 수 있어요?”“확인 가능한 범위는 알아보겠습니다.”“수혜자 말고요. 이 등록 자체가 진짜인지.”“그건 가능할 겁니다.”통화를 끊은 뒤에도 서하는 서류를 가방에 넣지 않았다.이준이 장기기증을 원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문제는 자꾸 모든 사실이 하나의 방향으로 모인다는 것이었다.그가 심장을 기증했다.자신은 같은 날 심장을 받았다.강태성조차 그 심장이 누구에게 갔는지 모른다.누구도 배정에 손댈 수 없었다면, 우연이라는 말이 더 무거워졌다.우연히 죽었고.우연히 조건이 맞았고.우연히 자신의 몸 안으로 왔다면.그건 계획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병원으로 돌아온 서하는 오민재를 찾아갔다.“하나만 다시 확인할게요.”민재가 차트를 내려놓았다.“뭡니까.”“재단 회장이면 기증 심장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어요?”“없습니다.”대답이 너무 빨라 서하는 잠깐 멈췄다.“이 병원 재단 회장이어도요?”“그 지위로 수혜자 신원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병원 안에 아는 사람이 많잖아요.”“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민재가 서하를 바라봤다.“윤서하 씨가 자꾸 같은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이유는 압니다.”“뭔데요.”“누군가 배정을 움직였는지 확인하고 싶은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69화

윤서하는 원본 사진을 확대했다.등록번호 아래, 사본에서는 흐릿하게 뭉개졌던 날짜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처음에는 숫자를 잘못 읽은 줄 알았다.화면을 줄였다가 다시 키웠다.그래도 같았다.강이준이 장기기증 의사를 등록한 날은 서하가 심장병 진단을 받기 전이었다.그보다 더 이전.두 사람이 처음 만나기도 전이었다.서하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머릿속에서 지난 몇 달 동안 자신이 만들어온 문장들이 하나씩 떠올랐다.이준이 자신의 심장을 남겼다.이준이 서하를 살렸다.혹시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 생각했던 건 아닐까.모두 자신을 중심에 놓은 문장이었다.서하는 강태경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형.”“날짜 봤습니까?”“이거 맞아요?”“네.”“나 만나기 전인데요.”“그렇습니다.”“내가 아프기 전이고.”“네.”서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등록을 왜 했는지는 알아요?”“정확한 계기는 모릅니다.”“가족한테 말했대요?”“어머니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사고 뒤에 서류를 다시 확인했고요.”“갱신하거나 바꾼 기록은요?”“제가 확인한 범위에는 없습니다.”서하는 등록증 사진을 다시 보았다.“그럼 적어도 나 때문에 한 건 아니네요.”태경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답이었다.“그렇죠?”“등록 시점만 보면 서하 씨와는 관계없는 결정입니다.”서하는 눈을 감았다.이상하게도 안도와 수치심이 동시에 밀려왔다.안도한 이유는 분명했다.이준이 죽음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심장을 서하에게 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았다.그는 서하를 알기도 전부터 장기기증 의사를 밝혀둔 사람이었다.사고도 계획하지 않았고, 죽으려 하지도 않았다.누구에게 장기가 갈지도 몰랐다.그런데 서하는 이 모든 우연을 자꾸 둘의 사랑으로 묶으려 했다.죽은 사람의 삶조차 자신과의 관계 안으로 끌어당겼다.“나 되게 이상했네요.”“무슨 뜻입니까.”“그 사람이 한 선택은 전부 나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서하 씨.”“거짓 약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70화

남는 건 남겨라.윤서하는 그 문장을 곧바로 강이준의 유언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장기기증 등록증 뒷면에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뒤 자신의 장기를 남기겠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이준은 이미 죽었고.남은 사람은 짧은 문장 하나에도 얼마든지 의미를 덧씌울 수 있었다.서하는 강태경에게 원본부터 보여달라고 했다.그날 오후, 태경은 등록증을 투명 파일에 넣어 가져왔다.“만지셔도 됩니다.”“사진으로 볼게요.”서하는 앞면부터 다시 확인했다.이름.등록번호.최초 등록일.자신을 만나기 전.심장이 아프기 전.그 날짜는 바뀌지 않았다.뒷면을 넘기자 연필로 눌러 쓴 짧은 문장이 있었다.남는 건 남겨라.“이준 씨 글씨 맞아요?”“맞습니다.”“기억 말고 확인할 방법 있어요?”태경은 예상했다는 듯 다른 서류를 꺼냈다.취재 노트 한 장과 오래된 사진 인화 봉투였다.인화 봉투 뒤쪽에는 촬영 장소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글자의 기울기.‘남’ 자를 쓰는 모양.받침을 짧게 흘리는 습관.등록증 뒤 문장과 같았다.서하는 휴대폰으로 세 개를 나란히 찍었다.“이 문장은 언제 쓴 건지 알아요?”“그건 모릅니다.”“등록할 때 썼다는 증거도 없고요?”“없습니다.”“사고 전날이나 나 만난 뒤에 적었을 수도 있고.”“가능성은 있습니다.”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면 됐다.필체 — 이준.작성 시점 — 확인 불가.문장의 의미 — 확인 불가.낭만을 만들지 않으려면 모르는 것을 남겨둬야 했다.서하는 다시 앞면의 등록일을 바라봤다.그 날짜만큼은 해석이 필요 없었다.강이준은 윤서하라는 사람을 모르던 시절에 이미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다.그 사실은 그의 죽음에서 서하를 조금씩 밀어냈다.이상하게 아팠다.자신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서하는 지난 몇 주 동안 이준의 마지막을 자신의 사랑을 중심으로 읽었다.왜 떠났는지.왜 돌아오려 했는지.왜 심장을 기증했는지.모든 문장의 주어는 이준이었지만 목적어에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7
Read More
Dernier
1
...
456789
Scanner le code pour lire sur l'application
DMCA.com Protection Status